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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 1세 (베르망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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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도 1세는 1080년 베르망두아 백작이 되었으나, 정신 질환으로 인해 통치 능력을 상실하여 여동생 아델라이드에게 백작령이 넘어갔다. 그는 아버지 헤르베르트 4세에게 상속권을 박탈당했으나, 어머니 아델라이드 드 발루아를 통해 발루아 백작령을 상속받았다. 이후 귀족 회의에서 두 백작위를 박탈당하고, 누이의 남편 위그 1세에게 넘겨졌으며, 생시몽 영주의 딸과 결혼 후 1085년 이후 사망했다. 17세기에는 클로드 드 루브루아가 오도 1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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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 1세 (베르망두아)
기본 정보
이름우도 1세
다른 이름외드 1세
작위베르망두아 백작
발루아 백작
영주생시몽
생애
출생1059년경
사망1085년 이후
가족 관계
가문베르망두아 가문(에르베르 가문)
아버지베르망두아 백작에르베르 4세
어머니아델라이드 드 발루아
배우자에드비주 드 생시몽
통치
즉위1080년
사망1085년
이전에르베르 4세
이후위그 1세

2. 생애

오도는 카롤루스 대제의 아들인 롬바르디아의 왕 피피노 카를로만의 마지막 남계 후손 중 한 명으로, 베르망두아 백작 피핀 2세의 7대손이다. 아버지 헤르베르트 4세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1077년 상속권을 박탈당했으나, 1080년 어머니 발루아의 아델라이드를 통해 외가의 영지인 발루아 백작령을 물려받았다. 같은 해 아버지의 사망으로 베르망두아 백작위도 계승했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오도는 약 5년 후 프랑스 귀족 회의의 결정으로 베르망두아와 발루아 백작위를 모두 박탈당했다. 이 작위들은 그의 여동생 아델라이드 드 베르망두아와 그녀의 남편이자 카페 왕가 앙리 1세 국왕의 아들인 위그 드 베르망두아에게 넘어갔다.

오도는 생시몽 영주의 딸 에드비주 드 생 시몽과 결혼하여 아내를 통해 생시몽 영지를 얻었으며, 1085년 이후 사망했다. 이후 17세기 프랑스의 루이 13세 총신 클로드 드 루브루아는 자신이 오도 1세의 후손이라고 주장했고, 그 결과 그와 그의 후손들은 생 시몽 공작 칭호를 사용했다.

2. 1. 상속권 박탈과 발루아 백작 상속

오도는 카롤루스 대제의 아들인 롬바르디아의 왕 피피노 카를로만의 마지막 남계 후손 중 한 명이자, 베르망두아 백작 피핀 2세의 7대손이다. 그는 아버지 헤르베르트 4세에게 인정받지 못했으며, 정신적으로 쇠약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077년 오도는 아버지 헤르베르트 4세에 의해 상속권을 박탈당했다. 그러나 1080년 어머니 발루아의 아델라이드 Adélaïde de Valois|아델라이드 드 발루아프랑스어를 통해 외할아버지 발루아의 라울 3세(발루아 백작 라울 4세)와 외삼촌 벡상의 시몬의 영토인 발루아 백작령을 물려받았다. 같은 해 아버지의 사후 베르망두아 백작의 통치권도 얻었다.

하지만 약 5년 후, 프랑스의 귀족 회의는 오도 1세로부터 베르망두아와 발루아 두 백작위를 박탈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에 따라 그의 여동생 아델라이드 드 베르망두아와 결혼한 카페 왕가 앙리 1세 국왕의 아들 위그 드 베르망두아에게 백작위가 넘어갔다.

2. 2. 귀족 회의와 작위 박탈

오도는 아버지 헤르베르트 4세로부터 상속권을 인정받지 못하고 1077년 상속권을 박탈당했지만, 어머니 발루아의 아델라이드를 통해 1080년 외가로부터 발루아 백작령을 물려받았다. 같은 해 아버지의 사후에는 베르망두아 백작 지위도 얻게 되었다.

오도 1세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프랑스의 바론 이사회는 그의 지위를 제한하는 결정을 내렸다. 결국 1085년경, 베르망두아의 귀족들은 회의를 열어 오도 1세로부터 베르망두아 백작위와 발루아 백작위를 박탈하기로 결정했다. 귀족들은 통치권을 오도 1세의 여동생인 아델라이드 드 베르망두아에게 넘겼고, 이 작위들은 아델라이드의 남편이자 카페 왕가 출신 앙리 1세 국왕의 아들인 위그 드 베르망두아에게 주어졌다.

2. 3. 결혼과 사망

오도 1세는 생시몽 영주의 딸인 에드비주 드 생 시몽(Hedwig 또는 Adwise, Avise)과 결혼하여 아내를 통해 생시몽을 얻었다. 그들 사이에 자녀가 있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지만, 생시몽의 귀족들 중에는 자신이 오도 1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오도 1세는 1085년 이후에 사망했다.

17세기프랑스의 루이 13세 총신이었던 클로드 드 루브루아는 가짜 문서를 통해 자신이 오도 1세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그 결과 그와 그의 후손들은 생 시몽 공작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3. 가계 논란

일설에 따르면 프랑스 루이 14세 시대에 생시몽 공작으로 임명된 클로드 드 루브루아나, 루이 16세 시대의 사상가이자 생시몽 백작인 클로드 앙리 드 루브루아가 오도 1세의 후손이라는 주장이 있다.

17세기에 루이 13세의 총신이었던 클로드 드 루브루아는 가짜 문서를 이용하여 자신이 오도 1세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그 결과 클로드 드 루브루아와 그의 후손들은 생 시몽 공작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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