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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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토 3세는 980년에 태어나 1002년에 사망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다. 오토 2세와 테오파노 황후의 아들로, 3세의 나이에 독일 왕위에 올랐으며, 어머니 테오파노와 할머니 아델하이트의 섭정을 받았다. 14세에 친정을 시작하여 로마 제국 부흥을 꿈꾸며 로마를 제국의 중심지로 삼으려 했다. 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와의 관계를 통해 동유럽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했으며, 그니에즈노 회의를 통해 폴란드와의 유대를 강화했다. 말년에 로마에서 반란을 겪고 라벤나로 피신하던 중 열병으로 사망했으며, 후계자 없이 사망하여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 그는 당대 최고의 학자들에게 교육받아 지적 능력이 뛰어났으며, 고대 로마와 비잔틴 문화에 매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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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3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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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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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로마인의 황제 |
왕조 | 오토 왕조 |
아버지 | 오토 2세 |
어머니 | 테오파누 |
출생일 | 980년 6월/7월 |
출생지 | 독일 왕국, 케셀 인근 클레버 라이히스발트 |
사망일 | 1002년 1월 23일 (21세) |
사망지 | 교황령, 팔레리아 |
매장지 | 아헨 대성당 |
통치 | |
황제 즉위 | 996년 5월 21일 |
이탈리아 왕 즉위 | 996년 4월 12일 |
독일 왕 즉위 | 983년 12월 25일 |
대관식 | 983년 |
선임 황제 | 오토 2세 |
후임 황제 | 하인리히 2세 |
선임 이탈리아 왕 | 오토 2세 |
후임 이탈리아 왕 | 이브레아의 아르두이노 |
선임 독일 왕 | 오토 2세 |
후임 독일 왕 | 하인리히 2세 |
섭정 | 하인리히 2세 (983년–984년) 테오파노 (984년–991년) 아델라이데 (991년–994년) |
2. 어린 시절
오토 3세는 980년 6월 또는 7월에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아헨과 네이메헌 사이에서 태어났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2세와 황후 테오파노 사이의 독자로, 부부의 네 자녀 중 막내였다.
오토 2세가 983년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오토 3세는 불과 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왕으로 선출된 오토 3세는 마인츠 대주교 빌리기스와 라벤나 대주교 요한 10세에 의해 983년 크리스마스에 왕으로 즉위했다.[81] 어린 왕의 즉위로 제국은 혼란에 빠졌고, 어머니 테오파노가 아들을 대신해 섭정을 맡았다.[83]
983년 오순절에 베로나에서 열린 궁중의회에서 오토 2세는 세 살인 오토 3세를 독일 및 이탈리아 왕으로 선출하여 법정추정상속인으로 삼았다. 이는 독일 지배자가 이탈리아에서 선출된 첫 사례였다. 오토 3세는 독일 왕의 전통적인 즉위식 장소인 아헨에서 즉위하기 위해 알프스 산맥을 건넜다. 오토 2세는 이탈리아에 머물다 983년 12월 7일에 급사하여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 묻혔다.
오토 3세는 아버지가 사망한 지 3주 후인 983년 크리스마스 때 마인츠 대주교 빌리기스와 라벤나 대주교 요한 10세에 의해 독일 왕으로 즉위하였다.[81] 오토 2세의 사망 소식은 아들의 즉위 직후 독일에 전해졌다.[82] 미성년자가 왕위에 오르면서 제국은 혼란에 빠졌고, 오토 3세의 어머니 테오파노가 어린 아들을 대신해 섭정을 맡았다.[83]
983년 아버지 오토 2세가 급사하여 3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한 직후, 아버지의 정적이던 사촌 하인리히 2세가 왕위를 노렸으나, 어머니 테오파노가 섭정으로서 난국을 헤쳐나가고 왕을 보좌했다.[65] 991년 테오파노가 사망한 후에는 할머니 아델하이트가 마인츠 대주교 빌리기스와 함께 섭정을 맡았다.[66]
3. 유년 시절
오토 3세의 친척인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는 섭정권을 주장하며 왕위를 노렸다.[84] 쾰른 대주교 바린은 별다른 반대 없이 하인리히 2세에게 섭정권을 부여하였으나, 테오파노는 시어머니인 이탈리아의 아델라이드 황태후, 오토 3세의 고모인 크베들린부르크의 수녀원장 마틸다와 함께 이에 반대했다. 그러나 아델라이드와 마틸다는 모두 이탈리아에 있었기에 반대 의사를 적극적으로 개진할 수 없었다.
