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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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일 전쟁은 1894년부터 1895년까지 일본 제국과 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배경에는 일본의 근대화와 제국주의적 팽창, 청나라의 쇠퇴와 조선에 대한 지배권 다툼이 있었다. 일본은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 청나라와 대립하여 전쟁을 시작했다. 주요 전투는 조선과 랴오둥반도, 황해에서 벌어졌으며, 일본이 평양 전투, 황해 해전 등에서 승리하며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청일 전쟁은 1894년 발발 당시 육십갑자를 따 중국에서는 갑오전쟁(甲午戰爭), 일본에서는 일청전쟁(日清戦争), 한국에서는 청일전쟁(淸日戰爭)으로 불린다.
전쟁 결과,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어 청나라는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고, 랴오둥반도, 타이완, 펑후 제도를 일본에 할양했으며,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했다. 이로 인해 일본은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부상하고, 타이완을 식민 지배하게 되었다. 반면, 청나라는 국력이 급격히 약화되고 서구 열강의 침략을 가속화했으며, 중화사상에 큰 타격을 입었다. 청일 전쟁은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재편하고 일본의 제국주의적 확장을 가속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2. 배경
19세기 중반 이후, 일본은 1854년 가나가와 조약을 통한 개항과 1868년 메이지 유신을 거치며 빠르게 근대 국가로 변모했다. 서구 기술을 적극 도입하여 군사력과 산업 기반을 강화하며, 서구 열강과 동등한 지위를 추구하고 대외 팽창을 모색했다. 반면, 청나라는 양무운동(1861-1895)을 통해 근대화를 시도했으나 내부적인 문제로 인해 일본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군사력에서도 점차 일본에 뒤처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을 둘러싼 양국의 갈등은 점차 고조되었다. 일본은 조선을 대륙 침략의 발판이자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간주하고 영향력 확대를 꾀했다.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전통적인 종주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려 했다.
1894년 초, 조선에서 동학 농민 운동이 대규모로 발생하자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군대 파견을 요청했다. 청나라가 파병하자 일본 역시 1885년 톈진 조약과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했다. 조선 정부가 농민군과 화약을 맺고 양국 군대의 철수를 요구했음에도,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조선의 내정 개혁을 요구하며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켰다.
일본은 표면적으로 조선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내세웠으나[34][35][36][37], 실제로는 청나라 세력을 축출하고 조선을 자국의 영향력 하에 두며[38][39], 나아가 영토 할양 등 이익 확대를 목표로 전쟁을 준비했다. 특히 러시아의 남하를 경계하며 조선반도에 대한 군사적 영향력 확보를 중요하게 여겼다[40][41]. 무쓰 무네미쓰 외무대신은 전쟁의 명분을 조선 독립에 두었지만[42], 이는 청나라로부터 조선을 분리시켜 일본의 영향권 아래 두려는 의도였다.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전통적 영향력을 근대적 종속 관계로 강화하려 했으나[43], 외교와 군사 지휘 체계의 분리, 이홍장을 비롯한 내부의 전쟁 회피론 등 구조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이는 전쟁 초기 청나라의 소극적 대응으로 이어지는 요인이 되었다.
2. 1. 국외적 배경
19세기 중반 이후 동아시아는 제국주의를 앞세운 서구 열강의 위협에 직면했다. 특히 청나라는 아편전쟁과 애로호 사건(제2차 아편 전쟁)을 겪으며 막대한 배상금 지불, 영토 할양, 개항 등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며 약화되었다.[120] 청나라는 이홍장 등을 중심으로 양무운동을 통해 군사 중심의 근대화를 시도했으나, 전통적인 중화 질서(조공-책봉 체제)를 유지하려 했고 관료들의 저항, 부패, 중앙 조정 부재 등으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반면, 일본 제국은 미국의 흑선 내항과 포함외교를 계기로 개항하고,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구식 근대 국가로 빠르게 변모했다. 메이지 정부는 중앙집권화, 문명개화, 부국강병 정책을 추진하며 서구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군사력(강력한 해군과 육군 창설)과 경제 기반 시설(철도, 전신 등)을 강화했다. 이를 통해 일본은 봉건 사회에서 근대 산업 국가로 탈바꿈하며 서구 열강과 동등한 위치를 추구했다.
