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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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삼사는 측천무후의 조카로, 무주(武周) 시대의 권신이다. 우위장군을 거쳐 하관상서에 임명되었으며, 측천무후가 황제를 칭한 후 양왕에 봉해졌다. 거란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참여하고, 검교내사 등을 역임하며 권력을 키웠다. 중종 복위 후에도 권력을 유지하려 했으나, 태자 중준의 정변으로 아들 무숭훈과 함께 살해되었다. 이후 예종에 의해 묘소가 파헤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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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승사는 측천무후의 조카이자 재상으로, 무씨 가문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으나 황태자 책봉에 실패하고 698년에 사망했다.
무삼사 | |
---|---|
기본 정보 | |
이름 | 무삼사 |
본관 | 무씨 |
작위 | 양왕 덕정왕 |
사망일 | 707년 8월 7일 |
아버지 | 무원경 |
자녀 | 무숭훈 |
시호 | 선(宣) |
로마자 표기 | Wu Sansi |
풀네임 | 성: 무(武) 이름: 삼사(三思) |
칭호 | 양왕 덕정왕 |
사후 칭호 | 선(宣) |
2. 생애
무삼사는 무측천의 조카로, 당나라와 무주 시대에 걸쳐 활동한 인물이다.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무측천의 친족이라는 배경을 바탕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무삼사는 숙부 무원상의 아들 무승사와 마찬가지로 황태자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무측천 역시 한때 무삼사를 태자로 삼으려고 했으나, 적인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럼에도 무삼사는 무측천의 신임을 계속 얻었으며, 장역지, 장창종 형제와 결탁하여 권세를 키우려고 했다.
696년, 거란의 이진충과 손만영이 반란을 일으키자, 무삼사는 군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진압에 나섰다.
705년, 당 중종이 복위하면서 무삼사의 지위는 낮아졌지만, 그는 여전히 권력을 유지하며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을 제거하고, 상관완아와 간통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한 아들 무숭훈을 안락공주와 결혼시켜 황태녀 자리를 노리는 등 권력욕을 드러냈다.
707년, 태자 이중준이 정변을 일으켜 무삼사와 그의 아들 무숭훈을 비롯한 친족 수십 명을 살해했다. 중종은 무삼사를 애도하며 양왕으로 추봉하고 태위를 추증했지만, 당 예종 즉위 후 무삼사 부자의 묘는 파헤쳐졌다.
무삼사는 위원충과 함께 『즉천후실록』 20권을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1. 초기 생애와 배경
