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공주 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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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 공주 메리는 1776년 조지 3세와 샬럿 왕비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조지 3세의 딸 중 가장 아름다운 공주로 여겨졌으며, 1816년 사촌인 글로스터와 에든버러 공작 윌리엄 프레데릭과 결혼했다. 메리는 네덜란드 왕자와의 로맨스를 겪었지만, 조지 3세의 결정으로 결혼하지 못했다. 남편과 사별한 후 리치먼드 공원의 화이트 로지로 이사했으며, 자녀는 없었다. 메리는 조카인 빅토리아 여왕의 숭배를 받았으며, 1857년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는 조지 3세와 샬럿 왕비의 자녀 중 마지막 생존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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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공주 메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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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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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글로스터와 에든버러 공작 부인 |
배우자 | 글로스터와 에든버러 공작 윌리엄 프레더릭 (1816년 7월 22일 결혼, 1834년 11월 30일 사별) |
가문 | 하노버 가문 |
아버지 | 조지 3세 |
어머니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샬럿 |
출생일 | 1776년 4월 25일 |
출생지 | 런던, 버킹엄 궁전 |
사망일 | 1857년 4월 30일 |
사망지 | 런던, 글로스터 하우스 |
매장일 | 1857년 5월 8일 |
매장지 | 윈저 성, 성 조지 예배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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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초기 생애와 가족
메리 공주는 1776년 4월 25일 런던 버킹엄 궁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시 영국 국왕 조지 3세였고, 어머니는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작의 딸이었던 샬럿 왕비였다. 메리는 조지 3세와 샬럿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15명의 자녀 중 열한 번째 아이이자 넷째 딸이었다.
메리는 1776년 5월 19일 세인트 제임스 궁전의 대의회 회의실에서 캔터베리 대주교 프레더릭 콘월리스에게 세례를 받았다. 대부모는 다음과 같다.
대부모 | 비고 (대리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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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센-카셀의 프리드리히 | 이종 사촌, 하트퍼드 후작 프랜시스 시모어-콘웨이가 대리인으로 참석 |
작센-마이닝겐의 샬롯 공주 | 에른스트 2세,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작의 부인, 아길 공작 부인 엘리자베스 캠벨이 샬럿 왕비의 침실 시녀로 대리인 참석 |
헤센-다름슈타트의 프리데리케 공주 | 삼종 사촌, 에핑햄 백작 부인이 샬럿 왕비의 침실 시녀로 대리인 참석 |
아버지 조지 3세는 자녀들에게 헌신적이어서 정기적으로 왕실 육아실을 방문하여 어린 자녀들과 활발하게 놀아주었다. 이는 격식을 중시했던 샬럿 왕비와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샬럿 왕비 역시 자녀들의 복지, 교육, 도덕성 발달을 세심하게 감독하며 남편 못지않게 자녀 양육에 깊이 관여했다. 왕비는 공무와 국왕과의 관계로 시간이 부족해지자, 샬롯 핀치 부인을 왕실 가정교사로 임명하여 자신의 교육 방침을 실행하도록 했다. 메리를 포함한 공주들은 부모가 딸들을 곁에 두려고 했기 때문에 주로 궁정 안에서 자매들과 함께 생활했다.
메리는 조지 3세의 딸들 중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고 평가받았으며, 작가 플로라 프레이저는 그녀를 "수수하고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묘사했다. 메리는 1791년 6월, 16세의 나이에 국왕의 생일을 기념하는 궁정 무도회에서 미뉴에트를 추며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1] 이듬해인 1792년 봄에는 귀족 법정에서 정식으로 데뷔했다.[1]
메리는 막내 여동생이자 소중한 친구였던 영국의 아멜리아 공주와 매우 가까웠다. 아멜리아 공주는 순종적인 성격의 메리를 "엄마의 도구"라고 부르기도 했다. 1810년 아멜리아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임종 전까지 헌신적으로 간호했던 메리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 또한 메리는 맏오빠인 조지 4세와도 매우 가까웠으며, 그의 아내이자 사촌인 브라운슈바이크의 캐롤라인에 대한 반감을 공유했다. 캐롤라인이 이탈리아로 떠났을 때, 메리는 오빠에게 편지를 보내 "그녀가 제거되어 다행이다. 하늘에 바라건대 그녀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우리가 다시는 그녀를 보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말하며 기쁨을 나타내기도 했다.[2]
2. 1. 네덜란드 왕자와의 사랑
메리는 부모인 조지 3세가 딸들을 곁에 두려 했기 때문에 자매들과 함께 궁정에서 생활했다. 메리는 조지 3세의 여섯 딸 중 가장 아름다운 공주로 알려졌으며, 1796년 무렵 런던에 망명 중이던 네덜란드 총독 빌럼 5세의 막내아들 프레데릭 판 오라녜나사우 (1774-1799)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조지 3세는 딸들이 나이 순서대로 결혼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기 때문에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1799년, 프레데릭 왕자가 군 복무 중 전사하자 메리는 공식적으로 그를 위해 상복을 입는 것이 허락되었다.3. 결혼과 이후의 삶
메리는 매우 보호받는 환경에서 부모님과 자매들과 함께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조지 3세 국왕과 샬럿 왕비는 자녀들, 특히 딸들을 가까이에 두려고 했다.
