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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니더로트링겐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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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토는 987년 아버지 샤를이 프랑스 왕위 쟁탈전에서 위그 카페와 싸울 때 하로렌 공작령을 맡았다. 991년 샤를이 패배하고 사망한 후, 1002년 신성 로마 황제 오토 3세의 유해를 아헨으로 운반하는 데 참여했다. 장브루의 시게베르트는 1005년에 사망했다고 기록했지만, 실제로는 1013/1014년경까지 생존했으며, 고트프리트 2세가 하로렌 공작위를 받았다. 오토는 카롤루스 대제의 셋째 아들 루트비히 1세의 마지막 남계 자손 중 한 명이었으며, 1023년경 동생 루이의 사망으로 카롤링거 왕조의 적통 혈통은 단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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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니더로트링겐 공작)
기본 정보
칭호하 로트링겐 공작
재임 기간993년 - 1012년
선임자샤를, 하 로렌 공작
후임자고드프루아 2세, 하 로렌 공작
가문카롤링거 왕조
아버지샤를, 하 로렌 공작
어머니아델라이데 드 트루아
오톤과 그의 아내 (17세기 그림)
오톤과 그의 아내 (17세기 그림)

2. 생애

아버지 샤를로부터 987년 하로렌 공작령을 위임받았으나, 아버지는 프랑스 왕위 계승 분쟁에서 패배 후 991년 사망하였다. 1002년에는 사망한 신성 로마 황제 오토 3세의 유해를 이탈리아에서 아헨으로 운반하는 행렬에 참여하였다. 사망 연대는 1005년이라는 기록도 있으나 1013년 혹은 1014년경으로 추정되며, 사후 공작위는 고트프리트 2세에게 넘어갔다. 오토는 카롤루스 대제의 아들 루트비히 1세의 주요 남계 후손 중 마지막 인물 중 하나로, 그의 사후 동생 루이마저 사망하면서 카롤링거 왕조의 적통 남계는 베르망두아 가문을 제외하고 사실상 단절되었다.

2. 1. 초기 생애

아버지 샤를은 987년 프랑스 왕위를 놓고 위그 카페와 다툴 때, 아들인 오톤에게 하로렌 공작령의 통치를 맡겼다. 그러나 샤를은 991년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이후 오를레앙에 갇혀 사망했다.

2. 2. 하로렌 공작

아버지 샤를은 987년 프랑스 왕위 쟁탈전에서 위그 카페와 다툴 때 아들 오톤에게 하로렌 공작령을 맡겼다. 그러나 샤를은 991년 전투에서 패배한 뒤 오를레앙에 감금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이후 오톤이 하로렌 공작위를 실질적으로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1002년 신성 로마 황제 오토 3세가 사망했을 때, 오톤은 황제의 유해를 이탈리아에서 아헨으로 운반하는 행렬에 참여했다.

장브루의 시게베르트는 오톤이 1005년에 사망했다고 기록했지만, 실제로는 1013년 또는 1014년경까지 생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오톤이 사망한 후, 베르됭 백작 고트프리트 2세가 하로렌 공작위를 이어받았다.

오톤은 카롤루스 대제의 셋째 아들인 루트비히 1세 경건왕의 마지막 남계 후손 중 한 명이었다. 그의 동생 루이가 1023년경 사망하면서, 카롤루스 대제의 장남 피핀의 서자 베른하르트의 후손인 베르망두아 가문을 제외하고는 카롤링거 왕조의 적통 남자 혈통이 사실상 단절되었다.

2. 3. 카롤링거 왕조의 후손

오톤은 카롤루스 대제의 셋째 아들인 루트비히 1세의 마지막 남계 자손 중 한 명이었다. 그가 1013년 또는 1014년경 사망하고, 이후 1023년경 그의 동생 루이가 사망하면서 카롤링거 왕조의 적통 혈통은 사실상 단절되었다. 다만, 카롤루스 대제의 장남 피핀의 서자 베른하르트를 조상으로 하는 베르망두아 가문을 통해서만 카롤링거 왕조의 혈통이 이어지게 되었다.

참조

[1] 서적 Christian Settipani
[2] 간행물 Il y a mille ans, les Carolingiens : fin d'une dynastie, début d'un mythe 1991-1992
[3] 서적 La symbolique royale française, ve – xviiie siècle P.S.R. éditions 2004
[4]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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