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 기요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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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토 기요마사는 일본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많은 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 당시 제2군 장수로서 조선을 침략, 함경도에서 왕자들을 생포하고 호랑이 사냥을 하는 등 악명을 떨쳤다.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 서서 승리, 구마모토번의 초대 번주가 되어 구마모토성 축성 및 치수 사업을 통해 지역 발전에 기여했다. 그러나 조선 침략에서의 잔혹 행위와 기독교 탄압 등으로 부정적인 평가도 받으며, 일본과 한국에서 다양한 문화 콘텐츠의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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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기요마사 | |
---|---|
기본 정보 | |
![]() | |
출생 이름 | 도라노스케 |
아명 | 야샤와카 |
별칭 | 도라노스케/도라노스케 지진 가토 오니쇼군 히고의 호랑이 |
사망일 | 1611년 8월 2일 |
출생일 | 1562년 7월 25일 |
출생지 | 오와리국, 일본 |
사망지 | 구마모토, 일본 |
묘소 |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 혼묘지 야마가타현 쓰루오카시 덴자와지 도쿄도 미나토구 가쿠린지 도쿄도 오타구 이케가미혼몬지 교토시 야마시나구 혼코쿠사 |
종교 | 일련정종 |
관직 및 작위 | |
관위 | 종5위하·주계두 종5위상·시종 겸 히고노카미 종4위하 증 종3위 |
봉록 | 히고국 구마모토번 번주 |
영지 | 구마모토번 |
가문 | |
씨족 | 가토씨 |
가문 문장 | [[File:Jyanome_(No_background_and_Black_color_drawing).svg|15px]] 가토 가문 |
가몬 설명 | 뱀 눈알 |
가족 | |
아버지 | 가토 기요타다 |
어머니 | 이토 (가지야 기요베의 딸) |
배우자 | 야마자키 가타이에의 딸 세이조인 혼카쿠인 조코인 쇼오인 |
자녀 | 도라쿠마 혼조인 다다마사 다다히로 요린인 기다 마사카쓰 햐쿠 |
경력 | |
주군 | 도요토미 히데요시 히데요리 도쿠가와 이에야스 히데타다 |
직책 | 구마모토번 초대 번주 |
임기 | 1587년 ~ 1611년 |
전임 | (신설) |
후임 | 가토 다다히로 |
소속 | [[File:Goshichi_no_kiri_inverted.svg|15px]] 도요토미 가문 [[File:Mitsubaaoi.svg|15px]] 동군 [[File:Tokugawa family crest.svg|15px]] 에도 막부 |
군사 활동 | |
주요 전투 | 돗토리성 전투 다카마쓰성 전투 야마자키 전투 시즈가타케 전투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규슈 정벌 임진왜란 우도성 전투 야나가와성 전투 |
지휘 | 구마모토성 |
기타 | |
계명 | 浄池院殿永運日乗大居士 |
훈격 | 증 종3위 |
2. 생애
가토 기요마사는 어린 시절 가토 기요타다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 이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6촌 여동생이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던 히데요시 밑에서 자라며 여러 전투에 참가했다.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는 '시즈가타케 칠본창' 중 한 명으로 적장을 죽여 3,000석의 영지를 받았다.[2][3]
1585년 히데요시가 관백이 되자 주요 신하로 기용되었고, 규슈 정벌에서 공을 세웠다. 1587년 히고국 남부 지역을 다스리는 25만 석 다이묘로 임명되었다. 가타가마야리를 애용했고, 특이한 모양의 투구는 키를 커 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히데요시의 명으로 제2군 장수로서 나베시마 나오시게, 사가라 요리후사를 이끌고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조선을 침략하였다. 함경도로 진격하여 임해군과 순화군을 생포하였다. 함경도에서 호랑이 사냥을 자주 하여 '호랑이 가토'라고 불렸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반목하고, 조선군과 명군의 반격에 밀려 서생포왜성을 쌓고(1593년 완성) 중요 거점으로 삼았다. 사명대사와 강화 회담을 진행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제1군 사령관으로 조선을 재침, 울산성 전투에서 농성 중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에 포위되어 식량과 식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598년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 전 병력을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귀국 후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과 이시다 미쓰나리를 습격했으나 실패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 가담하여 승리하고 고니시 유키나가의 옛 영지를 받았다. 이에야스의 양녀와 혼인하고 구마모토성을 건설하였다. 1611년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이에야스의 화친을 알선하고 돌아오던 중 병으로 6월 24일 구마모토성에서 50세로 사망하였다.
