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우 (1648년)
1. 개요
이상우(1648년)는 1648년 7월 26일에 태어난 조선 시대의 문신이다. 이경태의 아들이지만 이영구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며, 1681년 문과에 급제하여 찰방 등을 역임했다. 1709년 제주도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신병으로 부임하지 못했고, 이후 승문원 교검, 경안역 찰방 등을 지냈다. 1728년 이인좌의 난 당시 연좌되지 않았으며, 절충장군에 제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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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2년 사망 -
에드먼드 핼리
에드먼드 핼리는 핼리 혜성의 주기성을 예측하고 아이작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출판을 지원했으며, 항성의 고유 운동을 발견하는 데 기여한 영국의 천문학자, 수학자, 지도 제작자, 지구물리학자이자 기상학자이며 왕립 천문학자로서 천문학 발전에 기여했다. -
1742년 사망 -
이이 나오노리 (1694년)
이이 나오노리는 이이 나오오키의 아들이자 이이 나오토모의 양자이며, 슌쇼인의 아들이고, 아베 마사쿠니의 딸인 쇼가쿠인을 정실로, 이와사키 씨인 슌코인을 측실로 두었으며, 장남은 이이 나오하루이다. -
조선의 문신 -
정유길
정유길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명종 때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윤원형 탄핵에 앞장서 훈구파, 소윤파, 사림파 모두에게 존경받아 좌의정에 이르렀다. -
조선의 문신 -
윤증
윤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까지 역임한 정치가였으며, 성리학적·정치적 갈등으로 스승 송시열과 결별하고 탕평책을 지지했으나 당쟁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실천적 삶을 강조한 무실학을 추구하며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
경기도 출신 -
차훈
차훈은 2015년 밴드 엔플라잉의 기타리스트로 데뷔하여 슬래시와 마크 트레몬티를 롤 모델 삼아 독자적인 기타 연주 스타일을 구축하고, 김재현과 유튜브 채널 'Two Idiots'를 운영하며, 2022년부터는 연기 활동과 솔로 싱글 발표를 병행하다 2023년 군악대에 입대한 대한민국의 기타리스트이자 배우, 유튜버이다. -
경기도 출신 -
윤태일 (1918년)
윤태일은 만주군 장교 출신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한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 기업인이며, 박정희 정권에서 서울특별시장과 대한주택공사 총재, 제9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나 만주군 복무 경력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2. 생애
1648년(인조 26년) 7월 26일에 태어났으며, 자는 성택(聖澤), 설지(說之), 택보(澤甫)이다. 아버지는 이영구(李英久)이고 어머니는 미상이다. 생부는 이경태이고 생모는 전주 이씨이다. 생모 전주이씨는 세종대왕의 왕자 영해군 이당의 6대손 승의랑, 진용교위를 지낸 이집(李鏶)의 딸이다.
생가 8대조 이경연 혹은 6대조 이지방(李之芳)이 강원도 강릉에서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대장동, 낙생동)으로 이주하여 광주 언주에서 거주했지만, 포천 출신 이영구(李英久)의 양자가 되어 포천군 일동면으로 이주하였다.
본생가로는 내의원 의관 이희헌(李希憲)의 4대손인데, 생가 할아버지 이원빈은 통덕랑으로 사마시에 합격한 뒤 동몽교관, 현감을 역임했으며, 생가 할머니 전주이씨 이애임(全州李氏 李愛任)은 정종의 넷째 왕자 선성군 이무생(宣城君 李茂生)의 5대손 영의정 충정공 이홍주의 서녀였다. 생부 이경태는 사후 증 통훈대부 장악원정에 증직되었다. 생가 외할아버지인 이집은 가선대부 이숙명의 서자였다.
이상우는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과 언주면 일대에서 살다가 친족 이영구의 양자가 되면서 경기도 포천군으로 이주했다. 이후 그는 이동면 장암리 배선동에 정착했고, 후손들은 일동면 유동리, 원통, 덕현, 기산리 등에 정착했다. 그가 이영구(李英久)의 양자가 된 시점은 기록이 사라졌지만 1681년(숙종 7년) 문과에 응시할 때는 거주지는 경기도 포천이었다. 그의 생부 이경태는 1691년(숙종 17년)까지 생존했지만 국조방목, 문과방목에는 이미 사망한 것으로 나타난다. 양부 이영구는 1678년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문과방목 사본에는 그의 이름이 잘못 등재되어 있어 이상우(李尙宇)로 나타난다. 다른 문과방목, 국조방목에는 이상우로 등재되어 있지만, 그의 이름이 이상우(李尙宇)로 기록된 문과방목본 제5권은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소장하고 있다.
