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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루스 2세 칼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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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롤루스 2세 칼부스는 9세기에 서프랑크 왕국을 다스린 왕으로, 823년에 태어나 877년에 사망했다. 그는 프랑크 왕국의 분열 이후 서프랑크 왕국을 물려받았으며, 브르타뉴와 바이킹의 침략, 형제들과의 영토 분쟁 등 격동의 시기를 겪었다. 875년에는 서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했으나, 동프랑크 왕국과의 갈등 속에서 사망했다. 그는 학문과 문화를 장려하고 가톨릭 교회와 협력하여 정치적 기반을 다졌으며, '대머리'라는 별칭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대머리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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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루스 2세 칼부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비비안 성경에 묘사된 대머리 카를 2세, 845년경
비비안 성경에 묘사된 대머리 카를 2세, 845년경
칭호로마 황제
서프랑크 국왕
왕가카롤링거 왕조
아버지루트비히 1세
어머니유디트 폰 바이에른
출생일823년 6월 13일
출생지프랑크푸르트, 프랑키아
사망일877년 10월 6일
사망지브리드레뱅, 서프랑크 왕국
매장지생드니 대성당
통치
신성 로마 황제 즉위875년 12월 25일, 파비아
신성 로마 황제 재위875년 – 877년 10월 6일
신성 로마 황제 전임루트비히 2세
신성 로마 황제 후임뚱보 카를
서프랑크 국왕 재위843년 8월 10일 – 877년 10월 6일 (대략)
서프랑크 국왕 전임루트비히 경건왕
서프랑크 국왕 후임루이 말더듬이왕
배우자
배우자 1에르멘트루드 도를레앙
배우자 2리실드 드 프로방스
자녀
자녀 목록플랑드르의 유디트
루이 말더듬이왕
유아 카를
로타르 절름발이
카를로만
로틸드

2. 이력

카롤루스 2세는 경건왕 루트비히와 그의 두 번째 부인 바이에른의 유디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자, 카롤루스 대제의 손자이다. 아버지 루트비히 1세는 막내아들인 카롤루스에게 영토를 물려주려 했으나, 이미 영지를 가지고 있던 이복형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838년 이복형 아키텐의 피핀 1세가 사망하자 아키텐을 상속받았지만, 이는 조카 아키텐의 피핀 2세 및 아키텐 귀족들과의 오랜 분쟁으로 이어졌다.

840년 아버지 루트비히 1세가 사망한 후, 제국 계승을 둘러싸고 형제들 간의 내전이 발발했다. 카롤루스는 이복형 독일인 루트비히와 동맹을 맺고(스트라스부르 서약, 842년), 퐁트누아 전투(841년)에서 맏형 로타르 1세를 격파했다. 이 전쟁은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마무리되었으며, 카롤루스는 서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바이킹의 침입과 귀족들의 반란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브르타뉴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다.

869년 조카 로타르 2세가 사망하자 로타링기아 왕위를 주장했으나, 독일인 루트비히와의 갈등 끝에 870년 메르센 조약을 통해 로타링기아 서부와 프로방스를 획득했다. 875년에는 이탈리아의 루트비히 2세 황제가 사망하자 교황 요한 8세의 지지를 얻어 로마에서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했다.

876년 독일인 루트비히가 사망하자 동프랑크 왕국을 침공했으나 안데르나흐 전투에서 패배했다. 877년 교황의 요청으로 이탈리아 원정에 나섰으나 귀족들의 반발과 조카 카를만의 군대 진입으로 철수하던 중 병사했다. 그의 왕위는 아들 루이 2세가 계승했다.

2. 1. 생애 초반

카롤루스 2세 시대의 동전


카롤루스 2세는 823년 6월 13일 프랑크 왕국 헤센주 프랑크푸르트에서 경건왕 루트비히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바이에른의 유디트 사이에서 태어났다.[23] 유디트는 바이에른 공작 구엘프의 딸이었다. 그는 카롤루스 대제의 손자이기도 하다. 그의 이모 엠므 폰 바이에른은 그의 이복 형인 독일인 루트비히와 결혼했다.[23] 카롤루스에게는 누나 기셀라가 있었는데, 그녀는 이탈리아 북동부 프리울리후작 에버하르트 1세와 결혼했다.

카롤루스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에게는 이미 첫 번째 부인 에르망가르트 드 에스베에게서 얻은 세 아들, 로타르 1세, 피핀 1세, 독일인 루트비히가 있었다. 이들은 이미 성인이었고 각자의 영토(부왕국)를 할당받은 상태였다.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는 막내아들 카롤루스에게도 영토를 주려고 시도했다. 처음에는 알레만니아를 주려 했고, 832년 피핀 1세의 반란 이후에는 뫼즈강과 피레네 산맥 사이의 땅을 주려 했으나, 이복 형들의 강한 반발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복 형들은 817년에 맺어진 상속 협정(Ordinatio imperii)에서 보장된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려 했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여러 차례 반기를 들었다. 이 과정에서 어머니 유디트가 폐위되어 수도원에 감금되기도 했다.

수많은 갈등과 화해 속에서 카롤루스의 상속 몫은 계속 바뀌었지만,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는 포기하지 않았고 카롤루스를 갈리아 전역의 상속자로 삼으려 했다. 837년 아헨에서 열린 제국 회의에서는 귀족들에게 카롤루스를 자신의 상속자로 인정하도록 했다. 838년 이복 형인 아키텐의 피핀 1세가 사망하자, 카롤루스는 마침내 아키텐을 상속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피핀 1세의 아들과 아키텐 귀족들의 불만을 샀다.

840년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가 사망하자, 아들들 사이에 본격적인 내전이 벌어졌다. 카롤루스는 새로운 황제가 된 로타르 1세의 야심에 맞서기 위해 또 다른 이복 형인 독일인 루트비히와 동맹을 맺었다. 841년 6월 25일, 카롤루스와 루트비히 연합군은 퐁트누아 전투에서 로타르 1세의 군대를 격파했다. 842년, 두 형제는 스트라스부르 서약을 통해 동맹을 더욱 공고히 했다.

876년 카롤루스 2세(주황색)의 왕국과 다른 카롤링거 왕국들


이 전쟁은 843년 8월 베르됭 조약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카롤루스 2세는 서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었다. 그의 왕국은 오늘날의 프랑스 영역과 거의 일치하며, 뫼즈강, 손강, 론강 서쪽 지역과 에브로 강까지 이어지는 히스파니아 변경주를 포함했다. 독일인 루트비히는 라인강 동쪽의 동프랑크 왕국(훗날 독일)을 차지했고, 로타르 1세는 황제의 칭호와 이탈리아 왕국, 그리고 플랑드르에서 라인란트부르고뉴를 거쳐 이탈리아에 이르는 중프랑크 왕국을 차지했다.

