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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포르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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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포르투 전투는 1809년 5월 12일에 벌어진 전투로, 아서 웰즐리 휘하의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이 니콜라 장 드 듀 술트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군을 포르투갈에서 몰아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웰즐리는 도루 강을 건너 프랑스군을 기습하여 승리했고, 프랑스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영국군은 포르투갈에서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이후 반도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웰즐리는 이 전투의 승리로 웰즐리의 도루 남작으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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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포르투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전투 정보
분쟁반도 전쟁
전체포르투갈 및 북부 스페인, 1809년
날짜1809년 5월 12일
장소포르투갈 포르투
결과앵글로-포르투갈 연합군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파일:Flag of France.svg|75px|가운데]]
교전국 2[[파일:Flag of the United Kingdom.svg|75px|가운데]]
[[파일:Flag Portugal (1707).svg|테두리|75px|가운데]]
지휘관 1니콜라 술트 원수
지휘관 2아서 웰즐리 경 장군
병력 113,000명
병력 218,400–27,000명
사상자 1전사 및 부상 600명, 포로 1,500명 (총 2,100–2,400명)
사상자 215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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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8년 지중해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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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포르투갈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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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포르투갈 침공
1811년 연합군 스페인 원정
1814년 프랑스 남서부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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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포르투 제2차 전투에서 퇴각하는 프랑스 군을 추격하는 포르투갈 및 영국 연대
포르투 제2차 전투에서 퇴각하는 프랑스 군을 추격하는 포르투갈 및 영국 연대

2. 배경

1809년 초, 나폴레옹프랑스 제국군은 이베리아 반도 전역의 일환으로 포르투갈 북부를 침공했다. 술트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3월 28일 제1차 포르투 전투에서 승리하여 포르투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점령은 포르투갈 군민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고, 특히 프란시스쿠 실베이라가 이끄는 포르투갈 군대는 프랑스군의 보급선을 위협하며 술트의 군대를 고립시켰다.[2]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영국은 아서 웰즐리 장군을 사령관으로 하는 원정군을 파견하여 포르투갈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영국군은 리스본에 상륙하여 북진을 시작했고, 5월 11일 그리조 전투에서 프랑스군 선발대를 격파하며 도루강 남안까지 진출하였다. 이는 제2차 포르투 전투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제2차 포르투갈 전역은 브라가 전투를 시작으로 본격화되었다.

2. 1. 프랑스의 포르투 점령

1809년 3월 28일 벌어진 제1차 포르투 전투에서 술트 원수가 이끌던 프랑스군은 리마 바레토(Lima Barreto) 장군과 파레이라스(Parreiras) 장군이 지휘하는 포르투갈군을 포르투(전통적으로 영국에서는 Oporto|오포르투eng라 불림) 외곽에서 격파했다. 전투에서 승리한 술트는 곧바로 도시를 강습하여 점령했다.

프랑스군의 포르투 점령 과정은 매우 잔혹했다. 8,000명에 달하는 군사적 사상자 외에도 수많은 민간인이 프랑스군에 의해 학살당했으며, 도시는 약탈당했다. 특히, 프랑스군의 공격을 피해 후퇴하던 포르투갈 군인들과 피난민들이 도시의 유일한 다리였던 부교(폰테 다스 바르카스, Ponte das Barcas)로 몰려들면서 다리가 무너지는 참사가 발생했다. 이 포르투 보트 브리지 재앙으로 인해 약 4,000명으로 추정되는 민간인이 도루강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 이는 프랑스군의 무자비한 공격이 초래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술트가 포르투를 점령하고 있는 동안, 루이 앙리 루아송 소장이 지휘하는 프랑스군 별동대는 동쪽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한편, 프란시스쿠 실베이라 소장이 이끄는 포르투갈 군은 샤베스의 프랑스 주둔군을 격파하고 아마란테 지역을 장악하여, 술트와 스페인 사이의 프랑스군 연락선을 위협했다.[2] 4월 18일부터 5월 3일까지 포르투갈 군은 루아송이 지휘하는 부대를 타메가 강 서쪽 강둑에 묶어두기도 했다.

