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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문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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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문룡은 1576년 항주에서 태어나 명나라 말기의 군인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요동 지역에서 후금과 대항하며 가도에 동강진을 설치했으나, 부정부패와 직무 태만으로 명나라 장군 원숭환에게 처형당했다. 모문룡은 조선을 후금 공격의 기지로 삼아 정묘호란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으며, 사후 그의 부하들이 청나라에 투항하여 명나라 멸망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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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문룡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모문룡
본명모문룡 (毛文龍)
진남 (振南)
출생일1576년 2월 10일
출생지저장성 항저우시 상청구
사망일1629년 7월 24일
사망지랴오닝성 다롄시 뤼순커우구
국적명나라
직업무장
가족 관계
배우자처 장씨 (張氏), 첩 문씨 (文氏), 진씨 (陳氏), 심씨 (沈氏)
모위 (毛偉)
심씨 (沈氏)
자녀아들 모승두 (毛承斗), 조카이자 양자 모승록 (毛承祿)
군사 정보
주요 활동 지역가도
사망 원인참수

2. 생애

1621년 후금의 누르하치가 심양과 요양을 함락하자, 모문룡은 패잔병을 이끌고 압록강변의 진강을 점령했다.[56] 그러나 같은 해 후금의 아민이 이끄는 5천 군사의 기습으로 578명의 유민이 사망했고, 모문룡은 조선인 복장으로 도망쳤다.[56]

1621년 7월, 모문룡은 평안도 철산 앞바다의 가도에 상륙하여[57] 명나라 패잔병과 난민을 수습하며 민가를 약탈했다. 광해군은 모문룡의 주둔을 허락했고, 명군과 난민 1만여 명이 가도에 머물렀다.[56] 이들은 부족한 식량을 조선에서 군량을 강요해 징수하거나 명나라로부터 지원받았다. 이때 징수한 서량(西糧)은 1648년까지 계속 징수되었다.[58]

모문룡은 조선을 후금 공략 기지로 삼겠다며 한족들을 동원해 후금을 자극하고 조선 국경을 어지럽혔다. 1622년 10월, 명나라는 이러한 공을 인정하여 모문룡에게 총병 직책을 부여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도를 거점으로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교역에 집중했다.[56]

모문룡의 존재는 1627년 인조 5년에 후금의 침입(정묘호란)을 야기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후금군이 조선을 침략하자 모문룡은 도망쳤다가 정묘호란이 끝난 후 되돌아와 일부 조선인들이 후금과 함께 가도를 공격했다는 이유로 평안도 양민들을 학살하였다.

1629년 모문룡은 좌도독이 되었으나, 전략적 이점에도 불구하고 여러 주요 도시들을 방비하지 못해 베이징 지역 주민들의 분노를 샀다. 또한 위충현 등 많은 환관들에게 뇌물을 바치며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결국 같은 해 6월 30일 명나라의 충신 원숭환에 의해 직무태만과 부정부패를 이유로 참수당했다.

2. 1. 초기 생애와 군 경력

1576년 항주에서 태어났으며, 젊었을 때는 점쟁이 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 후 북쪽의 산해관으로 가서 1600년 경에 군인이 되었다.[1][2]

1605년 요동 총병 이성량 휘하에서 군공을 세웠다.[2] 지형 분석에서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아,[3] 1608년 봉성의 아이양 지휘관이 되었다. 10년 넘도록 승진하지 못하자 군에서 제대하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4] 1619년 새로운 총독 웅정필(Xiong Tingbi)이 임명되었고, 여진족의 침입이 증가함에 따라 국경 지역에서 초토화 작전을 수행하도록 모문룡에게 명령했으며,[5] 이를 통해 이듬해 승진했다.[6]

1621년 3월 심양과 요양이 누르하치에 의해 함락되자 패잔병을 이끌고 압록강변의 진강을 점령했다.[56] 같은 해 7월 압록강 하류 부근을 탈환했으나, 그해 말 누르하치의 반격을 받고 왕화정으로부터 이탈하여 부하 상가희, 긍중명, 공유덕 등을 이끌고 조선 평안도 철산군 철산 앞바다의 폄도와 신미도로 망명하였다.

