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설스탠의 북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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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애설스탠의 북벌은 934년 잉글랜드 왕 애설스탠이 감행한 스코틀랜드 원정을 의미한다. 이 원정의 배경은 명확하지 않으며, 역사가들은 웨섹스 파벌의 소멸, 데인족의 불안, 스코틀랜드와의 영토 분쟁 등을 그 원인으로 추정한다. 애설스탠은 육군과 해군을 동원하여 스코틀랜드를 침공했고, 던노터 성, 케이스네스 등을 공격했다. 잉글랜드 군은 약탈을 자행했으나, 스코틀랜드가 큰 승리 없이 애설스탠을 돌려보냈다는 기록과 잉글랜드가 저항 없이 진격했다는 기록이 공존하며, 협상으로 사건이 종결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원정 이후 스코틀랜드 왕 콘스탄틴 2세는 애설스탠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헌장에 서명했으나, 937년 브루난부르 전투에서 잉글랜드의 적으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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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설스탠의 북벌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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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정보 | |
분쟁 | 해당 사항 없음 |
일부 | 해당 사항 없음 |
이미지 | 해당 사항 없음 |
설명 | 해당 사항 없음 |
날짜 | 934년 |
장소 | 스코틀랜드 |
결과 | 군사적으로 결론이 나지 않았지만, 콘스탄티누스는 애설스탠의 종주권을 인정함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잉글랜드 궨트 데허바르스 귀네드 브러헤이니오그 |
교전국 2 | 스코틀랜드 |
지휘관 및 지도자 | |
지휘관 1 | 애설스탠 |
지휘관 2 | 콘스탄티누스 2세 |
병력 규모 | |
병력 1 | 알 수 없음 |
병력 2 | 알 수 없음 |
사상자 및 피해 | |
사상자 1 | 알 수 없음 |
사상자 2 | 알 수 없음 |
2. 배경
애설스탠의 스코틀랜드 원정 이유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933년 이복 형제 에드윈과 934년 고트프리드의 사망, 그리고 같은 해 밤버러의 올드레드로 추정되는 통치자의 죽음은 애설스탠에게 콘스탄틴과의 영토 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기회를 제공했을 수 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이 원정에 대해 간략하게 기록했지만, 우스터의 존은 콘스탄틴이 애설스탠과의 조약을 파기했다고 주장했다.[1]
2. 1. 잉글랜드 내부 권력 투쟁
애설스탠이 북벌을 감행한 이유는 불분명하며, 역사가들은 다양한 설명을 제시한다. 한 이론에 따르면, 애설스탠은 반대 세력의 두 지도자가 사망한 것을 기회로 삼았다. 933년 이복 형제 에드윈의 죽음으로 인해 그의 통치에 반대하던 웨섹스의 파벌이 사라졌을 수 있으며,[1] 934년 고트프리드의 사망으로 데인족 사이에 발생할 불안을 틈타 애설스탠이 북부에 대한 그의 권위를 확립할 기회를 얻었을 수 있다.[1] 고트프리드는 한때 노르드인 더블린 왕국의 왕이었고 노섬브리아를 잠시 통치했던 인물이었다.[1]2. 2. 스코틀랜드와의 영토 분쟁
《클론맥노이스 연대기》에 기록된 934년 통치자(아마도 밤버러의 올드레드 1세)의 죽음은 애설스탠과 콘스탄틴 간의 영토 지배권 분쟁을 시사한다.[1] 우스터의 존은 콘스탄틴이 애설스탠과의 조약을 깨뜨렸다고 기록했다.[1]3. 스코틀랜드 침공 (934년)