2. 2. 알레만니아 왕

829년 아버지 루트비히 경건왕은 카롤루스를 알레만니아 공작, 슈바벤 공작, 알자스 공작, 리티아(Raetia, 이탈리아 북부) 공작, 부르고뉴공작에 임명했다. 이는 카롤루스에게 상속 영토를 마련해주기 위한 조치였으나, 기존에 영지를 가지고 있던 이복형들의 불만을 샀다. 같은 해 8월, 셉티메니아의 베른하르트가 카롤루스의 권리를 지지하고 나섰고, 루트비히 경건왕은 카를 마르텔의 손자인 왈라(Wala)를 카롤루스의 후견인으로 특별히 지명하였다.

한편, 로타르 1세의 측근들은 바이에른의 유디트와 셉티메니아의 베른하르트 사이의 과거 관계에 대한 소문을 퍼뜨렸고, 피핀 1세는 베른하르트가 자신의 영토까지 넘볼 것을 우려하여 형 로타르 1세에게 함께 군사를 일으킬 것을 제안했다. 아버지 루트비히 경건왕이 829년 카롤루스에게 알레만니아 외에도 독일인 루트비히와 로타르 1세의 영지 일부를 추가로 떼어 주자, 이복 형들인 로타르 1세, 아키텐의 피핀 1세, 독일인 루트비히는 결국 반란을 일으켰다.

832년, 아키텐의 피핀 1세는 셉티메니아의 베른하르트의 지원을 받아 독일인 루트비히와 함께 아버지 루트비히 경건왕에게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반란은 진압되었고, 피핀 1세는 아버지에 의해 아키텐 국왕 자리를 박탈당하고 트리어 감옥에 갇혔다. 그의 왕국은 카롤루스에게 넘겨지게 되었으며, 같은 해 리모주 근처 조코디아크 궁(Jocondiac)에서 루트비히 경건왕은 피핀 1세의 영지였던 아키텐을 카롤루스에게 준다고 공식 선언했다. 837년 아헨 제국 의회와 838년 네이메헨 제국 의회에서도 루트비히 경건왕은 카롤루스에게 더 많은 영토를 넘겨주었다. 로타르 1세, 피핀 1세, 독일인 루트비히 등은 표면적으로는 이 조치를 받아들였으나, 속으로는 불만을 품고 있었다.

838년 12월, 아키텐의 피핀 1세가 사망하자 루트비히 경건왕은 카롤루스를 아키텐의 왕으로 봉했으나, 아키텐 귀족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카바네의 아데마르(Ademar de Chabannes), 푸아티에 백작 에메노네(Emenone) 등 아키텐의 유력 인사들은 황제의 명령을 거부하고, 아키텐의 분리 독립을 원하며 죽은 피핀 1세의 장남 피핀 2세를 왕으로 추대했다. 839년 보름스 제국의회에서는 피핀 2세의 아키텐 상속권을 박탈하고 카롤루스를 아키텐 왕으로 임명하며, 피핀 2세에게는 아헨으로 유학할 것을 지시했다. 루트비히 경건왕은 아키텐에 사절을 보내 피핀 2세를 아헨으로 보내라고 요구했지만, 아키텐 귀족들은 이를 거부했다. 결국 839년 카롤루스가 아키텐 통치를 선언했음에도 아키텐 귀족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후 카롤루스는 아키텐을 차지하기 위해 조카 아키텐의 피핀 2세와 20년 이상 분쟁을 벌여야 했다.

838년 12월, 카롤루스는 아버지 루트비히 경건왕으로부터 메인공작에도 임명되었다. 훗날 851년 카롤루스는 메인 영지와 앙주, 툴루즈로베르 르 포르에게 하사하였다.

839년 봄, 이복 형 독일인 루트비히가 게르만 귀족들을 선동하여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배하고 바이에른으로 물러났다. 이후 독일인 루트비히는 형 로타르 1세를 부추겨 카롤루스 2세의 영지인 알레만니아를 함께 침공했다. 이 침공으로 카롤루스는 판노니아 백작령을 잃게 되었다.

2. 3. 치세 기간 중

840년 아버지 루트비히 1세가 사망하자, 형제들인 로타르 1세, 루트비히 2세 독일왕과 제국 계승을 둘러싼 내전이 벌어졌다(퐁트누아 전투, 841년). 카롤루스는 루트비히 2세와 동맹을 맺고(스트라스부르의 맹세, 842년) 로타르 1세에 대항했다. 843년 베르됭 조약을 통해 왕국은 삼분되었고, 카롤루스는 서프랑크 왕국을 차지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국내 귀족 세력 통제의 어려움과 노르만족(바이킹)의 계속되는 침략[15]으로 순탄치 않았다.

통치 초기에 브르타뉴와의 전쟁에서 연이어 패배했다(845년 발롱 전투, 851년 장글랑 전투). 결국 브르타뉴의 독립을 승인해야 했다.

869년, 조카 로타르 2세가 사망하자 메스에서 로렌 왕으로 즉위했으나[16][17], 이복형 루트비히 2세 독일왕의 반발로 870년 메르센 조약을 맺고 로렌 서부와 프로방스를 획득했다.

875년, 황제 루트비히 2세가 사망하자 즉시 이탈리아를 병합하고, 교황 요한 8세의 지지를 얻어 그해 크리스마스로마에서 황제 카롤루스 2세로 즉위했다.[18]

876년, 형 루트비히 2세 독일왕이 사망하자 영토 확장을 위해 동프랑크를 침공했으나, 같은 해 안데르나흐 전투에서 조카 루트비히 3세가 이끄는 군대에 패배했다.[19]

877년, 반대 세력 진압을 위해 이탈리아로 향했으나, 조카 카를만의 군대가 접근하자 철수했다. 귀국 도중 10월 6일 사부아에서 병으로 사망했으며[20][21], 아들 루이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2. 3. 1. 시민 전쟁

카롤루스 2세


842년 스트라스부르 서약 선서문 사본(카롤루스 2세 작성 부분)


840년 아버지 루트비히 1세 경건왕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들 사이에 제국 계승을 둘러싼 전쟁이 발발했다. 카롤루스 2세는 큰형 로타르 1세가 제국 전체를 통치하려는 것에 반대하여, 이복 형인 독일인 루트비히와 동맹을 맺었다. 로타르 1세는 817년 제국 칙령에 따른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루트비히 1세가 사망했을 때 카롤루스 2세에게는 알레만니아, 네우스트리아, 프로방스 지역이 유산으로 분배되었으나, 로타르 1세가 이를 무시하고 전 국토의 황제로 즉위하자 카롤루스 2세와 독일인 루트비히는 반란을 일으켜 3년간의 시민 전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카롤루스 2세는 네우스트리아와 프랑스 지역을, 독일인 루트비히는 바이에른 외에 알레만니아 지역을 차지하기로 합의했다.

