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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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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옹기장은 옹기를 제작하는 장인을 의미하며,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등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30호 옹기장 배요섭은 푸레옹기 제작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 옹기장 박재환은 전통 옹기 제작 기술을 전승하고 있다. 옹기 제작 기술은 세대를 거쳐 전승되며, 옹기의 가치와 중요성을 알리기 위한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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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장
옹기장
옹기
옹기
유형국가무형문화재
지정 번호96
지정일1990년 5월 8일
전승 국가대한민국

2. 지정 현황

옹기는 한국의 전통적인 그릇으로, 국가 및 여러 지방자치단체에서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지정 번호명칭비고
국가무형문화재 제96호옹기장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30호옹기장푸레옹기 제작 기술 보유 (배요섭)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옹기장박재환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38-1호옹기장홍성군


2. 1.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제9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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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30호

옹기 장인 배요섭의 조부와 부친도 천주교인이었으며, '요섭'이라는 그의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이 집안의 공방은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모전리에 있다. 조부인 배경춘(1927년 사망) 때부터 가업으로 이어온 옹기일은 3대에 걸쳐 자연스럽게 전승되었으며, 옹기 이외의 일에는 눈을 돌리지 않고 줄곧 외길을 걸어온 전형적인 대물림 장인이다. 배요섭의 전승 계보는 다음과 같다.




배경춘 → 배의석 → 배요섭




1955년, 배요섭은 서울 중랑구 신내동 피울점으로 공방을 옮겨 부친과 함께 '한미요업'이라는 옹기 전문점을 열고 주로 서울, 경기지역의 독자적인 옹기 형식을 유지하면서 제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68년(42세), 부친이 사망하자 공방을 주도적으로 운영해 나갔으며, 장성한 두 아들(둘째 배연식, 셋째 배춘식)을 입문시켜 가업을 계승토록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부와 부친을 통해 가승된 서울 지역의 고유한 옹기 양식이 배요섭과 그의 아들을 통하여 원형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서 그 정통적 측면이 주목된다.[1]

배요섭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푸레옹기를 제작할 수 있는 장인이다. 푸레옹기는 유약을 입히지 않은 질그릇의 일종으로, 근래까지 경기도 북부의 전곡을 중심으로 제작되던 옹기 기법이다. 고온의 가마 번조에서 생겨난 재를 자연스럽게 녹아내리게 함으로써 연한 녹색 계열의 재유가 발색된 상태에서(약 1250°C), 약간의 천일염을 가마 봉통 안에 뿌려주고, 그 위에 다시 연기를 씌워 검은색을 입히는 방식으로 생산된다. 소금의 나트륨 성분과 나무 재가 상호 작용하여 매우 얇은 피막이 형성된,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옹기이다.[1]

저온에서 연기를 먹이는 기술은 보편화되어 있으나, 고온에서는 연이 쉽게 타버리기 때문에 난이도가 높은 고급 기술로 손꼽히고 있으며, 배요섭이 유일하게 제작할 수 있다. 푸레옹기 기법은 세계적으로도 그 가치가 인정되고 있으며, 여러 차례에 걸친 해외 현지 활동을 통해서 이 기법이 널리 소개되어 세계 각국의 많은 작가들이 전수를 희망하고 있다.[1]

2. 3.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 봉산리 346번지에 위치해 있다.

2. 3. 1. 옹기장 기능보유자 박재환의 생애

박재환은 1932년 6월 충청북도 청원군 강내면 봉산리 점촌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박원규는 옹기를 만들었고, 어머니 최복순은 옹기를 팔았다.[1] 넉넉하지 않은 가정 형편 때문에 박재환은 어린 시절부터 쑥, 냉이 등을 캐다 팔고, 동네 아기를 돌보며 생계를 도왔다.[1]

1941년, 아버지가 일본 탄광으로 끌려갔다가 발목을 다쳐 돌아오면서 가세가 기울었다.[1] 아버지는 이듬해 세상을 떠났고, 박재환은 11살에 옹기 공장에 취업하여 형과 함께 허드렛일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1]

옹기 공장에서 일한 지 3년째 되던 해, 박재환은 처음으로 옹기 뚜껑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1] 그는 남다른 재능을 보여 15살에는 똥장군을 만들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1] 1950년에는 정미소 기계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새로운 물레를 제작하여 생산성을 높였다.[1] 20대 중반에는 일류 옹기장과의 시합에서 이겨 '일류 옹기장'이라는 별칭을 얻었다.[1]

1956년, 박재환은 김정순과 결혼한 후, 전국 각지의 옹기 고수들을 찾아다니며 기술을 배웠다.[1] 그는 1958년 보은 송평리 옹기공장에서 가마 온도 조절 기술을,[1] 1959년부터 3년간 용인 삼계리 옹기공장에서 흙 다루는 기술을,[1] 1961년부터 5년간 안성 양협리 옹기공장에서 큰 단지 만드는 기술을 익혔다.[1] 1967년부터 2년간 연기 용담리 옹기 공장에서 기름으로 불 때는 기술을 배웠고,[1] 1969년부터 2년간 인천 경서동 옹기공장에서 큰 가마 다루는 기술을 배우며 후배들을 지도했다.[1]

1971년, 고향으로 돌아온 박재환은 옹기공장을 인수하고 옛 가마를 수선하여 옹기 제작을 이어갔다.[1] 그러나 플라스틱 등의 등장으로 옹기 수요가 줄면서 어려움을 겪었다.[1] 1979년에는 광명단 유약의 납 허용치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1982년 납 허용치를 높이는 데 성공했다.[1]

2003년, 박재환은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 옹기장으로 지정되었다.[1] 2010년 울산 세계옹기문화엑스포 광고 모델로 활동하고,[1] 2009년 캐나다 세계 무형문화재 작품전에 똥장군을 출품하는 등 한국 전통 옹기를 알리는 데 힘썼다.[1] 그의 아들 박성일이 옹기 제작 비법을 전수받아 가업을 잇고 있다.[1]

2. 4.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38-1호

홍성군 옹기장은 2013년 10월 30일에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38-1호로 지정되었다.[1]

3. 옹기 제작 기술

옹기 제작 기술은 지역과 장인에 따라 다양한 특징을 보인다.