신흥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한 일본은 조선에 주목했다. 일본은 청나라의 약세를 간파하고, 조선을 만주 등 대륙 침략의 발판이자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여겨 병합, 식민지화하려 했다. 초기에는 사이고 다카모리 중심의 강경파가 정한론을 주장했으나, 이토 히로부미 등 주류 세력의 반대로 무산되고 포함외교를 통한 통상 요구로 방향을 선회했다. 일본은 1875년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에 군사적 압력을 가했고, 이듬해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부산, 원산, 인천 개항을 강제하며 경제 침략의 발판을 마련했다.[48]
조선을 둘러싼 청나라와 일본의 갈등은 점차 고조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는 군대를 파견하여 흥선대원군을 납치하고 사건을 진압한 뒤, 종주권을 내세워 조선 내정에 깊이 간섭하기 시작했다. 이에 조선 내부에서는 청나라와의 관계 및 개화 노선을 두고 동도서기파와 변법개화파 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1884년 변법개화파가 일본의 지원을 받아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청일 양국 군대가 충돌하기도 했다. 사태 수습을 위해 청나라와 일본은 1885년 톈진 조약을 체결하여 양국 군대의 조선 철수 및 향후 파병 시 상호 통보 원칙에 합의했다. 이는 이후 동학농민운동 발발 시 양국 군대가 조선에 다시 들어오는 빌미가 되었다.
전쟁 직전, 서구에서는 근대화된 청나라 군대가 일본군을 압도할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관찰자들은 이홍장의 화이군이나 북양함대 등 청나라 군대를 높이 평가했다. 독일 참모본부는 일본의 패배를 예측했고, 청나라 해군 고문이었던 영국인 윌리엄 랭(William Lang) 역시 중국군의 우세를 점치며 "결국 일본은 완전히 짓밟힐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청나라는 광대한 영토와 많은 병력을 보유했지만, 외교와 군사 지휘 체계가 분리되어 있었고(총리각국사무아문과 군기처, 북양통상대신 이홍장의 이원적 구조), 군대 역시 통일되지 못하고 파벌(북양군벌 등)로 나뉘어 실질적인 사병(私兵)화 경향마저 보였다. 특히 해군의 경우, 서태후의 사치 등으로 예산이 전용되어 북양함대는 1890년 이후 신형 군함을 거의 도입하지 못했으며, 군 내부의 부패(포탄 화약을 모래로 바꿔 빼돌리는 등)도 심각했다.[121] 육군 역시 부대 간 전력 차이가 크고 사기가 낮아, 근대화되고 일사불란한 지휘 체계를 갖춘 일본군에 비해 전반적인 전투력이 떨어졌다. 이러한 청나라 내부의 구조적 문제점들은 서구의 예상과 달리 일본의 승리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2. 2. 조선 내부의 갈등
19세기 후반 조선은 내부적으로 큰 변화와 갈등을 겪고 있었다. 1864년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고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고,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시작했다. 대원군은 왕권 강화를 목표로 양반 세력을 약화시키는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서구 열강의 접근에 맞서 강력한 쇄국정책을 펼쳤다. 프랑스와 미국의 함대를 격퇴한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는 이러한 정책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러나 1873년, 명성황후가 자신의 친족들을 요직에 등용하고 대원군의 정적들과 손을 잡으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키웠다. 유학자 최익현이 고종의 친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자, 명성황후는 이를 계기로 대원군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했다. 대원군의 실각은 조선이 쇄국정책을 포기하고 개방으로 나아가는 전환점이 되었다.
한편,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던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꾀했다.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의 정한론은 이토 히로부미 등 주류 세력의 반대로 무산되었으나, 일본은 포함외교를 통해 조선의 개항을 압박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1875년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통상을 요구한 일본은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시켜 부산, 원산, 인천 세 항구를 개항하게 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투의 발판을 마련했다.
개항 이후 조선 사회는 개화 정책을 둘러싸고 다시 한번 갈등에 휩싸였다. 1882년 구식 군인들의 불만이 폭발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이 일시적으로 재집권했으나, 청나라가 군대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고 대원군을 납치해갔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내세우며 내정 간섭을 강화했다.
