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이사훈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사훈은 당나라의 화가이자 관료로, 당 고조 이연의 할아버지 이호의 현손이다. 그는 산수화, 수목화, 신선화에 뛰어난 실력을 보였으며, '이장군산수'로 불리며 금벽산수화풍을 대표했다. 당 현종의 명으로 오도현과 함께 촉도 가릉강의 산수를 대동전에 그렸으며, 아들 이소도 또한 화가로 이름을 알렸다. 이사훈은 북종화의 시조로 여겨지며, 그의 화풍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716년 사망 - 당 예종
    당 예종 이단은 측천무후의 아들로, 두 번 즉위하여 당나라를 다스렸으며, 아들 당 현종에게 황위를 물려주어 당나라 발전에 기여했다.
  • 716년 사망 - 카파간 카간
    카파간 카간은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 동돌궐을 통치하며 당나라와 대립, 동돌궐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나 말년 부락 이탈 심화로 암살당한 카간이다.
  • 당나라의 황족 - 이중준
    당 중종의 아들 이중준은 706년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나 위황후 등의 견제로 707년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피살되었고, 후에 당 예종에 의해 절민태자로 추증되었다.
  • 당나라의 황족 - 이지방 (당 황족)
    이지방은 당나라 황족으로, 공부시랑, 태자우서자, 종정경 등의 관직을 역임했으며 안록산의 난 이후 재상직에서 물러났고, 토번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납치, 감금 후 예부상서에 임명되었으나 태자빈객으로 발령 후 사망했으며, 《독례통고》에 기록이 전해진다.
이사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사훈
당나라 화가 이사훈
본명이사훈 (李思訓)
출생651년
사망716년
국적당나라
분야화가
사조북종화
영향받음전람
가족이소도 (아들)
이름
한국어이사훈 (李思訓)
중국어 간체李思训
중국어 병음Lǐ Sīxùn
웨이드-자일스Li³ Ssŭ¹-hsün⁴
생애
활동 시기당나라 시기
특징산수화와 인물화에 능했으며, 특히 화려한 채색의 산수화인 금벽산수화의 대가
경력좌무위대장군을 지냄
작품
대표작《강범도 (江帆圖)》
《궁원도 (宮苑圖)》
《춘산명수도 (春山明樹圖)》
《보계도 (楛溪圖)》
기타 정보
관련 인물이소도 (아들, 화가)

2. 생애 및 가계

이사훈은 당 고조 이연의 친척으로, 이연의 할아버지 이호의 현손이자 사촌 동생인 장평왕 이숙량의 손자였다. 이숙량의 둘째 아들이자 원주 도독부 장사였던 이효빈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사훈의 가계는 대대로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아들 이소도, 조카 이림보, 동생 이사회, 조카손자 이취 등이 모두 그림으로 이름을 날렸다. 특히 아들 이소도는 아버지 이사훈과 함께 북종화의 시조로 여겨질 만큼 뛰어난 화가였다.

2. 1. 이사훈

당 고조 이연의 할아버지인 이호의 현손이며, 이연의 사촌 동생인 장평왕 이숙량의 손자이다. 이숙량의 차남이며, 원주 도독부 장사로 있던 이효빈의 아들이다.

젊은 시절부터 재능으로 칭송받았으며, 당 고종 때 강도령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측천무후에 의해 이씨 황족들이 많이 해를 입자 벼슬을 버리고 숨어 지냈다. 신룡 원년(705년), 당이 부흥하자 당 중종에 의해 종정경에 임명되었고, 농서군공에 봉해져 200호를 하사받았다. 익주 장사를 거쳐, 개원 원년(713년) 좌우림대장군이 되었고, 팽국공에 봉해져 200호를 더 하사받았다. 이후 우무위대장군이 되었으나, 개원 6년(718년)에 사망하여, 진주 도독으로 추증되었다. 사후 이옹에 의해 비문이 만들어져, '이사훈비'로 전해진다.

서화에서 '일시의 묘'라고 칭송받았으며, 그의 산수화, 수목화, 신선화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때문에 '이장군산수'로 그의 산수화는 후세에 금벽산수화풍을 대표하는 것으로 유명해졌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대이장군'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만당의 주경현의 당조명화록에서는 제3위의 '신품 하'로 평가받고 있다. 화풍은 채색에 중점을 둔 것으로, 귀족적이었다.

당 현종의 명에 따라, 오도현과 동시에 촉도 가릉강의 산수를 대동전에 그렸다. 오도현이 하루 만에 완성한 데 반해, 수개월에 걸쳐 완성했으며, 현종으로부터 똑같이 칭찬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가 대동전에 그린 샘에서 밤에 물이 솟아나는 소리가 났다는 전승도 있다.

한편, 아들 이소도, 조카 이림보, 동생 이사회, 조카손 이취도 그림에 뛰어났다.

2. 2. 이소도

이사훈의 아들이다. 태자중사에 임명되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산수화에 뛰어났으며, 장군직에 있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에 연유하여 "이소장군"으로 불렸다.

《당조명화록》에서는 제4위의 "묘품상"으로 평가되어 아버지보다 낮은 평가를 받았지만, 장언원의 《역대명화기》에서는 아버지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다. 조수화도 잘 그렸으며, "해도"라는 화제를 만들어냈다고 전해진다.