2. 2. 프랑스군과 포르투갈군의 상황

1809년 3월 28일 벌어진 제1차 포르투 전투에서 술트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포르투갈 군을 포르투 외곽에서 격파하고 도시를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군의 무자비한 공격은 도시의 민간인 학살로 이어졌으며, 특히 도루강의 유일한 다리였던 부교(폰테 데 바르카스, Ponte das Barcas)가 파괴되면서 많은 피난민이 익사하는 포르투 보트 브리지 재앙이 발생하기도 했다.

술트가 포르투를 점령하고 있는 동안, 루이 루아송 소장이 지휘하는 프랑스군 별동대가 동쪽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 부대에는 초기에 앙리 드라보르드 소장의 보병 사단과 로제(Lorge)의 기병 사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프란시스코 실베이라 소장이 이끄는 포르투갈 군은 샤베스의 프랑스 수비대를 격파하고 아마란테 지역을 장악하여, 술트와 스페인 사이의 중요한 보급 및 통신선을 차단했다. 이로 인해 술트의 군대는 고립될 위험에 처했다.

포르투갈 군의 저항은 완강하여, 4월 18일부터 5월 3일까지 타메가 서쪽 강둑에서 루아송의 부대를 성공적으로 저지했다. 5월 3일이 되어서야 프랑스 공병대가 다리에 설치된 폭발물을 제거했고, 드라보르드의 보병대가 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2] 하지만 이미 통신선은 차단된 후였다.

1809년 5월이 되자, 술트 원수는 리스본에서 북진해오는 아서 웰즐리 장군 휘하의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에 의해 수적으로 열세에 놓일 것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통신선과 퇴각로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술트는 5월 11일까지 포르투에서 철수할 계획을 세웠다. 줄리앙 메르메 소장이 지휘하는 사단은 이미 포병대와 보급품을 싣고 퇴각 준비를 시작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술트는 도루강이라는 자연 방어선과, 강을 건널 배들을 모두 파괴하거나 북쪽 강둑으로 옮겨놓았다는 사실에 의지하여 즉각적인 철수를 서두르지는 않았다. 제1차 포르투 전투에서 파괴된 부교 외에는 강을 건널 수단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 시점 포르투에 남아있던 술트 휘하의 프랑스군은 다음과 같다.[3]

술트 휘하 포르투 주둔 프랑스군 (1809년 5월)
사단지휘관구성 부대
보병 사단앙리 드라보르드 소장제17 경보병 연대 (3개 대대), 제70 라인 보병 연대 (3개 대대), 제86 라인 보병 연대 (3개 대대)
보병 사단피에르 메를 소장제2 경보병 연대 (4개 대대), 제4 경보병 연대 (4개 대대), 제36 라인 보병 연대 (3개 대대)
기병 사단장 프란체스키 소장제1 후사르 연대, 제8 드라군 연대, 제22 샤쇠르 아 슈발 연대, 하노버 샤쇠르 연대



총 병력은 보병 약 10,000명과 기병 1,200명 규모였다. 한편, 동쪽에서는 실베이라가 이끄는 포르투갈 군이 계속해서 프랑스군의 후방을 위협하고 있었다.

2. 3. 영국군의 개입과 진격

리스본에서 출발한 영국군은 아서 웰즐리의 지휘 아래 포르투를 향해 진격하였다. 1809년 5월 11일, 영국군은 포르투 남쪽 약 16.09km 지점에서 벌어진 그리조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도루강 북안에 도달하였다. 같은 날, 영국군은 포르투 바로 맞은편 도루 강 남안의 빌라 노바 데 가이아에 도착하였으나, 술트 원수가 모든 배를 파괴하거나 북쪽 강둑으로 옮겨놓으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강을 건널 수 없었다. 웰즐리는 그의 부대를 그곳에 배치하고, 본부는 강 건너 포르투 시가지가 잘 보이는 남쪽 강둑 언덕 위의 Mosteiro da Nossa Serra do Pilar|세라 도 필라르 수도원por에 마련하였다.[3]

웰즐리가 지휘한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의 병력 규모와 편제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한 역사학자에 따르면, 당시 웰즐리 휘하의 병력은 18,400명이었으며 다음과 같이 편성되었다고 한다.

