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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스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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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스자오는 1881년에 태어나 1973년에 사망한 중국의 정치인, 교육자, 언론인이다. 그는 유년 시절 디프테리아를 앓고 형의 헌신적인 간호를 받으며 감동을 받았으며, 이후 일본과 영국에서 유학하며 학문적 기반을 다졌다. 1903년에는 소보 필화 사건으로 투옥되었고, 화흥회를 결성하여 혁명 운동에 참여했다. 신해혁명 이후에는 정치 활동과 교육 활동을 병행하며, 북경대학 교장, 사법총장, 교육총장 등을 역임했다.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시기에는 국공 화담에 참여했으며,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에는 전국정협위원,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했다. 말년에는 모택동의 지시로 보호를 받았으며, 홍콩에서 가족과 만나고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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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스자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장스자오
원어명章士釗
본명章士釗
로마자 표기Zhang Shizhao
별명황중황(黃中黃), 청동(靑桐), 추동(秋桐)
출생일광서(光緒) 7년 2월 21일(양력 1881년 3월 20일)
출생지청(淸) 호남성(湖南省) 장사부(長沙府) 장사현(長沙縣) 정공구(鼎功區) 당전향(唐田鄕)
사망일1973년 7월 1일(92세)
사망지영국령 홍콩
국적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직업변호사, 학자, 정치인
가족
부모부친: 장금(章錦)
생모: 유씨(劉氏)
배우자오약남(吳弱男, 1909.4.6.-)
자녀장용(章用)
장함지(章含之)(양녀)
학력
학교애버딘 대학교
에든버러 대학교
활동 정보
활동 기간1903-1973년

2. 생애

1881년 호남성(湖南省) 선화현(善化縣, 오늘날 장사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장금은 마을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는 이정(里正)이었고, 나중에는 중의(中醫)가 되었다.[1] 1886년 디프테리아를 앓았는데, 이때 형이 의사를 찾아 성 안으로 들어가면서 장스자오가 탄 가마를 따라 20리를 걸어갔다. 장스자오는 형의 행동에 감동하였고, 어려서는 형이 운영하는 사숙(私塾)에서 공부하였다.[1]

1898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집을 나와 아이들을 가르치는 훈장인 동자사(童子師傅)가 되었다. 여인숙에서 2년 정도 지내면서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고 답례로 내주는 선물인 속수(束脩)를 살림에 보탰다. 같은 해 북경(北京)에서는 무술변법(戊戌變法)이 진행되었다.[1] 1901년에는 무창(武昌) 양호서원(兩湖書院)에 들어갔다.[1]

1903년 5월, 장스자오는 『소보(蘇報)』의 주필(主筆)로 초빙되었으나, 같은 해 소보안(蘇報案)으로 상해(上海) 조계지에서 심문을 받고 투옥되었다. 『소보』가 폐간된 후, 『민우일보(民吁日報)』를 창간했다. '민우(民吁)'라는 제호는 '백성은 감히 소리내지 못하고 그저 예라고 한다(民不敢聲, 惟有吁也)'는 구절에서 따왔다. 양수인(楊守仁), 채원배(蔡元培), 채악(蔡鍔) 등과 상해에서 애국협회(愛國協會)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 『대혁명가손일선(大革命家孫逸仙)』을 번역하면서 손일선 즉 손문(孫文)의 별명인 중산초(中山樵)와 손문을 합쳐 '손중산(孫中山)'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2]

같은 해 11월 4일, 황흥(黃興), 오록정(吳祿貞), 유규일(劉揆一), 송교인(宋教仁) 등 30여 명을 팽연순(彭淵洵)의 집에 초청하여 비밀 회합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반청(反淸) 혁명을 위한 비밀 조직인 화흥회(華興會)를 결성하기로 결정하였다. 1904년 봄, 상해에서 애국협회(愛國協會)를 조직하고, 이를 화흥회의 외부 지원 조직으로 활용하였다. 2월 25일, 화흥회는 정식으로 성립되었으며, 황흥이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11월, 만복화(萬福華)가 왕지춘(王之春) 암살을 시도하다 체포되면서 화흥회는 큰 타격을 입었다.

1905년, 소보안 석방 후 일본 도쿄 호세이대학(法政大學)에서 유학했다. 동시에 도쿄세이소쿠학교(東京正則學校)에서 영어를 배웠다. 그는 스스로 '재주는 짧고 힘은 약하다(才短力脆)'고 인식했다고 회고했다. 같은 사건에 연루되어 부끄러움을 느끼고 혁명구국(革命救國) 대신 학문으로 구국(求學救國)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공부에 매진하였다. 같은 해 8월,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가 일본 도쿄에서 성립되었지만, 장스자오는 동맹회에 가입하지 않았으며, 이후에도 다른 정당에는 가입하지 않았다.

