애비게일 필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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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애비게일 필모어(Abigail Fillmore, 1798–1853)는 미국의 제13대 대통령 밀러드 필모어의 부인이자 영부인이다. 그는 어린 시절과 교육을 통해 문학, 수학, 역사 등 다양한 분야에 능통했으며, 노예 폐지 운동에 대한 신념을 가졌다. 1819년 밀러드 필모어를 만나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고, 남편의 정치 활동을 지원하며 조언자 역할을 했다. 영부인 시절에는 백악관에 도서관을 설치하고 문학 살롱을 운영하는 등 문화 교류에 기여했으며, 건강 문제에도 불구하고 영부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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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비게일 필모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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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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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함 | 미국 대통령 영부인 |
재임 기간 | 1850년 7월 9일 – 1853년 3월 4일 |
배우자 | 밀러드 필모어 |
출생 이름 | 아비가일 파워스 (Abigail Powers) |
출생일 | 1798년 3월 13일 |
출생지 | 뉴욕주스틸워터 |
사망일 | 1853년 3월 30일 |
사망지 | 워싱턴 D.C. |
안장지 | 포레스트 론 묘지, 뉴욕주 버팔로 |
배우자 | 밀러드 필모어(1826년 결혼) |
자녀 | 밀러드 파워스 메리 아비가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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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책 1 | |
직책 | 미국 부통령 영부인 |
부통령 | 밀러드 필모어 |
재임 기간 | 1849년 3월 4일 – 1850년 7월 9일 |
이전 | 소피아 댈러스 |
계승 | 메리 브레킨리지 |
2. 어린 시절과 교육
애비게일 파워스는 1798년 3월 13일 뉴욕주 스틸워터에서 침례교 목사인 아버지 레뮤엘 파워스와 어머니 애비게일 뉴랜드 사이에서 태어났다.[3] 아버지가 일찍 사망한 후,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도 어머니의 교육열과 아버지의 서재 덕분에 폭넓은 독서를 하며 성장했다.[3][2][1] 그녀는 문학, 수학, 정부, 역사, 철학 및 지리 등 다양한 분야에 능통했다.[3] 특히 노예 폐지 운동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1]
1819년 뉴 호프 아카데미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중 제자였던 밀러드 필모어를 만났다.[2] 학문적인 세계와 밀러드의 성실한 학습은 서로를 점차 가까워지게 했고, 점점 교사와 학생이라는 관계에 애정이 싹트게 되었다. 오랜 연애 끝에 1826년 2월 5일 뉴욕주 모라비아에 있는 그녀의 오빠 집에서 결혼했다.[1] 결혼 후에도 애비게일은 아이를 낳을 때까지 교사 생활을 이어갔다.[8]
16세에 학교 교사로 경력을 시작했으며,[4] 1814년 셈프로니우스 마을 학교에서 시간제 교사가 되었다. 1817년에는 전임 교사가 되었고, 1819년에는 사립 뉴 호프 아카데미에서 또 다른 교사직을 맡았다.[3] 학교에서 교직과 학업을 번갈아 가며 자신의 교육을 발전시켰고,[1] 학교를 떠난 후에도 프랑스어를 배우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등 배움을 이어나갔다.[5]
3. 결혼과 가족
필모어 부부는 슬하에 아들 밀러드 파워스 필모어(1828년생)와 딸 메리 애비게일 필모어(1832년생)를 두었다.[1] 남편의 정치 경력에 따라 뉴욕주 이스트 오로라,[7] 뉴욕주 버펄로,[1] 올버니 등지로 이주하며 내조와 자녀 양육에 힘썼다.
3. 1. 남편과의 관계
애비게일은 1798년 미국 뉴욕주 새러토가 군의 스틸워터에서 태어났다. 침례교의 목사였던 아버지 레뮤얼 파워스와 어머니 애비게일 뉴랜드-파워스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훗날 결혼하게 되는 밀러드의 농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카유가 군 모라비아 (뉴욕주)에서 자랐다.
1819년, 애비게일은 뉴호프에서 교사로 일하게 되었는데, 이때 제자 중 최연장자였던 19세의 학생이 밀라드 필모어였다. 학문적인 세계와 밀라드의 성실한 학습은 서로를 점차 가까워지게 했고, 점점 교사와 학생이라는 관계에 애정이 싹트게 되었다. 오랜 교제 기간을 거쳐, 1826년 2월 5일 두 사람은 결혼했다. 결혼식은 애비게일의 오빠인 판사 파워스의 집에서 열렸다.
애비게일은 단순한 아내를 넘어 밀러드의 정치적 동반자이자 조언자였다. 정치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남편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밀러드 또한 그녀의 의견을 존중하고 따랐다. 특히 1850년 도망 노예법 서명과 관련하여, 남편에게 서명하지 말 것을 강력히 권고한 일화는 유명하다.