청나라의 간섭 속에서 조선의 개화 노선은 두 갈래로 나뉘어 대립했다. 기성 관료 중심의 온건개화파(동도서기론)는 청나라와의 전통적인 사대 관계를 유지하면서 양무운동을 모델로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했다. 반면, 김옥균, 박영효 등 소장 관료 중심의 급진개화파(변법개화론)는 청나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과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한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했다.
1884년, 급진개화파는 일본 공사관의 지원을 받아 갑신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으나, 조선에 주둔하던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군과 일본군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으며, 정변을 주도했던 인사들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사태 수습을 위해 청나라와 일본은 이듬해인 1885년 톈진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다음의 내용을 골자로 했다.
# 조선으로부터 군대를 철수시킨다.
# 조선의 군대를 훈련하기 위한 훈련교관을 보내지 않는다.
# 변란 등의 중요 사건으로 어느 한쪽이 파병할 경우 상대방에 통보해야 한다.[71] 그러나 이 조약에도 불구하고 청나라는 갑신정변 진압을 계기로 조선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더욱 강화했으며, 일본은 친일 세력으로 간주되던 급진개화파(독립당)의 몰락으로 조선 내 입지가 약화되었다.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은 1894년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김옥균이 상하이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당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청나라는 김옥균의 시신을 조선으로 보내 부관참시하도록 했고, 일본 정부는 이를 자국에 대한 직접적인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같은 해, 동학 농민 운동이 발발하자 조선 내부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일본의 경제적 침탈 심화와 관리들의 수탈에 맞서 전봉준을 중심으로 농민들이 봉기하여 전주성을 점령하는 등 기세가 커지자[72], 스스로 사태를 수습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군대 파견을 요청했다. 청나라는 톈진 조약에 의거하여 파병 사실을 일본에 통보했고, 일본 역시 이를 빌미로 자국민 보호와 조선 내 영향력 확보를 위해 대규모 병력을 조선에 파견하면서 청일 간의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게 되었다.
2. 3. 일본의 군사적 성장과 대외 정책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부국강병 정책을 추진하며 군사력을 강화했다. 1854년 가나가와 조약으로 200년간 이어진 쇄국 정책을 끝내고, 1868년 메이지 유신과 도쿠가와 막부의 몰락 이후 새롭게 수립된 메이지 정부는 일본을 중앙집권화하고 근대화하기 위한 개혁에 착수했다. 일본은 서구의 예술과 과학을 배우고 흡수하기 위해 전 세계에 사절단과 유학생을 파견하여 서구 열강과 동등한 위치에 서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개혁을 통해 일본은 봉건 사회에서 근대 산업 국가로 변모했으며, 특히 서구식 훈련과 기술을 도입하여 군사력 강화에 집중했다. 그 결과 강력한 해군과 잘 갖춰진 육군을 보유하게 되었다. 철도, 전신선, 현대식 공장 건설 등 경제 기반 시설의 향상도 군사력 강화에 기여했다.
신흥 제국주의 국가로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나아가 만주를 비롯한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일본은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의 약세를 간파하고, 조선을 대륙 침략의 전진기지로 삼고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조선을 병합하고 식민지화하려 했다.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는 정한론을 주장했으나, 이토 히로부미 등 주류 세력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대신 일본은 포함외교를 통해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일본은 과거 미국이 자신들에게 했던 방식을 모방하여 운요호 사건(1875년)을 일으키고 이를 빌미로 조선에 통상을 강요했다. 1875년 9월 20일,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 연안에서 조선 수비대와 교전을 벌인 이 사건은 일본의 군사적 압박 수단이었다. 결국 1876년 2월 27일, 조선은 일본과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 조약으로 조선은 부산, 원산, 인천 세 항구를 개항하게 되었고, 이는 일본의 경제 침략을 위한 발판이 되었다.
