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니시 유키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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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니시 유키나가는 1558년 일본 이즈미국 사카이에서 태어난 무장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활동했다. 그는 후나부교를 거쳐 셋쓰노카미에 임명되었으며, 규슈 정벌과 임진왜란에 참전했다. 임진왜란에서는 선봉장으로 활약하며 부산진 전투, 동래성 전투 등에서 승리했고, 강화 협상 과정에서 히데요시를 속이려다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했으나 패배하여 처형되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며, 뛰어난 수군 지휘관이자 외교관으로 평가받지만, 임진왜란 당시 조선 침략의 선봉이었다는 점에서 한국에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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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시 유키나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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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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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고니시 유키나가 |
본명 | 야쿠로 (弥九郎) |
가명 | 야쿠로 (弥九郎), 조신 (如信) |
영명 | 아우구스티누스 (아고스티노, 아구스치노) / 돔 오귀스탱 지야크랑 |
로마자 표기 | Konishi Yukinaga |
일본어 표기 | 小西 行長 |
가나 표기 | こにし ゆきなが |
한자 표기 | 小西 行長 |
한국어 표기 | 고니시 유키나가 |
출생 | 1558년 |
사망 | 1600년 11월 6일 |
출생지 | 교토 |
사망지 | 교토 |
묘소 | 젠도지 (기후현 다루이정), 사카이 공원 묘지 내 공양탑 (오사카부 사카이시 미나미구) |
관직 및 직위 | |
다이묘 임기 시작 | 1588년 |
다이묘 임기 종료 | 1600년 |
다이묘 영지 | 히고국 남부 |
전임 다이묘 | 사사 나리마사 |
후임 다이묘 | 가토 기요마사 |
관위 | 종5위 하, 휴가국 국사, 셋쓰국 수 |
거점 성 | 우도 성 |
가문 및 소속 | |
가문 | 고니시 씨 |
주요 소속 | 우키타 씨, 도요토미 씨 |
세키가하라 전투 소속 | 서군 |
가족 | |
아버지 | 고니시 류사 (세례명: 조우친) |
어머니 | 와쿠사 (세례명: 막달레나) |
형제 | 고니시 조세이 (세례명: 벤트) 고니시 유키카게 (세례명: 조앙) 고니시 루이스 고니시 페드로 이타미야 무네쓰케의 아내 (세례명: 루시아) |
배우자 | 기쿠히메 (세례명: 유스타) |
측실 | 다테노도노 (세례명: 카타리나) |
자녀 | 고니시 효고노카미 (이름 미상) (이름 미상) (고니시 야자에몬 아내) 묘 (세례명: 마리아, 소 요시토모 아내) 아사야마 야자에몬 |
양녀 | 줄리아 오타아 |
종교 |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세례명 |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 |
세례일 | 1584년 |
주요 전투 | |
주요 전투 | 다카마쓰 성 포위전 오타 성 포위전 시코쿠 정벌 규슈 정벌 임진왜란 세키가하라 전투 |
주군 | |
주군 | 우키타 나오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리 |
2. 생애
고니시 유키나가는 에이로쿠 원년(1558년) 이즈미국 사카이에서 약재 장사를 하던 고니시 타카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은 교토에서 보냈다.[34] 본명은 야쿠로(彌九郎)였다.
우키타 나오이에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무사로 발탁되어 그의 가신이 되었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던 하시바 히데요시가 미키성(三木城)의 나오이에를 공격할 때, 노부나가에게 항복하기로 한 나오이에의 명으로 유키나가가 히데요시와 교섭했는데, 이때 히데요시로부터 그 재능을 인정받아 나오이에 사후 다시 히데요시의 신하가 되었다.
