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직 (15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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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경직은 1577년에 태어나 1640년에 사망한 조선 시대의 문신이다. 1601년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605년 식년시와 증광별시에 잇달아 합격하며 관직에 진출했다. 광해군 때 승정원, 시강원, 춘추관 등에서 봉직했으며, 1617년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다. 인목대비 폐위 사건에 연루되어 잠시 향리에 머물렀으나, 이후 철산부사로 파견되어 백성을 보살폈다. 인조반정 이후 의주부윤, 전라도절도사, 수원부윤 등을 역임했으며, 병조참판, 도체찰부사, 호조참판 등을 거쳐 1636년 청나라의 침입 당시에는 남한산성에서 활약했다. 이후 호조판서, 도승지를 지냈으며, 강화유수로 재임하던 중 병으로 사망했다. 사후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효민이다.
이경직은 1601년(선조 34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1605년 식년시와 증광별시에 잇달아 합격했다. 광해군 때 승정원, 시강원, 춘추관, 홍문관, 병조 등에서 봉직했고, 1617년 오윤겸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618년 인목대비 폐위 사건 때 조회에 불참하여 탄핵받고 5년간 향리에 머물렀다. 이후 모문룡이 철산군 가도에 군대를 주둔하는 문제로 이경직이 철산부사로 파견되었는데, 백성을 잘 보살펴 명군을 감화시켰다고 한다.
이경직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2. 생애
1623년 인조반정 후 의주부윤으로 좋은 정치를 베풀었고, 1624년 이괄의 난 때 전라도절도사로서 왕을 호종했다. 이후 수원부사와 개성유수를 지냈다. 1626년 장예원 판결사, 병조참판, 비변사 제조를 겸하였다. 1629년 도체찰부사, 호조참판, 예조참판, 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1634년 도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부친상을 당했고, 1636년 호군, 비변사 당상관을 겸하였다. 병자호란 당시 최명길과 함께 남한산성에서 청과의 교섭에 활약했고 도승지가 되었다.
1637년 인조가 환궁하자 호조판서, 도승지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지중추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했다. 1639년 강화유수로 전후 복구에 힘썼으나, 1640년 병으로 64세에 순직했다. 사후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효민(孝敏)이다.[1]
2. 1. 초기 생애 및 관직 진출
이경직은 1601년(선조) 생원시와 진사시 양시에 합격하고, 1605년 식년시와 증광별시에 잇달아 합격하는 등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승문원에 소속되었다가 광해군 때 승정원, 시강원, 춘추관, 홍문관, 병조 등에서 봉직했고, 1617년 여름 회답사(回答使) 오윤겸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일본에 다녀왔다.[1]
1618년 인목대비 폐위 사건 때 조회에 불참한 일로 탄핵받아 5년간 향리에 머물렀다. 그러던 중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철산군 가도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문제가 일어나자, 조정에서 그곳을 부(府)로 승격시키고 이경직을 철산부사로 파견했는데, 자애로운 마음으로 백성을 보살펴 명군을 감화시켰다고 전해진다.[1]
2. 2. 인목대비 폐위 사건과 철산부사 시절
1618년 인목대비 폐위 사건 때 조회에 불참한 일로 탄핵받아 5년간 향리에 머물렀다.[1] 그러던 중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철산군 가도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문제가 일어나자, 조정에서 철산군을 부(府)로 승격시키고 이경직을 철산부사로 파견했다. 이경직은 자애로운 마음으로 백성을 보살펴 명군을 감화시켰다고 전해진다.[1]