4. 워싱턴 D.C.와 영부인 시절
밀라드는 1832년 미국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애비게일은 그가 워싱턴 D.C.에 있는 동안 버팔로에 머물렀다. 그는 1834년에 사임했지만, 1836년에 다시 선출되었고, 이번에는 애비게일이 그와 함께 워싱턴으로 갔으며, 아이들은 뉴욕의 친척들에게 맡겼다. 여기서 그녀는 정치인의 아내로서 사회적 의무를 다했고, 도시의 문화 및 학술 기관을 찾았다.[6] 그들은 이후 몇 년 동안 의회가 소집될 때마다 이와 같은 일상을 계속했다. 그녀는 멀리 있는 동안 아이들에게 정기적으로 편지를 썼으며, 종종 자기 계발을 장려하고 답장에서의 맞춤법 오류를 꾸짖었다.[9]
애비게일은 워싱턴의 사교계에서 평판이 좋았다. 1840년에 그녀는 건물 헌정을 요청받았는데, 당시 여성에게는 드문 영광이었지만 그녀는 거절했다.[2] 워싱턴에 있는 동안, 그녀는 1837년 헨리 클레이의 미국 상원 토론에 참석했고, 1842년에는 찰스 디킨스를 만났다.[1] 밀라드가 1842년에 의회를 떠난 후 그들은 버팔로로 돌아왔고, 애비게일은 도시에서 인기 있는 안주인이 되었다. 밀라드가 뉴욕 주 감사원장으로 선출되자 가족은 올버니, 뉴욕로 이사했고, 그녀는 그곳의 사교계에 관여하게 되었다.[1] 그녀는 유행하는 사교계를 경멸했지만,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파티에 참석하는 것을 즐겼다.[9] 필모어 부부는 올버니에 있는 동안 다시 아이들과 떨어져 있었고, 이번에는 그들을 매사추세츠로 보냈다.[2]
1842년 미국 독립 기념일에 그녀는 발목 부상을 입었다.[1] 울퉁불퉁한 보도를 걷다가 미끄러져 발목을 심하게 삐어 2주 동안 걷지 못했다. 걷기 시작하자 발이 더욱 염증을 일으켰다. 그녀는 겨울까지 병상에 누워 있었고 그 후 몇 달 동안 방에 갇혀 있었다. 그 후 2년 동안 그녀는 목발을 사용해야 했다. 부상은 완전히 낫지 않았고, 그녀는 평생 동안 만성 통증에 시달렸다.[9]
필모어는 남편이 184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휘그당 미국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면서 유명 인사가 되었고, ''아메리칸 리뷰''에 실린 칭찬조의 묘사를 통해 대중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휘그당이 당선되면서, 애비게일은 1849년 3월에 영부인이 되었다.[1] 그녀의 건강 때문에 워싱턴으로의 복귀는 바람직하지 않았고, 그녀는 버팔로에 머물렀다.[7] 애비게일은 워싱턴의 사교계가 흥미롭지 않다고 생각했고,[4] 그녀는 영부인으로서 뇌졸중을 앓은 여동생을 돌보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1] 그녀는 1850년에 남편을 보기 위해 워싱턴을 잠시 방문했다.[9] 영부인이 된다는 것은 중요한 사교계에 관여하는 것을 의미했고, 그녀는 앤 S. 스티븐스, 리디아 시고니, 엠마 윌라드와 같은 당시 유명 작가들과 교류하는 것에 기쁨을 표현했다.
4. 1. 영부인으로서의 활동
재커리 테일러 대통령이 1850년 7월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남편 밀라드 필모어가 대통령직을 승계하여 애비게일은 영부인이 되었다.[1] 남편의 대통령 취임으로 백악관에서 필모어는 많은 사교 행사를 주최하는 활동적인 영부인이었다.[1] 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딸인 애비에게 자신의 임무를 위임했다.[1] 특히 발목 부상으로 인해 영부인으로서의 역할 수행에 어려움을 겪었다.[5]필모어 부부는 백악관에 도서관을 설치하는데 힘썼다. 애비게일은 백악관 2층의 옐로우 오벌 룸에 도서관을 설치하기 위해 의회로부터 특별 충당금을 받아 책을 직접 고르고 배치했다. 그녀는 윌리엄 새커리, 찰스 디킨스 등 당대 저명한 작가들을 백악관에 초청하여 문학 살롱을 운영하며 문화 교류에도 기여했다.[5]
애비게일은 남편과 떨어져 있을 때 정치와 관련된 내용의 서신을 주고받으며 조언과 상담을 제공했다.[6] 그녀는 의회의 법안과 기타 정치 뉴스를 면밀히 주시했으며, 남편은 그녀의 의견을 소중히 여겨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그녀와 상의했다고 한다.[5] 애비게일은 남편에게 1850년 도망자 노예법에 서명하지 말라고 조언했을 수도 있지만, 결국 그는 서명했다.[6] 그녀는 또한 그에게 미 해군에서 처벌로 태형을 폐지하도록 권장했을 수도 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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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 백악관 도서관
애비게일이 백악관으로 이사했을 때, 백악관에 도서관이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6][2] 이전 대통령들은 자신의 사적인 장서를 백악관으로 가져왔고, 임기가 끝난 후에도 이를 유지했다. 필모어 부부는 도서관이 백악관에 꼭 필요한 시설이라고 판단했다. 애비게일은 집에 책이 있는 것에 익숙했고, 밀라드는 대통령으로서의 업무에 참고 도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의회에서 승인된 예산으로 그녀는 오벌 룸에 백악관 도서관을 위한 책을 선정했다.[6][2]도서관은 필모어 행정부 시절 백악관의 사교 중심지가 되었다. 애비게일은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 찰스 디킨스, 워싱턴 어빙,[6] 그리고 헬렌 올드리치 드 크로이프트와 같은 작가와 안나 비숍 및 제니 린드와 같은 공연 예술가를 초대하여 백악관 문학 살롱을 만들었다.[6] 이 도서관은 영부인으로서 그녀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으며, 응접실, 가족실, 그리고 그녀의 남편을 위한 휴식 공간 역할을 했다.[1] 또한 음악실로도 사용되어, 애비는 방에서 피아노, 하프, 기타를 연주했다.