전쟁 중 아키텐의 분국왕이자 조카인 아키텐의 피핀 2세는 로타르 1세에게 합류하여 그를 지원했다. 841년 6월 25일, 퐁트누아 전투에서 카롤루스 2세와 독일인 루트비히 연합군은 로타르 1세 군대를 결정적으로 격파했다.[14] 패배한 로타르 1세는 수도 아헨으로 피신했다.

퐁트누아 전투 이후, 842년 2월 12일 카롤루스 2세와 독일인 루트비히는 스트라스부르에서 만나 동맹을 더욱 공고히 하는 스트라스부르 서약을 맺었다. 이 서약에서 독일인 루트비히는 게르만어로, 카롤루스 2세는 당시 서프랑크 지역에서 사용되던 갈로-로망어|갈로-로망어fro로 충성을 맹세하며 로타르 1세에 맞서 싸울 것을 다짐했다. 카롤루스 2세가 낭독한 서약 내용은 다음과 같다.

Pro Deo amur et pro christian poblo et nostro commun salvament, d'ist di in avant, in quant Deus savir et podir me dunat, si salvarai eo cist meon fradre Karlo et in aiudha et in cadhuna cosa, si cum om per dreit son fradra salvar dift, in o quid il mi altresi fazet, et ab Ludher nul plaid nunquam prindrai, qui meon vol cist meon fradre Karle in damno sit.


이 서약은 단순히 군주 간의 약속을 넘어, 신과 백성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지녔다. 또한, 프랑크 왕국의 표준어인 고지 독일어가 아닌, 각 지역의 언어(게르만어와 갈로-로망어)로 낭독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같은 해 작센에서 로타르 1세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났고, 튀링겐의 귀족들도 카롤루스 2세와 독일인 루트비히를 지지하면서 로타르 1세는 더욱 궁지에 몰렸다. 결국 로타르 1세는 협상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은 843년 8월 베르됭 조약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프랑크 왕국은 세 형제에게 분할되었다.

이 조약으로 카롤루스 2세는 서프랑크의 왕이 되었지만, 이후에도 노르만족(바이킹)의 침입과 국내 귀족 세력 통제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15]

2. 3. 2. 베르됭 조약과 서프랑크 왕

843년 베르됭 조약 이후 3개로 나뉜 프랑크 왕국.


823년 6월 13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이복형들은 이미 성인이었고 아버지 루트비히 1세 경건왕으로부터 각자의 영토(하위 왕국, ''regna'')를 할당받은 상태였다. 루트비히 1세는 막내아들 카롤루스에게도 영토를 주려 여러 차례 시도했다. 처음에는 알레만니아를, 832년 피핀 1세의 반란 이후에는 뫼즈강과 피레네 산맥 사이의 땅을 주려 했으나, 다른 아들들인 로타르 1세, 피핀 1세, 독일인 루트비히의 계속되는 반란과 화해 과정 속에서 번번이 무산되었다. 하지만 루트비히 1세는 포기하지 않고, 837년 아헨에서 열린 제국 회의에서 귀족들에게 카롤루스를 자신의 상속자로 인정하도록 서약하게 했다.[24] 838년 아키텐의 피핀 1세가 사망하자 카롤루스는 마침내 아키텐을 상속받았으나, 이는 피핀 1세의 아들 피핀 2세와 아키텐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840년 아버지 루트비히 1세가 사망하자 아들들 사이에 본격적인 내전이 벌어졌다. 카롤루스는 새로운 황제이자 맏형인 로타르 1세의 권력 장악 시도에 맞서기 위해 이복형 독일인 루트비히와 동맹을 맺었다. 두 동맹군은 841년 6월 25일 퐁트누아 전투에서 로타르 1세의 군대를 격파했다. 카롤루스는 이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여 성모 마리아에게 바치는 작은 성당을 보샤름 계곡 입구에 세우도록 했다.[24] 로타르 1세는 아키텐의 피핀 2세와 상스의 아르눌프의 지원을 받았지만, 아르눌프는 이듬해 사망했고 로타르 1세는 힘이 부족했다. 842년 카롤루스와 독일인 루트비히는 스트라스부르 서약을 통해 동맹을 더욱 굳건히 했다.

데니에르 (템플과 십자가 형태), 840년에서 864년 사이에 랭스에서 주조된 카롤루스 2세 칼부스의 동전.


소위 카롤루스 대제의 기마상 (c. 870), 카롤루스 2세 칼부스를 묘사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짐


계속되는 전쟁과 협상 시도 끝에, 843년 8월 세 형제는 마침내 베르됭 조약을 맺어 카롤링거 제국을 3분할하기로 합의했다. 이 조약으로 카롤루스 2세는 스헬데, 뫼즈, 손강 서쪽의 영토(네우스트리아, 프랑스)와 마시프상트랄 동쪽 산지, 론강 하류 지역, 그리고 에브로강까지의 히스파니아 변경주를 포함하는 서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었다. 이는 오늘날 프랑스 영토의 토대가 되었다. 독일인 루트비히는 라인강 동쪽의 동프랑크 왕국(훗날 독일)을, 로타르 1세는 제국의 중앙부(중프랑크 왕국)인 로타링기아, 부르고뉴, 프로방스와 이탈리아 왕국, 그리고 황제 칭호를 차지했다.

베르됭 조약 직후, 카롤루스 2세는 브르타뉴에 대한 원정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돌아오는 길에 귀족 및 성직자들과 쿨렌 조약을 맺어 왕국의 안정을 꾀하려 했다.[2] 하지만 그의 통치 초기는 평탄하지 않았다. 843년 바이킹브르타뉴를 침공하여 북서부 일대를 약탈했고, 낭트의 주교가 사망했다. 845년에는 바이킹이 센강을 거슬러 올라와 파리를 공방전 끝에 약탈하자, 카롤루스 2세는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그들을 돌려보내야 했다. 이후에도 바이킹의 침략은 계속되어 센강루아르강 유역, 심지어 아키텐 국경까지 황폐화되었다.

브르타뉴와의 관계도 나빠졌다. 845년 발롱 전투에서 브르타뉴 공작 노미노에에게 패배했고, 851년에는 젠글랑 전투에서 노미노에의 아들 에리스포에에게 다시 패배하여 결국 브르타뉴의 실질적인 독립을 인정해야 했다.