1907년, 영국 애버딘 대학교(University of Aberdeen)에 유학, 1908년에는 에든버러 대학교(The University of Edinburgh)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전공하고 논리학을 연구하였다.[3] 1909년 1월 24일, 영국에서 오약남(吳弱男)에게 서신을 작성, '12월 3일 온 서신을 받았다(12月3日來信收到)'고 적었다. 오약남은 서신을 받은 후 곧바로 영국으로 가서 장스자오를 만났고, 4월 6일 런던에서 결혼하였다. 결혼 후 에든버러 대학교에 입학하여 정치경제학과 논리학을 전공하였다. 1910년 1월 4일, 장남 장가(章可)가 애버딘에서 태어났다.

1912년 봄, 중국동맹회 기관지 『민립보(民立報)』 주필이 되었고, 강소도독부(江蘇都督府) 고문(顧問)도 겸임했다. 1913년 봄, 북경(北京) 명덕대학(明德大學) 교장(校長, 총장)에 초빙되었다. 송교인(宋敎仁)이 상해에서 피살되자 곧바로 상해로 내려가 남방에서의 위안스카이 토벌 행렬에 가입하고, '제2차 혁명' 선언문을 기초했다. 호국전쟁(護國戰爭) 발발 이후, 1916년 5월, 중화민국군무원(中華民國軍務院)의 비서장(秘書長)이 되었다. 위안스카이 사후 국회가 다시 열리면서 국회의원에 나섰다.

1917년, 쑨원을 지지하는 활동을 벌였으나, 10월 북경대학(北京大學) 초빙을 받고 논리학을 수업하고 도서관 관장이 되었다.[5] 1920년, 마오쩌둥(毛澤東)에게 2만위안을 조달하고 부법근공검학(赴法勤工儉學)을 조직하였다. 덩샤오핑(鄧小平)도 조직원 중 한 명이었다. 후에 돤치루이(段祺瑞)의 중화민국임시정부(中華民國臨時政府)에서 사법총장겸교육총장 등에 올랐다.[6]

1922년에서 1926년 사이, 국립북경농업대학(國立北京農業大學) 교장을 맡았다. 학교 재정과 교육을 정돈하였으나 동시에 학생운동을 제한하였다. 1925년, 교육총장 왕구령(王九齡)이 임직에 오지 않자, 북양정부(北洋政府)의 임명으로 사법총장겸교육총장이 되었다. 북경여자사범대학(北京女子師範大學) 교장으로 임명된 양음유(楊蔭榆)가 학교 교무 시정에 반대하는 학계의 분위기를 탄압하는 것을 지지하였다. 혼란 속에 루쉰(魯迅)은 학자들과 함께 장스자오와 여러 차례 부딪쳤고, 장스자오는 북경여자사범대학 폐쇄를 강제 명령했다. 루쉰은 평정원(平政院)에 소장을 제출하여 장스자오 파직을 요청했다.

1930년, 장쉐량(張學良)의 초빙으로 동북대학(東北大學) 문학원(文學院) 주임(主任)이 되었다. 만주사변 이후 상하이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며, 천두슈를 변호하는 등 주요 활동을 하였다.[1]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충칭으로 가서 국민참정회 참정원으로 활동하였다.[1] 전쟁 이후 상하이로 돌아와 변호사 활동을 계속하였다.[1]

2. 1. 유년 시절과 교육 (1881-1901)

1881년 음력 2월 21일 호남성(湖南省) 선화현(善化縣, 오늘날 장사현長沙縣) 동향(東鄕) 화가충(和佳冲)에서 태어났다. 부친 장금(章錦)은 고향에서 이정(里正, 마을 치안, 행정 담당)을 맡았고 후에 중의(中醫)가 되었다.[1]

1886년 디프테리아를 앓자, 형이 의사를 찾고자 성 안에 들어가면서 장사쇠가 탄 가마를 따라 20리를 걸어갔다. 이후 장사쇠는 형의 행동에 감동하였다. 어려서 형이 운영하는 사숙(私塾)에서 공부하였다.[1]

1898년 모친이 사망하였고 집을 나와 동자사(童子師傅, 아이를 가르치는 훈장)가 되었고, 여인숙에서 2년 여를 지내면서 속수(束脩,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답례로 내주는 선물)를 살림에 보태었다. 같은 해 북경(北京)에서는 무술변법(戊戌變法)이 진행되었다.[1]

1901년 무창(武昌) 양호서원(兩湖書院)에 들어갔다.[1]

2. 2. 소보 필화 사건과 화흥회 결성 (1903-1904)

