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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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독은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에서 사용된 군사 및 행정 관직이다.
신라에서는 6세기부터 9주(州)의 장관을 도독이라 칭했으며, 군사적 성격이 약화되고 행정적 외관으로 변화했다. 하대에 들어서는 도독이 지방 세력과 결합하여 세력을 강화하기도 했으며, 신라 말에는 호족화되어 신라 붕괴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고려는 천안도독부를 설치했다.
중국에서는 삼국 시대부터 군사 사령관을 지칭했으며, 여러 주를 관할하며 행정과 군사를 담당하는 직책으로 발전했다. 이후 육조 시대, 당나라,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를 거쳐 청나라 시대에는 사용되지 않다가 신해 혁명 이후 부활했다.
일본에서는 당나라에 파견된 아베노 나카마로가 노주대도독 관직을 받았으며, 다자이후를 도독이라 불렀다. 메이지 유신 이후 근위도독부가 설치되었고, 대일본 제국 시대에는 관동도독부가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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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 계급 - 4성 장군
4성 장군은 군대 계급 중 대장에 해당하며, 대한민국 국군에서는 합동참모의장, 각 군 참모총장 등을 포함한 7명이, 다른 국가에서는 각 군 참모총장, 통합군 사령관 등이 해당되는 군 최고위급 지휘관이다. - 군사 계급 - 대령
대령은 연대 규모의 부대를 지휘하는 장교 계급으로, 국가와 군종에 따라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며, 현대에는 부대 운영, 훈련, 작전 수행 등의 책임을 지고 명예연대장과 같은 직책도 존재한다. - 칭호 - 관찰사
관찰사는 중국, 한국, 일본에서 지방 행정 감찰관직으로, 당나라 채방처치사에서 시작되어 관찰처치사로 개칭되며 명칭이 유래되었고, 한국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정착하여 각 도에 파견된 종2품 문관직으로 지방 행정 전반에 걸쳐 권한을 행사했다. - 칭호 - 마쓰다이라씨
마쓰다이라씨는 기원이 불분명하나 세이와 겐지 닛타씨의 후예로 여겨지기도 하고 가모씨나 스즈키씨의 일족일 가능성도 있으며 미카와국 유래설이 가장 널리 알려진 일본의 무가로, 14세기경 미카와 마쓰다이라 마을에 세력을 확립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배출하고 에도 시대까지 이어졌다.
도독 | |
---|---|
도독 | |
개요 | |
뜻 | '영어: Governor-General, Commissioner' |
설명 |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부터 설치된 지방 장관의 일종으로, 군사권을 가진 절도사와 유사한 권한을 가졌다. 한국사에서는 고구려의 지방관 제도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
역사 | |
기원 | '한나라 시대에 변방 민족을 통제하기 위해 파견된 무관에서 기원했다.' |
역할 변화 | '점차 지방 행정, 군사, 감찰권을 모두 장악하는 지방 장관으로 발전했다.' |
전성기 | '남북조 시대에 각지에 파견되어 군정권을 행사하며 세력을 키웠다.' |
몰락 |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에 주현제가 실시되면서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어 폐지되었다.' |
권한과 특징 | |
권한 | '자신의 관할 구역 내의 군사, 행정, 감찰권을 모두 행사할 수 있었다.' |
특징 | '반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
한국사에서의 도독 | |
고구려 | '고구려의 지방관 제도에서 도독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
신라 | '신라에서도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도독을 설치했으나, 그 역할은 제한적이었다.' |
같이 보기 | |
관련 문서 | '절도사' '방진' '군벌' '지방관' |
2. 한국의 도독
신라의 도독은 시대에 따라 그 역할과 위상이 변화하였다. 삼국통일 이전에는 군사적 성격이 강했지만, 통일 이후에는 행정적 성격이 강해졌다.
문무왕 이후 도독의 명칭이 나타나고 있으므로, 문무왕 때 9주 장관의 명칭으로 도독이 사용되었고, 총관은 전국적인 군사 동원의 필요에 따라 임시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1] 문무왕 때 군주의 명칭이 도독으로 변경된 것은 9주 장관의 기능에서 군사적 성격이 배제되고, 단순한 행정적 외관(外官)이 되었음을 나타낸다.[1]
성덕왕 3년(704년) 김대문의 한산주도독 임명 기사 이후 선덕왕대에 이르기까지 100여 년간 임명 기사가 누락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중대에는 도독이 가지는 정치·군사상의 중요성이 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1]
하대에 들어서면 도독은 강력한 세력자로 재등장하여 군사적 활동을 수행하는 동시에 지방 세력과도 결부되어 그 세력이 강화되었다.[1] 하대의 도독 중 주목되는 인물은 김헌창, 김흔, 김양 등의 무열왕계 사람들이다.[1] 이들은 시중, 병부령으로 승진되어 귀족 연립적인 하대의 성격을 뚜렷하게 만들 만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거나, 원성왕계 왕실에 도전해 반란을 주도하기도 하였다.[1]
신라 말기 문성왕 이후에는 외관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보다 자신의 근무지에서 성주, 장군으로 불리는 호족의 입장이 되어 독립된 세력으로 성장, 신라 붕괴의 요인이 되었다.[1]
2. 1. 신라의 도독
신라의 도독은 시대에 따라 그 역할과 위상이 변화하였다. 각 시대별 변화는 하위 섹션을 참고하면 된다.9주 도독(부)은 다음과 같다.