조선 내부에서는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청나라가 개입하여 흥선대원군을 납치하고 난을 진압한 뒤, 종주권을 내세워 조선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이후 조선에서는 청나라와의 관계 및 개화 노선을 둘러싸고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었다. 기성 관료 중심의 동도서기파는 청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점진적 개혁을 추구한 반면, 소장 관료 중심의 변법개화파는 청의 간섭을 거부하고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
변법개화파는 일본 공사관과 내통하여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으나, 청나라 군사고문 원세개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청군과 일본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고, 패배한 변법개화파 인사들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청나라와 일본은 사태 수습을 위해 1885년 톈진 조약을 체결하여 양국 군대를 조선에서 철수시키고, 향후 조선에 파병할 경우 서로에게 사전 통보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일시적인 봉합이었을 뿐, 조선을 둘러싼 양국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군사력 강화에 박차를 가했다. 처음에는 프랑스 육군을 모델로 삼아 1872년-1880년과 1884년 두 차례에 걸쳐 프랑스 군사 고문단을 초빙했다. 1873년에는 전국적인 징병제를 시행하여 서구식 군대를 창설하고, 군사학교와 병기창을 건설했다. 1886년부터는 독일-프로이센식 모델로 전환하여 독일식 군사 교리와 제도, 조직을 채택했다. 독일 군사 고문 야코프 메켈의 자문에 따라 사단 및 연대 중심의 지휘 체계 개편, 군수 및 수송 체계 강화, 포병 및 공병 연대의 독립 부대화 등이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일본 육군은 유럽 군대와 견줄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청일 전쟁 발발 직전 일본군의 편제는 다음과 같았다.
구분 | 상세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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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병 | 17세~40세 남성 대상. 20세 징집, 17세 자원입대 가능. 현역 (3년), 제1예비군 (요비, 9만 2천 명), 제2예비군 (고비, 10만 6천 명), 제3예비군 (보충), 국민군 (영토 민병대). |
편제 | 6개 군관구 (도쿄, 오사카, 나고야, 센다이, 히로시마, 구마모토) 기반 사각 사단 (각 2개 여단, 여단당 2개 연대). 동원 시 사단 병력 약 18,600명, 포 36문. 근위사단 (전국 모병, 2개 여단, 연대당 2개 대대). 동원 시 근위사단 병력 12,500명, 포 24문. 이 외 요새 부대, 식민지 부대 (홋카이도, 류큐), 헌병대. 평시 병력 약 7만 명, 동원 시 22만 명 이상. |
장비 | 주력 소총: 8mm 단발식 무라타 18식 소총. 개량형 8발 탄창식 22식 소총 도입 중 (근위사단, 제4사단 우선 배치). 포병: 오사카 조병창 제조 75mm 야포 및 산악포 (크루프 설계 기반 이탈리아 개량형). 다수의 해안포 보유 (280mm 곡사포 50문, 274mm 포 38문, 240mm 포 45문, 150mm 포 40문, 120mm 포 42문 등). |
군수 | 사단 내 보급 부대 편성에도 불구, 야전 군수 지원 능력 부족. 노동자, 계약자, 운전사 등 15만 3천 명 동원 필요. 보급 문제로 작전 지연 및 현지 약탈 발생. 전쟁 후반 의약품, 방한복 부족.[8] |
1894년 7월 당시, 조선 내의 청나라 군대는 약 3,000명에서 3,500명 정도였으며, 이들은 아산만을 통해서만 병력을 보충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일본은 우선 아산에 주둔한 청나라 군대를 봉쇄하고 일본 육군으로 포위하는 것을 초기 목표로 삼았다.
1890년대까지 일본은 상대적으로 잘 훈련되고 장비된 근대적인 서구식 군대를 갖추게 되었다. 장교들은 유럽에서 유학하며 최신 군사 전략과 군사 전술을 습득했다. 전쟁 발발 시 일본 제국 육군은 2개 야전군과 5개 사단, 총 12만 명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일본 국내에서는 청일전쟁에 대한 주전론이 압도적이었으며, 정치와 군부가 통합된 모습을 보였다.[114] 개전 전 이토 히로부미 내각과 대립했던 의회 내 대외 강경파조차 전쟁이 시작되자 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임시 제7회 의회에서는 정부가 제출한 막대한 규모의 임시 군사비 예산안(전년도 일반회계 세출 결산액 8,458만 엔의 1.77배)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 전쟁을 "문명과 야만의 전쟁"[115]으로, 우치무라 간조는 "의로운 전쟁"[116]으로 규정하는 등 지식인 사회에서도 전쟁 지지 여론이 높았다. 이러한 분위기는 민간 의용병 운동 확산과 군자금 헌납 운동으로 이어져, 청일 전쟁은 일본에게 국민적 지지를 받는 전쟁이 되었다.