어느 학자의 문인이 되었는지 혹은 한성의 사부학당에 입학해서 수학했는지 등, 수학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훈련원주부 이정추(李廷樞)의 딸 학성이씨(鶴城李氏)와 혼인했는데, 장인 이정추는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판관, 훈련원주부를 역임했다. 처조부는 군자감판관 이언신(李彦信)이고, 처증조는 함안군수 이순광(李順光)이며 처고조는 이정숙(李貞淑) 또는 이천령(李千齡)이며, 통덕랑 직무(直武)의 5대손이다. 처삼촌은 이정량(李廷樑)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강화중군(江華中軍), 충청도병마절도사등을 역임했다.
장남 이필수(李必壽)는 일찍 사망하고 차남 이익수는 관상감 교수를 역임하고 사후 증 호조참판에 추증됐으며, 셋째 아들 이인수는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했다. 둘째 아들 이익수의 관직 경력은 족보에서 실전되었다가 2000년대 이후 조선 왕조 왕실 족보가 공개되면서 이익수의 사위 이동모(李東模, 서산군 이혜 11대손)의 기록에 敎官羽溪李益壽女英祖己酉生乙亥卒이라 하여, 이익수가 교관을 지낸 것과, 승정원일기에 관상감 겸교수 임명 기록이 확인되었다.
1677년(숙종 3) 12월 15일 숙종이 친히 전강을 실시할 때 유학으로서 전강에 서략(書略, 8등)하여 종이 4권, 필 4병, 먹 3개를 하사받았다. 같은 날 전강에서 상위 성적을 받은 유생들에게 자격을 부여할 때, 숙종의 명으로 예조로부터 일분(一分)을 하사받았다. 심릉(沈棱) 등과 1분을 사급받은 것은 승정원일기, 전강등록에 나타난다. 본가 쪽으로는 송곡 이서우와 8촌간으로 1680년 경신환국 당시에는 연좌되지 않았다.
통덕랑 재직 중 1681년(숙종 7년) 12월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 22위로 급제, 찰방을 지냈다. 1682년(숙종 8) 7월 2일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 9월 6일 교서관저작(校書館著作)이 되었으며 1683년(숙종 9년) 1월 11일 문신 전강에 나오지 않은 허지(許墀) 등을 파직할 때 함께 교서관저작에서 파직되었다. 1684년(숙종 10) 6월 2일 서용의 명이 내려지고 같은 날 직첩을 환급받았다. 이후 의영고주부, 교서관교리를 거쳐 7월 2일 다시 교서관저작에 임명되고 1684년 9월 14일 교서관박사(校書館博士)에 임명되었다.
1684년 12월 27일 의영고주부가 되고, 1685년 3월 10일 의영고주부로 경연윤대관(輪對官)이 되었다. 1685년 7월 의영고주부 재직 중, 사직기우제(社稷祈雨祭)에 참석하여 7월 18일 사직기우제 참석 관원들을 포상할 때 아마 1필을 선물로 받았다. 1686년(숙종 12년) 1월 10일 성균관전적(典籍)이 되었다가, 10월 5일 교서관교검(校檢)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사헌부감찰, 1687년 9월 2일 교서관저작, 1689년 사헌부감찰, 성균관전적을 역임하고, 1694년(숙종 20년) 4월 1일 갑술환국으로 면직되었다가 곧 서용의 명령이 내려졌지만 한동안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1704년(숙종 30) 성균관전적, 1705년(숙종 31) 교서관검교에 제수되고 그해 3월 2일 승문원교검(承文院校檢), 8월 30일 경연윤대관에 선발되었다. 1709년(숙종 35) 4월 12일 제주도교수(濟州道敎授)에 임명되었지만, 4월 18일 이조(吏曹)에 신병으로 부임하기 어렵다는 정장(呈狀)을 올려 숙종이 윤허하여 해임되었다. 1709년 7월 27일 승문원교검에 복직되었다. 1711년(숙종 37) 6월 29일 경안역찰방(慶安驛察訪)으로 부임하였다가, 3년만에 관직에서 물러났다. 1711년 11월 24일 선원록청에서 무주 적상산성 선원각에 봉원할 때, 경안찰방으로 선원록 봉안차사원(奉安差使員)에 임명되어 11월 24일부터 11월 26일 충청도 직산에 도착할 때까지 도차사원 교하현감 이익량(李翊亮)과 함께 선원록 운반을 배행하였다. 1714년(숙종 40년) 6월 사퇴하고 경안찰방에서 물러났다.