내부적으로도 귀족들의 불만이 계속되었다. 846년에는 카롤루스 2세의 측근인 마스가우의 기셀베르트가 로타르 1세의 딸 이르멘가르트를 납치하여 새로운 평화 조약을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했으나, 로타르 1세는 분노하여 이를 거부했다. 858년에는 불만을 품은 서프랑크 귀족들이 독일인 루트비히를 왕으로 세우려 했고, 루트비히는 서프랑크를 침공했다. 당시 인기가 없었던 카롤루스 2세는 군대 소집조차 어려워 부르고뉴로 피신해야 했으나, 주교들이 루트비히의 즉위를 거부하고 외가인 벨프 가문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위기를 벗어났다.

형제들과의 관계는 처음에는 협력했지만 점차 갈등 관계로 바뀌었다. 로타르 1세가 사망한 855년까지 세 형제는 코블렌츠(848년), 메르센(851년), 아티니(854년) 등에서 만나며 '형제 정부' 체제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860년 조카인 프로방스의 샤를의 왕국을 차지하려다 실패하는 등 영토 분쟁은 계속되었다. 869년 또 다른 조카인 로타르 2세가 아들 없이 죽자, 카롤루스 2세는 메츠에서 스스로 로타링기아 왕으로 즉위하며 그의 영토를 차지하려 했다. 하지만 독일인 루트비히 역시 로타링기아에 대한 권리를 내세우며 로타르 2세의 옛 봉신들의 지지를 얻자, 결국 협상을 통해 870년 메르센 조약을 체결하여 로타링기아를 루트비히와 나누어 가졌다. 카롤루스 2세는 로타링기아 서부와 프로방스 일부를 획득했다. 이 조약은 현재의 프랑스독일의 국경을 정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계속되는 바이킹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카롤루스 2세는 864년 피스트르 칙령을 발표했다. 이 칙령은 기사 계급의 기반이 되는 기병 전력을 강화하고, 바이킹의 강을 통한 내륙 침입을 막기 위해 모든 강에 요새화된 다리를 건설하도록 명령했다. 이때 파리에 건설된 두 개의 다리는 훗날 885-886년의 바이킹 공방전에서 도시를 지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외교적으로는 865년 코르도바 토후국과 교류하여 아미르 무함마드 1세로부터 낙타를 선물 받기도 했다.[3] 860년대부터 콩피에뉴 궁전은 카롤루스 2세에게 중요한 장소가 되었으며, 876년에는 그곳에 수도원을 설립했다. 10세기에는 콩피에뉴가 카롤루스 2세와 관련이 깊어 '카를로폴리스(Carlopolis)'로 불리기도 했다.[4] 871년과 872년에는 교황 하드리아노 2세에게 편지를 보내, 교황청이 국가 문제에 개입하는 것에 맞서 왕의 권한을 지키려 하기도 했다.[5]

2. 3. 3. 아키텐 분쟁

카롤루스 2세는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가 838년 자신에게 아키텐을 분배해주었기 때문에 아키텐을 자신의 영토로 여겼다. 그는 832년 9월 리모주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아키텐의 왕으로 임명된 것을 근거로 계속해서 아키텐 왕위를 요구했다. 하지만 841년까지는 그의 형 로타르 1세가 아키텐 총독을 겸하고 있어 카롤루스가 아키텐을 차지하기는 어려웠다.

839년 이후 아키텐에서는 피핀 2세가 로타르 1세와 루트비히 2세 독일인 등의 도움을 받아 왕위를 지키고 있었다. 842년 혹은 843년에 피핀 2세는 서프랑크를 침공하여 툴루즈 지역을 점령했다. 하지만 툴루즈와 루에르그(Rouergue)의 백작인 프레도론(Frédolon)은 피핀 2세를 배신하고 카롤루스 2세의 편에 섰다. 844년 피핀 2세는 바이킹 모험가 야를 오스카(Jarl Oscar)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서프랑크 땅을 약탈해 정복하면 정착지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이들은 함께 가론툴루즈 일대를 약탈했다. 843년 카롤루스 2세는 피핀 2세와 사오나(Saona) 섬에서 평화 조약을 맺었다.

845년 카롤루스 2세는 아키텐의 보르도를 점령했지만, 도시는 847년 야를 오스카가 이끄는 바이킹 군대에 의해 곧바로 탈환되었다. 이는 카롤루스 2세에게 불만을 품은 시민들의 도움 덕분이었는데, 이들 중에는 유대인과 피핀 2세 지지자들도 있었다. 피핀 2세는 이교도 해적과 손을 잡기도 했으나, 과음과 나태한 생활 방식으로 인해 848년경 아키텐 귀족들의 지지를 점차 잃어갔다.

848년 6월 6일, 카롤루스 2세는 자신이 아키텐의 진정한 왕임을 다시 선언했다. 같은 날, 피핀 2세의 동생인 아키텐의 샤를 역시 오를레앙에서 자신이 아키텐의 국왕임을 선언하며 왕위 계승 경쟁에 나섰다. 이후 1년 동안 많은 아키텐 귀족들이 피핀 2세에 대한 지지를 거두었다.

845년, 로타르 1세, 루트비히 2세 독일인, 카롤루스 2세는 서신 교환을 통해 피핀 2세를 카롤루스 2세의 가신으로 규정했다. 이에 따라 카롤루스 2세는 생브누아쉬르루아르에서 피핀 2세를 아키텐 전 지역의 주지사로 임명한다고 발표했으나, 피핀 2세는 왕에서 주지사로 격하된 것에 불복했다.

851년 카롤루스 2세는 피핀 2세가 바이킹과 협력했다는 이유로 수아송에서 의회를 열어 그의 해임을 선언했지만, 아키텐 귀족들은 이에 반발했다. 852년 9월, 가스코뉴백작 산초 2세 산시온(Sancho II Sánchez)이 피핀 2세와 그의 동생 샤를을 붙잡아 카롤루스 2세에게 넘겼다. 카롤루스 2세는 피핀 2세를 수아송의 생메다르(Saint-Médard) 수도원에 가두었다.

그러나 이때 동프랑크 왕국의 루트비히 2세 독일인이 전쟁을 시작하며 아들 청년 루트비히를 보내 카롤루스 2세와 싸우게 했다. 이 전쟁은 855년 청년 루트비히가 리모주 지역을 점령할 때까지 이어졌다. 루트비히 2세 독일인은 아들 청년 루트비히를 시켜 피핀 2세와 샤를을 수도원에서 탈출시키게 했고, 청년 루트비히는 이들의 탈출을 확인한 뒤 바이에른으로 돌아갔다.

