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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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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중준은 당나라 중종의 아들로, 698년에 의흥군왕에 봉해진 후 좌위대장군을 거쳐 양주 대도독을 겸임했다. 706년에는 형 초왕 중복을 제치고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나, 위황후와 안락공주의 시기를 받았다. 707년, 위협을 느낀 이중준은 위후, 무삼사 부자, 안락공주, 상관완아 등을 살해하려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도주 중 살해되었다. 이후 예종에 의해 절민태자로 추시되었으며, 1996년에는 묘가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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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준
기본 정보
칭호시호는 제민황태자
이름이중준 (李重俊)
로마자 표기I Jungjun
성씨이(李)
시대당나라
출생일알 수 없음
사망일707년 8월 7일
아버지당 중종
배우자양씨 (楊氏)
자녀이종회(李宗暉), 호양왕(湖陽王)

2. 생애

698년 의흥군왕에 봉해졌고, 좌위대장군으로 승진하여 양주대도독을 겸임했다. 신룡 2년 황태자로 책봉되었으나, 위황후의 친아들이 아니었기에 시기를 받았다. 707년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종남산으로 도망쳤지만, 중종의 명을 받은 조사신에게 살해되었다. 예종 즉위 후 '''절민태자'''로 추시되었다.

2. 1. 황태자 책봉과 위협

신룡 2년(706년) 가을, 이복형인 초왕 중복을 제치고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총명하고 결단력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좋은 스승을 만나지 못해 올바른 행동을 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위황후의 친아들이 아니었기에 위황후의 시기를 받았으며, 이복 여동생인 안락공주 역시 황태녀(皇太女) 지위를 노리며 이중준을 모욕하고 다녔다. 안락공주의 남편 무숭훈과 그의 아버지 무삼사는 이중준을 '노비놈(奴)'이라 욕하며 매도했다.[2] [3]

2. 2. 중준의 난 (707년)

707년 이다조, 이사충, 이승황, 독고위지, 사타충의 등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중준은 천자의 조(詔)라며 좌우 우림(羽林) 병사 및 천기(千騎) 3백 명을 동원해, 위황후, 무삼사, 무숭훈 부자와 안락공주, 상관완아를 죽이려 했다.[2]

이중준은 우선 위황후의 신임을 받던 무삼사, 무숭훈 부자를 그 저택에서 죽이고, 무삼사의 당여 10여 명도 함께 죽였다. 성왕 천리를 보내 궁성의 여러 문을 지키게 하고, 이중준은 병사를 거느리고 숙장문(肅章門)에서 관문을 지키던 자를 죽이고 들어가 위황후, 안락공주, 상관완아 등을 죽일 계획이었다. 그러나 군대는 현무문(玄武門) 밖에서 좌우림장군(左羽林將軍) 유인경(劉仁景) 등의 궁성 수비군에게 저지당해 궁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중종이 위황후와 함께 현무문에 나타나 직접 이중준의 군대를 회유하자, 군관 왕환(王歡) 등이 창끝을 돌려 이다조, 이승황, 독고위지, 사타충의 등을 죽였다. 이에 쿠데타군은 무너져 흩어졌다.

쿠데타에 실패한 이중준은 부하 1백 기(騎)만을 거느린 채 장안을 탈출해 종남산으로 달아나려 했지만, 중종은 과의군장령(果毅軍將領) 조사신(趙思慎)을 시켜 뒤쫓게 했다. 이중준은 호현(鄠縣)[3] 40리 앞에서 자신의 친병에게 살해되었다. 중종은 이중준의 수급을 가져다 태묘(太廟)에 제사하고 무삼사, 무숭훈 부자의 관 앞에 바쳤다.

2. 3. 사후

중종은 이중준의 수급을 태묘(太廟)에 제사하고 무삼사, 무숭훈 부자의 관 앞에 바쳤다.[3] 이중준이 태자로 있던 시절 동궁 소속 관리들은 중준이 죽은 뒤 달아나 숨어버렸는데, 영화현[4] 현승(縣丞)을 맡고 있던 영가욱(甯嘉勗)이라는 사람이 나서서 중준의 목 앞에서 곡을 하고 자신의 옷을 벗어 중준의 목을 덮었다. 이 일로 종초객에 의해 한직으로 내쳐져 부임하던 도중에 죽임을 당하였다. 위원충 역시 중준과 통모하였다는 이유로 종초객의 모함을 사 거주사마(渠州司馬)[5]에 이어 사주 무천위(務川尉)로 내쳐져 가던 도중에 부릉[6]에서 사망하였다. 황족으로서 아들 천수왕(天水王) 희(禧)와 함께 중준의 거병에 동참했던 성왕 천리는 중준이 죽은 뒤 예순두 살의 나이로 처형되었으며, 성씨도 복씨(蝮氏)로 고쳐졌다.[2]

예종이 즉위한 뒤 절민태자(節愍太子)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중준과 함께 거병에 가담했던 자들에 대한 복권이 이루어졌다.

1996년 중국 산시 성(陕西省) 웨이난 시(渭南市) 푸핑 현(富平县)에서 절민태자의 무덤과 함께 태자의 시책문과 애책문이 발굴되었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당 중종
어머니미상당 중종의 후궁이거나 일찍 요절한 것으로 추정
부인양씨(楊氏)원헌황후의 자매[7]
아들이종휘(李宗暉)호양군왕(湖陽郡王), 양씨 소생은 아님


4. 평가

이중준의 난은 당나라 황실 내부의 권력 투쟁과 갈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이중준의 난을 실패한 쿠데타로 규정하며, 당시 권력에 눈이 먼 위정자들의 암투가 백성들의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들었는지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한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중준의 행동이 성급하고 무모했다고 평가하지만, 당시 상황의 절박함과 위협을 고려해야 한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경룡 원년 7월
[2] 문서 당 태종의 손자인 오왕 각의 장남. 중준에게는 아저씨가 된다.
[3] 문서 지금의 중국 산시성 (섬서성) 시안시 후이구.
[4] 문서 지금의 중국 산시 성 린펀시 융허현.
[5] 문서 거주는 지금의 중국 쓰촨성 취현이다.
[6] 문서 지금의 중국 충칭 시 푸링 구.
[7] 서적 신당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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