1894년 6월 5일, 참모본부 내에 대본영이 설치되어 전시 체제로 돌입했다. 8월 4일, 대본영은 "작전 대방침"을 수립하여 천황에게 보고했다. 이 계획은 발해만 연안에 육군 주력을 상륙시켜 청군 주력과 결전을 벌이는 것(직례 결전)을 최종 목표로 삼고, 작전을 2단계로 나누었다. 제1기 작전은 조선에 파견된 제5사단으로 청군을 견제하면서, 나머지 육해군 전력의 출동 준비, 국내 방어, 그리고 해군을 동원한 청나라 북양함대 격파 및 황해·발해만 제해권 장악에 중점을 두었다. 제2기 작전은 제해권 확보 여부에 따라 세 가지 시나리오를 상정했다. (가)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할 경우 직례 평야에서 결전, (나) 일본 근해의 제해권만 확보할 경우 조선에 육군을 증파하여 조선의 독립 확보에 주력, (다) 제해권을 상실할 경우 조선 주둔군을 지원하며 국내 방어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8월 14일, 연합함대로부터 신중한 작전을 건의하는 전문이 도착하자 대본영은 제2기 작전을 (나) 시나리오로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8월 31일, 대본영은 "동계 작전 대방침"을 통해 다시 목표를 (가) 시나리오, 즉 직례 결전으로 변경했다. 다만 아직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으므로, 1) 직례 결전의 발판 마련을 위한 랴오둥반도 공략, 2) 청군을 남만주로 유인하기 위한 양동 작전(봉천 공격), 3) 양동 작전 준비를 위한 청군 집결지 평양 공략을 우선 과제로 설정했다. 이 계획에 따라 9월 1일, 평양 공략을 위해 제1군이 편성되었다.
당시 일본의 전쟁 지도는 정치 주도로 이루어졌다.[118] 천황의 특별 지시에 따라 이토 히로부미 총리 등 정치 지도자들이 대본영 회의에 참석하여 의견을 개진했으며[119], 서구 열강의 동향을 고려한 정치적 판단이 군사 작전에 영향을 미쳤다. 이는 통수권 독립의 제도를 만든 당사자들이 제도의 목적과 한계를 알고 있어 실정에 맞지 않는 경우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점, 그리고 정치와 군사가 미분화된 에도 시대에 태어나 자란 무사 출신이었던 당시 지도층이 정치의 우위를 자명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러한 정치 우위의 군사 지도 체제는 러일전쟁 후 점차 상실되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후에는 이른바 "다이쇼 민주주의"를 거쳐 의회 제도 민주주의가 뿌리내린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1930년대 초의 세계 대공황 이후 군부 주도로 전환하게 된다.
3. 진행
3. 1. 전쟁의 발발
1894년,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김옥균이 상하이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은 김옥균의 유해 인도를 요구했으나, 청나라는 이를 거부하고 유해를 조선으로 보냈다. 조선 정부는 김옥균의 시신을 부관참시했고, 일본 정부는 이를 심각한 모욕으로 여겼다. 이러한 갈등 상황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진압 지원을 요청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청나라는 톈진 조약에 따라 파병 사실을 일본에 통보하고, 엽지초가 이끄는 약 2,800명의 병력을 조선 아산에 파견했다. 이에 일본은 자국 내 정치적 위기를 외부로 돌리고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할 목적으로[78], 오시마 요시마사가 지휘하는 8,000명 규모의 대규모 병력을 조선에 보냈다. 일본군은 조선 정부의 항의를 무시하고 1894년 6월 9일 이후 인천에 상륙했으며, 7월 23일에는 고종이 머무는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했다. 일부 조선군이 저항했으나, 고종이 직접 무장 해제를 명령하면서 진압되었다.[206] 일본군은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김홍집, 박정양, 민영달 등 친일 성향의 인사들로 내각을 교체하며 갑오경장을 강행했다. 일본이 조선에 추가 병력을 파견하자, 청나라는 일본과의 국교 단절을 선언하고 조선의 새 정부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양국 간의 군사적 충돌이 임박했다.
당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정책 방향으로 네 가지 계획안을 검토했다.