하인리히 2세는 로타르 왕과 동맹을 맺고 로타링기아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독일 왕위를 찬탈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85] 그는 마그데부르크에서 독일 왕위에 대한 주장을 펼쳤지만, 폴란드 공작 미에슈코 1세와 보헤미아 공작 볼레슬라프 2세 등의 제한적인 지지만을 얻었다.[87] 작센 공작 베른하르트 1세를 비롯한 반대 세력은 오토 3세에 대한 충성을 유지했다. 결국 하인리히 2세는 985년 6월 29일 오토 3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섭정권을 포기하였으며, 바이에른 공작으로 복위되었다.[90][91]
3. 1. 테오파노 섭정
오토 2세가 983년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오토 3세는 불과 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어머니 테오파노가 섭정을 맡아, 991년 사망할 때까지 제국을 다스렸다.[3] 테오파노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왕으로 선출된 아들 오토 3세를 대신하여 섭정하였다.
테오파노는 남편 오토 2세가 마그데부르크 대교구에 병합시켰던 메르제부르크 교구를 복원하기 위해 노력했다.[12] 또한 보헤미아를 독일의 영향력 아래 두는 데 성공했는데, 보헤미아 공작 볼레스와프 2세는 오토 3세의 권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12]
간데르스하임 수도원의 관할권을 두고 마인츠 대주교와 힐데스하임 주교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을 때, 테오파노는 왕실의 권위를 통해 중재에 나서기도 했다. 이 분쟁은 오토 3세의 누이인 소피아가 수녀가 된 후 시작되었는데, 결국 두 주교가 모두 소피아를 서임하고, 나머지 수녀들의 서임은 힐데스하임 주교에게만 맡기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991년 테오파노가 네이메헌에서 31세의 나이로 사망하자,[13] 오토 3세의 할머니인 이탈리아의 아델라이드가 마인츠 대주교 빌리기스와 함께 섭정을 이어받았다.[13]
3. 2. 단독 통치
994년 9월 졸링겐에서 열린 국회에서 오토 3세는 섭정 없이 왕국을 완전히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93] 오토 3세는 단독 통치자로서 첫 번째 행동으로 쾰른의 헤리베르트를 이탈리아 재상(chancellor)으로 임명하였는데,:14 헤리베르트는 1002년 오토가 사망할 때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다.[14] 오토 3세는 재위 초기에 할아버지 오토 1세의 발자취를 따랐으며,:14 신임 교황 그레고리우스 5세를 임명하고 로마를 떠났다.[14] 그레고리우스 5세는 축출당했고, 오토 3세는 998년에 로마로 돌아와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14]
995년 여름, 오토는 아버지 오토 2세가 비잔티움의 테오파누와 결혼하여 왕위 계승권을 공고히 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자신과 비잔티움 공주와의 결혼을 주선하기 위해 대표로 피아첸차의 대주교 존 필라가토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했다.[14] 한동안 논의는 조에 포르피로게니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14]
3. 3. 슬라브족과의 전쟁
983년, 스틸로 전투에서 오토 2세가 패배하자 서슬라브족계 폴라비아 부족들의 루티치 연맹이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슬라브족 대반란). 그 결과 제국은 엘베강 동쪽의 북방변경과 빌룽 변경 등 영토를 포기해야만 했다.[95] 기독교화 진전이 멈추자, 슬라브인들은 제국과 평화 상태에 돌입했고, 테오파노는 하인리히 2세의 반란이 진압되자, 985년을 시작으로 상실한 동방 영토를 되찾기 위한 다수의 군사 활동을 시작하였다. 오토 3세는 겨우 6살에 불과했을 당시 몸소 이 군사 활동에 참전했었다. 986년 원정 시, 오토 3세는 폴란드 공작 미에슈코 1세의 충성의 맹세를 받았는데, 그는 제국군에게 군사적 도움을 주었고 오토 3세에게는 낙타 한 마리를 선물로 주었다.[96] 루티치 연맹이 987년에 항복은 하였으나, 이들은 어린 왕의 이목을 계속해서 끌었다.
