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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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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간회는 1927년 일제강점기 하에서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연합하여 결성한 독립운동 단체이다. 정치적, 경제적 각성과 민족 대단결을 목표로 하였으며, 전국적으로 지부를 두고 노동 운동 및 농민 운동을 지원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지원하며 일제에 저항했으나, 이후 지도부의 노선 갈등과 일제의 탄압으로 1931년 해산되었다. 신간회는 민족 협동 전선을 통해 독립운동에 기여했으나, 일제의 탄압과 내부 노선 갈등으로 인해 한계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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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기본 정보
명칭신간회
한자新幹會
로마자 표기Singanhoe
별칭민족 유일당 민족협동전선
유형독립운동단체
이념사회주의
민족주의
목적항일, 독립
언어한국어
활동 인원약 3만 9000여 명
위치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2가 46 기업은행 종로지점 앞 버스정류장
설립 및 해산
결성일1927년 2월 15일
해산일1931년 5월 16일
주요 인물
초대 회장이상재(李商在)
설립자안재홍(安在鴻)
이상재(李商在)
백관수(白寬洙)
신채호(申采浩)
신석우(申錫雨)
유억겸(兪億兼)
권동진(權東鎭) 외 34명
기타
관련 단체신민회 (구별 필요)
1927년 2월 14일, 신간회 창립 모습.

2. 배경

1920년대 조선 민족주의자들은 일제 통치 아래 자치를 주장하는 '타협파'와 독립을 추구하는 '비타협파'로 나뉘었다. 안재홍 등 비타협파는 일제와의 타협을 거부하는 사회주의 세력과의 연대를 모색했고, 사회주의 측에서도 정우회 선언 등을 통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의 협력을 주장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27년 2월 15일, 양 세력이 결합하여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신간회가 발족되었고, 조선일보 사장 이상재가 회장으로 취임했다.

2. 1. 민족주의 세력 내 분열

3·1 운동 이후 민족운동 진영은 일제 통치하에서 자치를 주장하는 '타협파'와 일제의 통치를 부정하고 독립을 추구하는 '비타협파'로 나뉘었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은 자치운동의 대표적인 주장이었다. 조선일보 계열의 이상재, 안재홍, 천도교 구파의 권동진 등은 '비타협적 민족전선'을 내세우며 자치운동을 강하게 비판했다.[1]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3·1 운동 이후 빠르게 성장한 사회주의 세력과의 연대를 모색했다. 사회주의 진영 역시 '정우회 선언' 등을 통해 비타협적인 민족주의자들과의 협력 움직임을 보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27년 2월 15일, 양 세력은 신간회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2. 1. 1. 이광수의 민족개조론과 그 영향



3·1 운동 이후 민중의 정치적 자각과 진출이 급속히 높아지면서 1920년대에 국내외에서 민족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만주에서는 무장독립투쟁이, 중국 관내에서는 상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외교활동이, 국내에서는 노동·농민·청년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대해 일제는 '문화정치'라는 기만적인 개량정책을 써서 민족독립운동 역량의 분열과 약화를 꾀했다. 특히 일제는 당시 광범위하게 전개되던 실력양성운동을 일제 지배하에서 자치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한 자치운동으로 전환시키려 했다. 1925년 1월 동아일보에 발표된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은 자치운동의 출발을 알리는 것이었다. 자치운동이 전개되자 조선일보 계열의 이상재·안재홍, 천도교 구파(舊派)의 권동진 등은 '비타협적 민족전선의 수립'을 제창하면서 자치운동에 격렬히 비난, 규탄하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는 한편, 허헌이나 홍명희3·1 운동 이후 급속히 성장한 사회주의자들과의 협력과 연대를 모색했다.[1]