병주문수현에서 태어났다. 무삼사의 생년에 대해서는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무측천의 일족이라는 이유로 우위장군으로 발탁되었고, 무측천이 정권을 장악하자 하관상서에 임명되었으며, 무주가 성립되자 양왕에 봉해져 천 호를 하사받았다.[2] 만세등봉 원년 (695년)에는 춘관상서로 전임하여 국사 감수를 담당했으며, 성력 원년 (698년)에 검교 내사, 이듬해에는 특진 태자빈객으로 진급했다.[2]무삼사는 무원경의 아들이며 무원경은 무측천의 이복 형제였다. 무원경과 그의 형제 무원상은 당나라 장군 무사확의 아들이었지만, 무원경과 무원상은 무사확의 첫 번째 부인인 상리 부인에게서 태어났고, 무측천과 그녀의 두 여동생은 무사확의 두 번째 부인인 양 부인에게서 태어났다. 무측천이 655년 당 고종의 황후가 된 후, 가족 간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황후의 형제와 사촌들은 고종에 의해 승진되었고, 무원경은 종정소경(宗正少卿), 즉 황족 업무의 부차관으로 승진했다. 665년까지 무측천은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으며, 그녀의 가족은 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666년 이전에 무측천은 형제와 사촌들이 승진에 감사하지 않는 것에 분노하여 그들을 모두 강등시켰고, 무원경은 룡주(龍州, 현재의 쓰촨성 몐양)의 자사로 강등되었다. 무원경은 룡주에서 무측천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사망했다. 무삼사가 아버지 무원경과 함께 룡주로 갔을 가능성이 높다. 675년, 무측천의 요청에 따라 무씨 가문은 사면되었고 무삼사는 황후의 조카로 칭해졌으며, 황실 근위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무삼사는 성격이 거만하고 아첨을 잘 하였다. 무측천이 황제로 즉위하기 전인 광택(光宅) 원년(684년)에 무삼사는 여러 차례 무측천에게 옛 당의 황족인 한왕(韩王) 원가(元嘉)와 노왕(鲁王) 영기(灵夔) 등을 미리 제거해야 한다고 주청하였는데, 수공(垂拱) 4년(688년)에 한왕과 노왕이 무후 타도를 외치며 병사를 일으킨 옛 당의 황족 월왕(越王) 정(贞)、낭야왕(琅邪王) 충(冲) 부자 등과 통모하였다가 사사되었다. 이때 무삼사는 그 당여들까지 모조리 제거하여 무측천이 황제로 즉위하기 위한 길을 닦았다.[2]
2. 2. 무측천 집권기의 활동
무삼사는 측천무후의 조카로서 우위장군(右衛將軍)으로 기용되었고, 측천무후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하관상서(夏官尚書)에 임명되었다. 690년 측천무후가 주(周)를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면서 무씨 일족을 대대적으로 봉왕(封王)할 때 양왕(梁王)에 봉해져 실봉 1천 호를 받았다.[2] 695년에는 춘관상서(春官尚書)로 전임되었고 감수국사(監修國史)를 겸하게 되었다.[2]696년 5월, 영주에서 거란의 이진충과 손만영이 영주도독 조문홰를 죽이고 무주 정권에 반란을 일으키자, 7월에 무삼사는 유관도안무대사(楡關道安撫大使)로 임명되어 거란 반란 진압군의 사령관을 맡았다. 698년에는 검교내사(検校内史)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특진태자빈객(特進太子賓客)이 되었다.
무삼사는 거만하고 아첨을 잘하는 성격이었다. 684년 무삼사는 여러 차례 무측천에게 옛 당나라 황족인 한왕(韩王) 원가(元嘉)와 노왕(鲁王) 영기(灵夔) 등을 미리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688년 한왕과 노왕이 무후 타도를 외치며 병사를 일으킨 옛 당나라 황족 월왕(越王) 정(贞)、낭야왕(琅邪王) 충(冲) 부자 등과 통모했다가 사사되었다. 이때 무삼사는 그 당여들까지 모조리 제거하여 무측천이 황제로 즉위하기 위한 길을 닦았다.
무삼사는 숙부인 무원상(武元爽)의 아들 무승사(武承嗣)처럼 황태자가 되려는 야심이 컸다. 무후 역시 무삼사를 태자로 삼으려다 적인걸(狄仁傑)의 반박에 그만두었으나, 이후로도 무삼사는 측천무후의 신임을 계속 누렸으며, 측천무후의 총애를 받았던 장역지 ・ 장창종 형제와 결탁해 권세를 확보하려 하였다.