1903년 5월, 장스자오는 『소보(蘇報)』의 주필(主筆)로 초빙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소보안(蘇報案)으로 상해(上海) 조계지에서 심문을 받고 투옥되었다. 『소보』가 폐간된 후, 장스자오는 다시 『민우일보(民吁日報)』를 창간했다. '민우(民吁)'라는 제호는 '백성은 감히 소리내지 못하고 그저 예라고 한다(民不敢聲, 惟有吁也)'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양수인(양서우런)(楊守仁), 채원배(차이위안페이)(蔡元培), 채악(차이어)(蔡鍔) 등과 함께 상해에서 애국협회(愛國協會)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 장스자오는 『대혁명가손일선(大革命家孫逸仙)』을 번역하면서 손일선 즉 손문(孫文)의 별명인 중산초(中山樵)와 손문을 합쳐 '손중산(孫中山)'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2]

같은 해 11월 4일, 장스자오는 황흥(黃興), 오록정(吳祿貞), 유규일(劉揆一), 송교인(宋教仁) 등 30여 명을 장사보갑항(長沙保甲巷) 팽연순(彭淵洵)의 집에 초청하여 비밀 회합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반청(反淸) 혁명을 위한 비밀 조직인 화흥회(華興會)를 결성하기로 결정하였다.

1904년 봄, 장스자오는 양수인 등과 함께 상해에서 애국협회(愛國協會)를 조직하고, 이를 화흥회의 외부 지원 조직으로 활용하였다. 2월 25일, 화흥회는 장사명덕학당(長沙明德學堂)에서 정식으로 성립되었으며, 황흥이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11월, 만복화(萬福華)가 광서순무(廣西巡撫) 왕지춘(王之春) 암살을 시도하다 체포되면서 화흥회는 큰 타격을 입었다. 광동성 동관(東莞) 여경리(餘慶里) 기관이 파괴되고 장계 등 10여 명이 체포되었으나, 이후 채악 등은 석방되었다.

2. 3. 일본 및 영국 유학 (1905-1911)

1905년, 소보안 석방 후 일본 도쿄 호세이대학(法政大學) 속성과(速成科)에서 유학했다. 동시에 도쿄세이소쿠학교(東京正則學校)에서 영어를 배웠다. 그는 스스로 '재주는 짧고 힘은 약하다(才短力脆)'고 인식했다고 회고했다. 같은 사건에 연루되어 부끄러움을 느끼고 혁명구국(革命救國) 대신 학문으로 구국(求學救國)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공부에 매진하였다. 같은 해 8월,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가 일본 도쿄에서 성립되었지만, 장스자오는 동맹회에 가입하지 않았으며, 이후에도 다른 정당에는 가입하지 않았다.

1907년, 영국 애버딘 대학교(University of Aberdeen)에 유학, 1908년에는 에든버러 대학교(The University of Edinburgh)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전공하고 논리학을 연구하였다.[3] 또한 논리학을 중국에 소개하였다. 청나라 말기 중국은 사상 방법, 연역, 귀납, 형식론과 논리학의 구분을 알기 시작했다. 4월, 『중등국문전(中等國文典)』을 편찬하여 상하이에서 출판했다.

1909년 1월 24일, 영국에서 오약남(吳弱男)에게 서신을 작성, '12월 3일 온 서신을 받았다(12月3日來信收到)'고 적었다. 오약남은 서신을 받은 후 곧바로 영국으로 가서 장스자오를 만났고, 4월 6일 런던고보(倫敦高堡)에서 결혼하였다. 결혼 후 에든버러 대학교에 입학하여 정치경제학과 논리학을 전공하였다. 영국 체류 기간 동안 국내 신문에 원고를 기고하여 서유럽 각 파의 정치학설을 소개하며 입헌정치에 많은 역할을 수행, 당시 중국 정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10년 1월 4일, 장남 장가(章可)가 애버딘에서 태어났다. 같은 해, 『국퐁보(國風報)』에 '논번역명의(論翻譯名義)'라는 글을 발표했다.

2. 4. 귀국 후 정치 활동과 교육 활동 (1912-1930)

1912년 봄, 장스자오는 중국동맹회 기관지 『민립보(民立報)』 주필이 되었고, 강소도독부(江蘇都督府) 고문(顧問)도 겸임했다. 2월에는 내각제를 주장하는 글을 쓰면서도 반대당 의견을 듣기도 하였다. 4월에는 호남에서 국회참정원(國會參政員)에 선출되었다. 7월에는 정당조직안(政黨組織案)을 발표하고 훼당조당설(毀黨造黨說)을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동맹회 일부 당원들은 불만을 보였고, 장스자오의 의견을 반박하며 비당인사가 당기관을 지휘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1913년 봄, 북경(北京) 명덕대학(明德大學) 교장(校長, 총장)에 초빙되었다. 2월에는 왕지상(王芝祥), 우우임(于右任), 임술경(林述慶) 등 18명과 함께 국사유지회(國事維持會)를 창립하고 북경에서 수립하였으며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3월, 송교인(宋敎仁)이 상해에서 피살되자 곧바로 상해로 내려가 남방에서의 토원(討袁, 위안스카이 토벌) 행렬에 가입하고, '제2차 혁명' 선언문을 기초했다. 4월, 쑨원의 명령에 따라 잠춘훤(岑春煊)을 설득하여 연합을 이루고 토원에 나섰다.[4]