그의 후손들은 이동면 장암리 외에도 다른 아들 이인수는 근처 일동면 유동리, 원통(圓通) 일대에 살았고, 생가 이복동생 이춘우(李春雨)는 근처 일동면 기산리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그의 후손들은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기산리, 유동리, 길명리와 주변 지역에 살게 되었다.
사후 손자 성석과 원석 등이 노인직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올랐으므로 그에게도 추은(追恩)으로 증직이 내려져 증(贈)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겸 경연참찬관(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영평군 배상동(排上洞, 현,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장암리(場岩里) 배상골(또는 배산골, 배선골 또는 배선동 부락)) 가리산 묘좌(卯坐)에 부인 학성이씨와 합장되었다.
묘비는 훼손되고 6.25 전쟁으로 일부 추가 훼손되면서 1995년 10월 3일 후손이 세운 비석이 있다. 또한 망주석은 묘소 앞 약 50m 지점에 위치해 있다.
7번째 칸에 그의 이름이 있다.
2.1. 출생과 가계
1648년(인조 26년) 7월 26일에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이영구(李英久)이고 어머니는 미상이다. 생부는 이경태이고 생모는 전주 이씨이다. 생모 전주이씨는 세종대왕의 왕자 영해군 이당의 6대손 승의랑, 진용교위를 지낸 이집(李鏶)의 딸이다. 자는 성택(聖澤), 설지(說之), 택보(澤甫)이다.
생가 8대조 이경연 혹은 6대조 이지방(李之芳)이 강원도 강릉에서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대장동, 낙생동)으로 이주하여 광주 언주에서 거주했지만, 포천 출신 이영구(李英久)의 양자가 되어 포천군 일동면으로 이주하였다.
본생가로는 내의원 의관 이희헌(李希憲)의 4대손인데, 생가 할아버지 이원빈은 통덕랑으로 사마시에 합격한 뒤 동몽교관, 현감을 역임했으며, 생가 할머니 전주이씨 이애임(全州李氏 李愛任)은 정종의 넷째 왕자 선성군 이무생(宣城君 李茂生)의 5대손 영의정 충정공 이홍주의 서녀였다. 생부 이경태는 사후 증 통훈대부 장악원정에 증직되었다.
생가 외할아버지인 이집은 가선대부 이숙명의 서자였다.
2.2. 초기 활동
이상우는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과 언주면 일대에서 살다가 친족 이영구의 양자가 되면서 경기도 포천군으로 이주했다. 이후 그는 이동면 장암리 배선동에 정착했고, 후손들은 일동면 유동리, 원통, 덕현, 기산리 등에 정착했다. 그가 이영구(李英久)의 양자가 된 시점은 기록이 사라졌지만 1681년(숙종 7년) 문과에 응시할 때는 거주지는 경기도 포천이었다.
그의 생부 이경태는 1691년(숙종 17년)까지 생존했지만 국조방목, 문과방목에는 이미 사망한 것으로 나타난다. 양부 이영구는 1678년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문과방목 사본에는 그의 이름이 잘못 등재되어 있어 이상우(李尙宇)로 나타난다. 다른 문과방목, 국조방목에는 이상우로 등재되어 있지만, 그의 이름이 이상우(李尙宇)로 기록된 문과방목본 제5권은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소장하고 있다.
어느 학자의 문인이 되었는지 혹은 한성의 사부학당에 입학해서 수학했는지 등, 수학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훈련원주부 이정추(李廷樞)의 딸 학성이씨(鶴城李氏)와 혼인했는데, 장인 이정추는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판관, 훈련원주부 등을 역임했다. 처조부는 군자감판관 이언신(李彦信)이고, 처증조는 함안군수 이순광(李順光)이며 처고조는 이정숙(李貞淑) 또는 이천령(李千齡)이며, 통덕랑 직무(直武)의 5대손이다. 처삼촌은 이정량(李廷樑)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강화중군(江華中軍), 충청도병마절도사등을 역임했다.