2. 1. 1. 상대
《삼국사기》 직관지(職官志)에 따르면, 785년(원성왕 1년)에 '''도독'''(都督)으로 그 명칭을 고쳤다고 한다.[1] 문무왕 이후 이미 도독의 명칭이 나타나고 있었고, 문무왕 때 9주 장관의 명칭으로 도독이 사용되었으며, 총관은 전국적인 군사 동원의 필요에 따라 임시로 사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1] 문무왕 때 군주의 명칭이 도독으로 변경된 것은 9주 장관의 기능에서 군사적 성격이 배제되고, 단순한 행정적 외관(外官)이 되었음을 나타낸다.[1]하대에 들어서면 도독은 강력한 세력자로 재등장하여 군사적 활동을 수행하는 동시에 지방 세력과도 결부되어 그 세력이 강화되었다.[1] 하대의 도독 중 주목되는 인물은 김헌창, 김흔, 김양 등의 무열왕계 사람들이다.[1] 이들은 시중, 병부령으로 승진되어 귀족 연립적인 하대의 성격을 뚜렷하게 만들 만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거나, 원성왕계 왕실에 도전해 반란을 주도하기도 하였다.[1]
신라 말기 문성왕 이후에는 외관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보다 자신의 근무지에서 성주, 장군으로 불리는 호족의 입장이 되어 독립된 세력으로 성장, 신라 붕괴의 요인이 되었다.[1]
2. 1. 2. 중대
《삼국사기》 직관지(職官志)에 의하면, 505년(지증왕 6년) 이사부를 실직주(悉直州)의 '''군주'''(軍主)로 삼았는데, 661년(문무왕 1년) '''총관'''(摠管)으로 바꾸었고, 785년(원성왕 1년) '''도독'''으로 그 명칭을 고쳤다고 한다.[1]문무왕 이후 이미 도독의 명칭이 나타나고 있으므로, 문무왕 때 9주 장관의 명칭으로 도독이 사용되었고, 총관은 전국적인 군사 동원의 필요에 따라 임시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무왕 때 군주의 명칭이 도독으로 변경된 것은 9주 장관의 기능에서 군사적 성격이 배제되고, 단순한 행정적 외관(外官)이 되었음을 나타낸다.[1]
삼국통일 이전에는 군주 임명 기사가 빈번했지만, 704년(성덕왕 3년) 김대문의 한산주도독 임명 기사 이후 선덕왕대에 이르기까지 100여 년간 임명 기사가 누락되어 있다. 이를 통해 중대에는 도독이 가지는 정치·군사상의 중요성이 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1]
2. 1. 3. 하대
하대에 들어서면 도독이 강력한 세력자로 재등장하여 군사적 활동을 수행하는 동시에 지방 세력과도 결부되어 그 세력이 강화되었다.하대의 도독 중 주목되는 인물은 김헌창, 김흔, 김양 등의 무열왕계 사람들이다. 이들은 시중, 병부령으로 승진되어 귀족 연립적인 하대의 성격을 뚜렷하게 만들 만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거나, 원성왕계 왕실에 도전해 반란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신라 말기 문성왕 이후에는 외관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보다 자신의 근무지에서 성주, 장군으로 불리는 호족의 입장이 되어 독립된 세력으로 성장, 신라 붕괴의 요인이 되었다. 이에 대해 군주를 일률적으로 주의 장관으로 보지 않고, 그러한 주 역시 재지세력(在地勢力)의 편제 과정에서 성립된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1]
2. 1. 4. 9주 도독(부)
《삼국사기》 직관지(職官志)에 따르면, 505년(지증왕 6년) 이사부를 실직주(悉直州)의 '''군주'''(軍主)로 삼았는데, 661년(문무왕 1년) '''총관'''(摠管)으로 바꾸었고, 785년(원성왕 1년) '''도독'''으로 그 명칭을 고쳤다고 한다.[1]하대에 들어서면 도독은 강력한 세력자로 재등장하여 군사적 활동을 수행하는 동시에 지방 세력과도 결부되어 그 세력이 강화되었다.[1]