991년 9월, 슬라브족 약탈자들이 브란덴부르크를 점령하였다. 992년에 바이킹 약탈자들의 발발과 더불어 이 침공은 오토 3세로 하여금 침입자들에 맞서 군대를 이끌게 하였으나, 이 군사 활동 중에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97] 다음 해에, 독일은 기근과 역병의 시기를 마주하였다. 994년과 995년에, 오토 3세는 북방의 슬라브족과 바이킹을 상대로 별 소득 없는 군사 원정을 벌였지만,[98] 993년에는 브란덴부르크를 탈환하는 데는 성공했고, 995년에는 오보트리티 슬라브족들을 굴복시켜냈다.[99]
995년 가을, 오토 3세가 성인이 되자, 그는 다시 루티키 연맹과 전쟁에 돌입하였고, 이때는 폴란드의 용감공 볼레스와프 1세의 도움을 받았다.[100] 997년에 그는 엘베강의 아르네부르크에 대한 루티치 연맹의 공격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점령된 이 도시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101]
4. 신성 로마 황제
오토 3세는 로마 제국을 부흥시켜 신정 정치를 실현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67] 그는 조부와 부친처럼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했는데,[65] 이는 로마 귀족 크레스켄티우스 2세의 반란으로 로마에서 추방당한 교황 요한 15세가 구원을 요청했기 때문이었다.[68]
996년 4월, 요한 15세가 열병으로 사망하자, 오토 3세는 파비아에서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하여 현지 귀족들을 제압하고, 자신의 친척 브루노를 그레고리우스 5세로 선출했다(996년 5월 3일).[69][70] 996년 5월 21일, 오토 3세는 그레고리우스 5세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관을 받고 즉위했다.[69][70]
오토 3세는 자신의 교사인 오리악의 제르베르[71]와 프라하 주교 아달베르트를 보좌관으로 삼아, 프랑크와 그리스의 두 로마 제국, 그리고 교황의 권위를 통합한 보편 제국 건설을 구상했다. 이는 어머니 테오파누로부터 로마 제국의 이상을 전수받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으며, 동로마 제국의 궁정 의례 일부를 도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토 3세가 로마를 떠나자 크레스켄티우스 2세는 동로마 황제 바실리우스 2세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켜 996년 9월에 그레고리우스 5세를 추방하고, 이듬해 997년 5월에 대립 교황 요한 16세를 세웠다. 그러나 오토 3세는 998년 2월에 로마에 개선하여 요한 16세를 처벌하고 크레스켄티우스 2세를 처형했다.[70]
이후 오토 3세는 팔라티노 언덕에 고대 로마 양식의 궁전을 건설하고,[72] 고대 로마의 전통을 계승한 그리스 궁정 양식의 축제를 거행했다. 그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사도들의 종", "세계의 황제"라고 칭했다. 998년에는 제르베르에게 라벤나 대주교의 지위를 부여했다.[71] 999년에는 그레고리우스 5세가 사망하자 제르베르를 실베스테르 2세로 교황 자리에 앉혔다.[73]
4. 1. 첫 이탈리아 여정
994년에 독일 왕으로 즉위한 오토 3세는 슬라브족의 반란을 진압한 뒤, 이탈리아 내 권력 장악을 시도했다.[104] 그는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할 목적과 함께, 로마에서 도피한 교황 요한 15세를 돕고자 했다. 996년 3월, 오토 3세는 라티스보나에서 이탈리아로 출발했다. 베로나에서는 베네치아 도제 피에트로 2세 오르세올로의 아들 오토 오르세올로의 후원자가 되었고, 그를 차기 베네치아 도제로 후원하기로 약속하며 신성 로마 제국과 베네치아 공화국 간의 좋은 관계를 이끌었다.996년 부활절에 파비아에 도착한 오토 3세는 이탈리아의 왕으로 선포되고 랑고바르드의 철관을 썼다.[105] 그러나 로마에 도착하기 전 교황 요한 15세는 열병으로 사망했다.[106] 오토 3세가 파비아에 있는 동안, 로마 진격을 두려워한 크레스켄티우스 2세는 오토 3세와 화해하고 그의 지명자를 교황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107]
오토 3세는 라벤나에서 자신의 친척이자 궁중 사제인 브루노를 교황 후보로 지명하여 로마로 보냈다. 996년 5월 초, 브루노는 최초의 독일 국적 교황인 교황 그레고리오 5세로 대관식을 치렀다.[108] 크레스켄티우스 2세는 보복이 두려워 가문의 요새인 하드리아누스 영묘에 틀어박혔다.[109]
996년 5월 21일, 신임 교황은 오토 3세에게 성 베드로 성당에서 신성 로마 황제 대관식을 치러주었다. 이후 황제와 교황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열린 시노드를 주최하여, 요한 15세에게 반란을 일으킨 로마 귀족들을 소환했다. 크레스켄티우스 2세를 포함한 다수의 반란 귀족들은 추방형을 선고받았으나, 교황 그레고리오 5세의 요청으로 오토 3세는 이들에게 사면을 선포했다. 크레스켄티우스 2세는 파트리키우스 칭호를 박탈당했지만, 로마에서 여생을 보내는 것이 허용되었다.[110]
시노드 이후, 오토 3세는 렝스 대주교 오리악의 제르베르를 자신의 교사로 임명했다.[111] 오리악의 제르베르와 프라하의 아달베르트 주교의 조언을 받아,[112] 오토 3세는 고대 로마 제국의 영광과 힘을 복원하고, 자신을 신권 정치 국가의 지도자로 두는 꿈을 꾸었다.[113][114] 그는 비잔티움 제국 궁정 관습을 도입하고,[115] 이탈리아 종교 지역 사회들의 지원을 통해 이탈리아 내 권력을 강화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5세 선출로, 오토 3세는 조부 오토 1세보다 더 많은 교회 지배력을 행사했다. 그는 오토 1세의 성좌 특권에 대한 황제 지원을 철회하고,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을 위조된 것이라 선언하며 거부했다.[116] 이러한 행보는 교황 지목 권한을 가진 로마 귀족과 교회에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117]
대관식 후, 오토 3세는 996년 12월 독일로 돌아가 997년 4월까지 니더라인 (특히 아헨)에 머물렀다. 997년 여름, 그는 작센 동쪽 국경 안정을 위해 엘베강 슬라브족을 상대로 군사 활동을 벌였다.