2. 3. 4. 학술, 문예 장려

카롤루스 2세는 할아버지 카롤루스 대제의 궁정학교인 스콜라를 본받아, 자신의 파리 궁정에도 학교를 세우고 왕족과 귀족 자제들의 교육을 맡겼다. 이 궁정학교의 유명한 교수 중 한 명은 아일랜드 출신의 요한 스코투스 에리게나(Johannes Scotus Eriugena)였다. 에리게나는 845년경부터 의 왕궁학교에서 문법, 논리학, 수사학 등을 가르쳤다. 에리게나는 범신론적인 사상으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카롤루스 2세는 그를 특별히 보호했다. 또한 에리게나는 카롤루스 2세의 명을 받아 '가짜 디오니시우스'의 저작을 갈리아 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카롤루스 2세는 작가이자 시인인 니타르트를 후작으로 임명하고 자신의 측근으로 삼았다. 니타르트는 카롤루스 대제 시절의 음유시인 안길베르트와 카롤루스 대제의 딸 베르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카롤루스 2세와는 친척 관계였다.

카롤루스 2세 시대에 부르주에서 주조된 데니에르 동전 (848년 이후)


2. 3. 5. 영토 문제와 전쟁

840년 아버지 루트비히 1세가 사망하자, 프랑크 왕국은 그의 아들들인 로타르 1세, 루트비히 2세 독일왕, 그리고 카롤루스 2세 사이에 영토 분쟁이 발생했다. 841년 퐁트누아 전투에서 카롤루스는 루트비히 2세와 연합하여 로타르 1세에게 맞섰고, 842년에는 스트라스부르 서약을 통해 로타르 1세에 대항하는 동맹을 공식화했다. 결국 843년 베르됭 조약을 통해 왕국은 삼분되었고, 카롤루스는 서프랑크 왕국을 차지하게 되었다. 로타르 1세는 중프랑크 왕국과 황제위를, 루트비히 2세는 동프랑크 왕국을 받았다.

카롤루스 2세


베르됭 조약 직후, 카롤루스는 브르타뉴에 대한 원정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귀환하는 길에 귀족 및 성직자들과 쿨렌 조약을 체결했다.[2] 845년에는 브르타뉴 공작 노미노에가 이끄는 브르타뉴 군대에게 발롱 전투(레돈 근처)에서 패배했다. 851년에는 노미노에의 뒤를 이은 에리스포에에게 젠글랑 전투에서 다시 패배하여 결국 브르타뉴의 사실상 독립을 인정해야 했다.

855년 로타르 1세가 사망할 때까지 형제들은 코블렌츠(848년), 메르센(851년), 아티니(854년) 등에서 만나며 "형제 정부" 체제를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카롤루스의 통치는 순탄치 않았다. 국내 귀족 세력을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북쪽에서는 바이킹(노르만족)의 침략이 끊이지 않았다.[15] 바이킹은 센 강과 루아르 강 유역을 황폐화시키고 아키텐 국경까지 위협했다. 특히 845년 바이킹은 파리를 성공적으로 공략하고 약탈했으며, 카롤루스는 막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그들을 물러나게 해야 했다. 카롤루스는 바이킹의 침략에 맞서 여러 차례 원정을 이끌었고, 864년 피스트르 칙령을 통해 기병을 강화하여 군대의 기동성을 높이고, 모든 강에 요새화된 다리를 건설하여 바이킹의 침입을 막도록 명령했다. 이 다리 중 파리의 두 개는 훗날 885–886년 파리 공방전에서 도시를 지키는 데 기여했다.

아키텐에서는 조카 피핀 2세와의 갈등이 계속되었다. 854년 생 메다르 수도원에서 탈출한 피핀 2세는 아키텐의 샤를과 함께 카롤루스에 맞서기 위해 바이킹 용병을 고용했다. 카롤루스는 피핀이 바이킹과 내통한다고 선전했다. 한편, 아키텐의 유력 가문인 에우도의 후손들이 하리베르트 2세로부터 이어지는 혈통임을 인정해달라고 요청하자, 카롤루스는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주었다. 855년 카롤루스는 자신의 아들 샤를 3세 유아왕을 아키텐 왕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10월 라모에서 열린 아키텐 귀족회의에서 샤를 3세 유아왕을 왕으로 선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귀족들은 여전히 피핀 2세를 지지했다. 피핀 2세는 옛 영토인 루아르 계곡, 푸아티에, 앙굴렘, 페리, 리모, 클레르몽, 부르주 등을 회복하려 시도했다. 샤를 3세 유아왕은 862년경에야 일부 아키텐 귀족들의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859년 피핀 2세는 로베르 강철공 및 브리튼의 주교 솔로몬 등과 동맹을 맺고 다시 카롤루스와 싸웠으나[27] 작은 승리를 거두는 데 그쳤고, 이후 바이킹에게 의탁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였다. 864년 무렵 피핀 2세가 바이킹이 되어 그들의 신을 숭배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같은 해 카롤루스는 툴루즈 지역을 공략하던 피핀 2세를 사로잡아 오랜 아키텐 분쟁을 종결시켰다.

858년에는 불만을 품은 서프랑크 귀족들의 초청을 받은 동프랑크의 루트비히 2세가 서프랑크 왕국을 침공했다. 카롤루스는 인기가 없어 군대를 모으지 못하고 부르고뉴로 도피했으나, 주교들이 루트비히 2세를 왕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벨프 가문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겼다. 860년에는 조카인 프로방스의 카를의 왕국을 점령하려 했으나 격퇴당했다.

869년 조카 로타르 2세가 사망하자, 카롤루스는 로타링기아를 차지하기 위해 9월 9일 메츠의 스테파누스 교회에서 로타링기아 왕으로 즉위했다.[16][17] 그러나 루트비히 2세 독일왕 역시 로타링기아에 대한 상속권을 주장하며 로타르 2세의 옛 봉신들 사이에서 지지를 얻자, 카롤루스는 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결국 870년 메르센 조약을 통해 로타링기아는 카롤루스와 루트비히 2세 독일왕 사이에 분할되었고, 카롤루스는 로타링기아 서부와 프로방스를 획득했다. 이탈리아와 황제위는 로타르 1세의 다른 아들이자 당시 황제였던 루트비히 2세에게만 인정되었다. 이 조약으로 현재의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카롤루스는 외교 활동도 펼쳤다. 865년에는 코르도바 토후국과 외교 관계를 맺고 아미르 무함마드 1세로부터 낙타를 선물 받았다.[3] 또한 871년872년에는 교황 하드리아노 2세에게 서신을 보내 국가 문제에 대한 교황청의 간섭에 맞서 왕의 주권을 옹호했다.[5] 860년대부터는 콩피에뉴 궁전이 카롤루스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으며, 876년에는 그곳에 수도원을 설립했다. 10세기에는 콩피에뉴가 카롤루스와의 연관성 때문에 '카를로폴리스'로 알려지기도 했다.[4]

875년 황제 루트비히 2세가 사망하자, 카롤루스는 즉시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병합하고, 교황 요한 8세의 지지를 얻어 그해 크리스마스로마에서 신성 로마 황제 카롤루스 2세로 대관식을 올렸다.[18]

876년 형인 동프랑크 왕 루트비히 2세 독일왕이 사망했다. 그의 영토는 세 아들에게 분할 상속되기로 했으나, 카롤루스는 이 기회를 이용해 영토 확장을 시도하며 아헨쾰른을 침공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8일, 루트비히 독일왕의 아들 루트비히 3세가 이끄는 동프랑크 연합군에게 안데르나흐 전투에서 패배했다.[19]

이듬해 877년, 카롤루스는 반대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다시 이탈리아로 향했다. 그러나 조카인 동프랑크 왕 카를만이 이끄는 대군이 알프스를 넘어오자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귀국 도중인 10월 6일 사부아에서 병으로 사망했다.[20][21] 그의 뒤는 아들 루이 2세 말더듬이왕이 이었다.

