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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응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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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한응 묘는 대한제국 말기 일제에 항거하여 순국한 독립운동가 이한응 열사의 묘이다. 이한응은 관립영어학교 졸업 후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영국에서 외교 활동을 펼쳤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한국 침탈을 영국이 인정하자 이에 항거하여 1905년 자결했다. 그의 유해는 용인에 안장되었으며, 정부는 그에게 벼슬을 추서하고 장충단에 배향했다. 묘비는 이한응의 생애와 순국 정신을 기리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1965년 이한응 열사 추모회에 의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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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응 묘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문화재 정보
이름이한응 묘
이한응 묘
이한응 묘
국가대한민국 용인시
유형향토문화재
번호49
지정일1999년 7월 14일
주소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덕성리 368-16
시대알 수 없음
소유자알 수 없음
관리자알 수 없음
참고 사항알 수 없음
면적알 수 없음
수량알 수 없음
전승지알 수 없음
전승자알 수 없음
설명알 수 없음
웹사이트알 수 없음
문화재청알 수 없음

2. 생애

대한제국 말기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 순국선열 1호인 이한응 (李漢應, Yi Han Eung, 1874.10.30~1905.05.12) 열사는 젊은 나이에 관립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성균관 진사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했다. 1901년 주영(駐英) 및 주이(駐伊) 양국 공사관의 삼등참서관으로 임명되어 민영돈 일행과 함께 런던에 부임하였고, 1903년 민영돈 귀국 후 서리공사(署理公使)로 임명되어 대영 외교를 담당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영국과 영일동맹을 맺어 일제의 한국 침탈을 영국이 인정하는 것에 항의하며 1905년 5월 12일 자택에서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유해는 7월에 해로로 고국에 돌아와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덕성리 금현에 안장되었고, 정부에서는 종이품 가선대부 내부협판에 추서하고, 장충단에 배향하였다.

2. 1. 영국에서의 외교 활동

이한응은 젊은 나이에 관립영어학교를 2년 만에 졸업하고 성균관 진사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1901년, 주영(駐英) 및 주이(駐伊) 양국 공사관의 삼등참서관으로 임명되어 민영돈 일행과 함께 런던에 부임하였다. 1903년 민영돈이 귀국한 후에는 서리공사(署理公使)로 임명되어 홀로 대영 외교의 중책을 맡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썼다.

2. 2. 순국과 그 이후

대한제국 말기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 순국선열 1호인 이한응 (李漢應, Yi Han Eung, 1874.10.30~1905.05.12) 열사의 묘이다. 이한응 열사는 1901년 주차영의(駐箚英義, 영국과 이태리) 양국 공사관의 삼등참서관(參書官)으로 임명되어 민영돈 일행과 함께 런던에 부임하였다. 1903년 민영돈이 귀국하자 이한응은 서리공사(署理公使)에 임명되어 홀로 대영외교의 중책을 수행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하였다. 하지만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영국과 영일동맹을 맺어 일본의 한국 침탈을 영국이 인정하는 행보를 보이자, 이에 항의하며 1905년 5월 12일 자택에서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이후 유해는 7월에 해로로 고국에 돌아와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덕성리 금현에 안장되었고, 정부에서는 종이품 가선대부 (從二品嘉善大夫) 내부협판(內部協辦)에 승서(陞敍)하고, 관원(官員)을 특파하여 치제(致祭)하며 장충단에 배향(配享)하였다.

3. 평가

대한제국 말기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 순국선열 1호인 이한응은 관립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성균관 진사를 거쳐 외교관이 되었다. 주영 공사관 서리공사로서 대영 외교를 담당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썼으나, 영일동맹으로 영국이 일본의 한국 침탈을 인정하자 이에 항의하며 자결하였다. 사후 대한제국 정부는 이한응에게 종이품 가선대부 내부협판을 추증하고 장충단에 배향하였다.