구분지휘관병력 / 구성 부대
중장 윌리엄 페인의 기병 사단
제1 기병 여단소장 스테이플톤 커튼제14 경기병연대 (1개 소대 제외), 제16 경기병연대, 제20 경기병연대 (2개 소대), 제3 KGL 경기병연대 (1개 소대)
중장 에드워드 파게트 사단 (총 5,145명)
제1 KGL 여단준장 랑게르트제1 및 제2 KGL 라인연대
제3 KGL 여단준장 드라이부르크제5 및 제7 KGL 라인연대
제6 여단준장 R. 스튜어트제29 보병연대, 제1대대 분견대, 제1/16 포르투갈 라인연대
중장 존 코프 셔브룩 사단 (총 6,706명)
제2 근위 여단준장 헨리 프레더릭 캠벨제1/콜드스트림 근위대, 제1/3 근위대
제4 여단준장 손타그제97 보병연대, 제2대대 분견대, 제2/16 포르투갈 라인연대
제5 여단준장 A. 캠벨제2/7 보병연대, 제2/53 보병연대, 제1/10 포르투갈 라인연대
소장 롤랜드 힐 사단 (총 4,370명)
제1 여단(명목상) 소장 롤랜드 힐 (실제 지휘는 선임 대령)제1/3 보병연대, 제2/48 보병연대, 제2/66 보병연대
제7 여단준장 A. 캐머런제2/9 보병연대, 제2/83 보병연대, 제2/10 포르투갈 라인연대
포병 (대령 에드워드 호워스)
4개 포대 (총 24문)실레리(RA), 로슨(RA), 틸링(KGL), 하이세(KGL)9파운더 포 1개 포대, 6파운더 포 2개 포대, 3파운더 포 1개 포대



반면, 역사학자 마이클 글로버는 전투 서열이 다소 달랐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은 편성을 제시하였다.

구분 (여단)지휘관병력
제1 근위 여단준장 헨리 F. 캠벨2,292명
제2 여단준장 알렉산더 캠벨1,206명
제3 여단준장 존 손타그1,307명
제4 여단소장 롤랜드 힐2,007명
제5 여단준장 앨런 캐머런1,316명
제6 여단준장 리처드 스튜어트1,290명
제7 여단소장 존 머레이2,913명 (제1 및 제2 KGL 경보병 분견대 포함)
기병 (소장 스테이플톤 커튼)
기병 여단소장 스테플턴 코튼1,463명
포병 (대령 에드워드 호워스)
4개 포대대령 에드워드 호워스24문



한편, 웰즐리의 주력 부대보다 더 동쪽에서는 윌리엄 카 베레스폴드(포르투갈 육군 원수 계급)가 크리스토퍼 틸슨 소장이 이끄는 영국 제3여단(영국군 1,659명 및 포르투갈 척탄병 약 600명)과 포르투갈군 5,000명을 지휘하며 프란시스코 실베이라가 이끄는 포르투갈 부대와 합류하고 있었다. 이들의 움직임은 술트의 프랑스군 퇴각로를 차단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 외에도 알렉스 렌돌 맥켄지 소장의 영국 제2여단과 다른 포르투갈 부대들은 테주강 유역에서 작전을 수행 중이었다.

3. 전투의 전개

웰즐리가 이끄는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은 5월 12일 도루강을 건너 포르투를 탈환하기 위한 기습 작전을 시작했다. 존 워터 대령이 현지 주민의 도움으로 확보한 배를 이용해, 영국군 선발대는 프랑스군의 감시를 피해 강을 건너 강변의 신학교 건물을 점령하고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프랑스군 사령관 술트는 영국군의 도하 사실을 뒤늦게 파악하고 막시밀리앵 포이가 이끄는 부대에게 신학교 탈환을 명령했으나, 영국군의 완강한 저항과 포병 지원으로 인해 실패했다. 술트가 신학교 공격에 병력을 집중시키기 위해 포르투 시내의 강변 수비를 소홀히 한 사이, 포르투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영국군의 추가 도하를 도왔다. 강을 건넌 영국군 본대는 신학교를 공격하던 프랑스군의 배후를 급습하며 전세를 결정지었다.