도요토미 정권의 후나부교(船奉行)로 임명되어 수군을 통솔했다. 덴쇼 13년(1585년)에는 셋쓰노카미(涉津守)로 임명되고 아울러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기도 했다. 덴쇼 12년(1584년) 다카야마 우콘의 권유로 세례를 받아 기리시탄이 되었다.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였다.[34]
히고 고쿠진 잇키 진압에 공을 세워 히고 남부 20만 석을 받았다.[30] 1589년 우토성(宇土城)을 쌓고 본거지로 삼았다. 이때 가토 기요마사의 도움을 받아 아마쿠사 제도의 반란을 진압하고 아마쿠사 1만 석을 추가로 획득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야욕을 감지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전쟁을 막고자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자, 사위인 소 요시토시 등을 이끌고 18,700명으로 구성된 조선 침공 선봉대 제1군의 지휘관으로 가장 먼저 조선에 상륙하였다.[39] 부산진성과 다대포성,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한양을 가장 먼저 점령하여 참전 무장 가운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39]
평양성을 함락시킨 이후, 보급 문제와 명의 원군에 대한 부담을 걱정했다. 이후 명의 개입과 이순신을 위시한 조선 수군의 남해 제해권 장악, 그리고 각지에서의 조선 의병의 활약으로 인한 보급 문제로 더 이상 진격을 못하고 지체하던 중 조명연합군에 패해 쫓겨났다.
1593년 1월 이여송이 이끄는 4만 명의 조선 지원군이 평양을 공격해 함락시켰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군의 공세에 밀려 한양까지 퇴각하였다. 벽제관 전투 이후 명군과 일본군 사이에는 다시 한 번 강화 교섭이 벌어졌는데,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측의 회담 담당자 심유경과 짜고 히데요시에게 명이 항복했다고 속였고, 명에 대해서는 히데요시가 항복한다고 속여 강화 교섭을 성립시켰다.
1598년 음력 8월 18일 히데요시가 죽자, 고니시 유키나가는 왜교성에 갇혔다. 히데요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철수를 결정, 명나라 수군을 지휘하던 진린에게 뇌물을 주어 퇴로를 확보해 주겠다는 확약을 받았지만, 조선 수군 통제사 이순신은 진린의 이러한 방침에 강력하게 반대하고 퇴각하는 일본 수군에 대한 공격에 나섰고, 노량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시마즈 요시히로 등의 도움으로 고니시 유키나가는 가까스로 후퇴, 12월에 귀국할 수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이시다 미쓰나리와의 친분으로 서군에 가담했다.[42] 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아이즈 정벌에 나섰을 때 참전하지 않고 잔류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으로 참전하여 다나카 요시마사, 쓰쓰이 사다쓰구 등과 격전을 벌였으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등의 배신으로 패배했다.[43]
이부키 산으로 도주했으나 붙잡혔다.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에 할복을 거부하고 10월 1일 교토 로쿠조 강변에서 이시다 미쓰나리, 안코쿠지 에케이와 함께 참수되었다.[29]
그의 죽음은 바티칸의 교황 클레멘스 8세에게도 알려져 애도를 받았으며, 1607년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음악극이 만들어지기도 했다.[28] 고니시 가문 멸문 후, 그의 영지는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어갔다.
2. 1. 출신과 초기 이력
에이로쿠 원년(1558년) 이즈미국 사카이에서 약재 장사를 하던 고니시 타카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은 교토에서 보냈다.[34] 본명은 '''야쿠로'''(彌九郎)였다.처음에는 비젠 후쿠오카의 거상 아베 요시사다(阿部善定)의 데다이(手代) 겐로쿠(源六)[35]의 양자로 들어갔다. 장사를 하던 지역의 영주 우키타 나오이에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무사로 발탁되어 나오이에의 가신이 되었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던 하시바 히데요시가 미키성(三木城)의 나오이에를 공격할 때, 노부나가에게 항복하기로 한 나오이에의 명으로 유키나가가 히데요시와 교섭했는데, 이때 히데요시로부터 그 재능을 인정받아 나오이에 사후 다시 히데요시의 신하가 되었다.
그 후 도요토미 정권의 '''후나부교'''(船奉行)로 임명되어 수군을 통솔했다. 덴쇼 13년(1585년)에는 셋쓰노카미(涉津守)로 임명되고 아울러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기도 했다.
