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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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동순은 1901년경에 태어나 1937년 사망한 인물로, 황해도 황주 지역의 지주 아들이자 사회운동가, 기업가,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경신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유학했으며, 신간회 황주지회 창립에 참여했다. 1923년 임여수의 딸 김선주와 결혼하여 1남 4녀를 두었으며, 1928년 서선전기를 설립하고, 1929년 황해도 평의원에 당선되어 교육 및 구제 사업에 힘썼다. 삼광상업을 설립하여 운영했으며, 1937년 사망 당시 황주공회당 설립과 황주읍 장로교회 개축을 위해 기금을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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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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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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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조동순 |
원어 이름 | 趙東淳 |
호 | 송파(松坡) |
본관 | 배천 조씨 |
출생 | 1901년(?) |
출생지 | 황주군 |
사망지 | 황주군 |
직업 | 사업가 |
종교 | 장로교 |
배우자 | 김선주(金善柱) |
부모 | 아버지 조석훈(趙錫勛) |
자녀 | 장남 조병철(趙柄哲), 장녀 조병숙(趙柄淑), 차녀 조병옥(趙柄玉), 삼녀 조병화(趙柄華), 사녀 조병은(趙柄恩) |
학력 | 황주양성학교 |
정치 활동 | |
공직 | 황해도 평의원 (민선) |
2. 생애
조동순은 경신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대학을 다녔으며, 황주도서관,[5] 황주보신계,[6] 신간회 황주지회 창립에 기여했고, 신간회 지회에서는 재정부 위원을 맡았다.[7] 1923년 김선주(金善柱)와 결혼하여[8] 1남 4녀를 두었다.[1][3][20][9]
1928년 서선전기를 설립하고, 1929년 황해도평의원 선거에 민선 도의원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12][15] 도의원으로 활동하며 구제사업과 교육사업에 적극 참여했다.[17][18]
이후 서선전기 이사, 삼광상업 및 삼광운수부 경영, 화신연쇄점 이사 등을 역임하며 사업 활동에 매진했다.[19]
1937년 12월 9일 지병으로 사망했으며, 유언으로 황주공회당 설립과 황주읍 장로교회 개축을 위해 2만원을 기증했다.[1][8]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조동순은 조석훈(趙錫勛)의 아들로 1901년(1899년[2]~1904년(?)[3])에 태어났다.[1] 그의 아버지 조석훈은 황주면 내에 수백 평 이상의 대지와 군내에 수만 평의 대지를 보유한 지주였다.[4] 이후 조동순은 경신고등보통학교를 나와 일본에서 대학을 다녔다.임여수의 딸이자 황주 만석꾼의 외동손녀인 한 살 아래의 김선주(金善柱)와 1923년에 결혼하여[8] 1925년 전에 장남 조병철(趙柄哲[3][20])을 낳았다.[9] 김선주는 평양 숭의여학교를 나와 일본에서 음악을 유학하다 중퇴하였는데, 이후 황주기독여자청년회의 회장을 맡고, 1924년 9월에 황주장로교회 부지에 유치원을 설립하여 경영하였다.[8][10][11] 조동순과 김선주는 1남 4녀를 낳았는데, 순서대로 조병철, 조병숙(趙柄淑), 조병옥(趙柄玉), 조병화(趙柄華), 조병은(趙柄恩)이다.[1][3][20][9]
2. 2. 결혼 및 가족
조동순은 임여수의 딸이자 황주 만석꾼의 외동손녀인 한 살 아래의 김선주(金善柱)와 1923년에 결혼하여[8] 1925년 전에 장남 조병철(趙柄哲[3][20])을 낳았다.[9] 김선주는 평양 숭의여학교를 나와 일본에서 음악을 유학하다 중퇴하였는데, 이후 황주기독여자청년회의 회장을 맡고, 1924년 9월에 황주장로교회 부지에 유치원을 설립하여 경영하였다.[8][10][11] 조동순과 김선주는 조병철, 조병숙(趙柄淑), 조병옥(趙柄玉), 조병화(趙柄華), 조병은(趙柄恩)의 1남 4녀를 낳았다.[1][3][20][9]김선주는 이후 1957년 부산에서 사망하였다.[20]
2. 3. 사회 활동
조동순은 경신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대학을 다녔으며, 황주도서관,[5] 황주보신계,[6] 신간회 황주지회 창립에 기여했다. 신간회 지회에서는 재정부 위원을 맡았다.[7]1928년 서선전기를 설립했고, 1929년에는 도의원 후보로 선출되었다.[12] "일반청년계의 신망이 두텁고 따라서 청년회계와 아울러 실업계의 추천으로 입후보 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13] 황주청년동맹은 조동순에 대한 지지를 결의했고,[14] 같은 해 3월 19일 황해도평의원 선거에서 민선 도의원으로 당선되어 4월 1일 임명되었다.[15] 7월에는 황주교육협회의 부총재로서 유치원에 해당 회의 전 재산을 기부할 것을 결의했다.[16]
이후 의정활동에서 구제사업 및 교육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31년 2월에는 도로공사의 긴급 동의와 함께 궁민구제산업을 발의했고,[17] 1932년 12월에는 사립학교 보조가 미흡하다고 비판했다.[18]
이후 사업 활동에 매진하여 서선전기의 이사로 활동했고, 삼광상업을 창립해 삼광운수부와 함께 경영했다. 1935년에는 화신연쇄점의 이사로서 평양지부의 이사로 선출되었다.[19]
2. 4. 정치 활동