2. 1. 어린 시절과 도요토미 가문
에이로쿠 5년(1562년) 6월 24일, 칼 제작 장인 가토 기요타다의 아들로 오와리국아이치군 나카무라(현재 나고야시나카무라구)에서 태어났다.[1] 기요타다의 아내 이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어머니의 사촌이었다.[1]
에이로쿠 7년(1564년), 기요마사가 3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여 어머니와 함께 쓰시마로 이주했다.
텐쇼 원년(1573년), 하시바 히데요시의 생모인 다이쇼와 어머니가 사촌 자매(혹은 먼 친척) 사이였던 인연으로, 오미국나가하마성의 주인이 된 지 얼마 안 된 외사촌 형제인 히데요시를 섬기기 시작하여, 텐쇼 4년(1576년)에 170석을 받았다.
오미의 수호 다이묘사사키씨의 일족이자 오미의 명문인 야마자키 가타이에의 딸과 결혼하여 정실로 삼았다.
텐쇼 8년(1580년) 9월 19일, 히데요시로부터 하리마국신토군 내에 120석을 주는 지교행장이 기록상 최초 등장이다.[22]
텐쇼 10년(1582년) 4월 14일, 중국 경략 중인 히데요시가 관산성을 공격했을 때, 기요마사는 성에 가장 먼저 진입하여 타케이 쇼칸을 죽였다. 같은 해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자, 히데요시를 따라 야마자키 전투에 참가했다. 이듬해 시즈가타케 전투에서는 적장 야마지 마사쿠니를 죽이는 전공을 세워, 히데요시로부터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중 한 명으로 3,000석의 영지를 받았다.[2][3]
텐쇼 13년(1585년) 7월, 히데요시가 관백에 취임함과 동시에 종오위하·주계두에 임명되었다.
텐쇼 14년(1586년), 히데요시의 규슈 평정에 참가하여, 텐쇼 16년(1588년)에 히고국 영주가 된 사사 나리마사가 실정으로 개역되자, 이를 대신하여 히고 북부 19만 5,000석을 받고 구마모토성에 들어가, 후에 텐쇼 19년(1591년)경부터 이를 개축하여 구마모토성으로 삼았다.
기요마사는 시즈가타케 전투 이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사국 정벌, 규슈 평정에 참가했지만, 대부분 히데요시의 주위를 보호하거나 후방 지원을 담당하는 후위로 활동했다.[22][21]
2. 2.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
1582년 혼노지의 변 이후 야마자키 전투와 시즈가타케 전투 등에서 활약하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요 가신으로 성장했다. 특히 시즈가타케 전투에서는 '시즈가타케 칠본창' 중 한 명으로 꼽히며 3,000석의 영지를 받았다.[2][3]1585년 히데요시가 관백에 취임하자 종오위하 주계두에 임명되었다.
1588년 히고국 북반부 19만 5천 석의 다이묘가 되어 구마모토성에 입성했고, 1591년경부터 구마모토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했다.
기요마사는 시즈가타케 전투 이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사국 정벌, 규슈 평정에 참가했지만, 대부분 히데요시의 주위를 보호하거나 후방 지원을 담당하는 후위로 활동했다.[22][21]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때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진립서에 기록된 가토 코스케(기요마사)의 동원 병력은 불과 150명이었다.[23] 당시 기요마사가 히데요시로부터 기대받았던 것은 도요토미 정권의 재무 관료로서의 역할이었다.[21]
2. 3. 임진왜란 참전
1592년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제2군 장수가 되어, 휘하에 나베시마 나오시게, 사가라 요리후사를 이끌고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조선을 침략하였다.[24] 부산 상륙 후에는 유키나가와 한성 공략을 다투어 남대문으로 한성에 입성했다.[25] 조선의 동북쪽 함경도로 진격하여 북진하였고, 전쟁 초반 조선의 왕자인 임해군과 순화군을 생포하였다.[4] 이때문에 함경도에서 호랑이 사냥을 자주 하였으므로 '''호랑이 가토'''(虎加藤)라고 불렸다.[5] 片鎌槍(가타카마 야리)|편날낫창일본어으로 호랑이 사냥을 하였다고 한다.[25]

임진강 전투에서 조선 정규군의 저항을 격파하고 함경도를 평정하였다. 두만강을 넘어 만주의 오랑카이(길주 이남에 주둔했다.
