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야노 다네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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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야노 다네모토는 히고 아마쿠사 제도의 국인인 아마쿠사 5인방 중 한 명이다. 그는 나와 아키타카의 딸과 결혼했으며, 검호 마루메 나가요시가 한때 의지하기도 했다. 1587년 아내와 함께 세례를 받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평정에 복속하여 본령을 안도받았다. 그러나 1589년 고니시 유키나가의 우토성 축성 요구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의 연합군에 항복했다. 이후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신종하여 임진왜란에 아들 오야노 다네카즈와 함께 참전했으나 왜교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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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야노 다네모토 | |
|---|---|
| 기본 정보 | |
| 씨명 | 오야노 씨 |
| 이름 | 오야노 다네모토 |
| 시대 |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
| 출생 | 에이로쿠 10년 (1567년) 경 |
| 사망 | 게이초 3년 (1598년) 11월 |
| 관위 | 민부쇼쇼 |
| 묘소 | 알 수 없음 |
| 영명 | 야코베 |
| 가계 | |
| 부모 | 아버지: 오야노 다네미츠 (진쓰) |
| 배우자 | 나와 아키타카 딸 (세례명 도나=조아나) |
| 자녀 | 오야노 다네카즈미타로, 세례명 돈=조앙., 오야노 나오시게12대 당주, 기헤에. |
| 섬긴 주인 | |
| 주군 | 도요토미 히데요시 → 고니시 유키나가 |
2. 생애
오야노 다네모토는 히고 아마쿠사 제도의 국인(国人)인 아마쿠사 5인방 중 한 명이었다. 오야노 다네미쓰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우토 국인 나와 아키타카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검호(劍豪) 마루메 나가요시가 한때 오야노 가문에 의탁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덴쇼 15년(1587년), 다네모토는 부인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같은 해 아마쿠사 5인방과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평정에 복속하여 본래 영지를 안도받았다. 그러나 덴쇼 17년(1589년) 아마쿠사 국인 일揆가 발발하자,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연합군에게 공격받아 항복했다.
이후 고니시 유키나가를 섬기며 조선에 머물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아들 슈료와 함께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에서 종군하였으나, 왜교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2. 1. 가계와 초기 활동
오야노 씨는 히고 아마쿠사 제도의 국인(国人)인 아마쿠사 5인방 중 한 가문이다.[1]오야노 다네미쓰(진토호리)의 아들로 태어났다.[1] 우토(宇土)의 국인 나와 아키타카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1] 검호(劍豪) 마루메 나가요시가 한때 의탁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1]
덴쇼 15년(1587년), 아내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1] 같은 해 아마쿠사 5인방과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평정 때 복속하여 본령을 안도받았다.[1]
2. 2. 아마쿠사 5인방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덴쇼 15년(1587년), 오야노 다네모토는 부인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같은 해 아마쿠사 5인방과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평정에 복속하여 본래 영지를 안도받았다.[1] 그러나 덴쇼 17년(1589년), 시키 쓰네시게를 비롯한 아마쿠사 5인방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우토성 공사에 대한 노역 명령을 따르지 않고 반란(天草国人一揆|아마쿠사 국인 일揆일본어)을 일으켰다.[1] 이에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항복하였다.[1]2. 3. 아마쿠사 국인 일揆와 고니시 유키나가
덴쇼 17년(1589년), 시키 쓰네시게를 비롯한 아마쿠사 5인방이 아마쿠사 제도를 중심으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우토성 공사에 대한 노역 명령을 따르지 않고 난을 일으켰다. (아마쿠사 국인 일揆)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항복하였다.이후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신종하여 조선에 머물렀고, 임진왜란 때 아들 슈료(種量|다네카즈일본어)와 함께 고니시군으로 종군하였으나 왜교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2. 4. 임진왜란 참전과 최후
덴쇼 17년(1589년), 시키 쓰네시게를 비롯한 아마쿠사 5인방이 고니시 유키나가의 우토성(|宇土城) 공사에 대한 노역 명령을 따르지 않고 난을 일으켰다. (아마쿠사 국인 일기) 이에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항복하고 영지를 몰수당했다.그 후,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신종하고 조선에 머물렀고, 임진왜란 때 아들 슈료(타네카즈)와 함께 고니시군으로 종군하였으나 왜교성 전투(순천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3. 가신
- 合津山城守|고즈야마시로마모루일본어 - 오야노씨의 일족으로, 다네모토의 친척. 중신(다이칸, 모토야마주)이었다. 세례명은 ペイトロ|페이투일본어이다.
- 安芸守|아키마모루일본어 - 중신 (다이칸, 오야노 스미)이었다. 세례명은 ジョアン|조안일본어이다.
- 岩屋高正|이와야 다카마사일본어 (고로)
- 沛下直貞|하이시타 나오사다일본어 (겐하치로)
- 原田種清|하라다 다네키요일본어 (로쿠로)
- 합진산성주 - 오야노씨 일족으로, 다네모토(種基)의 친척. 중신(대관, 본산 거주)이었다. 세례명은 페이트로이다.[3]
- 안예수(安芸守) - 중신(대관, 오야노 거주)이었다. 세례명은 조앙이다.[3]
참조
[1]
문서
弥太郎、洗礼名ドン=ジョアン
[2]
문서
12代目当主、喜兵衛
[3]
서적
日本史
1577-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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