2. 1. 2. 자치운동과 비타협적 민족주의의 대두

3·1 운동 이후 민중의 정치적 자각과 진출이 빠르게 높아지면서 1920년대 민족운동은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일제는 '문화정치'라는 기만적인 개량정책을 통해 민족독립운동 역량을 분열시키고 약화시키려 했다. 특히 일제는 실력양성운동을 일제 지배하에서 자치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한 자치운동으로 전환시키려 했다. 1925년 1월 동아일보에 발표된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은 이러한 자치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자치운동이 전개되자 조선일보 계열의 이상재, 안재홍, 천도교 구파(舊派)의 권동진 등은 '비타협적 민족전선의 수립'을 제창하며 자치운동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들은 허헌, 홍명희 등 사회주의자들과의 협력과 연대를 모색했다.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은 상호 협력을 모색했지만, 사회주의자들은 초기 운동을 특징지었던 엄격한 계급 이데올로기를 넘어섰고, 1924년부터 협력적 민족주의 진영과 혁명적 민족주의 진영으로 분류될 수 있었다. 1926년부터 타협 없는 운동을 위한 조직적인 시작이 있었다.

이러한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한국 공산당 제2서기장 강달영(Kang Talyǒng)은 권동진, 안재홍, 김춘연(Kim Chunyǒn) 등과 접촉했다. 자치운동으로 향하는 일반적인 추세에 대응하여 조직적인 민족전선을 구축하려는 욕구는 당시 상황을 잘 보여준다.

반대파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 간의 협력은 정우회(Chǒng’uhoe)가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연합체인 단일 민족주의 기구의 설립을 주장하는 정우회 선언을 발표하면서 빠르게 진전되었다.

2. 2. 사회주의 세력 내 합작 움직임

1920년대 중반, 3·1 운동 이후 사회주의 운동이 성장하면서, 사회주의 진영 내에서도 민족 협동 전선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특히 중국에서 국공합작의 성공 사례는 한국 사회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2] 이들은 중국의 사례를 통해 민족주의 세력과의 연대가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운동에 효과적일 수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2. 2. 1. 사회주의 운동의 성장과 민족 협동 전선 논의

1920년대 중반부터 사회주의 진영에서도 통일 조직 건설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3·1 운동 이후 급격히 성장한 사회주의 진영은 민족협동전선을 중요한 과제로 인식했다. 이들은 중국에서 국공합작으로 사회주의자들이 국민당과 연합해 성공적인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한 것에 크게 고무되었다.[2]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사회주의자들과의 협력을 모색했고, 사회주의자들 역시 초기의 계급중심적 사고를 극복하고 1924년경부터는 '타협적' 민족운동과 '혁명적' 민족운동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26년 들어 비타협 민족운동과의 협력이 조직적으로 모색되기 시작했다. 비록 실행 단계에 이르지 못했지만, 제2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강달영(姜達永)과 권동진, 안재홍, 김준연(金俊淵) 등이 비밀리에 접촉하여 자치운동세력의 움직임에 대응한 국민당 형태의 민족통일전선 조직을 결성하고자 한 것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비타협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협력은 1926년 11월 제3차 조선공산당의 표면사상단체인 정우회가 비타협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의 동맹을 통해 민족단일당을 건설할 것을 제창한 '정우회 선언'을 발표하면서 급속히 추진되었다.[2] 정우회화요회, 북풍회, 조선노동당, 무산자동맹회가 연합해 결성한 사회주의 사상운동 단체였다. 1926년 당시 사회주의 이념 서클은 338개에 이를 정도로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는데, 이 4개 그룹은 조선 사회주의운동의 주요 세력이었다. 1926년 4월 서울에서 조직된 정우회는 그해 11월 15일 '정우회 선언'을 발표했다. 선언문의 요지는 이전의 사회운동을 비판하면서 '분파투쟁 청산과 사상단체의 통일',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의 전환과 민족협동전선의 전개' 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즉, "민족주의 세력이 타락하지 않는 한 적극적으로 제휴해 싸워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이들은 선언대로 신간회 결성 이후 민족협동전선을 위해 과감히 정우회를 해체했다.[2]

2. 2. 2. 정우회 선언과 민족 협동 전선의 가시화

1926년 11월, 정우회는 '정우회 선언'을 발표하여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의 연대를 통해 민족 단일당을 건설할 것을 주장했다.[2] 정우회는 화요회, 북풍회, 조선노동당, 무산자동맹회가 연합해 결성한 사회주의 사상운동 단체였다.[2]