무쓰 무네미츠 외무대신을 비롯한 일본 지도부는 조선의 자력 독립 유지 가능성을 낮게 평가하고, 친일 내각 수립의 불안정성을 고려하여 조선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을(乙) 계획을 채택했다. 이는 훗날 을사조약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대조선 침략 정책의 기초가 되었으며, 1894년 8월 17일 일본 내각에서 공식 결정되었다.
1894년 7월 25일, 아산만 근해에서 일본 해군 제1유격대(순양함 요시노, 나니와, 아키쓰시마)가 청나라 순양함 제원(済遠)과 포함 광을(広乙)과 조우하면서 풍도 해전이 발발했다. 약 1시간의 교전 끝에 광을호는 좌초 후 폭발했고, 제원호는 도주했다.
이 교전 중, 도고 헤이하치로가 함장으로 있던 일본 순양함 나니와는 청나라 군대 수송 임무를 수행하던 영국 상선 '고승호(Kowshing)'를 발견했다. 고승호에는 1,100여 명의 청군과 독일인 군사고문 폰 하네켄 소령 등이 탑승하고 있었다. 나니와호는 고승호에 정선 및 나포를 통보하고 유럽인들의 이함을 요구했으나, 배에 타고 있던 청군 병사들은 이를 거부하고 영국인 선원들을 위협하며 항해 지속을 요구했다. 4시간의 대치 끝에 도고 함장은 고승호에 발포 명령을 내렸고, 어뢰와 함포 공격으로 고승호는 침몰했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청군 병사들이 사망했으며, 일부 생존자들은 나니와호 및 주변에 있던 다른 나라 군함들에 의해 구조되었다. 고승호 침몰 사건은 영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일으켰으나, 일본 측의 행위가 교전 중 국제법상 허용되는 조치라는 해석이 나오면서 외교 문제로 비화되지는 않았다.[13]
육상에서는 7월 29일 성환 전투가 벌어졌다. 오시마 요시마사 소장이 이끄는 일본군 혼성 제9여단 약 4,000명은 7월 25일 서울을 출발하여 아산 방면으로 남하했다. 당시 아산과 성환 일대에는 엽지초 제독이 지휘하는 약 3,880명의 청군이 주둔하며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7월 29일 새벽, 일본군은 청군 진지에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전투는 일본군의 우세 속에 진행되었고, 청군은 방어선을 포기하고 무기와 장비를 버린 채 평양 방면으로 후퇴했다. 이 전투에서 청군은 약 500명, 일본군은 88명의 사상자를 냈다. 일본군은 아산을 점령하여 서울에 대한 청군의 위협을 제거했다.[14]
풍도 해전과 성환 전투를 통해 청일 양국 간의 무력 충돌은 전면전으로 확대되었고, 1894년 8월 1일 양국은 공식적으로 서로에게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청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3. 2. 주요 전투
성환 전투와 평양 전투조선의 친일 내각으로부터 청나라 군대를 축출할 권한을 얻은 오시마 요시마사 소장은 약 3,500명의 일본군 여단을 이끌고 한양에서 아산만으로 이동했다. 이곳에는 아산과 성환(현재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에 주둔한 약 4,000명의 청나라 군대가 있었다. 1894년 7월 28일, 양측 군대는 아산 외곽에서 다음 날 아침까지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수적으로 열세였던 청나라 군대는 점차 밀려 평양으로 후퇴했다. 청나라 군대는 약 50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일본군 사상자는 100여 명에 불과했다. 8월 1일,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공식적으로 전쟁이 선포되었다.
8월 4일까지 조선에 남아있던 청나라 군대는 평양으로 철수하여 새로 파견된 병력과 합류했다. 약 15,000명에 달하는 청나라 수비군은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대대적으로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청나라는 평양을 거점으로 삼아 조선 반도 전체를 다시 장악할 계획이었으며, 당시 평양 주둔군은 다량의 현대식 장비와 최정예 부대를 일부 포함하고 있었다.
9월 15일, 약 23,800명의 일본군이 여러 경로를 통해 평양으로 집결하여 공격을 시작했다. 일본군은 동쪽에서 포격하고 남쪽에서 기만 공격을 펼치며 북쪽에서의 주 공격을 지원했다. 청나라 군대는 좌보규 장군이 이끄는 회족 부대를 중심으로 강력하게 저항했으나,[16] 일본군의 공세를 막지 못하고 결국 패배했다. 좌보규 장군은 전투 중 전사했다. 밤새 내린 폭우와 어둠을 틈타 살아남은 청나라 군대는 평양을 빠져나와 국경 도시인 의주로 후퇴했다. 이 전투에서 청나라는 사망자 1,000명, 부상자 4,000명에 달하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일본군 사상자는 500명 정도였다.
