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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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개원은 당 현종 시대의 연호로, 713년부터 741년까지 사용되었다. 이 시기에는 토번, 거란, 발해 등 주변 국가들과의 외교 및 군사적 관계가 중요한 특징으로 나타났다. 토번과의 관계는 하서구곡 할양을 통해 전략적 후퇴를 보였으며, 이후 군사적 충돌이 잦았다. 거란과의 관계는 734년 당나라의 승리로 동북방의 안정을 가져왔다. 발해는 732년 당나라 등주를 공격하며 긴장 관계를 형성했고, 이후 신라 견제를 위한 관계로 변화했다. 내정에서는 모병제가 실시되었고, 대당개원례가 반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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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보는 742년부터 756년까지 당 현종 치세 후반기에 사용된 연호로, 안사의 난 이전 당의 번영을 상징했으나 이후 지덕으로 변경되었으며, 안록산 임명, 양귀비 책봉, 돌궐 쇠퇴, 고선지 정복, 탈라스 전투 패배 등 당 왕조의 중요한 사건들이 발생한 동아시아 국제 정세 변화의 시대적 배경이다. - 당나라의 연호 - 정관 (당)
정관은 당나라 태종 이세민의 치세에 사용된 연호로, 사회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이루고 돌궐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던 시대를 나타내며, 동아시아 여러 국가의 연호와 병행 사용되어 당시 정치적, 문화적 교류를 보여주는 역사적 자료이고, 통치 원리는 『정관정요』에 기록되어 있다.
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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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원 연간의 주요 사건
- 713년 12월 22일(음력 12월 1일) 당 현종이 연호를 선천(先天)에서 '''개원'''(開元)으로 변경하였다.[1][2][3][4][5]
- 714년, 당나라 장수 왕해빈(王海賓)이 토번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자, 당 현종은 그의 어린 아들에게 왕충사(王忠嗣)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궁중에서 키웠다. 왕충사는 훗날 당나라의 명장이 되었다.[4]
- 716년, 승려 선무외가 장안에 도착하였다.[4]
- 716년 12월, 요숭이 재상에서 물러나고 송경이 재상으로 임명되었다.[4]
- 718년,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관변 서원인 여정수서원이 설립되었다.
- 720년, 송경이 재상에서 파직되고 원건요와 장가정이 재상으로 임명되었다.[4]
- 720년, 승려 금강지와 불공이 장안에 도착하였다.[4]
- 736년, 장구령이 재상에서 파직되고 이임보와 우선객이 재상이 되었다. 이후 이임보가 전횡을 일삼기 시작하였다.
2. 1. 외교 및 군사
713년, 당나라는 금성공주가 토번으로 시집갈 때 하서구곡(河西九曲) 땅을 탕목읍(湯沐邑)으로 주었다.[2]722년에는 모병제를 처음으로 실시하였다.
733년, 당나라는 전국을 15도(道)로 나누었다.
738년, 남조의 왕 피라각(皮羅閣)을 운남왕(雲南王)으로 책봉하였다. 이후 남조는 강성해져 대화성(大和城, 지금의 대리大理)에 도읍을 정하고 당나라 변경을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2. 1. 1. 발해와의 관계
732년 9월, 발해 무왕은 장군 장문휴에게 수군을 이끌고 당나라 등주(登州)를 공격하게 하여 자사 위준을 죽였다. 이는 발해와 당나라 사이의 긴장 관계를 더욱 심화시켰고, 신라와의 협공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733년 이후, 발해는 당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추구하였으며, 당나라는 발해를 신라를 견제하는 세력으로 활용하였다.2. 1. 2. 돌궐과의 관계
개원 4년(716년) 7월, 돌궐의 카파간 카간이 토쿠즈 오구즈를 정벌하고 돌아오던 길에 토쿠즈 오구즈 병사에게 살해당했다.[4] 퀼테긴과 톤유쿡이 카파간 카간의 아들 이넬 카간을 죽이고 형을 카간으로 세웠는데, 이가 곧 빌게 카간이다.[4] 이후 돌궐과의 관계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2. 1. 3. 토번과의 관계
713년, 당은 하서구곡(河西九曲) 땅을 토번으로 시집간 금성공주의 탕목읍(湯沐邑)으로 증여하는 형태로 토번에 넘겨주었다.[2] 이는 당의 전략적 후퇴로 해석된다. 714년 8월과 10월 사이 토번이 당의 위원(渭源)을 거듭 쳐들어왔고, 당의 장수 설눌과 왕준(王晙)이 10월에 토번을 무가(武街)에서 크게 쳐부수고 장성보(長城堡)까지 추격해 다시 토번을 패배시켰다.[4] 727년 정월, 청해(淸海)에서 당과 토번이 전쟁을 벌였다. 같은 해 10월, 과주(瓜州)에서 당과 토번이 전쟁을 벌였다. 729년 3월, 당의 삭방절도사(朔方节度使) 신안왕(信安王) 의(禕)가 이끄는 군이 토번의 석보성(石堡城)을 쳐서 점령하였다. 이처럼 잦은 군사적 충돌은 양국 간의 긴장 관계를 보여준다.2. 1. 4. 거란과의 관계
개원 2년(714년) 7월, 당나라 장수 설눌이 이끄는 군대가 거란을 난수곡(灤水谷)에서 격파하였다.[3]개원 18년(730년) 6월부터 개원 20년(732년)까지 당나라가 글안(거란)을 공격하였다.
개원 22년(734년), 유주절도사 장수규가 글안을 쳐부수었다. 이후 글안에서 내란이 발생하여 아관 이과절이 글안 왕 굴렬과 권신 가돌간을 죽이고 당나라에 투항하였다. 이로써 당나라의 동북쪽 변경이 차츰 안정되었다.
2. 2. 내정
개원 6년(718년)에 중국 최초의 관변 서원인 여정수서원이 설립되었다.[1]개원 10년(722년)에 모병제가 처음 실시되었다.[1]
개원 20년(732년)에 대당개원례가 반포되었다.[1]
개원 21년(733년)에 천하를 15도(道)로 나누었다.[1]
개원 24년(736년)에 장구령이 재상에서 물러나고 이임보, 우선객이 재상이 되었다. 이후 이임보가 전권을 휘두르게 되었다.[1]
3. 연대 대조표
레이키 원
요로 원
진귀 원년
덴표 원년
대흥 원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