그 후 고니시 유키나가와 반목하고 명군과 조선 의병, 조선 관군의 반격에 밀려 전황이 왜군에게 불리해져 남으로 후퇴하여 서생포왜성을 쌓고 중요 거점으로 삼았다.[25]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가토군은 북면으로부터 공성을 담당하여 성을 함락시켰다.
사명과 강화회담을 주로 진행하였으며, 히데요시의 강화 조건을 전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조건은 명과 조선 모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기요마사가 강화의 방해가 된다고 보고하여, 기요마사는 교토로 돌아와 금고(謹慎)가 된다.[25]
1597년 정유재란 때 제1군 사령관(2군 사령관)으로 왜선 300여 척을 이끌고 조선을 재침하였다.[60] 정유재란 시에는 전라도 지역을 주로 공격하였다.[34] 황석산성 전투에서 승리하고 전주를 점령한 뒤, 충청도 진천까지 진출하였다. 울산에 울산왜성을 축성하고 울산성 전투에서 농성하였으나 명과 조선 연합군에게 포위당하여 식수 부족으로 병사 대다수가 죽어갔다. 가토 기요마사도 말을 잡아 그 피를 마시는 과정에서 고니시 유키나가, 이시다 미쓰나리를 위시한 문치파와 계속 대립하여 내분을 빚었다. 1598년 서생포왜성이 명 제독 마귀에 의해 함락되었고,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 전 병력을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2. 4.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관계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과 함께 이시다 미쓰나리의 가택을 습격했으나 살해에는 실패했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13]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이에야스의 동군에 가담하여 규슈에서 이시다 측 동맹군과 싸우고 고니시 유키나가의 여러 성을 함락시켰다. 그 공으로 히고국(고니시의 옛 영지)의 나머지 절반을 받아 50만 석에 가까운 수입을 얻게 되었다.말년에는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히데요리 사이의 관계를 중재하려고 노력했다. 1611년 그러한 회의 후 바다를 통해 구마모토로 돌아가던 중 병이 들었고, 도착 직후 사망했다.[13]
3. 임진왜란에서의 역할과 논란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1592년~1598년) 당시 조선을 침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세 명의 고위 사령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서울, 부산 등 여러 도시를 함락시켰다. 임진강 전투에서 조선 정규군의 마지막 저항을 분쇄하고 함경도를 평정하였다.
조선의 선조는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가 오기 전에 서울을 버렸다. 기요마사는 탈영한 두 명의 조선 왕자를 인질로 삼아 하급 관리들의 항복을 강요했다.[4] 전쟁 중 그는 취미 삼아 창으로 호랑이 사냥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나중에 그 가죽을 히데요시에게 바쳤다.[5] 일부 이야기에서는 실제로는 히데요시의 건강을 위해 고기를 가져다주려고 호랑이를 생포하려 했으나, 부하들의 식량 부족으로 인해 나중에 호랑이들을 죽였다고 한다.
기요마사는 유명한 성곽 건축가였다. 임진왜란 중 그는 정복한 지역에 여러 개의 전략적인 일본식 성을 건설했다. 울산성은 그러한 요새 중 하나였고, 울산성 전투에서 기요마사의 가장 유명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었다. 기요마사는 성을 방어하여 6만 명에 달하는 명나라 장군 양호(楊鎬)의 군대를 성공적으로 저지했다. 그는 1598년 11월 23일까지 성을 방어했다. 그러나 그의 용맹함은 그의 라이벌이자 상관이었던 이시다 미쓰나리가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지 않아, 히데요시는 그를 교토로 소환했다.