2. 3. 중종 복위 후의 권력 장악
신룡(神龍) 원년(705년) 중종이 복위하면서 무삼사는 사공(司空) 및 동중서문하삼품(同中书门下三品)으로 지위가 옮겨졌고, 봉호는 덕정왕(德靜王)으로 강등되었으며, 실봉 2백 호를 받았다.[2] 얼마 뒤 측천무후가 붕어하자, 무삼사는 전권을 장악하여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무함하여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중종의 황후 위씨나 상관완아(上官婉儿)와 간통하면서 상관완아의 정부가 되었고, 아들 무숭훈(武崇訓)을 위황후 소생의 안락공주(安樂公主)와 혼인시켜 당시 태자였던 중준을 폐위하고 안락공주를 황태녀(皇太女)로 삼게 하려는 정치공작을 벌였다. 아울러 자신과 대립하던 환언범(桓彦範) ・ 경휘(敬暉) ・ 원서(袁恕) ・ 최현위(崔玄暐) ・ 장간지(張柬之)를 배제하고 자신의 총신을 대관으로 등용하는 등 조정 혼란의 원인을 제공하였다.[2]경룡(景龍) 원년(707년) 태자 중준은 이다조 등과 함께 정변을 일으켰는데, 이를 경룡의 변이라고 부른다. 이 정변에서 무삼사는 아들 숭훈 및 친족 수십 명과 함께 중준에게 살해되었다. 그러나 중준 역시 정변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좌우에 의해 살해되었다.[2]
중종은 무삼사에 대한 애도 의식을 거행하고 양왕으로 추봉하면서 시호를 선(宣)이라 하고, 태위(太尉)를 추증하였으며, 딸 안락공주가 중준의 목을 가지고 무삼사 부자의 빈소에 제사지내는 것을 허락하였다고 한다.[2]
예종이 즉위한 뒤 무삼사 부자는 절조를 거스른 자라는 이유로 그 묘소가 파헤쳐졌다.[2]
2. 4. 최후
무삼사는 거만하고 아첨을 잘하는 성격이었다. 그는 황태자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측천무후의 총애를 받던 장역지 ・ 장창종 형제와 결탁해 권세를 확보하려 하였다. 신룡 원년 신룡혁명으로 중종이 복위하면서 무삼사의 지위와 봉호는 강등되었다. 측천무후가 붕어한 뒤, 무삼사는 전권을 장악하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중종의 황후 위씨나 상관완아와 간통하면서 상관완아의 정부가 되었고, 아들 무숭훈을 안락공주와 혼인시켜 당시 태자였던 이중준을 폐위하고 안락공주를 황태녀로 삼게 하려는 정치공작을 벌였다. 자신과 대립하던 환언범 ・ 경휘 ・ 원서기 ・ 최현위 ・ 장간지를 배제하고 자신의 총신을 대관으로 등용하는 등 조정 혼란의 원인을 제공하였다.경룡 원년 태자 중준은 이다조 등과 함께 정변을 일으켰다. 이 정변에서 무삼사는 아들 숭훈 및 친족 수십 명과 함께 중준에게 살해되었다. 그러나 중준 역시 정변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좌우에 의해 살해되었다. 중종은 무삼사를 애도하며 양왕으로 추봉하고 시호를 선(宣)이라 하고, 태위를 추증하였으며, 딸 안락공주가 중준의 목을 가지고 무삼사 부자의 빈소에 제사 지내는 것을 허락하였다. 예종이 즉위한 뒤 무삼사 부자는 절조를 거스른 자라는 이유로 그 묘소가 파헤쳐졌다.[2]
3. 가족 관계
구분 | 이름 | 비고 |
---|---|---|
아들 | 무숭훈(武崇训) | 고양왕(高阳王), 부마도위(驸马都尉) |
아들 | 무계식(武繼植) | 좌위장군(左衛將軍), 안락공주 소생 |
아들 | 무숭렬(武崇烈) | 신안왕(新安王), 상승봉어(尚乘奉御) |
아들 | 무숭겸(武崇謙) | 광록경(光祿卿), 양공(梁公) |
아들 | 무숭위(武崇撝) | |
아들 | 무숭조(武崇操) | |
딸 | 미상 | 염립덕(閻立德)의 증손 즉선(则先)의 아내 |
딸 | 방성현주(方城县主) | 설숭간(薛崇简)에게 시집감 |
딸 | 미상 | 처음에는 정씨(郑氏)에게 시집갔다가 다시 배광정(裴光庭)의 처가 되어 이림보(李林甫)와 사통[3] |
4. 기타
- 명나라 시대의 에로 소설 ''수아편''의 등장인물 중 한 명이다.
- 2009년 드라마 ''영웅의 숭고함''에서 리이(李易)가 연기했다.
참조
[1]
웹사이트
兩千年中西曆轉換
http://www.sinica.ed[...]
[2]
서적
신당서
[3]
서적
구당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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