2. 4. 생애 후반

869년, 로타르 1세의 아들 로타르 2세가 사망하자, 카롤루스 2세는 메스에서 로타링기아의 왕으로 즉위했다[16][17]. 그러나 이복형인 동프랑크의 루트비히 2세가 상속권을 주장하며 개입하자, 결국 870년 메르센 조약을 통해 로타링기아 서부 지역과 프로방스를 획득했다. 이 조약은 현재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영토의 기초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875년, 중프랑크의 황제이자 이탈리아의 왕이었던 루트비히 2세가 아들 없이 사망하자, 카롤루스 2세는 교황 요한 8세의 지지를 받아 이탈리아로 진군하여 파비아에서 왕관을 쓰고 같은 해 12월 25일 로마에서 서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했다.[6][18] 황제가 된 카롤루스 2세는 할아버지 샤를마뉴와 아버지 루트비히 1세의 모토를 결합하여 '로마인과 프랑크 제국의 부활'을 내세웠다.

그러나 황제위 계승을 두고 동프랑크의 루트비히 2세와 갈등이 불거졌고, 그의 사후에는 영토 확장을 시도했으나 876년 10월 8일 안데르나흐 전투에서 루트비히 2세의 아들 루트비히 3세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했다.[6][19]

877년, 사라센족의 위협에 직면한 교황 요한 8세의 요청으로 카롤루스는 다시 알프스 산맥을 넘었으나, 귀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롬바르디아 섭정 보소마저 합류를 거부했다. 동시에 동프랑크 왕 루트비히 2세의 아들인 카를만이 북부 이탈리아로 진입하는 등 상황이 불리해지자, 카롤루스는 병이 깊어져 갈리아로 돌아가던 중 877년 10월 6일 몽세니 고개를 넘다가 브리드-레-뱅에서 사망했다.[7][20][21] 그의 뒤는 아들 루이 2세(말더듬이 왕)가 이었다.

2. 4. 1. 메르센 조약

869년 이복 형 로타르 1세의 아들인 로타르 2세가 사망하자, 카롤루스 2세와 독일인 루트비히는 로타르 2세의 아들 위그를 사생아로 규정하고 로타링기아에서 추방했다. 카롤루스 2세는 868년 메츠에서 독일인 루트비히와 로타르 2세 사후 로타링기아를 분할하기로 비밀리에 약속했었으나[28], 이 약속을 어기고 869년 9월 로타링기아 전역을 점령했다. 그는 메츠의 스테파누스 교회에서 869년 9월 9일 스스로 로타링기아 전체의 왕으로 즉위하고, 자신을 '''황제이며 존엄한 자'''(Imperator Augustusla)라고 선언했다.[16][17]

이에 독일인 루트비히는 즉시 반발했다.[28] 870년, 독일인 루트비히는 동프랑크와 모라비아 군대를 이끌고 로타링기아를 침공하여 전역을 점령하고 카롤루스 2세에게 분할 협상을 요구했다. 결국 교황청의 중재 요구에 따라 두 사람은 870년 8월 8일 메르센에서 만나 메르센 조약을 체결했다.[28]

이 조약에 따라 로타링기아는 분할되었다. 카롤루스 2세는 로렌 서부와 프로방스를 획득했고, 독일인 루트비히는 라인강 서쪽 영역과 프리슬란트를 차지했다. 한편, 로타르 2세의 형이자 당시 중프랑크의 황제였던 이탈리아인 루트비히는 871년까지 남부 이탈리아에서 아랍인 세력과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조약 체결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을 배제한 분할 조약에 항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메르센 조약은 현재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영토적 기초를 마련한 중요한 조약으로 평가받는다.

2. 4. 2. 서로마 제국 황제

카를 2세상 (11세기작)


875년 8월, 이탈리아의 루트비히 2세 황제가 아들 없이 사망하면서, 자신의 처남이자 사촌인 카를로만(독일왕 루트비히 2세의 장남)을 후계자로 지목했다. 그러나 카롤루스 2세는 이 소식을 듣고 재빨리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산맥을 넘어 로마로 향했다. 그는 교황 요한 8세의 지지를 확보하여 그해 12월 25일 파비아에서 왕관을 받고, 12월 29일 로마에서 서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했다.[6][18] 일부 학자들은 카롤루스 2세의 황제 즉위를 제후들이 너도나도 제관을 노리게 된 계기로 보기도 한다.[29] 황제로서 카롤루스 2세는 할아버지 샤를마뉴와 아버지 루트비히 1세가 사용했던 모토를 결합하여 ''로마인''과 ''프랑크'' 제국의 부활을 내세웠고, 이는 그의 인장에도 나타났다.

승려와 자문관들에게 둘러쌓인 카를 2세


카롤루스 2세의 황제 즉위는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루트비히 2세가 지명한 후계자였던 카를로만은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군하여 자신이 적법한 후계자임을 주장하며 제위 계승의 무효를 선언했다. 카롤루스 2세는 막대한 , 보물들을 카를로만에게 주어 일단 돌려보냈지만, 갈등은 계속되었다. 독일왕 루트비히 2세의 셋째 아들인 비만왕 카를 역시 이탈리아로 와서 로마 교황청에 카롤루스 2세의 폐위를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또한, 황제위 계승 후보였던 독일왕 루트비히 2세는 카롤루스 2세의 영토를 침략하며 보복했고, 이로 인해 카롤루스 2세는 서프랑크 왕국으로 급히 돌아가야만 했다.