결국 프랑스군은 큰 혼란에 빠져 북동쪽 발롱구 방면으로 무질서하게 퇴각하기 시작했다. 웰즐리는 존 머레이가 지휘하는 부대를 보내 프랑스군의 퇴로를 차단하려 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제14 경기병대는 퇴각하는 프랑스군을 맹렬히 추격하여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이 전투는 영국군의 승리로 마무리되었고, 프랑스군은 포르투에서 쫓겨나며 상당한 병력 손실을 겪었다.

3. 1. 도하 작전

웰즐리는 도루강을 건널 지점을 찾기 위해 포르투갈어를 구사하는 유능한 장교인 존 워터 대령에게 5월 12일 아침, 포르투 동쪽 강변 정찰 임무를 맡겼다. 워터 대령은 세라 두 필라르 수도원 근처에서 현지 이발사를 만났고, 그의 안내로 덤불 속에 숨겨진 작은 보트를 발견했다. 이 보트를 이용해 워터 대령은 이발사, 수도원장, 그리고 몇몇 지역 뱃사공과 함께 약 457.20m 폭의 강을 건넜다. 강의 지형 덕분에 이들의 도하는 프랑스군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강 건너편에는 경비 없이 묶여 있는 네 척의 와인 바지선이 있었고, 워터 대령 일행은 이 배들을 확보하여 돌아왔다. 또한 강 북쪽 둑, 포르투 성벽 외곽에 위치한 크고 견고한 3층짜리 신학교(Seminário) 건물이 비어 있음을 확인했다. 이 신학교 건물은 강력한 방어 거점이 될 수 있는 곳이었다.

제2차 포르투 전투 지도


이 보고를 받은 웰즐리는 "자 그럼 병사들에게 강을 건너게 하자."[5]라고 말하며 즉시 도하 작전을 명령했다. 제3 보병 연대("버프스")의 장교 1명과 병사 24명으로 구성된 소대가 와인 바지선을 타고 강을 건너 신학교를 점령했다. 곧이어 같은 중대의 나머지 병력과 경보병 중대가 뒤따랐다. 프랑스군이 영국군의 도하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힐의 여단 소속인 "버프스" 대대 병력 대부분이 강을 건너 신학교를 요새화하고 있었고, 교두보는 에드워드 파겟 소장의 지휘 아래 있었다.

늦잠을 자고 있던 술트 원수는 이 상황을 뒤늦게 파악했다. 영국군의 도하를 처음 발견한 것은 여단장 막시밀리앵 포이였다. 그는 제17 경보병 연대의 3개 보병대대를 이끌고 오전 11시 30분경 신학교를 공격했지만, 요새화된 신학교와 세라 두 필라르 수도원에서 지원하는 영국 포병의 포격에 막혀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포이 자신도 부상을 당했다. 이후 3개 보병대대의 지원을 받아 다시 공격했지만, 이미 영국군 3개 대대가 추가로 증원되어 신학교와 주변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프랑스군은 또다시 격퇴되었다.

술트는 신학교를 탈환하기 위해 포르투 시내 리베이라 부두의 수비 병력까지 빼내어 동쪽의 신학교 공격에 투입하는 치명적인 결정을 내렸다. 프랑스군이 강변을 떠나자마자 포르투 시민들은 즉시 모든 종류의 배를 동원하여 빌라 노바 데 가이아에 대기하던 영국군을 강 건너편 포르투 시내로 실어 날랐다. 4개의 영국군 대대가 즉시 도하하여 신학교를 공격하던 프랑스군의 배후를 공격했고, 이는 전투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프랑스군은 완전히 붕괴되어 북동쪽 발롱구를 향해 무질서하게 퇴각하기 시작했다.

한편, 웰즐리는 프랑스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존 머레이 소장이 지휘하는 2,900명의 여단(제14 경기병대 포함)을 포르투 동쪽 약 8.05km 지점인 아빈테스 근처에서 나룻배로 도강시켜 북쪽으로 보냈다. 머레이의 부대는 발롱구로 향하는 도로가 내려다보이는 능선에 도달했지만, 그는 프랑스군과 교전하기를 주저하며 퇴로를 효과적으로 차단하지 못했다. 그러나 제14 경기병대는 찰스 스튜어트 장군의 지휘 아래 퇴각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하여 돌격했다. 이 공격으로 약 300명의 프랑스군을 베고 다수를 포로로 잡았으나, 영국 기병대도 110명 중 35명(사망 10명, 중상 11명 포함)의 사상자를 냈다.[1]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총 125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웰즐리의 부사령관 에드워드 파겟은 신학교 전투 중 프랑스군의 총탄에 팔을 맞아 절단해야 했다. 프랑스군은 300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고 1,800명이 포로로 잡혔다. 다른 자료에 따르면 프랑스군 사상자는 약 600명으로 추정된다.