하대의 도독 중 주목되는 인물은 김헌창, 김흔, 김양 등의 무열왕계 사람들이다. 이들은 시중, 병부령으로 승진되어 귀족 연립적인 하대의 성격을 뚜렷하게 만들 만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거나, 원성왕계 왕실에 도전해 반란을 주도하기도 하였다.[1]
신라 말기 문성왕 이후에는 외관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보다 자신의 근무지에서 성주, 장군으로 불리는 호족의 입장이 되어 독립된 세력으로 성장, 신라 붕괴의 요인이 되었다.[1] 이에 대해 군주를 일률적으로 주의 장관으로 보지 않고, 그러한 주 역시 재지세력(在地勢力)의 편제 과정에서 성립된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1]
2. 2. 고려의 도독(부)
천안도독부3. 중국의 도독
삼국 시대에 설치되었으며, 본래는 감독, 통괄의 의미로 군사령관을 지칭했으나, 여러 주에 걸쳐 관할 영역을 가진 도독은 주 장관인 자사를 겸임하여 도독부를 설치하고 부관을 임명하여 군사뿐만 아니라 민정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적국과의 국경 수비, 변방의 이민족 대책 등에는 장기간 지방에 주둔해야 했으며, 특정 군현을 지키는 '점의 방위'가 아닌, 여러 주군에 걸친 '선 · 면의 방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대규모 소란에 대해 중앙에서 지방으로 파견되는 독군(독군 제사 · 감군 사자)과 후한 말기의 주목 기능, 그리고 황제로부터 부여받은 사지절의 권한이 합쳐져서 '사지절 · 도독 제군사(행도독독군)'의 제도가 생겨났다.[1] 여러 주를 소유한 조위의 도독은 사정 · 사진 장군이나 주 자사를 겸임하며, 임지에 도독부를 설치하여 행정과 군사를 관장했다. 위나라에는 이 주도독이라고도 불리는 지방 주둔의 군사 지휘관 외에, 황제 직속의 중군(중외군)을 지휘하는 도독 중외 제군사(중외 도독)나 임시직의 도독 정토 제군사(정토 도독)라는 직책도 있었다.
한편, 손오는 양주 · 교주의 두 개의 주, 촉한은 익주만 있었기 때문에, 도독의 권한이 미치는 지역은 위, 오, 촉한에서 크게 달랐다.
오나라에서는 장강 유역과 그 연안에 '독'을 설치하고, 그것을 통괄하는 '도독'을 설치했다.[1][2] 또한 호족 정권인 오나라에서는 독이나 도독의 지위가 세습되는 경우가 있었다.
촉한에서는 위, 오 및 남만과의 전선에 도독을 배치했다. 위나라와의 전선을 담당하는 한중 도독, 오와의 전선을 담당하고 백제성에 주둔하는 영안 도독, 익주 남부의 이민족에 대비한 래강도독, 그리고 이 세 군의 후방 지원 · 병참을 담당하는 파군의 강주현에 주둔하는 강주 도독의 네 도독이 유명하다.[1][3] 이 외에도, 유비의 동정이나 제갈량의 북벌의 군 편성에 있어서 본군의 전후 좌우의 군을 통괄하는 '독부 · 부독'이나 별동대를 지휘하는 '별독', 거점 등의 규모를 독군하는 '독' '독군', 관우가 임명된 '동독' 등의 직책도 사서에 산견된다.
이후, 육조 시대를 거쳐 도독의 관명이 사용되었다. 당나라 시대에는 절도사가 설치되었기 때문에 그 권한은 축소되었지만, 송대에는 재상의 출정 시에 도독의 칭호가 임시로 사용되었으며, 원나라 · 명나라에도 대도독부의 명칭이 보였다(→오군도독부). 청나라에서는 도독의 명칭은 사용되지 않았지만, 신해 혁명 이후, 지방의 군정 담당관으로서 도독이 설치되었다. 또한, 고구려, 백제, 왜와 같은 주변 민족의 왕에게도 ''''도독''' ◯◯ 제군사 · △△ 장군'의 칭호가 주어졌으며 (→장군), 근린 제국 · 제민족 회유책에 사용되는 경우가 있었다.
4. 일본의 도독
일본에서는 아베노 나카마로가 당나라에 출사하여 노주대도독(潞州大都督)의 관명을 받았다.[1] 일본 관제에서는 다자이후의 당나라 명칭을 도독(都督)이라고 하였다.[2] 후지와라 나카마로는 준닌 천황에게 청하여 "도독 사기내 삼관 오미 단바 하리마 등 국 병사"(都督四畿内三関近江丹波播磨等国兵事使)에 임명되었다. (→후지와라 나카마로의 난)[3]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 직할 군의 사령부로서 근위도독부가 설치되었다. 대일본 제국 시대, 중국 관동주에 관동도독부가 설치되었다.