3. 1. 외교관으로서의 평가

대한제국 말기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 순국선열 1호인 이한응 열사는 관립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성균관 진사를 거쳐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1901년 주영(駐英) 양국 공사관의 삼등참서관으로 임명되어 민영돈과 함께 런던에 부임하였고, 1903년 민영돈 귀국 후에는 서리공사로서 홀로 대영 외교를 담당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썼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영국과 영일동맹을 맺어 일본의 한국 침탈을 영국이 인정하는 상황에 이르자, 이한응은 이에 항의하며 1905년 5월 12일 자택에서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3. 2. 사후 평가 및 추모

대한제국 말기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 순국선열 1호인 이한응(1874.10.30~1905.05.12) 열사의 유해는 1905년 7월 해로로 고국에 돌아와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덕성리 금현에 안장되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이한응을 종이품 가선대부(從二品嘉善大夫) 내부협판(內部協辦)에 추증하고,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으며, 장충단에 배향하였다.

4. 비문

처럼 목숨을 가벼이 여기고 의를 태산처럼 무겁게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은 곧 의인이요, 그 정신은 곧 정기다. 세상에 사람은 많을지라도 사람마다 의인이 아니며, 시대는 면면히 흐르지만 언제나 의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난세에 영웅이 나타나는 것과 같이 의인은 국가의 운이 다했을 때 혜성처럼 나타나 그 빛으로써 국가와 민족을 평안한 길로 인도한다. 그리하여 의인이 나타난 곳에는 반드시 나라는 부흥하고 겨레는 다시 살아난다. 의인의 정기는 숭고하고 갸륵하다.

전의 이씨(全義 李氏) 이한응 공 (李漢應 公)은 고종 12년, 서기 1874년 9월 21일에 태어났다. 공은 한말의 안팎으로 닥친 어려움 속에 나라의 운명이 암담하고 파란이 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갑오년에는 아버지 남영우령관(南營右領管) 경호(璟鎬)공이 관군의 영장(領將)으로 동학농민운동을 토벌하다 전사하였다. 공은 약관의 나이였지만 가슴 속에는 비통함과 함께 큰 감회가 서려 있었다.

공은 천성이 영특하여 이와 같은 환경의 자극을 받아 뜻을 품고 사숙(私塾)에서 한학(漢學)을 공부하다가 16세에 관립(官立) 영어학교에 입학하여 영어를 익혔다. 21세에는 사마방(司馬榜)에 응시하여 성균진사(成均進士)에 합격하였으나, 이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변고를 당하고 3년간 상을 치렀다.

24세에 한성부(漢城府) 주사(主事)에 임명되었고, 26세에는 모교인 영어학교 교관으로 발탁되어 직무에 힘썼다. 그의 인격과 재능이 인정받아 28세 때인 3월에는 주차영의양국(駐箚英義兩國) 공사관(公使館) 삼등참서관(三等參書官)으로 발탁되었으니, 이는 공의 이름을 만대에 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에 공사(公使) 민영돈과 함께 영국 런던에 부임하여 그를 보좌하였고, 2년 후에는 통훈대부(通訓大夫)에서 정삼품(正三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다. 갑진년에는 민 공사(閔公使)가 귀국함에 따라 서리공사(署理公使)로서 영국과 이탈리아 양국과의 외교직무를 전담하였다.

일본이 청일 전쟁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한반도 침략을 강화하며, 러일 전쟁 전에 체결한 영일 동맹 조약을 개정하였다. 이 조약에는 일본이 한국의 정치, 경제, 군사상에 대해 지도, 감독 및 보호할 권리를 영국이 인정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갑진년 2월에 체결한 한일의정을 같은 해 8월에는 더욱 굴욕적인 한일협약으로 바꾸어 한국의 재정과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공은 한일협약 체결에 반대하고 영일 동맹 개정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대세가 불리하여 공의 주장이 관철되지 못하였다. 이에 공은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다가 을사년 5월 12일(음력 4월 9일)에 자결하니, 향년 32세였다. 공의 위국단성(爲國丹誠)은 꽃답고, 고매장렬(高邁壯烈)한 정기는 빛난다. 공은 진실로 애국의 화신이요, 의인 중의 의인이며, 한말 순국열사의 최선봉이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공의 절의를 기리기 위하여 종이품(從二品) 가선대부(嘉善大夫) 내부협판(內部協辦)에 추서(追敍)하고 장충단에 제사 지냈으며, 작년 가을에는 장충단에 기념비를 건립하여 그 뜻을 기리고자 하였다.




::::전의 이희승 (全義 李熙昇) 찬(讚)

::::안동 김충현 (安東 金忠顯) 서(書)

::::서기 1965년 을사 11월 국은 이한응 열사 추모회 회장 이은상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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