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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다보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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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얀다보 조약은 1826년 2월 24일 영국과 버마 간에 체결된 조약으로, 제1차 영국-버마 전쟁의 종결을 의미한다. 영국은 아삼, 마니푸르, 라카인, 타닌타리 등을 할양받고, 100만 파운드의 배상금을 요구했다. 이로 인해 버마는 막대한 재정적 부담을 안게 되었고, 영토를 상실하는 등 굴욕적인 결과를 맞이했다. 얀다보 조약은 버마 왕국을 무력화시켜 영국의 식민 지배를 가속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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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다보 조약
조약 정보
조약명얀다보 조약
로마자 표기Yandabo Sa Kyauk
조약 종류평화 조약
정식 명칭동인도 회사와 아바 왕 간의 평화 조약
서명일1826년 2월 24일
서명 장소얀다보, 버마 제국
서명 국가꼰바웅 왕조
영국 동인도 회사
사용 언어영어
버마어
역사적 배경
관련 전쟁제1차 영국-미얀마 전쟁
전쟁 종결조약 체결로 전쟁 종결
추가 정보
거리 정보얀다보는 아바에서 거리에 위치함

2. 초기 협상

영국군은 1825년 9월 바간 북쪽 20마일 떨어진 '''응가야웅빈제이크'''에서 평화 협상을 시작했을 때 이미 군사적으로 우세한 위치에 있었다.[5] 다누뷰 전투에서 마하 반둘라 장군을 포함한 버마군 지휘부가 전사하면서 영국군은 하부 버마, 라카인 및 타닌타리 해안, 아삼과 마니푸르 지역을 점령하였다. 영국은 버마에 여러 요구를 했고, 버마는 군대가 약화된 상황에서 협상에 임했다.[5]

2. 1. 영국 측 요구

영국군은 1825년 9월 바간 북쪽 20마일 떨어진 '''응가야웅빈제이크'''에서 평화 협상을 시작할 때 이미 우세한 입장에 있었다.[5] 1825년 4월 다누뷰 전투에서 마하 반둘라 장군을 포함한 버마군 지휘부가 전사하면서 영국군은 하부 버마, 라카인 및 타닌타리 해안, 그리고 아삼과 마니푸르 지역에서의 점령지를 굳혔다. 영국은 버마에 아삼, 마니푸르, 카차르에 대한 간섭 중단, 라카인 및 그 부속 영토 할양, 아바 궁정에 영국 상주 대표 설치, 200만파운드 배상금 지불을 요구했다. 양곤과 타닌타리 지역은 배상금이 지불될 때까지 영국이 점령할 예정이었다.[6]

2. 2. 버마 측 반응

버마는 영국의 요구가 과도하다고 판단했으나, 군사력이 약화된 상황에서 일부 요구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협상에 임했다.[5]

아바 궁정은 서부 제국의 완전한 해체와 그에 따른 가혹한 처벌을 예상하지 못했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군대가 심각하게 약화된 상태에서 버마 사절인 카올린 영주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6]

1. 아삼과 마니푸르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할 것이다.

2. 미래의 마니푸르 라자를 선택하는 문제에 대해 영국 측의 결정에 반대한다.

3. 타닌타리 해안은 할양하겠지만 라카인은 할양하지 않을 것이다.

영국은 이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당신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양보할 것이냐가 아니라, 우리가 당신들에게 얼마나 돌려줄 것이냐이다."[6]

3. 협상 결렬과 재개

협상은 결렬되었고, 버마군은 전투를 계속했으나 영국의 우세한 화력에 패배했다. 1825년 11월, 마하 네 묘가 이끄는 버마군은 피이를 탈환하려 했으나 실패했다.[6] 1826년 초, 영국군은 아바를 향해 꾸준히 진격하여 파간을 점령하고, 아바에서 약 80.47km 미만 거리의 얀다보 마을까지 진격했다.

3. 1. 버마군의 저항

협상은 결렬되었고, 버마군은 계속 싸우기로 결정했다. 1825년 11월, 마하 네 묘가 이끄는 버마군은 주로 샨족 사우바들이 이끄는 여러 샨 연대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피이를 탈환하기 위해 과감하게 진격하여 거의 성공했다.[6] 그러나 12월 초, 영국의 우월한 화력에 버마군의 최후의 저항은 격퇴되었다.

3. 2. 영국의 진격

1826년 초, 영국군은 아바를 향해 꾸준히 진격했다. 영국군은 2월 8일 고대 도시 파간을 점령했고, 2월 16일에는 아바에서 약 80.47km 미만, 즉 나흘 거리의 얀다보 마을을 점령했다.[6]

4. 조약 체결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던 버마는 평화를 요구했다. 버마 왕 바지더는 미국인 1명, 영국인 1명, 버마 각료 2명으로 구성된 대표단을 영국군 사령관 아서치볼드 캠벨 경에게 파견했다.[4] 최종 협상은 사실상 일방적인 요구였다.

1826년 2월 24일, 얀다보에서 영국 측의 캠벨 장군과 버마 측의 레가잉 총독 마하 민 흘라 쿄 흐틴이 평화 조약에 서명했다.[7] 버마는 배상금의 첫 번째 할부금으로 금과 은괴 25만파운드를 지불했고, 영국 전쟁 포로들을 석방했다.