푸레옹기는 유약을 바르지 않고 잿물과 소금을 이용해 독특한 색을 내는 경기도 북부 지역의 옹기 제작 방식이다. 배요섭 장인은 국내 유일의 푸레옹기 제작 기술 보유자이다. 푸레옹기는 1250°C 정도의 고온 가마에서 구울 때 생기는 재가 자연스럽게 녹아내려 연한 녹색 계열의 재유약이 발색된 상태에서, 약간의 천일염을 가마 봉통 안에 뿌려주고, 그 위에 다시 연기를 씌워 검은색을 입히는 방식이다.[1]

충청북도에서는 박재환 장인이 전통 옹기 제작 기술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전국 각지를 돌며 다양한 옹기 기술을 익혔고, 옹기 산업의 쇠퇴 속에서도 전통 방식을 고수하며 옹기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있다. 박재환은 1932년 충청북도 청원군 강내면 봉산리(현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 봉산리)에서 태어났으며, 6대조부터 옹기장이 가업을 이어왔다.[1]

3. 1. 푸레옹기 (배요섭)

배요섭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푸레옹기를 제작할 수 있는 장인이다. 푸레옹기는 유약을 입히지 않은 질그릇의 일종으로, 근래까지 경기도 북부의 전곡을 중심으로 제작되던 옹기 기법이다. 1250°C 정도의 고온 가마에서 구울 때 생겨난 재가 자연스럽게 녹아내려 연한 녹색 계열의 재유약이 발색된 상태에서, 약간의 천일염을 가마 봉통 안에 뿌려주고, 그 위에 다시 연기를 씌워 검은색을 입히는 방식이다. 소금의 나트륨 성분과 나무재가 상호 작용하여 매우 얇은 피막이 형성된,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옹기이다.[1]

저온에서 연기를 먹이는 기술은 보편화되어 있으나, 고온에서는 연기가 쉽게 타버리기 때문에 난이도가 높은 고급 기술로 손꼽히며, 배요섭이 유일하게 제작할 수 있다. 푸레옹기 기법은 세계적으로도 그 가치가 인정받고 있으며, 여러 차례에 걸친 해외 현지 활동을 통해 이 기법이 널리 소개되어 세계 각국의 많은 작가들이 전수를 희망하고 있다.[1]

3. 2. 전통 옹기 (박재환)

박재환은 1932년 6월 충청북도 청원군 강내면 봉산리(현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 봉산리) 점촌마을에서 태어났다. 6대조 박예진이 200여 년 전 봉산리 점촌마을에 들어와 옹기를 굽기 시작한 이래, 옹기장이가 가업으로 이어졌다.[1] 아버지 박원규는 옹기를 만들었고, 어머니 최복순은 옹기를 팔았다.[1]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박재환은 어린 시절부터 쑥, 냉이 등을 팔고, 아기를 돌보며 생계를 도왔다.[1] 1941년 아버지가 일본 탄광 사고로 발목을 잃고 이듬해 세상을 떠나자, 11세에 옹기 공장에 취업하여 형과 함께 허드렛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1]

3년 후 옹기 뚜껑 제작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고, 15세에는 고난도 기술이 필요한 똥장군을 능숙하게 만들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1] 1950년에는 물레를 개량하여 생산성을 높여 '전국에서 뚝배기를 제일 잘 만든다'는 소문이 났다.[1] 20대 중반에는 일류 옹기장과의 시합에서 이겨 '일류 옹기장'이라는 별칭을 얻었다.[1]

결혼 후, 박재환은 전국 각지의 옹기 고수들을 찾아다니며 기술을 배웠다.[1] 보은군 송평리(1958년)에서는 가마 온도 조절 기술,[1] 용인시 삼계리(1959년~1961년)에서는 흙 다루는 기술,[1] 안성시 양협리(1961년~1966년)에서는 큰 단지 제작 기술,[1] 연기군(현 세종특별자치시) 용담리(1967년~1968년)에서는 기름 가마 사용 기술,[1] 인천광역시 경서동(1969년~1970년)에서는 큰 가마 다루는 기술을 익혔다.[1]

1971년 고향으로 돌아와 옹기 공장을 인수하고 가마를 수선했지만, 플라스틱 등의 등장으로 옹기 산업이 쇠퇴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1] 1979년에는 광명단 납 허용치 규정으로 인해 '국민 보건을 해치는 사람'으로 몰리기도 했으나, 노력 끝에 1982년 납 허용치를 완화시켰다.[1]

2003년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 옹기장으로 지정되었고,[1] 2010년 울산 세계옹기문화엑스포 광고 모델, 2009년 캐나다 세계 무형문화재 작품전 참가 등 전통 옹기를 알리는 활동을 했다.[1] 현재는 문의문화재단지 내 옹기전수관에서 옹기 제작 시연 및 체험 활동을 제공하고 있다.[1]

셋째 아들 박성일이 옹기 제작 비법을 전수받아 가업을 잇고 있으며, 손자도 8대째 가업을 이을 준비를 하고 있다.[1] 박재환은 전통 옹기의 색과 빛을 강조하며, 옛 방식을 따르는 옹기 제작의 중요성을 강조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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