조선 침략에 참전한 다른 많은 다이묘들처럼, 그는 포로로 잡힌 조선 도공들을 그의 규슈 영지로 데려갔다.[6]
3. 1. 조선 침략과 함경도 점령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1592년~1598년)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요 사령관 중 한 명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한성, 부산 등 여러 도시를 함락시켰고, 임진강 전투에서 조선 정규군의 저항을 꺾고 함경도를 점령했다.[4]조선의 선조는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가 오기 전에 이미 서울을 떠난 상태였다. 기요마사는 탈영한 두 왕자를 인질로 삼아 조선 하급 관리들의 항복을 받아냈다.[4]
전쟁 중, 기요마사는 취미로 창을 사용하여 호랑이 사냥을 즐겼다고 알려져 있으며, 나중에 그 가죽을 히데요시에게 바쳤다고 한다.[5] 일설에는 히데요시의 건강을 위해 호랑이 고기를 구하려 했으나, 부하들의 식량 부족으로 호랑이를 죽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기요마사는 문록(文禄) 원년(1592년)부터 시작된 문록・게이초의 역(文禄・慶長の役)에서 2번대 주장이 되어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소라 요리후사(相良頼房) 등을 지휘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1번대와는 다른 경로로 진격하여 4월 17일 부산에 상륙, 5월 3일 남대문을 통해 한성에 입성했다. 한성 점령 후에는 북쪽으로 진격하여 임진강 전투(臨津江の戦い)에서 김명원(金命元) 등의 조선군을 격파했다.
황해도(黄海道) 김교역(金郊駅)에서는 1번대, 3번대와 헤어져 북동쪽 함경도(咸鏡道)로 향하여 해정창 전투(海汀倉の戦い)에서 한극엄(韓克諴)의 조선군을 격파하고 함경도를 평정, 현지 조선인에 의해 생포되었던 조선 이왕자(二王子)(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를 포로로 삼았다.
기요마사는 조선 국경인 두만강(豆満江)을 넘어 만주(満洲)의 오랑카이(길주(吉州) 이남에 주둔했다. 일본군이 떠난 함경북도에서는 조선인 의병이 봉기하여 길주를 공격했지만, 기요마사는 이를 격파했다.
3. 2. 울산성 전투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 중 정복한 지역에 여러 일본식 성을 건설한 것으로 유명하다. 울산성은 그중 하나로, 1597년 12월 22일 울산성 전투에서 기요마사의 가장 유명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1597년 12월, 완공을 앞둔 울산왜성에 5만 7천 명의 명·조선군이 공격해오면서 울산성 전투가 시작되었다. 기요마사는 급히 500명 정도의 측근만 이끌고 울산왜성에 들어갔다. 물과 식량이 부족한 미완성 상태에서[34] 모리 히데모토, 구로다 나가마사 등 원군이 올 때까지 10일 정도 명·조선군의 공격을 버텨냈다. 이 전투에서 명군은 1,621명의 손해를 입었다. 기요마사는 6만 명에 달하는 명나라 장군 양호(楊鎬)의 군대를 성공적으로 저지했으나, 그의 용맹함은 라이벌이자 상관이었던 이시다 미쓰나리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지 않아 교토로 소환되었다.
당시 조선에 있던 명군 총사령관 양호(楊鎬)는 승리라고 속여 본국에 보고했지만, 참패가 드러나 해임되었다.
1598년 9월, 울산왜성은 다시 공격받았지만, 이때는 성이 완성되어 이전만큼 고전하지 않고 격퇴했다.
3. 3. 민간인 학살 및 문화재 약탈 논란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략하여 여러 도시를 함락시키고, 함경도를 평정하는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과 문화재 약탈을 자행했다는 논란이 있다.- 민간인 학살: 기요마사는 탈영한 두 조선 왕자를 인질로 삼아 하급 관리들의 항복을 강요했다.[4]
- 문화재 약탈: 조선 침략에 참전한 다른 많은 다이묘들처럼, 기요마사는 포로로 잡힌 조선 도공들을 그의 큐슈 영지로 데려갔다.[6] 이는 일본 도자기 문화 발전에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강제 이주와 문화재 약탈이라는 비판도 함께 받고 있다.
- 호랑이 사냥: 전쟁 중 기요마사는 창으로 호랑이 사냥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나중에 그 가죽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바쳤다.[5]
4. 구마모토 번주로서의 업적
임진왜란 종전 후, 가토 기요마사는 구마모토번의 초대 번주가 되었다. 구마모토성을 중심으로 마을을 정비하고 치산, 치수, 산업을 장려하여 현재 구마모토시의 기초를 닦았으며,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구마모토성 축성이 있다.
