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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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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적청은 북송 시대의 무장으로, 변방에서 기병술을 익히고 서하와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는 투구 대신 가면을 쓰고 싸워 적을 위협했으며, 농지고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기적적인 동전 던지기 일화를 남겼다. 추밀사까지 올랐으나, 과도한 출세로 인해 조정의 의심을 받아 면직되었고, 49세에 사망했다. 일개 병졸에서 시작하여 장군이 된 입지전적인 인물로, 민간에서 무곡성의 화신으로 숭배받았으며,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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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청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적청
원어 이름狄青
로마자 표기Di Qing
한신 (漢臣)
시호무양 (武襄)
출생1008년
사망1057년
사망 장소저우커우, 허난 성
직업군인
자녀적자 (狄諮)
적영 (狄詠)
경력
주요 직책중서령
상서령
기타 정보
적청

2. 생애

북송 시대, 일개 병졸에서 시작해 장군(將軍)의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서민들로부터 인기가 높았으며, 《적청연의(狄靑演義)》, 《만화루연의(萬花樓演義)》 등의 문학 작품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무인(武人)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즐겨 읽었고, 병법과 역사에 두루 통달하였다고 한다.

같은 시대의 명판관으로 이름이 높던 포증(包拯)이 문곡성(文極星)의 화신으로 여겨졌던 것과 대비되어, 적청은 무곡성(武曲星)의 화신으로 여겨졌다. 이와 관련된 전설은 《수호전》(水滸傳) 등의 민간 전승으로 전해지기도 했다.

2. 1. 초기 생애와 서하와의 전쟁

적청은 빈주(汾州) 서하(西河), 지금의 산시성(山西省) 빈양(汾陽)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 지역은 당시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던 변경 지대에 가까웠기 때문에, 적청은 일찍부터 무술(武術)을 익혔고, 특히 기사(騎射)에 뛰어났다. 보원(寶元) 연간(1038년~1040년)에 서하와의 전쟁에 종군하여 전선에서 활약했다. 4년 동안 25번의 큰 싸움에 참가하여 적이 쏜 화살에 여덟 번이나 맞는 격전을 뚫고 많은 성을 함락시키고 5,700명의 포로를 얻는 전공을 세웠다. 이때 적청은 투구를 쓰는 대신 구리로 만든 가면을 쓰고 머리를 풀어헤친 채로 싸웠는데, 이 모습을 본 서하군은 적청을 두려워하며 상대하기를 꺼렸다고 한다.

2. 2. 농지고의 반란 진압

경력(慶曆) 4년(1044년)에 서하와 화의가 이루어지자, 적청은 현지에서 복무하다가 1052년에 추밀부사로 임명되어 수도 개봉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당시 군사와 관련된 요직에는 모두 문관을 임명했던 북송에서 군사의 부장관에 해당하는 추밀부사에 무관 출신인 적청이 임명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후 광원주(廣源州)의 농지고가 화남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적청은 이를 평정하기 위해 다시 전선에 나섰다.[1]

당시 관군의 사기는 매우 저하된 상태였다. 적청은 사기가 떨어진 군사들 앞에서 "지금부터 동전 100개를 던질 것인데, 모두 앞면이 나오면 이는 신의 계시로 관군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부하들이 만류했지만, 적청은 동전을 던졌고, 백 개의 동전 모두 앞면이 나왔다. 사실 이 동전은 적청이 미리 준비한, 앞면만 있는 동전이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신이 돕는다는 확신을 얻어 사기가 크게 올랐고, 마침내 농지고의 반란을 평정할 수 있었다.[1]

2. 3. 말년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적청은 무관 최고 지위인 추밀정사(樞密正使)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지나치게 빠른 출세는 조정의 의심을 샀고, 결국 지화 3년(1056년)에 면직되어 진주장관(陳州長官)이 되었다. 그 뒤로도 조정의 감시가 이어졌고 이듬해 적청은 사망했다. 향년 49세였다.

3. 일화

적청이 가면을 쓰고 전투에 임한 것은 탈영 방지를 위해 얼굴에 새겼던 문신을 가리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훗날 장군의 지위에까지 오른 적청이 이 문신을 갖고 있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 인종 황제는 약으로 문신을 지울 것을 명했지만, 적청은 "이 문신 덕분에 낮은 지위의 병사들까지 격려할 수 있으니, 굳이 감출 필요는 없습니다."라며 거절했다.[2]

적청은 적인걸의 자손이라는 족보를 받았으나, 서민 출신임을 밝히며 거절하는 겸손함을 보였다.[2]

4. 평가 및 영향

문치주의가 팽배했던 북송에서 일개 병졸로 시작해 장군(將軍)의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서민들로부터 인기가 높았으며 《적청연의(狄靑演義)》, 《만화루연의(萬花樓演義)》 등의 문학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무인(武人)이었음에도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즐겨 읽었고 병법과 역사에 두루 통달하였다고 한다.[1]

같은 시대의 명판관으로 이름이 높던 포증(包拯)이 문곡성(文極星)의 화신으로 여겨졌던 것과 대비되어 적청은 무곡성(武曲星)의 화신으로 여겨졌다. 관련된 전설은 《수호전》(水滸傳) 등의 민간 전승으로 전해지기도 했다.[1]

5.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적보
어머니위씨(魏氏)정국부인에 봉해짐
장남적자서상각문부사
아들적영동두공봉관, 합문지후.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움
아들적혜전내숭반
아들적간전내숭반
아들적설동두공봉관. 요절


참조

[1] 논문 Introduction to Judge Bao and the Rule of Law: Eight Ballad-Stories from the Period 1250-1450 https://papers.ssrn.[...] Social Science Research Network 2009-12-23
[2] 문서 『양가장연의(楊家將演義)』 등 같은 시대의 무장 양가군(楊家軍)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에서도 적청이 등장하는데, 다만 여기에서 적청은 비중있는 캐릭터인 양종보(楊宗保)의 암살을 꾸미는 악역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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