5. 4세기 - 6세기 아시아 외교와 도독
4세기에서 6세기 사이에 동아시아에서는 외교 관계를 맺을 때 '도독'이라는 직함을 사용했다. 특히 왜와 신라는 중국 왕조로부터 도독 제군사(都督諸軍事) 또는 도독(都督)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국가 | 내용 |
---|---|
왜 | 왜5왕은 중국에 스스로를 도독 왜, 백제, 신라, 임나, 진한, 모한 7국 제군사라고 칭하며 조공을 바쳤고, 중국 왕조는 왜왕에게 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6국 제군사라는 칭호를 내렸다. |
신라 | 신라 왕은 중국으로부터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 또는 계림주도독(鷄林州都督) 등의 칭호를 받았다. |
이러한 칭호는 외교적 관계에서 각국의 지위를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였다.
5. 1. 왜 5왕의 도독 제군사
서기 | 왕명 | 가수 (자칭/중국에 청구한 것) | 제정 (중국으로부터 수여받은 것) | 비고 |
---|---|---|---|---|
438년 | 왜진 | 도독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6국 제군사 | ||
451년 | 왜제 | 도독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6국 제군사 | 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6국 제군 | |
478년 | 왜무 | 도독 왜·백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7국 제군사 | 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6국 제군 | |
479년 | 왜무 | 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6국 제군사 | 제에 의한 일방적인 승작 가능성. |
5. 2. 신라 왕의 도독
《삼국사기》 직관지(職官志)에 따르면, 505년(지증왕 6년) 이사부를 실직주(悉直州)의 '''군주'''(軍主)로 삼았는데, 661년(문무왕 1년) '''총관'''(摠管)으로 바꾸었고, 785년(원성왕 1년) '''도독'''으로 그 명칭을 고쳤다고 한다.[1]문무왕 이후 이미 도독의 명칭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문무왕 때 9주 장관의 명칭으로 도독이 사용되었고, 총관은 전국적인 군사동원의 필요에 따라 임시로 사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문무왕 때 군주의 명칭이 도독으로 변경된 것은 9주 장관의 기능에서 군사적 성격이 배제되고, 단순한 행정적 외관(外官)이 되었음을 나타낸다.[1]
삼국통일 이전은 군주의 임명기사가 빈번한 것에 비하여, 704년(성덕왕 3) 김대문의 한산주도독 임명기사 이후 선덕왕대에 이르기까지 100여 년간 임명기사가 누락되어 있는 것을 보면, 중대에는 도독이 가지는 정치·군사상의 중요성이 그리 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1]
하대에 들어서면 도독이 강력한 세력자로 재등장하여 군사적 활동을 수행하는 동시에 지방세력과도 결부되어 그 세력이 강화되었다.[1] 하대의 도독 중 주목되는 인물은 김헌창, 김흔, 김양 등의 무열왕계 사람들이다.[1] 이들은 시중, 병부령으로 승진되어 귀족연립적인 하대의 성격을 뚜렷하게 만들 만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거나, 원성왕계 왕실에 도전해 반란을 주도하기도 하였다.[1]
그리고 신라 말기 문성왕 이후에는 외관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보다 자신의 근무지에서 성주, 장군으로 불리는 호족의 입장이 되어 독립된 세력으로 성장, 신라 붕괴의 요인이 되었다.[1] 이에 대해 군주를 일률적으로 주의 장관으로 보지 않고, 그러한 주 역시 재지세력(在地勢力)의 편제과정에서 성립된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1]
서기 | 왕명 (신하명) | 도독호 (가수) | 도독호 (제정) | 비고 | |
---|---|---|---|---|---|
675년 | 김법민 | 계림주 대도독 | 당에 의함. 왕. 김인문의 형. | ||
687년 | 김이홍 | 계림주 도독 | 무주에 의함. | ||
702년 | 김흥광 | 계림주 도독 | 무주에 의함. | ||
713년 | 김흥광 | 대도독 계림주 제군사 | 당에 의함. | ||
785년 | 김양상 | 도독 계림주 자사 | 당에 의함. | ||
812년 | 김언승 | 지절·대도독 계림주 제군사 | 당에 의함. | ||
831년 | 김경휘 | 사지절·대도독 계림주 제군사 | 당에 의함. | ||
841년 | 김경응 | 사지절·대도독 계림주 제군사 | 당에 의함. |
참조
[1]
서적
洪飴孫『三国職官表』
[2]
서적
陶元珍『三国呉兵考』
[3]
서적
嚴耕望『中国地方行政制度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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