4. 1. 구마모토성 축성
임진왜란 종전 후, 가토 기요마사는 구마모토번의 초대 번주가 되었다. 그는 울산왜성 전투에서의 경험을 교훈 삼아 1607년 구마모토성을 축성하였다. 이 성은 일본 삼대 명성 중 하나로 손꼽히며,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기 위해 성 안에는 120개가 넘는 우물을 파고, 다다미도 식용이 가능한 고구마 줄기로 제작하는 등 장기 농성에 대비하였다.[24]4. 2. 치수 사업과 농업 장려
가토 기요마사는 구마모토번 초대 번주로서 구마모토성을 중심으로 마을을 정비하고 치산, 치수, 산업을 장려하여 현재 구마모토시의 기초를 닦았다. 특히 시라카와와 쓰보이가와의 물길을 바꾸고 대규모 관개 시설을 정비하여 구마모토 평야를 곡창 지대로 만들었다. 이러한 업적으로 인해 구마모토 지역민들에게 '세이쇼코 상'(清正公様)이라 불리며 현재까지도 존경받고 있다.[21]5. 평가와 논란
가토 기요마사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긍정적인 평가로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축성 기술, 구마모토 지역 발전에 기여한 점을 들 수 있다. 구마모토에서는 지역 발전에 크게 기여한 영주로서 존경받고 있으며, 가토 신사에서 신으로 모셔지고 있다.[1] 현대에도 '''세이쇼코상'''(清正公さん, 세이쇼코 상)이라고 불리며 친숙하게 여겨지며, 메이지 43년(1910년)에는 종삼위를 추증받았다.
호소카와 타다토시는 구마모토성에 들어갈 때 "당신의 성지를 맡겠습니다"라고 하며 기요마사를 공경했다. 본묘사는 호소카와씨의 보리사에 버금가는 사찰 영지를 기증받았다. 교호 20년(1735년) 125회 원기 무렵, 매달 23일 기요마사의 기일에는 참배객이 급증했다. 6월 23일에는 참배객을 노리고 참도에 임시 가설 점포와 다방이 들어설 정도로 번성했고, 현재 돈샤회의 원형이 나타났다. "닛쇼 님", "닛쇼 거사"라고 불렸던 기요마사는 "청정공", "청정신기"라고 존칭되면서 신격화되었고, 본묘사는 "세이쇼코(청정공) 씨"로서 민중의 청정 신앙 중심이 되었다.
반면, 임진왜란 당시 조선 침략의 선봉장이었던 가토 기요마사는 민간인 학살, 문화재 약탈 등 수많은 전쟁 범죄에 책임이 있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17] [18] 함경도 해정창 전투에서 조선군을 격파하고, 현지 주민에게 생포된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았으며, 두만강을 넘어 오랑카이를 공격하기도 했다.
윌리엄 스콧 윌슨은 가토 기요마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군인이었으며, 시조 낭송조차 금지하고 무술을 모든 것보다 우선시했다"고 묘사하며 그의 잔혹한 성격을 지적했다.[18] 혼도 전투에서는 부하들에게 임신한 기독교 여성들의 배를 갈라 태아의 머리를 베도록 명령하는 등 잔혹한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18]
일본 내에서도 기요마사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과도한 충성심과 잔혹한 성격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관계에서 갈등을 야기했고, 가문은 아들 가토 다다히로 대에 개역되어 몰락했다.[14]
한국에서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 장수였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진보 진영에서는 그를 침략자이자 학살자로 규정하며 강하게 비판한다.[4] 전쟁 중, 기요마사는 창으로 호랑이 사냥을 즐겼으며, 잡은 호랑이 가죽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바쳤다고 한다.[5]
가토 기요마사의 사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당대기(当代記)』에는 방탕한 생활로 인한 “허증(虚ノ病)”(신허(腎虚) 혹은 성병(性病))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으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또는 그 일파에 의한 독살설도 제기되고 있다. 니조 성(二条城) 회견에서의 음식을 통한 독살, 독만주에 의한 독살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이케나미 쇼타로(池波正太郎)의 『불의 나라의 성(火の国の城)』은 뿌리 깊은 독살설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한센병(ハンセン病)이 사인이라는 설도 있으며, 가토 신사(加藤神社)에는 병의 완치를 기원하는 참배객이 많았다고 한다.
5. 1. 긍정적 평가
가토 기요마사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축성 기술, 그리고 구마모토 지역 발전에 기여한 점이 높이 평가받는다. 특히 구마모토에서는 지역 발전에 크게 기여한 영주로서 존경받고 있으며, 가토 신사에서 신으로 모셔지고 있다.[1]구마모토 등지에서는 현대에도 '''세이쇼코상'''(清正公さん, 세이쇼코 상)이라고 불리며 친숙하다. 이는 신전 개발과 치수 공사에서 실적을 올린 덕이 크다. 메이지 43년(1910년)에 종삼위를 추증받았다.