9월 16일 아침, 일본군은 평양성에 입성했다. 평양 전투의 승리로 일본은 조선 반도에서 청나라 군사력을 사실상 몰아냈으며, 이후 조선의 내정에 대한 간섭을 더욱 강화했다. 조선의 물자와 노동력이 일본군에게 강제로 제공되었고, 이는 농민들의 봉기를 유발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황해 해전 (압록강 해전)
1894년 9월 17일, 압록강 하구에서 청나라의 북양함대와 일본의 연합 함대 사이에 대규모 해전이 벌어졌다. 이는 청일 전쟁 중 가장 큰 규모의 해전이었다. 청나라 북양함대는 평양의 육군을 지원하기 위해 병력 수송선을 호위하던 중 일본 함대와 마주쳤다. 북양함대는 정원, 진원과 같은 강력한 철갑함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함대 기동 능력과 수병들의 훈련 수준에서 일본 함대에 비해 열세였다.
오전 10시 넘어 시작된 전투는 해질녘까지 이어졌고, 결과는 일본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북양함대는 참가한 군함 10척 중 '초용', '치원', '경원' 등 5척이 침몰하고 6척이 크게 파손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사망자는 850명, 부상자는 500명에 달했다. 반면 일본 연합함대는 기함 '마쓰시마'를 포함한 4척이 중파 또는 대파되었지만 침몰한 함선은 없었고, 사망자 90명, 부상자 197명의 비교적 가벼운 피해를 입었다.
이 해전의 승리로 일본은 황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이는 일본 육군의 만주 진격을 용이하게 만들었으며, 청나라 해군의 사기를 크게 꺾었다. 전투 후 북양함대의 남은 함선들은 여순항으로 피신했다가 이후 위해위로 후퇴했다. 이 전투는 일본에게 중요한 군사적, 선전적 승리를 안겨주었다.[17]
압록강 전투 (구련성 전투)
평양에서의 패배와 황해 해전에서의 참패 이후, 청나라 군대는 조선 북부에서 완전히 철수하여 압록강변의 요새, 특히 구련성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했다. 약 3만 400명의 병력과 90문의 대포가 배치되었으나, 평양에서 패주한 병력이 다수 포함되어 사기가 낮았고, 신병이 많아 방어에 어려움이 예상되었다.[101] 총지휘관 송경 장군의 지휘 아래 여러 장수들 간의 불협화음도 문제였다.
10월 24일 밤, 야마가타 아리토모 원수가 지휘하는 일본 제1군은 뗏목 다리를 이용해 몰래 압록강을 건넜다. 다음 날인 10월 25일, 일본군은 구련성 북쪽의 호산에 있는 청나라 진지를 먼저 공격하여 방어군의 주의를 분산시킨 후, 구련성 본진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일본군은 호산의 청군 거점을 점령했으나(일본군 전사 34명, 부상 115명), 다음 날 새벽 구련성을 공격하려 했을 때는 이미 청나라 군대가 모두 철수한 후였다.
청군은 구련성을 버리고 단둥으로 후퇴했으며, 26일까지 압록강 연안의 모든 요새를 포기했다. 이후 청군은 봉황성으로 후퇴했지만, 일본군이 추격해오자 10월 30일 봉황성마저 버리고 심양 방면으로 후퇴했다. 일본 제1군은 큰 저항 없이 단둥을 점령하며 만주 땅에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제3사단은 서쪽으로 도주하는 청군을 추격하며 랴오둥 반도의 도시들을 점령해 나갔다.