2. 2. 히데요시 가신 시대
도요토미 정권의 후나부교(船奉行)로 임명되어 수군을 통솔했다.[34] 덴쇼 13년(1585년) 셋쓰노카미(摂津守)에 임명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34] 같은 해 규슈 정벌에서 수군을 거느리고 참전했다가 사이가추(雜賀衆)의 저항으로 패배했으나, 오타성 수공에서 아타케부네나 대포를 동원한 공격으로 항복을 받아냈다.[34] 기슈 정벌에서는 수군을 이끌고 참전했지만, 잡가중의 저항을 받고 패퇴했다고 전해진다.[25]덴쇼 12년(1584년) 다카야마 우콘의 권유로 세례를 받아 기리시탄이 되었다.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였다.[34] 기리시탄이 된 후 자신의 영지가 된 쇼도섬에 포르투갈 출신 로마 가톨릭교회 신부인 세스페데스를 초빙해 기독교를 포교하고 섬의 전토 개발을 적극적으로 행했다.[34] 덴쇼 15년(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내린 바테렌 추방령 때 개역당한 우콘을 섬에 숨겨주고 추방령의 부당함을 히데요시에게 간언하였다.[34]
2. 3. 우토 성주 시대
히고 고쿠진 잇키 진압에 공을 세워 히고 남부 20만 석을 받았다.[30] 1589년 우토성(宇土城)을 쌓고 본거지로 삼았다. 이때 가토 기요마사의 도움을 받아 아마쿠사 제도의 반란을 진압하고 아마쿠사 1만 석을 추가로 획득했다.아마쿠사 제도는 인구의 3분의 2가 기리시탄일 정도로 기독교 세력이 강했는데, 유키나가는 이들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보호했다. 이탈리아인 수도사 조반니 니콜라오가 유화, 수채화 등 서양 미술을 가르치는 학교를 운영하도록 도왔다.[37]
유키나가는 우토성 외에도 무카이시마성(麦島城) 등 여러 성을 쌓아 영지를 관리하고, 기리시탄 출신 가신들을 적극 등용했다. 그러나 니치렌종 신자였던 가토 기요마사와는 영지 문제, 종교 문제 등으로 갈등을 빚었다.[30]
2. 4.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야욕을 감지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전쟁을 막고자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자, 사위인 소 요시토시 등을 이끌고 18,700명으로 구성된 조선 침공 선봉대 제1군의 지휘관으로 가장 먼저 조선에 상륙하였다.[39] 부산진성과 다대포성,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한양을 가장 먼저 점령하여 참전 무장 가운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39]평양성을 함락시킨 이후, 보급 문제와 명의 원군에 대한 부담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고니시 유키나가의 걱정대로 명의 개입과 이순신을 위시한 조선 수군의 남해 제해권 장악, 그리고 각지에서의 조선 의병의 활약으로 인한 보급 문제로 더 이상 진격을 못하고 지체하던 중 조명연합군에 패해 쫓겨났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시다 미쓰나리 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강화교섭에 힘썼는데, 조선측은 이를 몇 번이나 거부 또는 묵살하였다. 명의 개입 초기에는 평양성 공격을 격퇴하기도 했으며, 이때 고니시 유키나가의 동생인 고니시 요시치로(小西与七郎일본어) 등이 전사하였다. 그 뒤 강화 교섭에 강경한 자세로 일관하던 조선 조정 대신 명과 교섭을 시도했고, 명측과 고니시 유키나가 양측은 50일간의 휴전과 강화 교섭에 동의했다.
1593년 1월에 이여송이 이끄는 4만 명의 조선 지원군이 평양을 공격해 함락시켰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군의 공세에 밀려 한양까지 퇴각하였다. 벽제관 전투 이후 명군과 일본군 사이에는 다시 한 번 강화 교섭이 벌어졌는데,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측의 회담 담당자 심유경과 짜고 히데요시에게 명이 항복했다고 속였고, 명에 대해서는 히데요시가 항복한다고 속여 강화 교섭을 성립시킨다. 이때 고니시 유키나가의 가신인 나이토 조안(内藤如安)[40]이 일본측 사절로써 베이징까지 오기도 했다. 그 결과 명의 사신이 히데요시를 일본국왕으로 봉한다는 만력제의 칙지와 금인(金印)을 가지고 일본으로 당도했다. 그런데 이는 히데요시가 명의 신하가 된다는 것으로 히데요시가 명에 요구한 화의 조건과는 다른 것이었다. 때문에 히데요시에게 회보하는 단계에서 고니시 유키나가는 칙지를 읽는 임무를 명한 사이쇼 조타이에게 내용을 살짝 바꿔서 읽어줄 것을 부탁했지만, 조타이는 칙지를 곧이곧대로 히데요시 앞에서 읽어버렸고, 강화 교섭은 결렬되었다. 교섭을 주도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서 죽을 위기에 몰렸으나, 사이쇼와 마에다 도시이에, 요도도노 등의 만류로 목숨은 건졌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불충불의의 대죄를 전쟁에서 공을 세워서 갚으라는 히데요시의 엄명을 받고 조선으로 향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가신 사이노 시치다유(梯七太夫, 조선측 기록에 등장하는 요시라)를 조선의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김응서에게 보내어 가토군의 도해 정보를 보내주었다. 이에 대해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적군이 보내준 정보라 믿지 않아 공격하지 않았고, 조정에서 다시 공격 명령을 내렸을 때는 이미 가토군이 부산에 상륙한 뒤였기에 공격 명령을 다시 거부했다.[41] 그러자 조정은 이순신을 파면하고 대신 원균을 후임으로 앉혔다. 그러나 원균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출전하지 않았고, 도원수 권율이 원균에게 태형을 가해 반강제로 출전시켰다. 이후 거제도 인근의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은 대패하였다. 조선 수군을 궤멸시킨 뒤 고니시 유키나가는 5만 8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순천으로부터 남원성 공격에 가담했고, 남원성을 함락시킨 뒤 조선인들의 코와 귀를 베어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보냈으며 그 후 전주 전투에서 꺾이게 된다.