2. 2. 후금과의 항쟁과 동강진 설치

1621년 후금의 누르하치가 심양과 요양을 함락하자, 모문룡은 패잔병을 이끌고 압록강변의 진강을 점령했다.[56] 그러나 같은 해 후금의 아민(阿敏)이 이끄는 5천 군사의 기습으로 578명의 유민이 사망했고, 모문룡은 조선인 복장으로 도망쳤다.[56]

1621년 7월, 모문룡은 평안도 철산 앞바다의 가도에 상륙하여[57] 명의 패잔병과 난민을 수습하며 민가를 약탈했다. 광해군은 모문룡의 주둔을 허락했고, 명군과 난민 1만여 명이 가도에 머물렀다.[56] 이들은 부족한 식량을 조선에서 군량을 강요해 징수하거나 명나라로부터 지원받았다. 이때 징수한 서량(西糧)은 1648년까지 계속 징수되었다.[58]

모문룡은 조선을 후금 공략 기지로 삼겠다며 한족들을 동원해 후금을 자극하고 조선 국경을 어지럽혔다. 1622년 10월, 명나라는 이러한 공을 인정하여 모문룡에게 총병 직책을 부여했다. 그러나 모문룡은 가도를 거점으로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교역에 집중했다.[56]

모문룡의 이러한 행보는 1627년 인조 5년에 후금의 침입(정묘호란)을 야기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후금군이 조선을 침략하자 모문룡은 도망쳤다가 정묘호란이 끝난 후 되돌아와 일부 조선인들이 후금과 함께 가도를 공격했다는 이유로 평안도의 양민들을 학살하였다.

1605년 모문룡은 요동 총병 이성량 휘하에서 군공을 세웠다. 1621년, 누르하치가 이끄는 후금이 요양부를 함락시키자, 광녕순무 왕화정 휘하에서 좌도독이 되어 요동반도 연안 주민들을 위무하고, 같은 해 7월 압록강 하류 부근을 탈환했다. 그러나 같은 해 말 누르하치의 반격을 받고 왕화정으로부터 이탈하여, 부하 상가희, 긍중명, 공유덕 등을 이끌고 조선 평안도 철산군 철산 앞바다의 폄도와 신미도로 망명하였다. 모문룡은 후금의 후방을 교란하여 공격하는 게릴라전으로 싸운다는 명분으로, 폄도에 동강진을 설치하고 8영을 두어 근거지로 삼아, 1629년 죽기 직전까지 조선에 머물렀다. 이것이 1627년 정묘호란 발발의 원인이 되었다.

1629년 모문룡은 좌도독이 되었으나, 전략적 이점에도 불구하고 여러 주요 도시들을 방비하지 못해 베이징 지역 주민들의 분노를 샀다. 또한 위충현 등 많은 환관들에게 뇌물을 바치며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결국 같은 해 6월 30일 명나라의 충신 원숭환에 의해 직무태만과 부정부패를 이유로 참수당했다.

모문룡 사후, 명 조정은 진계성을 후임으로 파견했으나, 통솔력 부족으로 유흥치 형제 등 여러 장수들이 이반했다. 유흥치는 동생 유흥조 등과 함께 누르하치의 아들 홍타이지에게 항복하고 진계성을 비롯한 백여 명을 참살했다.

2. 3. 조선과의 관계 악화와 정묘호란

1621년 후금아민이 5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 가산, 용천 등을 습격했을 때, 모문룡은 요동 전체를 수복하겠다고 장담했으나, 용천 관아에서 조선인 복장을 하고 도망쳤다. 이 기습으로 유민 578명이 죽었다.[56]

1621년 7월, 후금의 대병력이 내려오자 모문룡은 평안도 철산군 앞바다의 가도에 상륙하여[57] 철산, 용천, 의주 등을 돌아다니면서 명나라 패잔병과 난민을 수습하며 민가에 대한 약탈을 일삼았다.[56] 1622년 (광해군 14년) 광해군은 모문룡이 철산의 가도에 주둔하는 것을 허락했고, 명군과 난민 1만여 명이 이곳에 머물렀다.[56] 이들은 부족한 식량을 조선에 군량을 강요해 징수했으며, 명나라로부터도 지원을 받았다. 이때 징수한 서량(西糧)은 모문룡이 철수한 뒤에도 계속 징수되다가 1648년 (인조 22년)에야 폐지되었다.[58]

모문룡은 명나라의 우방인 조선을 후금의 공략 기지로 삼겠다며 한족들을 동원해 후금을 자극하고 조선의 국경을 어지럽혔다.[56] 모문룡의 존재는 1627년(인조 5년) 조선이 후금의 침입(정묘호란)을 받게 된 주요한 원인이었는데, 후금군이 조선을 침략하자 모문룡은 도망쳤다가 정묘호란이 끝난 후 되돌아와 일부 조선인들이 후금과 함께 가도를 공격했다는 이유로 평안도의 양민들을 학살하였다.