장남 이필수(李必壽)는 일찍 사망하고 차남 이익수는 관상감 교수를 역임하고 사후 증 호조참판에 추증됐으며, 셋째 아들 이인수는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했다. 둘째 아들 이익수의 관직 경력은 족보에서 실전되었다가 2000년대 이후 조선 왕조 왕실 족보가 공개되면서 이익수의 사위 이동모(李東模, 서산군 이혜 11대손)의 기록에 敎官羽溪李益壽女英祖己酉生乙亥卒이라 하여, 이익수가 교관을 지낸 것과, 승정원일기에 관상감 겸교수 임명 기록이 확인되었다.
2.3.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1677년(숙종 3) 12월 15일 숙종이 친히 전강을 실시할 때 유학으로서 전강에 서략(書略, 8등)하여 종이 4권, 필 4병, 먹 3개를 하사받았다. 같은 날 전강에서 상위 성적을 받은 유생들에게 자격을 부여할 때, 숙종의 명으로 예조로부터 일분(一分)을 하사받았다. 심릉(沈棱) 등과 1분을 사급받은 것은 승정원일기, 전강등록에 나타난다. 본가 쪽으로는 송곡 이서우와 8촌간으로 1680년 경신환국 당시에는 연좌되지 않았다.
통덕랑 재직 중 1681년(숙종 7년) 12월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 22위로 급제, 찰방을 지냈다. 1682년(숙종 8) 7월 2일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 9월 6일 교서관저작(校書館著作)이 되었으며 1683년(숙종 9년) 1월 11일 문신 전강에 나오지 않은 허지(許墀) 등을 파직할 때 함께 교서관저작에서 파직되었다. 1684년(숙종 10) 6월 2일 서용의 명이 내려지고 같은 날 직첩을 환급받았다. 이후 의영고주부, 교서관교리를 거쳐 7월 2일 다시 교서관저작에 임명되고 1684년 9월 14일 교서관박사(校書館博士)에 임명되었다.
1684년 12월 27일 의영고주부가 되고, 1685년 3월 10일 의영고주부로 경연윤대관(輪對官)이 되었다. 1685년 7월 의영고주부 재직 중, 사직기우제(社稷祈雨祭)에 참석하여 7월 18일 사직기우제 참석 관원들을 포상할 때 아마 1필을 선물로 받았다. 1686년(숙종 12년) 1월 10일 성균관전적(典籍)이 되었다가, 10월 5일 교서관교검(校檢)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사헌부감찰, 1687년 9월 2일 교서관저작, 1689년 사헌부감찰, 성균관전적을 역임하고, 1694년(숙종 20년) 4월 1일 갑술환국으로 면직되었다가 곧 서용의 명령이 내려졌지만 한동안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1704년(숙종 30) 성균관전적, 1705년(숙종 31) 교서관검교에 제수되고 그해 3월 2일 승문원교검(承文院校檢), 8월 30일 경연윤대관에 선발되었다. 1709년(숙종 35) 4월 12일 제주도교수(濟州道敎授)에 임명되었지만, 4월 18일 이조(吏曹)에 신병으로 부임하기 어렵다는 정장(呈狀)을 올려 숙종이 윤허하여 해임되었다. 1709년 7월 27일 승문원교검에 복직되었다. 1711년(숙종 37) 6월 29일 경안역찰방(慶安驛察訪)으로 부임하였다가, 3년만에 관직에서 물러났다. 1711년 11월 24일 선원록청에서 무주 적상산성 선원각에 봉원할 때, 경안찰방으로 선원록 봉안차사원(奉安差使員)에 임명되어 11월 24일부터 11월 26일 충청도 직산에 도착할 때까지 도차사원 교하현감 이익량(李翊亮)과 함께 선원록 운반을 배행하였다. 1714년(숙종 40년) 6월 사퇴하고 경안찰방에서 물러났다.