4. 2. 두 번째 이탈리아 여정
오토 3세가 독일로 돌아간 사이, 로마의 상황은 불안정했다. 996년 9월, 오토 3세에게 사면받은 지 몇 달 만에 크레스켄티우스 2세는 테오파노 황후의 옛 조언자이자 피아첸차 대주교인 요안니스 필라가토스와 함께 교황 그레고리오 5세를 폐위시킬 계획을 꾸몄다.[118] 997년, 비잔티움 제국 황제 바실리오스 2세의 지원을 받아, 크레스켄티우스 2세는 그레고리오 5세에 대한 반란을 주도하여 그를 폐위시키고 요안니스 필라가토스를 대립 교황인 요한 16세로 세웠다.[118] 그레고리오 5세는 북부 이탈리아의 파비아로 달아나 시노드를 열어 요한 16세를 파문하였다.997년 12월, 오토 3세는 이탈리아로 두 번째 원정을 시작했다. 오토 3세는 누이 소피아와 함께 이탈리아로 왔고, 이모인 크베들린부르크 수도원장 마틸다를 독일 섭정으로 임명했다. 998년 2월, 오토 3세는 로마 귀족들이 강화 조약을 받아들이면서 유혈 사태 없이 로마를 탈환했고, 그레고리오 5세는 교황으로 복위되었다.[119] 요한 16세는 도망쳤지만, 황제의 군대에 붙잡혀 코와 귀가 잘리고 혀가 잘렸으며, 손가락이 부러지고 눈이 멀게 된 채 오토 3세와 그레고리오 5세 앞에 끌려왔다. 로사노의 성 닐로의 중재로 오토 3세는 요한 16세의 목숨을 살려주었고, 그를 독일의 수도원으로 보냈다. 그는 그곳에서 1001년에 사망했다.
크레스켄티우스 2세는 크레셴치 가문의 요새인 하드리아누스 영묘로 달아났으나, 오토 3세의 군대에게 포위당했다. 4월 말, 요새가 함락되자 크레스켄티우스 2세는 붙잡혀 참수당했다. 그의 시신은 몬테 마리오에 공개적으로 전시되었다.

4. 3. 로마 집권 시대
오토 3세는 로마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로마를 제국의 행정 중심지로 삼고, 고대 로마와 비잔티움 제국의 궁정 의례를 부활시키려 했다.[113] [114] [115] 팔라티노 언덕에 황궁을 건설하고, 로마 원로원을 복원하려 했다. 그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사도들의 종', '세계의 황제' 등으로 칭하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서의 권위를 강조했다.[71]999년 2월 18일 교황 그레고리오 5세가 사망하자, 오토 3세는 자신의 스승인 오리악의 제르베르를 교황 실베스테르 2세로 임명하였다.[73] 오토 3세는 자신을 최초의 기독교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에, 제르베르를 실베스테르 1세에 비유하여 교황의 이름을 짓게 했다. 또한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장을 "엉터리이고 허구적인 것"으로 취소하고, 다시 소유지를 기증했다.[74]
5. 동유럽과의 관계
서슬라브족계 폴라비아 부족들의 루티치 연맹은 오토 3세의 재위 초에는 잠잠했으며, 하인리히 2세의 실패한 반란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983년, 스틸로 전투에서 오토 2세가 패하자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권에 맞서 슬라브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제국은 북방변경과 빌룽 변경 등 엘베강 동쪽 영토를 포기해야 했다.[95] 기독교화 진전이 멈추면서 슬라브인들은 제국과 평화 상태에 들어갔다. 테오파노는 하인리히 2세의 반란이 진압된 후, 985년부터 상실한 동방 영토를 되찾기 위한 군사 활동을 시작했다. 오토 3세는 6살의 나이로 이 군사 활동에 참전했다. 986년 원정 때, 오토 3세는 폴란드 공작 미에슈코 1세에게 충성 맹세를 받았는데, 미에슈코 1세는 제국군에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고 오토 3세에게 낙타를 선물했다.[96] 987년 루티치 연맹이 항복했지만, 이들은 계속해서 어린 왕의 이목을 끌었다.