3. 2. 프랑스군의 반격과 시가전

영국군의 도하를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막시밀리앙 포이(Maximilien Foy)였다. 그는 제17 경보병 연대의 3개 보병대대를 이끌고 오전 11시 30분경 영국군이 점령한 수녀원에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포이와 그의 부대는 영국군의 반격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나야만 했다. 다음 날, 프랑스군은 세 개의 보병대대를 추가로 지원받아 다시 공격에 나섰다. 하지만 이때는 영국군 3개 보병대대 전체가 수녀원과 그 주변을 이미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또다시 격퇴되었다.

프랑스군 사령관 술트는 포이를 지원하기 위해 포르투 방어에 필요한 최소한의 병력만 남기고 도시에서 주력 부대를 이동시켰다. 프랑스군이 강가에서 철수하자마자, 포르투 시민들은 "뜰 수 있는 것은 뭐든지" 동원하여 영국군 병사들을 강 건너편으로 실어 날랐다. 이를 통해 4개의 영국군 대대가 즉각적으로 강을 건너 후퇴하는 프랑스군의 배후를 공격했다. 프랑스군은 이미 도시에서 철수하여 북쪽으로 퇴각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한편, 웰즐리는 머레이가 지휘하는 2,900명의 여단과 제14 경 용기병 여단을 도우로 강 너머 포르투 동쪽 약 8.05km 지점으로 보내 프랑스군의 퇴로를 차단하려 했다. 그러나 머레이는 적극적인 차단 작전 대신 소규모 교전에만 집중하여 프랑스군의 퇴로를 막는 데는 실패했다. 반면, 제14 경 용기병 여단은 퇴각하는 프랑스군을 빠르게 추격하여 돌격을 감행했다. 이 공격으로 약 300명의 프랑스군을 사살하고 상당수를 포로로 잡았다. 이 과정에서 제14 경 용기병 여단도 총 110명의 기병 중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하는 손실을 입었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총 125명의 사상자를 냈다. 특히 수녀원 전투 중 웰즐리의 부사령관 에드워드 파겟(Edward Paget)은 프랑스군의 총탄에 팔을 맞아 결국 절단해야 했다. 프랑스군의 피해는 더 컸는데, 약 300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고 1,800명이 포로로 잡혔다. 다른 자료에서는 프랑스군 사상자를 600명 정도로 추산하기도 한다. 포이 장군 역시 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3. 3. 프랑스군의 퇴각

막시밀리안 포이(Maximilien Foy)가 이끄는 부대가 수녀원 공략에 실패하자, 술트는 포이를 지원하기 위해 포르투 방어에 필요한 최소 병력만 남기고 주력 부대를 도시에서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미 프랑스군은 무모하게 북쪽으로 도주하기보다는 질서 있게 도시에서 물러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한편, 웰즐리는 존 머레이 소장이 지휘하는 2,900명의 여단과 제14 경 용기병 여단을 도루강 너머 포르투 동쪽 약 8.05km 지점으로 보내 프랑스군의 퇴로를 차단하려 했다. 그러나 머레이는 적극적인 기동 대신 소극적인 교전에만 머물러 프랑스군의 퇴각을 막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영국군 제14 경 용기병 여단은 퇴각하는 프랑스군을 신속하게 추격했다. 이들은 프랑스군 후위에 돌격해 약 300명의 프랑스군을 사살하고 상당수를 포로로 잡았다. 이 과정에서 영국군 기병 110명 중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 전체에서 영국군은 총 125명의 사상자를 냈다. 특히 수녀원 전투 중 웰즐리의 부사령관이었던 에드워드 파겟은 프랑스군의 총탄에 팔을 맞아 절단해야 했다. 프랑스군은 300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고 1,800명이 포로로 잡혔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프랑스군 사상자는 약 600명으로 추산된다. 프랑스군의 막시밀리안 포이 장군 역시 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4. 전투의 결과

제2차 포르투 전투는 웰즐리가 이끄는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의 결정적인 승리로 귀결되었다. 이 전투에서 술트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은 상당한 인명 손실을 입고 포르투에서 밀려났으며, 이후 험난한 퇴각 과정에서 추가적인 병력과 모든 대포, 보급품을 상실한 채 스페인으로 후퇴해야 했다. 이 전투의 승리는 프랑스의 포르투갈 북부 점령 계획을 좌절시키고 반도 전쟁의 향방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되었다.