3. 가족 관계
| 양 증조부 | 이여추(李汝樞) |
|---|---|
| 양 할아버지 | 이규(李規) |
| 양 아버지 | 이영구(李英久) |
| 양 어머니 | 미상 |
| 양 동생 | 이은우(李殷雨) |
| 생 증조부 | 이희헌(李希憲, 1569년 6월 15일 - 1651년 11월 28일), 내의원 의관 |
| 생 조부 | 이원빈(李元賓, 1608년 4월 12일 ~ 1679년 5월 26일) |
| 생 조모 | 전주이씨(1611년 2월 18일 - 1673년 3월 26일), 정종의 서자 선성군 5대손 이홍주의 서녀 |
| 생부 | 이경태(李慶泰, 1632년 9월 3일 - 1691년 4월 2일) |
| 생모 | 전주이씨(1635년 12월 28일 - 1671년 7월 26일), 영해군 이당의 아들 영춘군의 6대손 진용교위 이집(李鏶)의 딸 |
| 생 동생 | 이윤우(李潤雨) |
| 이세빈(李世彬, 본관은 전주, 효령대군 후손, 오위장 이간 아들 이경복(李慶福)의 4대손)의 처 우계이씨 | |
| 우흥적(禹興績, 본관은 단양)의 처 우계이씨 | |
| 생 제수 | 창원황씨, 생몰년 미상 |
| 생 제수 | 전주이씨, 생몰년 미상 |
| 생 조카사위 | 우순요(禹順堯, 본관은 단양) |
| 생 질 | 이중개(李重開) |
| 이진개(李震開) | |
| 생 질 | 우순요(禹順堯) |
| 계모 | 의령남씨(1640년 1월 18일 - 1709년 11월 23일) |
| 계모 동생 | 이춘우(李春雨, 1684년 - 1735년 2월 11일) |
| 계제수 | 파평윤씨 |
| 조카 | 이창수(李昌壽, 1718년 8월 7일 - 1794년 1월 6일) |
| 조카사위 | 양시장(楊時長, 본관은 청주) |
| 부인 | 학성이씨(1652년 7월 16일 - 1719년 1월 25일), 훈련원주부 이정추(李廷樞)의 딸 |
| 아들 | 이필수(李必壽) |
| 이익수(李益壽, 1682년 9월 23일 - 1755년 10월 29일) | |
| 이인수(李仁壽, 1685년 6월 20일 - 1755년 9월 12일) | |
| 며느리 | 장수황씨, 황협(黃浹)의 딸 |
| 손자 | 이희석(李禧錫) |
| 이성석(李聖錫), 이익수의 양자 | |
| 이중석(李重錫) | |
| 이광석(李光錫) | |
| 이효석(李孝錫) | |
| 이명석(李命錫) | |
| 손자 | 이원석(李元錫) |
| 사위 | 윤항화(尹恒和), 본관은 해평 |
| 우순요(禹順堯), 본관은 단양 | |
| 장인 | 이정추(李廷樞, 1606년 ~ ?), 본관은 학성 |
| 처조부 | 이언신(李彦信), 군자감판관 |
| 생 외할아버지 | 이집(李鏶, 1613년 ~), 영해군 당 5대손 가선대부 이숙무의 서자, 본관은 전주 |
| 생 외할머니 | 영산신씨(靈山辛氏), 동지중추부사 신일(辛逸)의 딸 |
| 생 외삼촌 | 이재무(李再茂, 1640년 ~ ) |
| 생 서외조모 | 예춘(禮春), 노비 출신 첩 |
| 서외삼촌 | 이재방(李再芳) |
| 생 외증조부 | 이숙무(1558년 12월 16일 ~ 1615년 9월 8일) |
4. 기타
양아버지 이영구(李英久)의 가계는 조부 이규(李規), 증조부 이여추(李汝樞)로 이어지나, 가계가 실전되어 1810년(순조 10) 이후에 편찬된 우계이씨 족보에서는 그는 본생가로 환원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영평군 배상동(현,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장암리 배상골(또는 배산골, 배선골 또는 배선동 부락)) 가리산 묘좌(卯坐)에 부인 학성이씨와 합장되었다. 장남 이필수는 5대손 대에 남자 후손이 단절되었지만, 차남 이익수의 증손이자 4대손은 태화 이현상이고, 5대손, 6대손, 7대손은 각각 분서 이봉녕, 이재명, 이휘선이다. 삼남 이인수의 4대손은 대한제국 때의 법관 이재정, 5대손은 군수 이교선, 안산의 군청 주사 이민선, 6대손은 서울시의회 초대 시의원 이원찬 등이다.
그의 후손들은 이동면 장암리 외에도 다른 아들 이인수는 근처 일동면 유동리, 원통(圓通) 일대에 살았고, 생가 이복동생 이춘우(李春雨)는 근처 일동면 기산리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그의 후손들은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기산리, 유동리, 길명리와 주변 지역에 살게 되었다.
사후 손자 성석과 원석 등이 노인직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올랐으므로, 그에게도 추은(追恩)으로 증직이 내려져 증(贈)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추증되었다.
묘비는 훼손되고 6.25 전쟁으로 일부 추가 훼손되면서 1995년 10월 3일 후손이 세운 비석이 있다. 또한 망주석은 묘소 앞 약 50m 지점에 위치해 있다.
7번째 칸에 그의 이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