2. 3. 인조반정 이후 활동
1623년 인조반정 후 의주부윤이 되어 좋은 정치를 베풀었고, 1624년 이괄의 난 때 전라도절도사로서 왕을 모셨고, 그 뒤 수원부사와 개성유수(開城留守)를 지냈다.[1] 1626년 다시 서울로 와 장예원 판결사를 거쳐 병조참판으로 비변사 제조를 겸하였다.[1] 1629년 도체찰부사(都體察副使)로 활약했고 이후 호조참판, 예조참판, 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1] 모친상을 마친 뒤 1634년 도승지에 임명되나 다시 부친상을 당했고,[1] 1636년 다시 호군(護軍)에 임명되어 비변사 당상관을 겸하였다.[1] 그 해 12월 청나라 군대가 침입하자 이조판서 최명길과 함께 모화관(慕華館)에서 청의 장수를 만났으나 그들의 의도가 강화(講和)에 있지 않음을 알고 바로 남한산성으로 왕을 따라갔다.[1] 남한산성에서 청과의 교섭에 있어 중국어에 능통한 그가 활약했고 도승지가 되었다.[1]
1637년 봄 인조가 서울로 돌아오자 호조판서로 승진하고 다시 도승지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지중추부사로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했다.[1] 1639년 봄 강화유수(江華留守)에 임명되어 전쟁 후 복구에 힘썼는데, 병으로 1640년 7월 임소에서 64세로 순직했다.[1] 사후 우의정에 추증되었다.[1] 시호는 효민(孝敏)이다.[1]
2. 4. 남한산성 항전과 사망
1636년 12월 청나라 군대가 침입하자 이조판서 최명길과 함께 모화관(慕華館)에서 청의 장수를 만났으나, 그들의 의도가 강화(講和)에 있지 않음을 알고 바로 남한산성으로 왕을 뒤따라갔다.[1] 남한산성에서 청과의 교섭에 있어 중국어에 능통한 이경직이 활약했고 도승지가 되었다.[1]
1637년 봄 인조가 서울로 환궁하자 호조판서로 승진하고 다시 도승지에 서용되었으며,[1] 이듬해 지중추부사로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했다.[1] 1639년 봄 강화유수(江華留守)에 제수되어 전후 복구에 힘썼는데,[1] 1640년 7월 병으로 임소에서 64세로 순직했다.[1] 사후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1] 시호는 효민(孝敏)이다.[1]
3. 가계
아들 | 손자 |
---|---|
이장영(李長英) | 이집성(李集成), 이민성(李敏成), 이구성(李九成), 이관성(李觀成), 이노성(李老成), 이현성(李玄成) |
이후영(李後英) 혹은 이기영(李起英) | 이익성(李翼成), 이덕성(李德成) |
이정영(李正英)[8] | 이만성(李晩成), 이대성(李大成) |
3. 1. 조부 및 부모
- 조부: 이수광(李秀光) (함풍군 묘역 역내)
- 부: 이유간(李惟侃) (함풍군 묘역 옆, 장자 효민공 이경직 묘역 역내)
- 모: 개성 고씨, 고한량(高漢良)의 딸
3. 2. 형제
3. 3. 자녀 및 후손
- 조부: 이수광(李秀光)
- 부: 이유간(李惟侃)
- 모: 개성 고씨, 고한량(高漢良)의 딸
- 부인: 보성 오씨, 오경지의 딸
- 부인: 고성 이씨, 이성길(李成吉)의 딸
아들 | 손자 |
---|---|
이장영(李長英) | 이집성(李集成), 이민성(李敏成), 이구성(李九成), 이관성(李觀成), 이노성(李老成), 이현성(李玄成) |
이후영(李後英) 혹은 이기영(李起英) | 이익성(李翼成), 이덕성(李德成) |
효간공(孝簡公) 서곡(西谷) 이정영(李正英)[8] | 이만성(李晩成), 이대성(李大成) |
3. 4. 부인
보성 오씨 오경지의 딸과 고성 이씨 이성길의 딸이다.[8]참조
[1]
문서
후릉 (조선)
[2]
문서
덕천군 묘역
http://www.cha.go.kr[...]
문화재자료 제6호
[3]
문서
신종군 묘역
http://www.seongnam.[...]
향토유적 제8호
[4]
문서
완성군 묘역
http://www.cha.go.kr[...]
기념물 제17호
[5]
문서
함풍군 묘역 및 아들 이수광 묘소
[6]
문서
효민공 석문 이경직 묘역 및 부친 우곡 이유간 묘소
http://www.cha.go.kr[...]
유형문화재 제105호
[7]
문서
문충공 백헌 이경석 묘역
http://www.cha.go.kr[...]
기념물 제84호
[8]
문서
효간공 서곡 이정영 묘역
http://www.cha.go.kr[...]
유형문화재 제9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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