1598년 음력 8월 18일에 히데요시가 죽었다. 9월 말부터 10월 초에 걸쳐 고니시 유키나가는 순천에서 조명연합군을 상대로 농성을 벌였다. 전투에 앞서 명의 장군 유정의 강화 제안에 응해 고니시 유키나가는 성 밖으로 나왔지만, 이는 고니시 유키나가를 잡으려는 명측의 함정이었다. 간발의 차이로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를 알아채고 성안으로 돌아왔지만, 조명 연합군에 의해 고니시 유키나가의 성은 포위되었다. 그렇게 고니시 유키나가는 왜교성에 갇혔다. 히데요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철수를 결정, 명나라 수군을 지휘하던 진린에게 뇌물을 주어 퇴로를 확보해 주겠다는 확약을 받아냈지만, 조선의 수군 통제사 이순신은 진린의 이러한 방침에 강력하게 반대하고 퇴각하는 일본 수군에 대한 공격에 나섰고, 노량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시마즈 요시히로 등의 도움으로 고니시 유키나가는 가까스로 후퇴, 12월에 귀국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하들을 둘로 나눠, 걸어갈 수 있는 부하들만 데리고 도망갔으며 걸어가지 못할 정도로 부상이 심한 부하들은 그냥 왜교성에 놓고 갔다.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를 따라 종군했던 승려 덴케이(天荊일본어)는 전란 상황을 상세히 기록한 《서정일기》를 남겼고, 이는 임진왜란 연구의 사료로 손꼽힌다.
2. 5. 세키가하라 전투와 죽음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이시다 미쓰나리와의 친분으로 서군에 가담했다.[42] 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아이즈 정벌에 나섰을 때 참전하지 않고 잔류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으로 참전하여 다나카 요시마사, 쓰쓰이 사다쓰구 등과 격전을 벌였으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등의 배신으로 패배했다.[43]
이부키 산으로 도주했으나 붙잡혔다.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에 할복을 거부하고 10월 1일 교토 로쿠조 강변에서 이시다 미쓰나리, 안코쿠지 에케이와 함께 참수되었다.[29] 참수 당시, 정토종 승려가 머리 위에 경문을 올리는 것을 거부하고, 포르투갈 왕비에게서 받은 예수와 성모 마리아 이콘을 세 번 머리 위로 올린 뒤 참수되었다고 한다.[29] 구로다 나가마사에게 고해성사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사제에게 성사를 받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29]

그의 죽음은 바티칸의 교황 클레멘스 8세에게도 알려져 애도를 받았으며, 1607년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음악극이 만들어지기도 했다.[28] 고니시 가문 멸문 후, 그의 영지는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어갔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할복을 거부한 것이 기독교 신앙 때문이라는 것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인식하면서, 일본에서 대대적인 기독교 탄압이 실시되었다는 지적이 있다. 그의 옛 영지였던 아마쿠사 제도에서는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3. 가족 관계
구 분 | 내 용 |
---|---|
아버지 | 고니시 류사 |
어머니 | 와쿠사(세례명: 막달레나) |
정실 | 기쿠히메(세례명: 주스타) |
측실 | 다치노덴 (시마즈 다다키요의 부인, 세례명: 카타리나) |
아들 | 고니시 히데사다 |
고니시 효고노카미 (기쿠히메의 자녀) | |
고니시 효에몬 (다치노덴의 자녀) | |
고니시 우에몬 | |
아사야마 야자에몬 (막내, 시마바라의 난 당시 구로다 다다유키에게 불려감, 녹봉 1300석) | |
딸 | 소 요시토시의 처 다에 (세례명: 마리아) - 세키가하라 전투 후 이혼, 쓰시마섬에서 추방, 나가사키의 수도원에 숨어 지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사면, 1605년 사망. |