991년 9월, 슬라브족 약탈자들이 브란덴부르크를 점령했다. 992년 바이킹 약탈자들의 발발과 더불어 이 침공은 오토 3세가 군대를 이끌게 했으나, 큰 패배를 당했다.[97] 이듬해 독일은 기근과 역병을 겪었다. 994년과 995년에 오토 3세는 북방 슬라브족과 바이킹에 대한 군사 원정을 벌였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98] 그러나 993년에는 브란덴부르크 탈환에 성공했고, 995년에는 오보트리티 슬라브족을 굴복시켰다.[99]
995년 가을, 오토 3세가 성인이 되자 다시 루티키 연맹과 전쟁을 벌였고, 이때 폴란드의 용감공 볼레스와프 1세의 도움을 받았다.[100] 997년에는 엘베강의 아르네부르크에 대한 루티치 연맹의 공격으로 일시 점령된 도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101]
5. 1. 폴란드와의 관계
960년경, 미에슈코 1세 재위 기간 폴란드계 피아스트 왕조는 오데르강 너머로 폴란드 공국을 넓혔다. 이는 폴란인들을 독일의 세력권 및, 폴라비아 슬라브족을 정복하기를 바라던 오토 1세의 독일 왕국과의 분쟁으로 이끌었다. 오토 1세는 게로를 보내 미에슈코 1세를 963년에 패배시키고 오토 1세를 주군으로 인정하게끔 하였다.[125][45] 신성 로마 황제에게 충성을 하는 대가로, 오토 1세는 미에슈코 1세에게 '아미쿠스 임페라토리스'(amicus imperatoris, 황제의 친우)라는 칭호를 내리고 '둑스 폴로니아이'(폴란드 공작)라는 지위를 승인해주었다. 미에슈코 1세는 독립적인 폴란드 국가의 창시자이자 폴란드의 첫 번째 통치자로 인정받고 있으며, 그의 아들 볼레스와프 1세는 폴란드의 첫 번째 국왕이 되었다.미에슈코 1세는 오토 1세 생전에 그의 강력한 동맹으로 남아 있었다. 그는 오다와 혼인, 그리고 볼레스와프 1세와 리크다크의 딸을 혼인시키며 신성 로마 제국과의 동맹을 강화하였다. 이교도이던 시절 미에슈코 1세는 965년에 도브라바와 혼인했고 966년에 기독교로 개종하여, 폴란드를 보헤미아 공국 및 신성 로마 제국과 더욱 가깝게 만들었다. 973년에 오토 1세가 죽자, 미에슈코 1세는 하인리히의 실패한 반란 당시에 오토 2세에 맞서 하인리히 2세의 편에 섰다. 반란이 진압되자, 미에슈코 1세는 오토 2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126][46] 오토 2세가 983년에 갑작스럽게 죽고 겨우 세 살이던 오토 3세가 즉위하자, 미에슈코 1세는 독일 왕위를 노리는 하인리히 2세를 다시 한번 지원하였다.[127] [47] 하인리히의 반란이 실패하자, 미에슈코 1세는 오토 3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미에슈코 1세의 아들 볼레스와프 1세가 992년에 공작 자리를 이어받았고, 폴란드는 제국과의 동맹을 이어나갔다. 폴란드 군대는 980년대와 990년대 기간 슬라브 대봉기를 진압하는 제국의 군사 작전에 동참했다.


5. 2. 보헤미아와의 관계
독일과 보헤미아 공국의 중요한 접촉은 929년에 시작되었다. 독일 왕 하인리히 1세는 보헤미아 공작 바츨라프 1세에게 정기적인 공물을 바치도록 보헤미아를 침공했다.[45] 바츨라프 1세가 935년에 암살되자, 그의 동생 볼레슬라프 1세가 공작 자리를 이어받았고, 독일에 매년 공물을 바치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 행위는 하인리히 1세의 아들이자 후임자인 오토 1세가 보헤미아를 침공하게 하였다. 초반 공격 이후, 양국 간의 분쟁은 950년까지 국경 약탈전으로 이어지다가, 오토 1세와 볼레슬라프 1세가 평화 조약을 맺으면서 끝났다. 볼레슬라프 1세는 공물 납부를 재개하고 오토 1세를 자신의 군주로 인정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보헤미아는 신성 로마 제국의 구성 국가로 편입되었다.[45]보헤미아는 신성 로마 제국의 동쪽 국경에서 벌어진 여러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볼레슬라프 1세는 953년 오토 1세가 엘베 강 하류에서 일어난 슬라브족 반란을 진압하는 것을 도왔고, 955년에는 레히펠트 전투에서 헝가리 군대를 격퇴하기 위해 제국군에 다시 합류했다. 973년, 오토 1세는 보헤미아 지역의 기독교화를 위해 마인츠 대주교구 산하의 프라하 주교구를 설치했다. 보헤미아와 폴란드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965년 볼레슬라프 1세의 딸 도브라바는 이교도였던 폴란드의 미에슈코 1세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폴란드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기여했다. 972년 볼레슬라프 1세가 사망하자, 그의 장남 볼레슬라프 2세가 공작위를 계승했다.[45]