4. 1. 양측의 피해

영국군은 제2차 포르투 전투에서 총 125명의 사상자를 냈다. 특히 신학교 전투 중에는 웰즐리의 부사령관인 에드워드 파겟 소장이 프랑스군의 총탄에 팔이 부서져 절단해야 하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프랑스군은 60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여기에는 부상을 입은 포이 장군도 포함되었다. 또한 1,800명의 병력이 포로로 잡혔다.

4. 2. 술트의 퇴각

머레이의 판단 착오와 웰즐리가 이끄는 영국군 주력이 여전히 도루강 남쪽 빌라 노바 드 가이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술트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5월 12일에 포르투를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루아송은 실베이라가 지휘하는 포르투갈 부대를 저지하는 데 실패했다. 실베이라의 부대는 술트가 계획했던 북동쪽 퇴각로를 막아섰고, 이로 인해 술트의 부대는 모든 장비와 대포를 버리고 북쪽(혹은 서쪽) 산악 지대로 방향을 틀어 힘겹게 퇴각해야만 했다.

술트와 루아송의 부대는 기마랑이스에서 간신히 합류했다. 하지만 웰즐리의 영국군은 더 직접적인 경로로 빠르게 행군하여 프랑스군보다 먼저 브라가(기마랑이스 북서쪽)에 도착했다. 이는 술트로 하여금 다시 퇴각로를 북동쪽으로 변경하도록 강요했다. 동시에 베레스포드와 실베이라는 술트의 새로운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기동하고 있었다.

몇 차례의 위기를 넘기며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의 끈질긴 추격을 간신히 뿌리친 술트는 험준한 산을 넘어 스페인의 오렌세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퇴각 과정에서 술트의 군단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총 4,500명의 병력을 잃었으며, 군자금과 보유하고 있던 58문의 대포 전부, 그리고 모든 보급품과 짐을 상실했다. 결국 술트는 제2차 포르투 전투 이전 병력의 절반 정도만 이끌고 스페인으로 퇴각했다.

5. 전투의 영향 및 의의

제2차 포르투 전투는 반도 전쟁포르투갈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는 영국군 사령관 아서 웰즐리 경의 군사적 명성을 크게 높이는 데 기여했다. 포르투갈에서의 성공을 발판 삼아 영국군은 스페인으로 전선을 확대하여 반도 전쟁의 다음 국면으로 나아갔다.

5. 1. 포르투갈에서의 프랑스군 축출

제2차 포르투 전투가 포함된 제2차 포르투갈 전역은 프랑스군포르투갈에서 철수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영국군 사령관 아서 웰즐리 경은 포르투와 이후 탈라베라 전투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웰즐리의 도루 남작(Baron Douro of Wellesley영어)으로 임명되었다. 포르투갈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낸 후, 영국군은 스페인으로 이동하여 1809년 말 스페인 전역을 개시하며 탈라베라 전투 등을 치렀다.

5. 2. 웰즐리의 명성

포르투와 탈라베라 전투에서의 승리를 인정받아 아서 웰즐리 경은 웰즐리의 도루 남작 작위를 받았다.

6. 대중문화에서의 묘사

제2차 포르투 전투는 여러 역사 소설에서 다루어졌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베르나르드 콘웰의 『샤프의 하보크』, 사이먼 스캐로우의 『불과 검』, 앨런 맬리슨의 『용기의 행동』, 이안 게일의 『킨의 부대』, 그리고 마틴 맥도웰의 『탈라베라 평원』 등이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Battle of the Douro https://www.britishb[...]
[2] 서적 Smith, p 298-9
[3] 서적 Smith, p 302
[4] 서적 Glover, p 372-3
[5] 서적 Glover, p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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