호국전쟁(護國戰爭) 발발 이후, 1916년 5월, 양광도사령부(兩廣都司令部)와 중화민국군무원(中華民國軍務院)은 앞뒤로 광동 조경(肇慶)에 수립되었고, 장스자오는 동시에 사령부와 군무원의 비서장(秘書長)이 되었다. 위안스카이 사후 국회가 다시 열리면서 장스자오는 북경에서 국회의원에 나섰고, 국회는 양원제를 일원제로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7년, 장스자오는 쑨원을 지지하는 활동을 벌였으나, 10월 북경대학(北京大學) 초빙을 받고 논리학을 수업하고 도서관 관장이 되었다.[5]

1920년, 마오쩌둥(毛澤東)에게 2만위안을 조달하고 부법근공검학(赴法勤工儉學)을 조직하였다. 덩샤오핑(鄧小平)도 조직원 중 한 명이었다. 후에 돤치루이(段祺瑞)의 중화민국임시정부(中華民國臨時政府)에서 사법총장겸교육총장 등에 올랐다.[6]

1922년에서 1926년 사이, 2년 4개월 동안 국립북경농업대학(國立北京農業大學) 교장을 맡았다. 장스자오는 『신보(晨報)』에서 '징빙농업전가특고(徵聘農業專家特告)'를 올려, 공개적으로 인재를 모으고 국내외 '웅대한 책략을 품고 본교를 이상 시험의 땅으로 삼는(懷抱偉略, 幸以本校爲理想試驗之地)' 농업 전문가를 초빙하여 가르치게 하였다.[7] 장스자오는 학교 재정과 교육을 정돈하였으나 동시에 학생운동을 제한하였고 내 집회도 금지하였다. 학생운동 반대와 정치 성향의 변화는 장스자오에 대한 학생들의 태도에도 영향을 주었다. 오칠학조(五七學潮)가 발발하자 학생들이 불만을 보이며 가택에 침입하였고 군경이 투입되면서 학생들은 부상당하고 체포되었다.

1925년, 교육총장 왕구령(王九齡)이 임직에 오지 않자, 4월 14일 북양정부(北洋政府)의 임명으로 사법총장겸교육총장이 되었다. 장스자오는 당시 북경여자사범대학(北京女子師範大學) 교장으로 임명된 양음유(楊蔭榆)가 학교 교무 시정에 반대하는 학계의 분위기를 탄압하는 것을 지지하였다. 혼란 속에 루쉰(魯迅)은 학자들과 함께 장스자오와 여러 차례 부딪쳤고, 혼란이 8월까지 이어지자 장스자오는 북경여자사범대학 폐쇄를 강제 명령했다. 루쉰은 평정원(平政院)에 소장을 제출하여 장스자오 파직을 요청했다. 후기 혁명운동이 고조에 달하면서, 11월 19일 북경 위가호동(魏家胡同) 13호 장스자오의 거처는 민중과 학생에게 파괴되었고, 장스자오는 천진(天津)으로 도주, 교육총장의 공직은 면직되었다. 11월말, 북경여자사범대학은 원래 자리에 학교를 복구하였다.[8]

1930년, 장쉐량(張學良)의 초빙으로 동북대학(東北大學) 문학원(文學院) 주임(主任)이 되었다.

2. 5.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시기 (1930-1949)

만주사변 이후 상하이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며, 천두슈를 변호하는 등 주요 활동을 하였다.[1]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충칭으로 가서 국민참정회 참정원으로 활동하였다.[1] 전쟁 이후 상하이로 돌아와 변호사 활동을 계속하였다.[1]

3. 사상과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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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서적 政客裡的文人,文人裡的俠客 章士釗的傳奇人生
[2] 문서 劉揆一《創立華興會》
[3] 웹인용 存档副本 http://old.counsello[...] 2021-08-20
[4] 뉴스 如是我聞之六(北京通信) https://archive.org/[...] 1917-02-24
[5] 뉴스 章行嚴到京 https://archive.org/[...] 1917-10-21
[6] 뉴스 歷史探密/揭!蔣介石與毛澤東的相同與不同 http://www.nownews.c[...] 2015-02-09
[7] 웹사이트 章士钊的农村立国论与农大办学宗旨 http://www2003.cau.e[...]
[8] 웹사이트 鲁迅状告教育总长章士钊始末 http://www.shjcy.gov[...] 2018-07-02
[9] 서적 《政客裡的文人,文人裡的俠客 章士釗的傳奇人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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