5. 죽음
애비게일 필모어는 자신의 후임자인 프랭클린 피어스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최초의 영부인이었다.[6] 백악관을 떠난 후, 남편과 여행을 계획했지만, 감기가 기관지염으로, 이어서 폐렴으로 악화되면서[6] 계획은 중단되었다. 의사가 불려왔지만, 비효율적인 부항 및 수포 치료 기술을 사용했고, 이는 오히려 그녀의 건강을 악화시켰을 수도 있다.[9] 결국 애비게일은 1853년 3월 30일, 55세의 나이로 워싱턴 D.C.의 윌라드 호텔에서 사망했다.[9] 워싱턴은 애도 기간에 들어갔고, 연방 정부의 상당 부분은 그녀의 죽음에 대한 존경심으로 일시적으로 운영을 중단했다.[2] 그녀의 장례식은 워싱턴에서 국장으로 치뤄졌으며,[9] 이후 뉴욕주 버펄로의 포레스트 론 묘지에 안장되었다.[7]
밀라드 필모어는 회고록에서 그녀가 자신의 교육 발전에 제공한 지원에 대해 그녀에게 공을 돌렸다.[1] 애비게일 사후 5년 뒤인 1858년 2월 10일, 당시 58세였던 밀러드 필모어는 44세의 부유한 버팔로의 미망인인 캐롤라인 카마이클 맥킨토시와 재혼했다.[11]
6. 유산
애비게일 필모어는 백악관에 도서관을 조직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1] 이는 지식 함양과 문화 교류에 기여한 그녀의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그녀의 사적인 서신 대부분은 아들에 의해 파기된 것으로 추정되어 분실되었지만,[1] 남편 밀라드 필모어가 여행하는 동안 구매를 요청한 책 목록은 남아있다.[4] 이를 통해 남편의 정치적 조언자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역사가들은 그녀의 건강 악화와 발목 부상이 백악관 업무 수행에 미친 영향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데, 일부는 그녀의 능력을 제한했다고 보는 반면, 다른 이들은 영부인의 책임을 피하기 위한 핑계였다고 주장한다.[7] 그러나 그녀는 지적인 인물이며 대통령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로 일반적으로 인정받고 있다.[1] 미국 남북 전쟁 이전에는 영부인의 역할이 대중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필모어는 다른 시대의 영부인들에 비해 역사적 조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종종 덜 활동적인 영부인으로 여겨진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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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서적
A Companion to First Ladies
https://books.google[...]
John Wiley & Sons
[2]
서적
First Ladies of the United States
https://archive.org/[...]
Lynne Rienner Publishers
[3]
웹사이트
First Lady Biography: Abigail Fillmore
http://www.firstladi[...]
2017-03-28
[4]
서적
The First Ladies: From Martha Washington to Mamie Eisenhower, an Intimate Portrait of the Women Who Shaped America
https://archive.org/[...]
Cumberland House
[5]
서적
First Ladies: From Martha Washington to Michelle Obama
https://archive.org/[...]
Oxford University Press, USA
[6]
서적
Rating the First Ladies
https://archive.org/[...]
Citadel Press Books
[7]
서적
First Ladies: A Biographical Dictio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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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ts on File
[8]
서적
From Classroom to White House: The Presidents and First Ladies as Students and Teachers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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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서적
American First Ladies: Their Lives and Their Leg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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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서적
The First White House Library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1]
서적
The Presidents, First Ladies, and Vice Presidents: White House Biographies, 1789–2001
https://archive.org/[...]
CQ Press
[12]
뉴스
The height differences between all the US presidents and first ladies
https://www.business[...]
ビジネス・インサイダ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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