호소카와 타다토시는 구마모토성에 들어갈 때 "당신의 성지를 맡겠습니다"라고 하며 기요마사를 공경하는 태도를 보였다. 본묘사는 호소카와씨의 보리사에 버금가는 사찰 영지를 기증받았다. 교호 20년(1735년)의 125회 원기 무렵, 매달 23일 기요마사의 기일에는 참배객이 급증하였다. 6월 23일에는 참배객을 노리고 참도에 임시 가설 점포와 다방이 들어설 정도로 번성하였고, 현재의 돈샤회의 원형이 나타났다. "닛쇼 님", "닛쇼 거사"라고 불렸던 기요마사는 "청정공", "청정신기"라고 존칭되면서 신격화되었고, 본묘사는 "세이쇼코(청정공) 씨"로서 민중의 청정 신앙의 중심이 되었다.
5. 2. 부정적 평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침략의 선봉장이었던 가토 기요마사는 민간인 학살, 문화재 약탈 등 수많은 전쟁 범죄에 책임이 있다.[17] [18] 함경도 해정창 전투에서 조선군을 격파하고, 현지 주민에게 생포된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를 포로로 잡았으며, 두만강을 넘어 오랑카이를 공격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위는 조선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고, 현재까지도 비판받고 있다.윌리엄 스콧 윌슨은 가토 기요마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군인이었으며, 시조 낭송조차 금지하고 무술을 모든 것보다 우선시했다"고 묘사하며 그의 잔혹한 성격을 지적했다.[18] 혼도 전투에서는 부하들에게 임신한 기독교 여성들의 배를 갈라 태아의 머리를 베도록 명령하는 등 잔혹한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18]
일본 내에서도 기요마사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과도한 충성심과 잔혹한 성격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관계에서 갈등을 야기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에 가담하여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지를 몰수하고 구마모토번의 번주가 되었지만, 가문은 아들 가토 다다히로 대에 개역되어 몰락했다.[14]
5. 3. 한국에서의 인식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 장수였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진보 진영에서는 그를 침략자이자 학살자로 규정하며 강하게 비판한다.[4]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부산에 상륙하여 서울을 함락시켰고, 임진강 전투에서 조선군을 격파한 후 함경도를 점령했다.[4] 그는 함경도에서 탈영한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인질로 잡아 조선 관리들의 항복을 강요하기도 했다.[4]
전쟁 중, 기요마사는 창으로 호랑이 사냥을 즐겼으며, 잡은 호랑이 가죽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바쳤다고 한다.[5] 일설에는 히데요시의 건강을 위해 호랑이 고기를 구하려 했으나, 부하들의 식량 부족으로 호랑이를 죽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일부에서는 가토 기요마사의 군사적 능력과 구마모토성과 같은 성곽 건축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6. 가토 기요마사 관련 문화
임진왜란 종전 후 구마모토번 초대 번주가 된 가토 기요마사는 구마모토성을 중심으로 마을을 정비하고 치산, 치수, 산업을 장려하여 현재 구마모토시의 기초를 닦았다.
구마모토시니시구 가가노하라의 발성산 본묘寺 정지묘와 야마가타현쓰루오카시 마루오카의 금봉산 천택사에 묘소가 있다. 도쿄도미나토구시로카네다이의 최정산 각림사에는 위패가 있으며, 오타구의 장영산 대국원 본문사(이케가미혼몬지)에는 공양탑이 있다. 구마모토시 본마루에는 가토신사가 있는데, 오오키 켄노우, 조선인 김환(金宦, 조선명: 양보감)도 함께 제사지내고 있다.[48]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통일신보」는 경상도의 대표적 민요 중 하나인 쾌지나 칭칭나네가 가토 기요마사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였다.[61] 임진왜란 당시 철수하는 왜군을 보고 사람들이 '''쾌재라 청정(청정)이 나가네'''라고 한 환호에서 변형되었다고 한다.
가토 기요마사는 일본의 소설, 드라마, 게임 등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임진왜란을 다룬 한국 드라마에서도 등장하며, 주로 부정적인 이미지로 그려진다.
-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 《54만석의 거짓말》, 엔도 슈사쿠의 소설 《숙적》 등에 등장한다.