애설스탠의 침공은 934년에 육지와 바다 양쪽에서 이루어졌다. 12세기 연대기 작가 더럼의 시메온에 따르면, 애설스탠의 육군은 던노터와 스코틀랜드 북부의 포트리우까지 약탈했으며, 함대는 케이스네스를 습격했는데, 이로 인해 서덜랜드를 포함한 훨씬 더 넓은 지역이 공격받았을 것이다.[5] 케이스네스는 당시 오크니의 노르드 왕국의 일부였을 것이다.[5] 오와인은 패배했고 콘스탄틴의 개인적인 권위가 그렇게 멀리 북쪽으로 확장되었을 가능성은 낮으므로, 애설스탠의 공격은 단순한 약탈 원정을 포함하여 콘스탄틴의 동맹국을 겨냥했을 가능성이 높다.[6]
3. 1. 잉글랜드 군의 진격
애설스탠의 군대는 934년 5월 28일경 윈체스터에서 집결하기 시작하여 6월 7일경 노팅엄으로 이동했다. 그는 데헤우바르스의 하웰 다 왕, 기네드의 이드왈 포엘 왕, 그웬트의 모건 압 오와인, 브르체이니오그의 테우드르 압 그리프리 등 많은 지도자들과 동행했다.[2] 그의 수행원에는 18명의 주교와 13명의 백작이 포함되었는데, 그중 6명은 잉글랜드 동부 출신의 데인인이었다.[3]애설스탠의 군대는 베벌리와 리폰을 통과했다.[4] 6월 말 또는 7월 초까지 군대는 체스터-르-스트리트에 도착했는데, 애설스탠은 커스버트의 무덤에 스톨과 마니플(교회 의복)을 포함한 많은 선물을 했다. 이 의복들은 원래 그의 계모 앨플레드가 윈체스터의 프리데스탄 주교에게 선물하기 위해 의뢰한 것이었다.[5]
3. 2. 스코틀랜드 공격
더럼의 시메온에 따르면, 육군은 던노터 성과 포트리우까지 약탈했고, 함대는 케이스네스를 습격했는데, 이로 인해 서덜랜드 등 더 넓은 지역이 공격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케이스네스는 당시 오크니의 노르드 왕국의 일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5] 애설스탠의 공격은 콘스탄틴의 동맹국을 겨냥한 약탈 원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6]3. 3. 결과
《클론맥노이스 연대기》는 스코틀랜드가 큰 승리 없이 애설스탠을 돌려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7] 반면 헌팅던의 헨리는 잉글랜드가 아무런 반대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한다.[7] 이러한 상반된 기록으로 볼 때, 협상을 통해 사건이 종결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우스터의 존에 따르면, 콘스탄틴의 아들이 애설스탠에게 인질로 보내졌고, 콘스탄틴은 애설스탠과 함께 잉글랜드 남쪽으로 돌아갔다고 한다.[7]4. 정치적 영향
애설스탠의 원정 기간 동안 전투는 기록되지 않았고, 연대기에도 그 결과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4. 1. 애설스탠의 종주권 인정
934년 9월, 애설스탠은 버킹엄에서 콘스탄틴으로부터 '부왕'(subregulus)으로서 헌장에 서명을 받으며 종주권을 인정받았다.[8]4. 2. 935년의 상황
935년, 콘스탄틴은 치렌체스터에서 스트래스클라이드의 오와인, 하이웰 다, 이드왈 포엘, 모건 압 오와인과 함께 헌장의 증인으로 나타난다.[9] 같은 해 크리스마스에 스트래스클라이드의 오와인은 웨일스 왕들과 함께 애설스탠의 궁정에 있었지만 콘스탄틴은 없었다. 2년 후, 콘스탄틴은 브루난부르 전투에서 애설스탠의 적으로 잉글랜드를 침공한다.[10]참조
[1]
서적
Æthelstan: The First King of England
[2]
서적
Anglo-Saxon Chronicle
[3]
서적
Æthelstan: The First King of England
[4]
서적
Anglo-Saxon England
[5]
서적
Æthelstan: The First King of England
[6]
서적
Anglo-Saxon Chronicle
[7]
서적
Early Sources
[8]
서적
Early Sources
[9]
서적
Pictland to Alba
[10]
서적
Æthelstan: The First King of Eng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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