1816년 7월 22일, 40세가 된 메리는 사촌인 글로스터와 에든버러 공작 윌리엄 프레데릭과 결혼했다.[5] 당시 신랑 윌리엄 프레데릭 역시 40세였다. 결혼식 날, 메리의 오빠인 섭정공 조지 4세는 신랑의 경칭을 기존의 'Highness'에서 메리와 동등한 'Royal Highness'로 높여주었다.
윌리엄 프레데릭은 원래 메리의 조카인 웨일스 공주 샬럿과 결혼하려 했으나, 샬럿 공주의 거절로 무산된 바 있다. 역사가 A. W. 퍼듀는 메리가 윌리엄 프레데릭과의 결혼을 결심한 데에는 어머니 샬럿 왕비의 엄격한 통제 하에 있던 가정 생활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꾸리고자 하는 동기가 작용했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샬럿 공주는 당시 글로스터 공작이 "매우 사랑에 빠져 있으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메리]도 그만큼은 아니겠지만,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 자기 집을 가지고, 거리를 자유롭게 걸어 다니는 모든 것을 기뻐한다"라고 말했다.
3. 1. 왕실과의 관계
메리는 딸들을 곁에 두려는 부모님 조지 3세 곁에서 자매들과 함께 성장했다. 그녀는 조지 3세의 여섯 딸 중 가장 아름다운 공주로 알려졌으며, 1796년경 런던에 망명 중이던 네덜란드 총독 빌럼 5세의 막내아들 프레데릭 판 오라녜나사우 (1774-1799)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조지 3세는 딸들이 나이 순서대로 결혼해야 한다는 원칙을 내세워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1799년 프레데릭이 전쟁 중 사망하자, 메리는 공식적으로 상복을 입는 것이 허락되었다.1816년 7월 22일, 메리는 사촌인 글로스터-에든버러 공작 윌리엄 프레데릭과 버킹엄 궁전 예배당에서 결혼했다.[5] 결혼에 즈음하여 메리의 맏형인 섭정공 조지 4세는 윌리엄 프레데릭의 경칭을 단순히 'Highness'에서 'Royal Highness'로 높여, 부부의 지위를 동등하게 맞추었다.
글로스터 공작 부부는 백샷 파크에서 살았으며, 남편 사후 메리는 리치먼드 파크의 화이트 로지로 거처를 옮겼다. 부부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메리는 조카인 빅토리아 여왕에게 깊은 존경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맏형 조지 4세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으며, 형과 함께 그의 아내 캐롤라인 오브 브라운슈바이크를 매우 싫어했다. 메리는 조지 3세의 15명의 자녀(이 중 2명은 요절) 중 가장 오래 살았으며(81세), 마지막까지 생존한 자녀였다.
4. 사망
메리 공주는 1857년 4월 30일 메이페어의 글로스터 하우스에서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는 조지 3세와 샬럿 왕비의 자녀 중 마지막 생존자이자 가장 오래 산 자녀였다.
5. 유산
1789년 기준으로 국왕의 딸로서 메리는 왕국의 문장을 사용했으며, 이는 세 개의 점이 있는 은색 레이블로 구분되었다. 중앙 점에는 붉은 장미가, 바깥 점에는 각각 붉은 칸톤이 있었다.[3]
참조
[1]
서적
The Royal Daughters of England
[2]
서적
George III's Children
[3]
웹사이트
Marks of Cadency in the British Royal Family
http://www.heraldica[...]
[4]
서적
Genealogie ascendante jusqu'au quatrieme degre inclusivement de tous les Rois et Princes de maisons souveraines de l'Europe actuellement vivans
https://books.google[...]
Frederic Guillaume Birnstiel
[5]
서적
We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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