876년 8월 28일, 카롤루스 2세와의 전쟁을 준비하던 독일왕 루트비히 2세가 갑자기 사망했다. 카롤루스 2세는 이 기회를 틈타 영토 확장을 시도하여, 그해 10월 8일 베르나르 플랑타뷜리 등을 대동하고 군사를 이끌어 로트링겐을 넘어 독일왕 루트비히 2세의 영토를 침략했다. 그러나 그는 안더나흐 전투에서 독일왕 루트비히 2세의 아들인 청년 루트비히 3세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했다.[6][19] 이 전투에서 청년 루트비히 3세는 자신의 군사들에게 흰 옷을 입혀 밤중에 기습하는 전술을 사용했고, 이를 귀신으로 착각한 카롤루스 2세의 군대는 혼란에 빠져 도주했다. 이 전투에서 제롬 백작과 라그니에르가 사망했으며, 베르나르 플랑타뷜리, 아달하르드 백작, 파리 주교 고즐린 등은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났다.[30] 이후 카롤루스 2세는 청년 루트비히 3세와 담판하여 프랑켄과 작센에서의 군대 소집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전쟁을 종결하고 서프랑크로 귀환했다.[31]

생 드니에 매장된 후 카롤루스 2세 칼부스의 환영


877년, 사라센족의 위협에 직면한 교황 요한 8세는 카롤루스 2세에게 이탈리아 방어를 요청했다. 카롤루스 2세는 다시 알프스 산맥을 넘었으나, 이번 원정은 귀족들의 지지를 거의 받지 못했다. 심지어 롬바르디아의 섭정인 보소조차 군대 합류를 거부했다. 동시에 카를로만이 북부 이탈리아로 진입했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카롤루스 2세는 갈리아로 철수하기로 결정했으나, 병이 깊어져 877년 10월 6일 몽세니 고개를 넘던 중 브리드-레-뱅에서 사망했다.[7][20][21] 그의 나이는 54세였다. 뒤는 아들 루이 2세가 이었다.

2. 4. 3. 혼란과 최후

875년, 조카이자 황제였던 루트비히 2세가 사망하자, 카롤루스 2세는 교황 요한 8세의 지지를 얻어 이탈리아로 향했다. 그는 파비아에서 왕관을 쓰고, 같은 해 12월 25일 로마에서 황제 카롤루스 2세로 즉위하였다.[6][18] 황제로서 그는 할아버지 카롤루스 대제와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가 사용했던 모토를 결합하여 '로마 제국프랑크 왕국의 부활'을 내세웠으며, 이는 그의 인장에도 나타났다.

그러나 황제위 계승 후보였던 이복형 동프랑크 왕 루트비히 2세는 이에 반발하여 카롤루스 2세의 영토를 침략했고, 카롤루스는 급히 서프랑크 왕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876년 8월 28일 동프랑크 왕 루트비히 2세가 사망하자, 카롤루스 2세는 이 기회를 틈타 그의 왕국을 차지하려 아헨, 쾰른 등을 침공했다. 하지만 같은 해 10월 8일, 안데르나흐 전투에서 동프랑크 왕 루트비히 2세의 아들 루트비히 3세가 이끄는 군대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하였다.[6][19]

한편, 사라센족의 위협에 직면한 교황 요한 8세는 카롤루스 2세에게 이탈리아로 와서 방어해 줄 것을 촉구했다. 877년, 카롤루스 2세는 다시 알프스 산맥을 넘었으나, 이번 원정은 귀족들의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다. 심지어 롬바르디아의 섭정으로 임명했던 보소마저 군대 합류를 거부했고, 주요 봉신들 또한 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동시에 동프랑크 왕 루트비히 2세의 또 다른 아들인 카를만이 군대를 이끌고 북부 이탈리아로 진입했다.

결국 카롤루스 2세는 병이 들었고(늑막염으로 추정[20]), 갈리아로 회군을 결정했다. 그러나 877년 10월 6일, 몽세니 고개를 넘던 중 브리드레뱅(Brid-les-Bains)에서 병세가 악화되어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7][21]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두고, 한때 유대인 의사 시드기야(Zédéchias)와 카롤루스의 후처 리첼다가 공모하여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그의 뒤는 아들 루이 2세(말더듬이 왕)가 이었다.

2. 5. 사후

카를 2세의 석관묘 스케치본


카롤루스 2세가 사망한 후, 독일왕 루트비히 2세의 아들인 카를로만 3세는 이탈리아의 루트비히 2세가 자신을 후계자로 지목했다는 점과 카롤루스 2세가 불법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자리를 차지했다는 이유를 내세워 황제 제관을 요구했다. 하지만 로마 교황청은 이를 거부했다. 한편, 교황청은 카롤루스 2세의 아들 루이 2세(말더듬이왕)에게 제관을 제안했으나, 그가 이를 거절하면서 황제 자리는 공석으로 남게 되었다.

카롤루스 2세의 시신은 부패가 심각하여 파리까지 운구하기 어려웠다. 생 베르탱 연대기에 따르면, 시신 운반자들이 부패로 인한 악취를 견디지 못해 서둘러 브르고뉴의 낭튀아 수도원에 임시로 안치했다고 한다. 얼마 후, 아들 루이 2세(말더듬이왕)의 요청에 따라 시신은 생드니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카롤루스 2세는 생전인 867년에 이미 생드니 대성당에 자신의 안치될 자리를 마련해 두었다.[8] 그는 반암으로 만들어진 욕조에 안치되었는데, 이는 '다고베르의 욕조'(cuve de Dagobert프랑스어)와 동일한 것일 수 있으며,[9]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10] 생드니 대성당에서는 그의 부인 오를레앙의 이르멘가르트 옆에 안치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이 한창이던 1792년 8월 10일, 그의 묘소는 혁명 세력에 의해 파괴되었고, 묘소에 있던 기념 놋쇠 장식도 녹아 없어졌다고 전해진다. 이후 누군가가 그의 석관묘를 스케치한 그림 몇 점을 남겼으나, 묘소는 복원되지 못했다.

카롤루스 2세의 왕위는 아들 루이 2세가 계승했다. 카롤루스 2세는 교육과 문학을 중시했던 군주였으며, 교회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반항적인 귀족 세력에 맞서기 위해 주교단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고, 생의 구에넬롱이나 랭스의 힝크마르와 같은 고위 성직자들을 자신의 고문관으로 삼았다.

3. 가계


  • 부왕 : 경건왕 루트비히 (루트비히 1세)
  • 모후 : 바이에른의 유디트
  • * 누이 : 기셀라
  • * 매부 : 에버하르트(프리울리 후작)
  • ** 외조카 : 베렝가리오 1세, 이탈리아의 왕
  • 이복 형 : 로타르 1세 (모후: 헤스바니아의 에르망가르드)
  • 이복 형 : 피핀 (모후: 헤스바니아의 에르망가르드)
  • 이복 형 : 독일왕 루트비히 (모후: 헤스바니아의 에르망가르드)
  • 이복 누나 : 아델라이드 (모후: 헤스바니아의 에르망가르드)
  • * 이복 매형 : 네우스트리아의 로베르 (로베르 르 포르)
  • ** 이복 외조카 : 외드
  • ** 이복 외조카 : 로베르 1세


카롤루스 2세는 842년 오를레앙 백작 오도 1세의 딸 에르멘트루트와 결혼했다. 그녀는 869년에 사망했다. 870년, 그는 로타링기아 귀족 가문 출신인 리힐데와 결혼했다. 리힐데는 프로방스의 보소의 누이였다.