조동순은 경신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대학을 다녔으며, 신간회 황주지회 창립에 기여하고 재정부 위원을 맡았다.[7] 1928년 서선전기를 설립했고, 1929년에는 도의원 후보로 선출되어 선거운동을 했다.[12] 당시 "일반청년계의 신망이 두텁고 따라서 청년회계와 아울러 실업계의 추천으로 입후보 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13] 황주청년동맹은 조동순에 대한 지지를 결의했다.[14] 1930년 3월 19일 황해도평의원 선거에서 민선 도의원으로 당선되어 4월 1일에 임명되었다.[15] 같은 해 7월, 황주교육협회 부총재로서 유치원에 협회 전 재산을 기부할 것을 결의했다.[16]이후 의정활동에서 구제 사업 및 교육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31년 2월에는 도로 공사의 긴급 동의와 함께 궁민 구제 산업을 발의했으며,[17] 1932년 12월에는 사립학교 보조가 미흡하다고 비판했다.[18]
2. 5. 사업 활동
조동순은 1928년에 서선전기(西鮮電氣)를 설립하였다.[21] 1933년에는 서선전기의 감사이자 이사역을 맡았다.[22][23] 또한 사과를 포함한 농작물 및 목재 매매를 주로 하는 삼광상업(三光 - ) 및 삼광운수부를 설립해 1937년 사망 시까지 재직하였다.[24] 1935년에는 화신연쇄점의 이사로서 평양지부의 이사로 선출되었다.[19] 삼광상업은 1937년 조동순이 사망한 후 1941년 해산되었다.[25]2. 6. 사망
1937년 12월 9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사망하며 20000KRW을 기증하였는데, 이 중 18000KRW은 황주공회당의 설립을, 2000KRW은 황주읍 장로교회의 양식 개축을 위해 사용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1][8] 아내인 김선주는 이후 1957년 부산에서 사망하였다.[20]3. 사업
1928년 3월 3일 서선전기(西鮮電氣)의 창립 이사로 등록되었고, 1933년에는 감사이자 이사역을 맡았다.[21][22][23] 또한 사과를 포함한 농작물 및 목재 매매를 주로 하는 삼광상업(三光 - ) 및 삼광운수부를 설립해 1937년 사망 시까지 재직하였다.[24] 삼광상업은 1937년 조동순이 사망한 후 1941년 해산되었다.[25]
참조
[1]
뉴스
臨終에 거룩한 遺言, 公會堂 建設費로 一萬餘圓喜捨 黃州趙東淳氏美擧
동아일보
1937-12-12
[2]
뉴스
西電重役 趙東淳君
중외일보
1930-03-13
[3]
문서
배천 조씨 족보
[4]
간행물
1917년 2월 14일 조선총독부 관보 제1357호, 利用權讓渡許可
[5]
뉴스
1924년 4월 8일, 시대일보 제9호
[6]
뉴스
普信契總會
시대일보
1926-03-26
[7]
뉴스
新幹黃州支會
중외일보
1928-01-11
[8]
뉴스
公會堂建築費等으로 二萬圓을 喜擲!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2020-10-27
[9]
뉴스
金善柱女史의美擧 海州高普에百圓 圖書費로서寄贈
매일신보
1937-12-20
[10]
뉴스
幼稚園父母會
시대일보
1924-12-17
[11]
뉴스
幼稚園維持와 其他重要案件
동아일보
1925-07-27
[12]
뉴스
黃州面議選擧
매일신보
1929-11-2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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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州에 道議員選擧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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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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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02-1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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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4월3일, 매일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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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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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02-2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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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議閉會後 懇談會開催
매일신보
1932-12-20
[19]
저널
全鮮 店主團結한 和信連鎖店主會
1935-09-01
[20]
문서
김선주 묘비문 (신불산추모공원 소재)
[21]
서적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
東亞經濟時報社
1929
[22]
서적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
東亞經濟時報社
1933
[23]
뉴스
西鮮電氣總會
매일신보
1933-03-31
[24]
서적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
東亞經濟時報社
1937
[25]
간행물
1941년 8월 20일 조선총독부 관보 4373호, 7페이지 광고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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