977년, 하인리히의 반란 실패 당시 오토 2세에 맞서 하인리히 2세 편에 섰던 볼레슬라프 2세는 반란이 진압된 후 오토 2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128] 983년 오토 2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불과 세 살이었던 오토 3세가 왕위를 계승하자, 볼레슬라프 2세는 다시 한번 독일 왕위를 노리던 하인리히 2세를 지지했다.[129] 하인리히의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자, 볼레슬라프 2세는 오토 3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45]
5. 3. 헝가리와의 관계
955년 레히펠트 전투에서 오토 1세가 헝가리인들에게 승리하면서 수십 년간 지속된 마자르인의 유럽 침공은 종식되었다.[130] 헝가리 대공 퍼이스는 이 패배 이후 퇴위하였고, 서방으로부터 고립 정책을 채택한 턱쇼니가 그 뒤를 이어받았다. 그의 뒤를 이은 아들 게저는 973년에 오토 1세에게 사절단을 보내는 등 관계 개선을 시도하였다. 게자는 972년에 세례를 받았으며, 그의 재위 기간 헝가리인들 사이에서 기독교가 전파되었다.게자는 도나우강과 하람강 서쪽 영역으로 그의 지배력을 확장시켰으나, 카르파티아분지 상당 지역은 여전히 토착 부족 지도자의 통치 하에 남아 있었다. 997년에 게저가 사망하고 이슈트반 1세 (본래 이름 버이크)가 그 뒤를 이었다. 이슈트반은 프라하의 아달베르트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고, 하인리히 2세의 딸이자 오토 3세의 먼 친척인 기젤러와 혼인하였다. 이슈트반은 헝가리의 부계 우선 계승 전통에 따라 게저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는 친척 코파니의 반란에 직면해야 했다. 이슈트반은 서방의 전술 및 소수의 슈바벤 기사들을 사용하여 코파니를 제압하였다.
오토 3세는 1000년에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 교황 실베스테르 2세에게 왕관을 받아왔다. 오토 3세의 승인으로, 이슈트반은 1000년 성탄절에 초대 기독교도 헝가리 왕으로 즉위하였다.[130]
5. 4. 그니에즈노 회의
996년, 폴란드의 공작 볼레스와프 1세는 프라하 주교 아달베르트를 프루센족을 기독교화하기 위해 파견했다. 그러나 아달베르트는 997년에 선교 중 프루센족에게 순교당하고 말았다.[131] 볼레스와프 1세는 프루센족에게 그의 시신을 돌려받는 대가로 그 무게와 동등한 금을 보냈고, 그의 시신을 그니에즈노에 있는 대성당에 안치했다. 이곳은 폴란드의 종교 중심지가 되었다. 오토 3세와 볼레스와프 1세는 아달베르트를 시성시키기 위해 함께 활동하였고, 결국 그는 성인이 된 최초의 슬라브계 주교가 되었다.[132] 999년 12월, 오토 3세는 아달베르트의 무덤에 기도를 드리기 위해 로마에서 폴란드의 그니에즈노로 순례를 떠났다.[132]오토 3세의 순례는 황제가 동유럽 내 기독교의 영향력을 늘리고 폴란드와 헝가리를 '페데라티'(federati, 동맹)라 부르며 이들과 유대를 강화하게 해주었다.[133] 그니에즈노 순례 중에, 그는 마워미체 인근 보브르강 쪽 폴란드 국경에서 볼레스와프 1세에게 환대를 받았다. 1000년 3월 7일과 15일 사이에, 오토 3세는 볼레스와프 1세에게 '프라테르 에트 쿠페라토르 임페리'(frater et cooperator Imperii, 제국의 형제이자 협력자)와 '포풀리 로마니 아미쿠스 에트 소키우스'(populi Romani amicus et socius, 로마의 형제이자 동맹) 칭호를 수여했다.[133] 오토 3세는 볼레스와프에게 성창 (제국보기의 일부)의 복제품을 선물하였고 볼레스와프는 답례로 황제에게 성 아달베르트의 팔뼈를 주었다.


오토 3세는 폴란드 방문 당시, 그니에즈노를 대교구로 승격시키고 성 아달베르트의 형제 라짐 가우덴티를 그니에즈노 첫 대주교로 임명하였다.[132] 또한 그니에즈노 대교구 아래에 다음과 같은 새로운 하위 교구를 설치하였다.[132]
- 크라쿠프 교구 (포포 주교에게 할당됨)
- 브로츠와프 교구 (얀 주교에게 할당됨)
- 포메라니아의 코워브제크 교구 (라인베른 주교에게 할당됨)
볼레스와프 1세는 이후 오토 3세가 독일로 돌아가는 길에 동행하였다. 이들은 아헨 대성당에 있는 샤를마뉴의 무덤을 함께 방문했다. 또한 볼레스와프의 아들 미에슈코 2세와 오토의 조카 로타링기아의 리헤자 간의 약혼을 주선했다.