- 고에이의 비디오 게임 ''결전'', ''결전 III'', ''삼국무쌍 3'', ''삼국무쌍 4'' 등에 등장한다.
- ''포켓몬 + 노부나가의 야망''에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등장하며, 파트너 포켓몬은 톱치와 액스라이즈이다.[19]
- 『호지로 일대기』, 『가토 기요마사』(사다케 신고), 『가토 기요마사』(카이온지 시오고로), 『불의 나라의 성』, 『가토 기요마사』(무라카미 겐조), 『가토 기요마사 호랑이의 꿈을 꾸다』, 『고집쟁이 성 구마모토 성곽 축성 종말』, 『똑똑한 시종들아』 등의 소설에 등장한다.
- 조루리나 가부키 등 연극에서는 "태합"(太閤)이라는 관직명을 "대공"(大功)으로 바꾸어 『대공기』(大功記)라는 제목으로 하거나, "태합 히데요시"(太閤秀吉)의 이름을 "대공 쿠요시"(大功久吉)로 바꾸어 각색하기도 하는데, 가토 기요마사 역시 "가토 마사키요"(加藤正清)로 등장하는 작품이 있다.[57]
- 『팔진수호성』, 『증보 도요토미담』, 『기요마사 성충록』, 『니조성의 기요마사』 등의 연극 작품에 등장한다.
- 동요 「가토 기요마사」(『尋常소학교가요』(尋常小学校唱歌) 5학년 5번째 곡)가 있다.
드라마에서는 다음과 같은 작품들에 등장한다.
일본일본어
- 태합기 (1965년, 배우:아타라시 카츠토시)
- 봄의 언덕길 (1971년, 배우:사가와 테츠로)
- 황금의 나날 (NHK, 1978년, 배우:와타비키 카츠히코)
- 여인 태합기 (1981년, 배우:세리자와 안히사→카토 켄이치)
- 도쿠가와 이에야스 (1983년, 배우:이부키 고로)
- 카스가노 츠보네 (1989년, 배우:나카 코우지)
- 류큐의 바람 (1993년, 배우:타카스기 코우)
- 히데요시 (1996년, 배우:타카스기 코우)
-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 (2000년, 배우:카리야 슌스케)
- 토시이에와 마츠~카가 백만석 이야기~ (2002년, 배우:마츠다 히토미)
- 천지인 (2009년, 배우:타카하시 츠토무)
- 고우~공주들의 전국~ (2011년, 배우:요코야마 카즈토시)
- 군사 칸베에 (2014년, 배우:아베 신노스케)
- 사나다마루 (2016년, 배우:아라이 히로후미)
- 세키가하라 (1981년, TBS, 배우: 후지오카 히로시)
- NHK 대하드라마
- *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 (2000년, 배우: 카리야 준스케)
- * 코우명가辻 (2006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카네루 켄지)
- * 사나다마루 (2016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아라이 히로후미)
- * 도쿠가와 이에야스(2023년 NHK 대하드라마) (2023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후치가미 야스시)
- TV 구마모토 고향의 위인 시리즈 다큐멘터리 드라마 『가토 기요마사 ~토목의 신 민과 함께~』(2019년, 배우: 이시구로 켄)[58][59]
한국한국어
- 임진왜란 (MBC, 1985년~1986년, 배우: 김기일)
- 왕의여자 (SBS, 2003년~2004년, 배우: 이재연)
- 불멸의 이순신 (KBS1, 2004년~2005년, 배우: 이정용)
- 징비록 (KBS1, 2015년, 배우: 이정용)
- 임진왜란 1592 (KBS1, 2016년, 배우: 이우승)
6. 1. 구마모토 지역
임진왜란 종전 후 가토 기요마사는 구마모토번 초대 번주가 되었다. 1607년 일본 3대 명성 중 하나로 꼽히는 구마모토성을 축성했는데, 울산왜성 전투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성 안에 우물을 120개 넘게 만들고 다다미도 식용이 가능한 고구마 줄기로 제작하였다.[47] 구마모토성을 중심으로 마을을 정비하고 치산, 치수, 산업을 장려하여 현재 구마모토시의 기초를 닦았다.구마모토시 니시구 가가노하라의 발성산 본묘寺 정지묘에 묘소가 있으며, 도쿄도미나토구시로카네다이의 최정산 각림사에는 위패가 있다. 오타구의 장영산 대국원 본문사(이케가미혼몬지)에는 공양탑이 있고, 구마모토시 본마루에는 가토신사가 있다. 가토 신사에는 가토 기요마사에게 순절한 오오키 켄노우, 조선인 김환(金宦, 조선명: 양보감)도 함께 모셔져 있다.[48]
6. 2. 민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통일신보」는 경상도의 대표적 민요 중 하나인 쾌지나 칭칭나네가 가토 기요마사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였다.[61] 임진왜란 당시 철수하는 왜군을 보고 사람들이 '''쾌재라 청정(청정)이 나가네'''라고 한 환호에서 변형되었다고 하며, 임동권이 지은 『한국민요집1』에도 진주 지방에서 가토 기요마사를 철수하게끔 하는 내용을 담은 '''쾌지나 칭칭나네''' 수록본이 있다.6. 3. 대중문화
가토 기요마사는 일본의 소설, 드라마, 게임 등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임진왜란을 다룬 한국 드라마에서도 등장하며, 주로 부정적인 이미지로 그려진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 《54만석의 거짓말》, 엔도 슈사쿠의 소설 《숙적》 등에 등장한다.