  • 왕후 : 에르멘트루트(830년경 - 869년 10월 6일), 오를레앙 백작 오도의 딸. 842년 결혼.
  • * 딸 : 유디트 (Judith, 843/844년경 - 870년 이후) - 첫 결혼: 웨식스 왕 에설울프, 두 번째 결혼: 웨식스 왕 애설발드(에설울프의 아들), 세 번째 결혼: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1세
  • * 아들 : 루이 2세 말더듬이왕 (Louis II, 846년 11월 1일 - 879년 4월 10일) - 서프랑크
  • * 아들 : 어린 샤를 (Charles the Child, 847/848년 - 866년 9월 29일) - 아키텐 왕
  • * 아들 : 로타르 (Lothar the Lame, 848년경 - 866년) - 861년 수도사가 되어 생제르맹 수도원장 역임.
  • * 아들 : 카를로만 (Carloman, 849년경 - 876년) - 생메다르 수도원장.
  • * 딸 : 로트루드 (Rotrude, 852년 - 912년경) - 수녀, 생 라데군드 수도원장.
  • * 딸 : 에르멘트루드 (Ermentrude, 854년경 - 877년) - 수녀, 하스농(Hasnon) 수도원장.
  • * 딸 : 힐데가르드 (Hildegarde, 856년경 출생, 요절)
  • * 딸 : 기젤라 (Gisela, 857/858년경 - 874년)
  • * 딸 : 고데힐드 (Godehilde, 864년경 - 907/923년경) - 멘 백작 고드프루아 3세(또는 고즐랭)와 결혼.

  • 계비 : 리힐데 (Richilde, 845년경 - 910년 6월 2일), 프로방스의 보소의 누이. 870년 결혼.
  • * 딸 : 로틸드 (Rothilde, 871년 - 928/929년) - 첫 결혼: 부르주 백작 위그, 두 번째 결혼: 멘 백작 로제.
  • * 아들 : 드로고 (Drogo, 872년 - 873년)
  • * 아들 : 피핀 (Pippin, 873년 - 874년)
  • * 아들 : 이름 미상 (875년 출생 및 사망)
  • * 아들 : 샤를 (Charles, 876년 - 877년)

4. 기타

그를 일반적인 의미에서 근대 국가 프랑스의 첫 군주로 간주하기도 한다.

카롤루스 2세는 '대머리왕(칼부스)'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그가 대머리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역사적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18] 동시대 기록에서 그의 외모, 특히 머리카락에 대해 조롱한 내용이 발견되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가 대머리가 아니었거나 당시 사회에서 대머리가 조롱의 대상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19] 오히려 845년에 제작된 성경의 삽화, 847년과 875년의 인장, 약 870년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기마상 등 동시대의 묘사에서는 그가 풍성한 머리숱을 가진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카롤루스 2세 연구자인 자넷 넬슨(Janet Nelson)은 그의 외모가 할아버지인 카롤루스 대제와 닮았으며, 카롤루스 대제가 "백발이 아름답다"고 칭송받았던 점을 들어 카롤루스 2세 역시 대머리가 아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18]

'대머리왕'이라는 별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가장 널리 알려진 설은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 루도비쿠스 1세로부터 영토를 분배받지 못했기 때문에 '영토 없는 왕', 즉 '대머리'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별명은 10세기경 기록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그의 형들이 이미 왕으로서 통치하고 있을 때에도 오랫동안 영토를 갖지 못했던 상황을 조롱하는 의미에서 '대머리'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다.[14] 라인하르트 레베(Reinhard Lebe)는 저서 『카롤루스 대머리왕은 정말로 대머리였는가』에서 영지 부재설 외에도 10세 때 수도원에 보내져 삭발당했기 때문이라는 설 등을 소개했지만, 신빙성은 낮다고 보았다. 레베는 오히려 계속된 전쟁과 정치적 어려움 속에서 실제로 머리카락이 빠져 대머리가 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후크발트(Hucbald)가 쓴 라틴어 시 "Carmina clarisonae calvis cantate Camenae"(대머리를 위한 노래)를 근거로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가 실제로는 토술라(승려들의 삭발 관습)를 칭찬하는 내용이라는 반론도 있다.[18]

카롤루스 2세가 언제부터 '대머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는지는 명확하지 않다.[18] 다만, 869년경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프랑크 왕들의 계보』에서 이미 그를 "Karolus Calvus", 즉 '대머리 카롤루스'라고 칭하고 있다.[17][19] 이후 10세기 말 랭스의 리체르와 샤바네의 아데마르 같은 역사가들도 공식적인 기록에서 그를 '카롤루스 대머리왕'이라고 불렀다.[22]

한편, 카롤루스 2세는 문화와 예술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여 니타르트와 같은 문인들을 등용하고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다시 꽃피우는 데 기여했다. 또한 가톨릭교회와의 긴밀한 협력 관계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고 왕으로서의 권위를 높였다.

참조

[1] 문서
[2] 서적 Du royaume franc aux origines de la France et de l'Allemagne 800–1214 Presses Universitaires du Septentrion 2014
[3] 서적 Les Carolingiens et al-Andalus (VIIIe–IXe siècles) https://www.worldcat[...] Maisonneuve et Larose 2002
[4] 간행물 Trois Palais Royaux de la Vallée de l'Oise d'après les travaux des érudits mauristes: Compiègne, Choisy-au-Bac et Quierzy 1976
[5] 간행물 A King Praises Himself: The Letters of Charles the Bald to Pope Hadrian II http://dx.doi.org/10[...] 2024
[6] 문서 Annales Vedastini
[7] 문서 Annales Vedastini
[8] 문서 Rituals of Powers: From Late Antiquity to the Early Middle Ages
[9] 서적 La France avant la France, (481–888) Belin 2010
[10] 웹사이트 Cuve dite 'de Dagobert ' http://cartelfr.louv[...]
[11] 문서 世界大百科事典 第2版
[12] 문서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
[13] 문서 『百科事典マイペディア』
[14] 문서
[15] 문서
[16] 문서
[17] 문서
[18] 문서
[19] 문서
[20] 문서
[21] 문서
[22] 문서
[23] 문서
[24] 문서 http://msn.wine21.co[...]
[25] 문서
[26] 문서
[27] 문서 Annales de Saint-Bertin , Pag 99 http://gallica.bnf.f[...]
[28] 서적 교회사 콘서트 한국학술정보 2013
[29] 문서
[30] 서적 Charles the Bald Longman Publishing Company 1992
[31] 서적 이야기 독일사 청아출판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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