4. 1. 조약 내용

버마는 영국의 모든 요구에 동의해야 했다.[1][2]

요구 사항
아삼, 마니푸르, 트리푸라, 라카인 (아라칸), 타닌타리 (테나세림) 해안을 살루윈강 남쪽으로 영국에 양도한다.
카차르와 자인티아에 대한 모든 간섭을 중단한다.
100만 파운드 스털링의 배상금을 4차례에 걸쳐 지불한다.
아바와 캘커타 사이에 외교 대표를 교환하는 것을 허용한다.
적절한 시기에 통상 조약을 체결한다.



배상금의 첫 번째 할부금은 즉시 지불하고, 두 번째 할부금은 조약 서명 후 100일 이내에, 나머지는 2년 이내에 지불해야 했다. 두 번째 할부금이 지불될 때까지 영국군은 양곤을 떠나지 않았다.[2]

4. 2. 서명자

1826년 2월 24일, 얀다보 조약은 영국 측의 아서치볼드 캠벨 경과 버마 측의 레가잉 총독 마하 민 흘라 쿄 흐틴에 의해 서명되었다.[7]

5. 조약의 영향

얀다보 조약은 버마 왕국에 심각한 경제적, 정치적 타격을 입혔다. 버마는 이 조약으로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고, 아삼 등 영토를 상실했으며, 이는 결국 영국의 식민 지배 가속화로 이어졌다.

조약의 주요 영향은 다음과 같다.


  • 경제적 부담: 조약에 따른 배상금은 버마 왕실 재정을 파탄시켰다.
  • 영토 상실과 굴욕: 버마는 아삼 등 영토를 잃었고, 아바 궁정은 영국 거주자로 인해 패배의 굴욕을 느꼈다.
  • 영국의 식민 지배 가속화: 영국은 이 조약을 통해 버마를 무력화하고, 결국 버마 전체를 식민지로 병합했다.

5. 1. 경제적 부담

얀다보 조약으로 인한 배상금은 버마 왕실 재정을 파탄시켰다. 100만 파운드는 당시 유럽에서도 엄청난 액수로 여겨졌는데, 1,000만 버마 짯으로 환산하면 더욱 엄청난 금액이었다.[2] 1826년 상부 버마의 일반 농민의 한 달 생활비가 1짯이었던 것을 고려하면[2] 이는 매우 큰 액수임을 알 수 있다.

5. 2. 영토 상실과 굴욕

버마인들에게 이 조약은 완전한 굴욕이자 오랜 재정적 부담이었다. 한 세대의 남성들이 전투에서 전멸했다. 지난 75년 동안 인상적인 군사적 성공을 바탕으로 구축된 정복과 무예의 자부심이라는 버마인들이 알던 세상은 무너졌다.[4] 아바 궁정은 아삼과 같은 영토 상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영토를 되찾기 위한 시도를 했지만 실패했다. 아바에 초청된 영국 거주자는 패배의 굴욕을 매일 상기시켜주는 존재였다.[8]

5. 3. 영국의 식민 지배 가속화

얀다보 조약은 버마 왕국에 막대한 재정적 부담을 주어 사실상 무력화시켰다. 영국은 전쟁으로 인한 인명 및 재정적 손실을 이유로 버마에 가혹한 조건을 강요했다. 약 4만 명의 영국군과 인도군이 참전하여 1만 5천 명이 사망했고, 영국령 인도는 1,300만 파운드에 달하는 재정적 손실을 보았다. 이 전쟁 비용은 인도에 심각한 경제 위기를 초래하여 1833년 벵골의 무역 회사들을 파산시키고, 영국 동인도 회사중국과의 무역 독점권을 포함한 특권을 잃게 만들었다.[8]

아삼 등 지역은 영국령 인도 제국에 편입되었다. 이 조약은 버마인들에게 굴욕적이었고, 오랜 재정적 부담을 안겨주었다. 한 세대에 걸친 군사적 성공으로 쌓아 올린 자부심은 무너졌다.[4] 아바 궁정은 영토 상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영토 회복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아바에 주둔한 영국 거주자는 패배를 상기시키는 존재였다.[8]

배상금은 왕실 재정을 파산 상태로 만들었다. 100만 파운드의 배상금은 당시 유럽에서도 엄청난 금액이었으며, 1,000만 버마 짯으로 환산하면 더욱 컸다. 1826년 상부 버마 일반 농민의 한 달 생활비는 1짯이었다.[2]

이 조약으로 영국은 버마를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영국은 이후 1852년과 1885년에 두 차례 더 전쟁을 일으켜 결국 1885년 버마 전체를 식민지로 병합했다.

참조

[1] 서적 History of Burma Sunil Gupta
[2] 서적 A History of Burma https://archive.org/[...] Cambridge University Press
[3] 서적 The River of Lost Footsteps – Histories of Burma Farrar, Straus and Giroux
[4] 서적 The River of Lost Footsteps – Histories of Burma Farrar, Straus and Giroux
[5] 서적 History of Burma Sunil Gupta
[6] 서적 The River of Lost Footsteps – Histories of Burma Farrar, Straus and Giroux
[7] 서적 The Making of Modern Burma https://archive.org/[...] Cambridge University Press
[8] 서적 Gentlemen Capitalists: British Imperialism in South East Asia, 1770–1890 I.B. Tau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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