고니시 야자에몬의 처 (기쿠히메의 자녀, 세례명: 카타리나) | |
양녀 | 줄리아 오타아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데려온 고아 소녀) |
양자 | 겐로쿠 (아베 요시사다의 데다이, 오카야마 시모노초의 무명포 상인) |
손자 | 만쇼 고니시 (소 요시토시와 다에의 자녀, 에도 시대 마지막 일본인 사제) |
오가와 소슈 (고니시 우에몬의 자녀, 에도의 의사) | |
형제 | 고니시 조세이 (세례명: 벤토) |
고니시 슈덴노스케 (세례명: 페드로) | |
고니시 유키카게 (세례명: 조앙) | |
고니시 요시치로 (세례명: 루이스 혹은 지안) | |
여동생 | 이타미야 소우즈케의 처 (세례명: 루시아) |
일문 | 고니시 지우에몬 (고니시 유키나가의 삼촌) |
고니시 안토니오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촌) | |
고니시 야자에몬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 세례명: 레온) |
4. 평가와 논란
고니시 유키나가는 뛰어난 수군 지휘관이자 외교관으로 평가받는다. 오다 노부나가는 세토 내해에서 모리 해군으로부터 오다 영토를 방어한 그의 공로를 칭찬했다.[5] 도요토미 히데요시 휘하에서는 "해군 사령관"으로 활약하며 다카마쓰성 전투, 오타성 전투, 시코쿠 정벌, 규슈 정벌 등에서 공을 세웠다.[2] 명나라 장군 양원은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으며, 명나라 군대는 울산성 전투에서 가토 기요마사를 공격할 때 고니시의 지원을 경계했다.[5]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고니시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외세와 무역을 희생해서라도 기독교를 금지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하기도 했다.[11]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조선 침략의 선봉장이었다는 점에서 한국에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강화 협상 과정에서 심의경과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속인 행위는 기회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7] 또한, 김응서를 통해 조선 측에 군사 기밀을 누설하고 이순신에게 가토 기요마사를 공격하도록 요청한 것은 이중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가토 기요마사와의 관계는 복잡했다. 영토 분쟁, 종교적 차이, 임진왜란 당시 전략 및 강화 방침의 차이 등으로 대립했다.[30] 가토는 고니시를 "약방 주인의 아들"이라며 멸시했고, 고니시는 가토의 상륙 시기를 조선 측에 밀고하여 토벌하려 했다는 기록도 있다.[30]
세키가하라 전투 패배 이후, 고니시는 가토 기요마사 등에게 일방적으로 비난받은 측면이 있으며, 일본 역사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일본 대중문화에서는 이시다 미쓰나리와 비슷한 무능한 관료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이는 중국, 한국, 유럽의 역사 자료와는 상반된다. 평양성 전투 패배는 그의 군사적 무능력 때문이라기보다는, 당시 일본군이 성벽 도시 방어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5]
4. 1. 임진왜란 시기 조선인 포로 문제
고니시 유키나가는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조선인을 포로로 잡아 일본으로 압송했다.[41] 이들 포로 중에는 여성과 어린이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일부는 노예로 팔려나가거나 기독교 신자가 되기도 했다. 조선인 포로 문제는 임진왜란의 비극적인 측면 중 하나이며,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정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사례로 지적된다.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여러 대중 매체에서 다뤄졌다.
