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선 (1883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호선은 1883년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대장동에서 태어났으며, 대한제국 시기 조선사관학교에서 수학했으나 군인의 길을 포기하고 측량술을 배워 측지기사로 활동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에서 기수로 근무했으며, 해방 후에는 낙생면장을 역임하고 조선연료협회 창립에 참여했다. 2018년 성남시 분당구 대장동으로 묘소가 이장되었다.
출생지는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대장동이고, 본적지는 경기도 광주이다.[1] 아버지는 재인(在寅)이고, 어머니는 고성이씨(固城李氏)로 이영기(李永基)의 딸이다.
2. 생애
그의 15대조 충좌위부사정 혹은 호군을 역임한 이경연 혹은 그의 손자 병마절도사 이지방의 대에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낙생면 일대에 정착했다. 이호선의 7대조 이상우는 포천에 있던 일가 이영구의 양자로 입양됐으나, 상우의 손자이자 인수의 아들 광석, 중석이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낙생면 일대의 분묘를 수호하려고 다시 경기도 포천 일동면에서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대장리로 이주하여 자리잡았다. 고조부 이한택은 정조 때 무과에 급제하였다.
대한민국 인사록에 의하면 그는 대한제국 때 조선사관학교(朝鮮士官學校)에서 수학했다.[2] 그러나 군인의 길을 포기하고, 측량술을 배워 측지기사로 활동하게 된다. 그가 군인의 길을 포기한 사유는 알려진 것이 없다.
1911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측량과 기수(技手)가 되고[3] 그해 9월 30일 토지조사국 기수에 재임명되어, 1912년[4], 1913년[5], 1914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측량과 기수(技手)로 있었다. 1914년부터 1915년, 1916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측지과 기수(技手)였다. 1916년 11월 15일 7급봉으로 승급했다. 1917년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 기수로 재직 중이었다.
1945년 해방 후 낙생면장이 되었다. 9월 19일 서울 종로구 와룡동 119번지에서 조직한 조선연료협회(朝鮮燃料協會) 창립에 참여하고, 석탄부 위원에 선출되었다.[6] 1947년 당시에는 광주군농회 회원이었다.[7] 1948년 정부 수립 후에도 낙생면장에 유임, 1949년에는 광주군 후생협회 지부장(厚生協會 支部長), 성인교육협회 지부장(成人敎育協會支部長), 미산협회 낙생면 분구장(米產協會樂生面 分區長) 등을 역임했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대장리(현, 성남시 분당구 대장동) 절골(寺谷) 초입 쌍봉(雙峰)부락에 매장되었다가, 2018년 10월 성남시 분당구 대장동 산19-63번지 무두만현(無頭滿峴) 고개 자좌(子坐)로 이장되었다.
2. 1. 일제강점기 활동
이호선은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대장동에서 출생하였으며, 본적은 경기도 광주이다.[1] 그의 15대조 이경연 혹은 그의 손자 이지방 대에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낙생면 일대에 정착했다. 대한제국 때 조선사관학교(朝鮮士官學校)에서 수학했으나[2], 군인의 길을 포기하고 측량술을 배워 측지기사로 활동했다.
1911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측량과 기수(技手)가 되고[3] 그해 9월 30일 토지조사국 기수에 재임명되어, 1912년[4], 1913년[5], 1914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측량과 기수(技手)로 있었다. 1914년부터 1915년, 1916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측지과 기수(技手)였다. 1916년 11월 15일 7급봉으로 승급했다. 1917년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 기수로 재직 중이었다.
2. 2. 해방 이후 활동
1945년 해방 후 낙생면장이 되었다.[6] 9월 19일 서울 종로구 와룡동 119번지에서 조직한 조선연료협회(朝鮮燃料協會) 창립에 참여하고, 석탄부 위원에 선출되었다.[6] 1947년 당시에는 광주군농회 회원이었다.[7] 1948년 정부 수립 후에도 낙생면장에 유임, 1949년에는 광주군 후생협회 지부장(厚生協會 支部長), 성인교육협회 지부장(成人敎育協會支部長), 미산협회 낙생면 분구장(米產協會樂生面 分區長) 등을 역임했다.
3. 가계
3. 1. 가족 관계
3. 2. 선조
4. 묘소
그의 묘소는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대장리(현, 성남시 분당구 대장동) 절골(寺谷) 초입 쌍봉(雙峰)부락에 매장되었다.[1] 이후 2018년 10월 성남시 분당구 대장동 산19-63번지 무두만현(無頭滿峴) 고개 자좌(子坐)로 이장되었다.[1]
참조
[1]
서적
대한민국인사록 人事錄 1949년
내외홍보사
1949
[2]
서적
대한민국인사록 人事錄 1949년
내외홍보사
1949
[3]
서적
조선총독부및소속관서직원록 1911년도
[4]
서적
조선총독부및소속관서직원록 1912년도
[5]
서적
일본제국직원록 조선총독부편 1913년도
[6]
뉴스
조선연료협회 결성
매일신보
1945-09-19
[7]
뉴스
祝八.一五記念
현대일보
1947-08-2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