2. 4. 원숭환과의 대립과 처형

원숭환천계제가 하사한 보검을 소지한 모문룡이 자신의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44][45][46] 모문룡은 동강 주둔군 유지 비용이 국고에 과도한 부담을 주고, 그의 장교들에게 항명과 부정부패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다른 정부 관리들의 탄핵을 받았다. 1629년 초 모문룡이 원숭환이 자신의 군대 재정을 감사할 관리를 임명하는 것을 거부하자, 원숭환은 모문룡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다.[47]

1629년 6월 1일, 원숭환은 모문룡과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뤼순에 도착했지만, 사흘간의 협상 끝에도 모문룡은 원숭환이 자신의 주둔군의 군수품을 임명하고 관리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자 원숭환은 모문룡에게 은퇴를 권유했지만, 모문룡은 자신이 요동과 조선의 문제를 다루는 데 더 경험이 많다고 하며 거절했다.[48] 이틀 후, 원숭환은 모문룡을 활쏘기 훈련을 검열하자는 구실로 불러들여 체포하고 군복을 벗겼다. 모문룡이 항의하자 원숭환은 자신의 보검을 보이며 모문룡에게 "열두 가지 죄목"이 있다고 선포하고,[49] 전 군사 앞에서 즉결처형했다.

동강군의 폭동반란을 막기 위해 원숭환은 모문룡만이 죄를 지었다고 선포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처벌에서 면제했다. 그리고 모문룡의 부관인 진계성(陳繼盛)을 새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동강의 예산을 은 18만 으로 증액했다. 또한 모문룡을 위한 제대로 된 장례를 치렀다.

원숭환은 모문룡이 패전을 거듭하면서도 조정에 뇌물을 주고 동시에 무역으로 재산을 축적하여 백성을 괴롭히는 원흉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원숭환은 조정에 모문룡이 직무태만이라고 상주하고, 독단적으로 모문룡을 체포하여 그 죄상을 읽고 “죄는 모문룡에게만 있으며 다른 장수들은 죄를 묻지 않는다”고 말하고, 결국 모문룡을 참수형(斬首)에 처했다.

2. 5. 모문룡 사후

모문룡이 사망하자 후금은 기뻐하며 "술잔치"를 열었다고 전해진다.[50] 그해 말, 홍타이지는 연산을 통해 침략하여 원숭환이 구축한 산해관-닝원-진주 방어선을 완전히 우회했다. 이 공격은 기사사변으로 알려져 있으며, 후금군이 북중국 평야를 성공적으로 침략한 최초의 사례였다. 여진족은 거의 저항 없이 베이징 외곽까지 약탈했다.[51] 이후 여진족은 서쪽으로의 침략에 대한 우려를 더 이상 하지 않았으며,[51] 1636년에는 조선을 침략했다.

원숭환은 황제에게 모문룡 처형 이유로 감독관 거부, 예산 초과, 병력 보고 조작, 민간인을 적군으로 위장 살해 등을 제시했다.[52] 충정제는 의혹을 품었지만 상황을 받아들였다.[53][54] 그러나 모문룡 사건은 몇 달 후 기사사변 이후 다시 제기되었고, 이듬해 원숭환의 탄핵, 기소 및 능지처참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모문룡의 옛 부하들은 명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대부분 모문룡과의 개인적인 관계에 의존했기 때문에 낙담하고 여진족에 대한 항쟁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몇 년 안에 반란을 일으켜 변절했는데, 그중에는 20년 후 청나라의 중국 정복에 중요한 역할을 한 공유덕, 갱중명, 상가희가 포함된다.

모문룡의 후임으로 진계성이 파견되었으나, 통솔력 부족으로 유흥치 형제 등 여러 장수들의 이반을 초래했다. 유흥치는 동생 유흥조 등과 함께 홍타이지에게 항복하고, 진계성을 비롯한 백여 명을 참살했다.

모문룡의 살아남은 자식 중 한 명은 청나라에 은거하며 아버지 부하였던 구장(舊將)들의 보상을 계속 거절했다.