- 소설
- * 시라이시 이치로의 『해장 ~젊은 시절의 고니시 유키나가~』
- * 엔도 슈사쿠의 『철의 족쇄 고니시 유키나가 전』
- * 엔도 슈사쿠의 『숙적』[16] [17] [18]
- * 아사쿠라 카즈야의 『고니시 유키나가』
- * 에구치 타카유키의 『고니시 유키나가 후회하지 않는 삶』
- * 모리모토 시게루의 『고니시 유키나가』
- * 아라야마 토오루의 『고려비첩』
- 만화
- * 노다 타츠노리의 『수군의 장 ~고니시 유키나가 전~』
- 텔레비전 드라마
- * NHK 대하드라마
- ** 『황금의 날들』 (1978년, 연기: 오노데라 아키라)
- ** 『여자 태합기』 (1981년, 연기: 사쿠마 타카시)
- **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 (2000년, 연기: 스가오 타카유키)
- ** 『결정! 가문의 흥망성쇠』 (2023년, 연기: 이케우치 만사쿠)
- ** 『군사 칸베에』 (2014년, 연기: 오시나리 슈고)
- * 『세키가하라』 (1981년, TBS, 연기: 가와즈 유우스케)
- * 『바다의 사령관 고니시 유키나가 ~히데요시가 일본을 맡긴 남자~』 (2011년, TV쿠마모토 향토의 위인 시리즈, 연기: 가츠야마 신고)
5. 1. 한국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야욕을 감지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전쟁을 막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그는 사위인 소 요시토시 등과 함께 18,700명으로 구성된 조선 침공 선봉대 제1군의 지휘관으로 가장 먼저 조선에 상륙하였다.[39] 부산진성과 다대포성,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한양을 가장 먼저 점령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39]이시다 미쓰나리 등과 함께 강화 교섭에 힘썼으나, 조선 측은 이를 거부하거나 묵살했다.[39] 1593년 1월, 이여송이 이끄는 조선 지원군이 평양성을 공격해 함락시키자, 유키나가는 한양까지 퇴각했다. 이후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강화 교섭에서 유키나가는 명측 담당자 심유경과 짜고 양쪽을 속여 강화 교섭을 성립시켰다.[40] 그러나 강화 교섭은 결국 결렬되었고, 유키나가는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죽을 위기에 처했으나, 주변의 만류로 목숨을 건졌다.
히데요시는 유키나가에게 전쟁에서 공을 세워 죄를 갚으라고 명령했고, 유키나가는 다시 조선으로 향했다. 유키나가는 가신을 김응서에게 보내 가토 기요마사군의 도해 정보를 알려주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 정보를 믿지 않아 공격하지 않았고, 이후 원균의 지휘 아래 조선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했다. 유키나가는 5만 8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남원성 공격에 가담하여 함락시켰으며, 그 후 전주 전투에서 패배했다.
1598년 음력 8월 18일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 유키나가는 순천에서 조명연합군을 상대로 농성을 벌였다. 명나라 장군 유정의 강화 제안에 응했으나 함정이었고, 유키나가는 왜교성에 갇혔다. 히데요시 사망 소식을 듣고 철수를 결정, 명나라 수군 지휘관 진린에게 뇌물을 주어 퇴로를 확보했지만, 이순신은 이에 반대하며 퇴각하는 일본 수군을 공격했다. 노량 해전에서 시마즈 요시히로 등의 도움으로 유키나가는 가까스로 후퇴하여 12월에 귀국했다.
임진왜란 당시 유키나가의 군대를 따라 종군했던 승려 덴케이天荊일본어는 전란 상황을 상세히 기록한 《서정일기》를 남겼으며, 이는 임진왜란 연구의 중요한 사료로 꼽힌다.
한국에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매체에 등장하는 경우는 대부분 임진왜란을 다룰 때이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2004~2005, 배우 정승호), 징비록(2015, 배우 이광기), 임진왜란 1592(2016, 배우 박동하) 등에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장수로 등장한다. 소설 7년 전쟁(김성한, 산천재)에서는 히데요시의 침략을 막으려 했던 비극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5. 2. 일본
엔도 슈사쿠의 소설 《숙적》에서는 신앙과 세속적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로 묘사된다.[16] [17] [18] 엔도 슈사쿠는 고니시 유키나가를 세속적인 삶을 버리지 못하고 신앙인으로서 깨끗하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한 열등감을 가진 "약한 남자"로 묘사했지만, 땅을 기어서라도 자신의 십자가를 버리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견뎌낸 인물로도 묘사했다.[19]2014년 NHK 대하드라마 군사 칸베에에서는 오시나리 슈고가 고니시 유키나가를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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