6. 말년
996년, 폴란드 공작 볼레스와프 1세는 프라하 주교 아달베르트를 프루센 지역에 파견하여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하였으나, 997년 아달베르트는 순교하였다.[131] 볼레스와프 1세는 아달베르트의 시신 무게와 동일한 금을 주고 시신을 돌려받아 그니에즈노 대성당에 안치했다. 오토 3세와 볼레스와프 1세는 아달베르트를 시성하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아달베르트는 최초의 슬라브계 성인 주교가 되었다.[132] 999년 12월, 오토 3세는 아달베르트의 무덤에 참배하기 위해 로마에서 폴란드의 그니에즈노로 순례를 떠났다.[132]
오토 3세의 순례는 동유럽 내 기독교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폴란드, 헝가리와의 유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133] 오토 3세는 그니에즈노 순례 중 마워미체 인근 보브르강 쪽 폴란드 국경에서 볼레스와프 1세를 만났다. 1000년 3월 7일과 15일 사이에 오토 3세는 볼레스와프 1세에게 '제국의 형제이자 협력자'(frater et cooperator Imperii)와 '로마의 형제이자 동맹'(populi Romani amicus et socius)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133] 오토 3세는 볼레스와프에게 성창 (제국보기의 일부)의 복제품을 선물했고, 볼레스와프는 답례로 성 아달베르트의 팔뼈를 선물했다.
오토 3세는 폴란드 방문 당시, 그니에즈노를 대교구로 승격시키고 성 아달베르트의 형제 라짐 가우덴티를 초대 대주교로 임명했다.[132] 또한 그니에즈노 대교구 산하에 크라쿠프 교구(포포 주교), 브로츠와프 교구(얀 주교), 포메라니아의 코워브제크 교구(라인베른 주교)를 설치했다.[132]
이후 볼레스와프 1세는 오토 3세가 독일로 돌아가는 길에 동행했다. 이들은 아헨 대성당에 있는 샤를마뉴의 무덤을 함께 방문했으며, 볼레스와프의 아들 미에슈코 2세와 오토의 조카 로타링기아의 리헤자의 약혼을 주선했다.
6. 1. 로마 복귀
1001년, 이탈리아 도시 티부르 사람들이 황제의 권위에 반대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오토 3세는 티부르를 포위하고 손쉽게 반란을 진압하였으며, 거주민들의 목숨은 살려주었다. 이 행위는 티부르를 경쟁 도시이자 파괴되기를 바라던 로마 사람들을 분노케 하였다. 교황령에 대한 정책 변화로, 오토 3세는 교황 실베스테르 2세에게 로마시에 대한 행정권을 부여했으나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권 하에 있었다. 이전에, 오토 3세는 '콘스탄티누스 기증'과 '오토 헌장' 등을 부정하며 교황의 세속 지배자로서 권한들을 박탈한 바 있다.[54]오토가 티부르에서 행한 행동 이후 몇 주 만에, 투스쿨룸 백작 그레고리우스 1세의 지휘 아래 로마 시민들이 황제에게 반기를 들었다. 반란군 시민들은 팔라티노 언덕에 있는 황궁에 있는 황제를 포위 공격하여 도시에서 몰아냈다.[55] 그는 힐데스하임의 베른바르트 주교와 독일 연대기 작가 탄그마르와 함께 도시로 돌아와 반란을 일으킨 로마인들과 평화 협상을 벌였다. 양측이 로마인들이 오토의 도시 지배를 존중하기로 합의한 평화적인 해결에 동의했지만, 불신감은 남아 있었다. 황제의 고문들은 그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군대 증원이 도착할 때까지 도시 밖에서 기다릴 것을 촉구했다.
오토 황제는 실베스테르 2세 교황과 함께 라벤나로 여행하여 산타폴리나레 인 클라세 수도원에서 참회하고 군대를 소집했다. 라벤나에 있는 동안 그는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1세 공의 사절단을 받았고, 헝가리를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이슈트반 1세 국왕의 에스테르곰 대교구 설립 계획을 승인했다. 황제는 베네치아의 도제 피에트로 2세 오르세올로와의 관계도 강화했다. 오토는 996년부터 피에트로 2세의 아들 오토 오르세올로의 대부였으며, 1001년에는 피에트로 2세의 딸의 세례를 주선했다.