3. 정치적 비판

모문룡은 후금의 조선 침입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으로 비난받기도 한다. 그는 당시 명나라의 동맹국이었던 조선 내 기지를 이용하여 후금에 대항하여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금군이 조선에 대한 응징 작전을 펼치자, 모문룡은 모든 명나라 군대의 전면적인 후퇴를 명령했다. 이는 이전에 한반도와 무역을 했던 많은 북경 상인들을 분노케 했다.[55]

모문룡은 전략적 이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요 후금 도시들과의 전쟁을 감행하지 않았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동료 명나라 장군인 원숭환(1584-1630)에 대항하여 많은 영향력 있는 명나라 관리들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55]

모문룡은 명나라 수군을 이용하여 광범위한 밀수에 가담하여 중국 북부 경제의 호황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결국 밀수 혐의로 체포되어, 마지막 명나라 황제로부터 절대 권력의 황제 칼을 수여받은 동료 장군 원숭환에 의해 처형되었다.[55] 모문룡의 죽음은 명나라 경제 침체의 부분적인 원인으로 여겨진다.

4. 가족

관계이름
조부모옥산(毛玉山)
백부모득춘(毛得春)
부친모위(毛偉)
모친심씨(沈氏)
외숙부심광조(沈光祚)
동생모중룡(毛仲龍), 모운룡(毛雲龍)
아들毛鈺|모옥중국어 (본명은 승두(承斗))
양자모승록(毛承禄), 모승조(毛承祚)
손자모유한(毛有韓) (모옥(毛鈺)의 아들)


참조

[1] 서적 《东江疏揭塘报节抄》卷4天启五年九月初四日具奏
[2] 서적 《明季北略》卷2《毛文龙入皮岛》
[3] 서적 《毛总戎墓志铭》
[4] 서적 《东江疏揭塘报节抄》卷4天启五年九月初四日具奏
[5] 서적 《熊襄愍公集》卷3《申明还兵情由疏》
[6] 서적 《毛大将军海上情形》
[7] 서적 《表忠录·毛将军文龙传》
[8] 서적 《东江疏揭塘报节抄》卷5天启六年二月初六日塘报
[9] 서적 《皇明通纪集要》卷45
[10] 서적 《明史纪事本末补遗》卷4《毛帅东江》
[11] 서적 《东江疏揭塘报节抄》卷1
[12] 서적 《满文老档》太祖第24册天命六年七月
[13] 서적 《枫窗脞语·朝鲜颂毛碑文》
[14] 서적 《大明熹宗实录》卷23天启二年六月
[15] 서적 《大明熹宗实录》卷31天启三年二月
[16] 서적 《燃藜室记述》卷21《废主光海君故事本末》
[17] 서적 《三朝辽事实录》卷10
[18] 서적 《东江疏揭塘报节抄》卷2天启三年七月二十二日塘报
[19] 서적 《东江疏揭塘报节抄》卷2天启三年七月二十二日塘报
[20] 서적 《三朝辽事实录》卷13
[21] 서적 《东江疏揭塘报节抄》卷2天启三年八月初二日塘报
[22] 서적 《东江疏揭塘报节抄》卷2天启三年十月初□日塘报
[23] 서적 《东江疏揭塘报节抄》卷2天启三年十月初□日塘报
[24] 서적 《三朝辽事实录》卷13
[25] 서적 《明史纪事本末补遗》卷4《毛帅东江》
[26] 서적 《三朝辽事实录》卷13
[27] 서적 《三朝辽事实录》卷13
[28] 서적 《三朝辽事实录》卷14
[29] 서적 《皇明通纪集要》卷56
[30] 서적 《东江疏揭塘报节抄》卷4天启五年二月二十三日塘报
[31] 서적 《三朝辽事实录》卷15
[32] 서적 《东江疏揭塘报节钞》卷4天启五年八月二十二日具奏
[33] 서적 《大明熹宗实录》卷42天启三年十二月
[34] 서적 《大明熹宗实录》卷55天启五年正月
[35] 서적 《满文老档》太祖第64册天命十年正月至三月
[36] 서적 동강탕보소절초 1621-02-20
[37] 서적 황명속기삼조법전전록
[38] 서적 枣林杂俎 1626-06
[39] 서적 동강소절탕보절초 1621-09-02
[40] 서적 명실록·숭정실록
[41] 서적 명실록·숭정실록
[42] 서적 명기북략
[43] 서적 명사
[44] 서적 명실록·숭정실록
[45] 서적 명사
[46] 서적 명기북략
[47] 서적 명사
[48] 서적 명사
[49] 서적 명사
[50] 서적 명기북략
[51] 서적 삼조려사실록
[52] 서적 명사
[53] 서적 명사
[54] 서적 숭정장편
[55] ECCP Mao Wên-lung
[56] 웹인용 후금의 건국과 조선의 대응 http://keyword.press[...] 프레시안 2009-08-15
[57] 서적 조선왕조실록
[58] 웹인용 승정원일기, 1623년 4월 3일 http://db.itkc.or.kr[...] 2018-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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