- 고에이의 비디오 게임 ''결전'', ''결전 III'', ''삼국무쌍 3'', ''삼국무쌍 4'' 등에 등장한다.
- ''포켓몬 + 노부나가의 야망''에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등장하며, 파트너 포켓몬은 톱치와 액스라이즈이다.[19]
- 『호지로 일대기』, 『가토 기요마사』(사다케 신고), 『가토 기요마사』(카이온지 시오고로), 『불의 나라의 성』, 『가토 기요마사』(무라카미 겐조), 『가토 기요마사 호랑이의 꿈을 꾸다』, 『고집쟁이 성 구마모토 성곽 축성 종말』, 『똑똑한 시종들아』 등의 소설에 등장한다.
- 조루리나 가부키 등 연극에서는 "태합"(太閤)이라는 관직명을 "대공"(大功)으로 바꾸어 『대공기』(大功記)라는 제목으로 하거나, "태합 히데요시"(太閤秀吉)의 이름을 "대공 쿠요시"(大功久吉)로 바꾸어 각색하기도 하는데, 가토 기요마사 역시 "가토 마사키요"(加藤正清)로 등장하는 작품이 있다.[57]
- 『팔진수호성』, 『증보 도요토미담』, 『기요마사 성충록』, 『니조성의 기요마사』 등의 연극 작품에 등장한다.
- 동요 「가토 기요마사」(『尋常소학교가요』(尋常小学校唱歌) 5학년 5번째 곡)가 있다.
6. 3. 1. 드라마
일본일본어- 태합기 (1965년, 배우:아타라시 카츠토시)
- 봄의 언덕길 (1971년, 배우:사가와 테츠로)
- 황금의 나날 (NHK, 1978년, 배우:와타비키 카츠히코)
- 여인 태합기 (1981년, 배우:세리자와 안히사→카토 켄이치)
- 도쿠가와 이에야스 (1983년, 배우:이부키 고로)
- 카스가노 츠보네 (1989년, 배우:나카 코우지)
- 류큐의 바람 (1993년, 배우:타카스기 코우)
- 히데요시 (1996년, 배우:타카스기 코우)
-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 (2000년, 배우:카리야 슌스케)
- 토시이에와 마츠~카가 백만석 이야기~ (2002년, 배우:마츠다 히토미)
- 천지인 (2009년, 배우:타카하시 츠토무)
- 고우~공주들의 전국~ (2011년, 배우:요코야마 카즈토시)
- 군사 칸베에 (2014년, 배우:아베 신노스케)
- 사나다마루 (2016년, 배우:아라이 히로후미)
- 세키가하라 (1981년, TBS, 배우: 후지오카 히로시)
- NHK 대하드라마
- *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 (2000년, 배우: 카리야 준스케)
- * 코우명가辻 (2006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카네루 켄지)
- * 사나다마루 (2016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아라이 히로후미)
- * 도쿠가와 이에야스(2023년 NHK 대하드라마) (2023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후치가미 야스시)
- TV 구마모토 고향의 위인 시리즈 다큐멘터리 드라마 『가토 기요마사 ~토목의 신 민과 함께~』(2019년, 배우: 이시구로 켄)[5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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