6. 2. 죽음
1002년 1월 24일, 오토 3세는 치비타카스텔라나 인근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135] 그는 21세의 젊은 나이였으며, 독립적인 통치 기간은 6년이 채 되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 8세의 딸 조이가 그와 결혼하기 위해 풀리아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136]오토 3세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원인이 제기되었다. 중세 사료에서는 말라리아를 언급하는데, 이는 그가 라벤나 주변의 불결한 늪지대에서 걸린 것이라고 한다.[137] 로마 사람들은 크레스켄티우스 2세의 미망인 스테파니아가 오토를 유혹하여 독살했다고 주장했다.
황제의 시신은 병사들이 독일로 운구했으며, 그 과정에서 이탈리아인들은 시신에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138] 오토 3세는 아헨 대성당에 샤를마뉴와 함께 안치되었다.
6. 3. 왕위 계승 위기
오토 3세는 결혼하지 않고 자녀 없이 사망하여, 신성 로마 제국은 명확한 계승자 없이 혼란에 빠졌다.[135] 1002년 2월, 장례 행렬이 바이에른 공국을 따라 이동할 때, 오토 3세의 친척인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4세(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의 아들)는 주교들과 귀족들에게 자신을 새로운 독일 왕으로 선출해 달라고 요청하였다.[135]아우구스부르크 주교와 빌리기스(마인츠 선제후)를 제외한 대부분의 귀족들은 하인리히 4세의 왕위 주장을 지지하지 않았다.[135] 하인리히의 왕위 주장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 아우구스부르크 주교는 하인리히가 오토의 시신을 잘 보살피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아우구스부르크 대성당에 오토의 창자를 안치시키기까지 했다. 1002년 부활절 아헨에서 열린 오토의 장례식에서 독일 귀족들은 하인리히 4세에 대한 반대 의사를 재차 확인하였다. 로트링겐 궁정백 에초, 마이센 변경백 에카르트 1세, 슈바벤 공작 헤르만 2세 등은 하인리히 4세의 계승에 강력하게 반발하였다.[135]
1002년 6월 6일 혹은 7일 마인츠에서, 하인리히 4세는 바이에른, 프랑크, 상로트링겐의 지지자들에 의해 하인리히 2세라는 이름으로 로마인들의 왕으로 선출되었고, 빌리기스가 왕으로서 대관식을 치러주었다.[135] 한편, 에카르트는 상속 분쟁과 관련이 없는 불화로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135] 대관식을 마친 하인리히 2세는 슈바벤의 헤르만에 대해 별다른 성과 없는 군사 활동을 펼쳤지만, 몇 달 뒤 튀링겐, 작센, 하로트링겐 지역들에서 충성의 맹세 및 다시 열린 선거를 통해 왕으로 인정받았다.[135][136] 1002년 10월 1일 브루흐잘에서 헤르만은 마침내 하인리히 2세에게 항복하였고, 계승은 막을 내렸다.[136]
7. 성격
오토 3세는 힐데스하임의 베른바르트 주교와 렝스 대주교 오리악의 제르베르 같은 당대 최고의 학자들에게 교육을 받아 지적 능력이 뛰어났다.[139] 세 가지 언어를 구사할 정도로 박식하여, 동시대 사람들은 그를 '세상의 경이'(mirabilia mundi)라고 불렀다. 훗날 프리드리히 2세 역시 '세상의 경이'(stupor mundi)로 불렸으며, 두 황제는 지적 능력, 야망, 이탈리아 문화에 대한 관심 등에서 공통점을 보였다.[60]
오토 3세는 그리스와 로마 문화에 매료되었으며, 탕그마르의 Vita Bernwardi에는 그가 독일 귀족들보다 로마 귀족들을 선호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 기록의 진위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140] 그는 고대 로마 제국을 부흥시켜 신정 정치를 실현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67]
8. 재위 시절에 대한 기록
메르제부르크의 티트마르는 1012년부터 1018년까지 908년부터 1018년까지의 시기를 다룬 8권으로 이뤄진 연대기(Chronicon)를 저술했다.[1] 연대기의 초기 부분은 비두킨트의 '색슨족 업적록', ''Annales Quedlinburgenses'' 및 다른 사료들을 사용했으며, 후반부는 티트마르 개인의 지식에서 비롯한 것이다.[1] 이 연대기는 오토 3세 및 하인리히 2세 황제 시기 작센의 역사에 대한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1] 특히 벤트족과 폴족에 대한 메르제부르크 주교구의 분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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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から見れば実質ドイツ王だが称号は「東フランク王」「フランク王」単にあるいは「王」と不安定で、また当時国家・地域・民族としてのドイツは存在し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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当時はまだ神聖ローマ帝国という国号はなく、古代ローマ帝国内でローマ人と混交したゲルマン諸国及びその後継国家群を漠然とローマ帝国と呼び、皇帝は古代帝国の名残であるローマ教会の最高位聖職者、すなわち教皇により戴冠していた。また神聖ローマ皇帝やドイツ王は歴史学的用語で実際の称号では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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