장언원은 《역대명화기》에서 "산수의 변(산수화의 화법의 변혁)은 오도현에게서 시작되어 이사훈·이소도 부자에게서 이루어진다"라고 평했다.[1]

아버지와 함께 원체화의 계보와 맥을 같이하는 북종화(북화)의 시조로 여겨진다.[2]

3. 화풍 및 업적

이사훈은 산수화, 수목화, 신선화에 뛰어났으며, 그의 산수화는 '이장군산수'라 불리며 금벽산수화풍을 대표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대이장군'이라 불렀다. 만당 시기 주경현은 당조명화록에서 이사훈을 제3위인 '신품 하'로 평가했다. 그의 화풍은 채색을 중시하고 귀족적인 특징을 보였다.

이소도와 함께 원체화의 계보를 잇는 북종화(북화)의 시조로 여겨진다. 장언원은 《역대명화기》에서 "산수의 변(산수화의 화법의 변혁)은 오도현에게서 시작되어 이사훈·이소도 부자에게서 이루어진다"라고 평했다.

3. 1. 이사훈의 화풍

이사훈은 젊은 시절부터 재능으로 칭송받았으며, 서화에서 '일시의 묘'라고 칭송받았다. 그의 산수화, 수목화, 신선화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장군산수'로 불린 그의 산수화는 후세에 금벽산수화풍을 대표하는 것으로 유명해졌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대이장군'이라고 불렀다. 만당 주경현의 당조명화록에서는 제3위인 '신품 하'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화풍은 채색에 중점을 둔 귀족적인 화풍이었다.

당 현종의 명에 따라, 오도현과 동시에 촉도 가릉강의 산수를 대동전에 그렸다. 오도현이 하루 만에 완성한 데 반해, 이사훈은 수개월에 걸쳐 완성했으며, 현종으로부터 똑같이 칭찬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가 대동전에 그린 샘에서 밤에 물이 솟아나는 소리가 났다는 전승도 있다.

한편, 아들 이소도, 조카 이림보, 동생 이사회, 조카손 이취도 그림에 뛰어났다.

3. 2. 이소도의 화풍

이사훈의 아들로 태자중사에 임명되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산수화에 뛰어났으며, 장군직에 있지는 않았지만 아버지로 인해 "이소장군"으로 불렸다.

장언원의 《역대명화기》에서는 아버지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당조명화기》에서는 제4위의 "묘품상"으로 아버지보다 낮은 평가를 받았다. 조수화도 잘 그렸으며, "해도"라는 화제를 만들어냈다고 전해진다.

장언원은 《역대명화기》에서 "산수의 변(산수화의 화법의 변혁)은 오도현에게서 시작되어 이사훈·이소도 부자에게서 이루어진다"라고 평했다.

아버지와 함께 원체화의 계보와 맥을 같이하는 북종화(북화)의 시조로 여겨진다.

3. 3. 오도현과의 일화

당 현종의 명에 따라, 오도현과 동시에 촉도 가릉강의 산수를 대동전에 그렸다. 오도현이 하루 만에 완성한 데 반해, 이사훈은 수개월에 걸쳐 완성했으며, 현종으로부터 똑같이 칭찬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가 대동전에 그린 샘에서 밤에 물이 솟아나는 소리가 났다는 전승도 있다.

4. 평가 및 영향

이사훈은 당나라 때 뛰어난 화가로, 그의 산수화, 수목화, 신선화는 '일시의 묘'라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그의 산수화는 '이장군산수'라 불리며, 금벽산수화풍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후대에 널리 알려졌다.[1] 당시 사람들은 그를 '대이장군'이라 불렀으며, 만당의 주경현은 자신의 저서 《당조명화록》에서 이사훈을 세 번째 등급인 '신품 하'로 평가했다.[1] 그의 화풍은 채색을 중시하고 귀족적인 특징을 지녔다.[1]

당 현종의 명으로 오도현과 함께 촉도 가릉강의 산수를 대동전에 그린 일화가 유명하다. 오도현이 하루 만에 그림을 완성한 반면, 이사훈은 수개월에 걸쳐 완성했지만, 현종은 두 사람 모두를 칭찬했다고 한다.[1] 또한, 그가 대동전에 그린 샘에서 밤에 물이 솟아나는 소리가 났다는 전설도 전해진다.[1]

이사훈의 아들 이소도, 조카 이임보, 동생 이사회, 조카손자 이취도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1] 특히 이소도는 아버지처럼 산수화를 잘 그렸으며, '이소장군'으로 불렸다.[1] 《당조명화록》에서는 이소도가 아버지보다 낮은 평가를 받았지만, 장언원은 《역대명화기》에서 이소도를 아버지보다 높게 평가했다.[1] 이소도는 조수화에도 능했으며, '해도'라는 새로운 화제를 창안했다고 전해진다.[1]

장언원은 《역대명화기》에서 "산수화의 화법 변혁은 오도현에게서 시작되어 이사훈·이소도 부자에게서 완성되었다"라고 평했다.[1] 이사훈 부자는 원체화의 계보를 잇는 북종화(북화)의 시조로 여겨진다.[1]

5. 전기 자료

이사훈은 당 고조 이연의 할아버지인 이호의 현손이며, 이연의 사촌 동생인 장평왕 이숙량의 손자이다. 이숙량의 차남이며, 원주 도독부 장사로 있던 이효빈의 아들이다.

젊은 시절부터 재능으로 칭송받았으며, 당 고종 때 강도령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측천무후에 의해 이씨 황족들이 많이 해를 입자 벼슬을 버리고 숨어 지냈다. 신룡 원년(705년) 당이 부흥하자 당 중종에 의해 종정경에 임명되었고, 농서군공에 봉해져 200호를 하사받았다.

참조

[1] 간행물 Li Sixun https://www.britanni[...] Encyclopædia Britannica 2022
[2] 서적 A Cultural History of the Chinese Language McFarland 2011
[3] 웹사이트 李思訓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21-09-0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