뤼순 전투와 뤼순 대학살
한편, 오야마 이와오 대장이 이끄는 일본 제2군은 10월 24일 랴오둥 반도 남쪽 해안의 화원구에 상륙하여 여순항 공략을 목표로 진격했다. 11월 6일 금주성을 점령한 후, 11월 21일 뤼순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했다. 청나라 수비군은 약 12,000명이었으나 사기가 낮고 신병이 많아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고, 일본군은 다음 날인 22일까지 큰 피해 없이 견고한 여순 요새를 점령했다.[100] 일본군의 손실은 전사 40명, 부상 241명에 불과했지만, 청군은 전사 4,500명, 포로 600명이라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뤼순 점령 과정에서 일본군은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군 병사들의 시신이 훼손된 것을 보복한다는 명분 아래, 일본군은 뤼순 시내에서 통제되지 않은 민간인 학살, 즉 뤼순 대학살을 자행했다. 학살은 며칠간 이어졌으며,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으나 수천 명의 비전투원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은 국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일본의 이미지를 크게 실추시켰다. 특히 미국에서는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과의 조약 개정 논의가 잠시 중단될 뻔하기도 했다. 12월 10일, 일본 제1군은 개평을 점령했다.
위해위 해전
황해 해전에서 패배하고 뤼순항마저 함락당한 북양함대의 잔존 함대는 산둥 반도의 위해위 요새로 후퇴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육군과 해군을 동원하여 위해위를 포위했다. 일본 육군은 산둥 반도에 상륙하여 육지 쪽에서 위해위 요새를 공격했고, 해군은 해상 봉쇄와 공격을 담당했다.
위해위 해전은 1895년 1월 20일부터 2월 12일까지 약 23일간 지속된 포위 공격이었다. 북양함대 사령관 정여창 제독은 기뢰 방어선 뒤에 함대를 숨기고 소극적으로 방어했지만, 일본군의 육해 합동 공격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18] 결국 육지 쪽 방어선이 일본 육군에 의해 돌파되면서 위해위 요새는 함락되었다. 정여창 제독은 항복을 거부하고 자결했으며, 북양함대는 완전히 와해되었다. 이 전투를 끝으로 청나라는 전쟁 수행 능력을 거의 상실하게 된다.
4. 전쟁의 결과 및 영향
1894년 말 일본군은 여순항을 점령하고, 이 과정에서 '여순 대학살'이라 불리는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이후 1895년 초까지 웨이하이 요새를 함락시키고 북쪽으로 진격하여 북경 인근까지 도달했으며, 남쪽으로는 펑후 제도와 타이완을 점령하여 동중국해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의 요청으로 1895년 4월 17일,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강화 조약인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하고, 랴오둥반도, 타이완, 펑후 제도를 일본에 할양했으며, 전쟁 배상금으로 은 2억 냥(兩)을 지불하고 여러 통상 특권을 일본에 부여했다.
이 전쟁의 결과, 청나라는 군사적 무력함이 드러나 국제적 위신이 크게 실추되었고, 서구 열강에 의한 중국 분할 경쟁이 더욱 심화되었다. 또한 오랜 중화사상에 기반한 동아시아 질서는 큰 타격을 입었으며, 이는 훗날 신해혁명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동아시아의 주도권은 청나라에서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일본은 전쟁 승리와 막대한 배상금을 통해 국제적 지위가 크게 향상되었고, 확보한 자본으로 군비 확장과 산업 발전에 박차를 가했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에 대한 침략 야욕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러시아와의 대립 구도를 형성하게 되었다.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전쟁 중 만주 점령과 북경 약탈을 주장하는 글을 신문에 연재한 것은[207] 당시 일본 사회에 팽배했던 제국주의적 분위기를 보여준다.
그러나 시모노세키 조약 직후,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삼국 간섭으로 일본은 랴오둥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해야 했다. 이는 일본에게 외교적 좌절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러시아에 대한 적대감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조선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나라의 종주권에서 공식적으로 벗어났으나, 일본의 강력한 내정 간섭에 직면하게 되었다. 조선 정부는 1895년 1월, 일본의 압력 하에 청나라 연호를 폐지하고 왕실 호칭을 격상하는 등 자주독립국의 면모를 갖추려 했으나, 삼국 간섭 이후에는 러시아 세력을 이용하여 일본을 견제하려 시도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을미개혁을 강행했다. 이에 대한 반발로 을미의병이 일어나고,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이 발생하면서 조선 내 일본의 영향력은 일시적으로 약화되었다. 이후 고종은 환궁하여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자주독립 의지를 천명했지만, 조선(대한제국)을 둘러싼 열강의 각축은 더욱 심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