정우회 선언의 주요 내용은 “분파투쟁의 청산과 사상단체의 통일”,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의 전환과 민족협동전선의 전개” 등이었다. 즉, “민족주의 세력이 타락하지 않는 한 적극적으로 제휴해 싸워야 한다”는 입장이었다.[2]

정우회 선언은 민족주의 세력과의 적극적인 제휴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며, 신간회 결성 이후, 정우회는 민족협동전선을 위해 과감히 해체되었다.[2]

3. 결성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민족주의 진영은 조선총독부의 통치 아래에서 자치를 추구하는 '타협파'와 총독부의 통치를 부정하고 독립을 이루고자 하는 '비타협파'로 나뉘었다. 안재홍 등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총독부와의 타협을 거부하는 사회주의 세력과의 연대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진영에서도 비타협적인 민족주의자들과의 연대를 주장하는 '정우회 선언' 등이 발표되었다.

1926년 11월, 정우회는 '정우회 선언'을 통해 "민족주의적 세력에 대하여는 그 부르주아적 민족주의적 성질을 명백하게 인식하는 동시에 또 과정상의 동맹자적 성질도 충분히 승인하여 그것이 타락하는 형태로 출현되지 아니하는 것에 한하여는 적극적으로 제휴하여 대중의 개량적 이익을 위하여서도 종래의 소극적 태도를 버리고 분연히 싸워야 할 것이다."라고 선언하며, 민족주의 세력과의 협력 의지를 분명히 했다.[2]

이러한 움직임 속에 1927년 2월 15일, 서울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결합하여 신간회가 창립되었다. 조선일보 사장 이상재가 회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최성기에는 150여 개의 지부와 4만 명이 넘는 회원을 거느린 거대 조직으로 성장했다.

3. 1. 민족주의-사회주의 연대의 가속화

1926년 들어 비타협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 간의 협력이 조직적으로 모색되기 시작했다. 비록 실행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제2차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 강달영권동진, 안재홍, 김준연 등이 비밀리에 접촉하여 자치 운동 세력에 대응한 국민당 형태의 민족 통일 전선 조직을 결성하고자 했다.[2]

이러한 협력은 1926년 11월 제3차 조선공산당의 표면 사상 단체인 정우회가 '정우회 선언'을 발표하면서 급속히 추진되었다. 정우회화요회, 북풍회, 조선노동당, 무산자동맹회가 연합해 결성한 사회주의 사상 운동 단체였다. 정우회 선언의 요지는 '분파 투쟁의 청산과 사상 단체의 통일', '경제 투쟁에서 정치 투쟁으로의 전환과 민족 협동 전선의 전개' 등이었다. 즉, "민족주의 세력이 타락하지 않는 한 적극적으로 제휴해 싸워야 한다"는 입장이었다.[2] 정우회는 선언대로 신간회 결성 이후 민족 협동 전선을 위해 과감히 정우회를 해체했다.[2]

정우회는 1926년 당시 338개에 이르는 이념 서클이 활동할 정도로 광범위하게 퍼져있던 사회주의 운동의 주요 세력이었다.

3. 2. 신간회 창립

1927년 2월 15일,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맞서 정치·사회 사상의 이념을 초월한 독립운동단체 '신간회'가 창립되었다.[2]
1927년 2월 14일자 동아일보에서 신간회 창립을 보도하는 기사.
창립 발기인으로는 소설 《임꺽정》으로 유명한 사회주의 문인 벽초 홍명희, 역사학자이자 언론인 안재홍, 백관수, 독립운동가 신채호 등 34명이 참여했고, 이상재가 초대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2]

신간회는 처음 '신한회'(新韓會)라는 명칭을 사용하려 했으나, 총독부가 허가하지 않아 '신간회'로 변경되었다.[3][2] 이는 조선일보 부사장이자 소유주였던 신석우가 총독부의 허가를 받기 위해 노력한 결과였다.

3. 3. 신간회 강령

'''창립 당시 강령'''

  • 우리는 정치 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1927년 12월 동경 지회의 대회에서 제안된 강령 수정안'''

  • 우리는 조선 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해방의 실현을 기함
  • 우리는 전민족의 총역량을 집중하여 민족적 대표 기관이 되기를 기함
  • 우리는 일체 개량주의 운동을 배척하여 전민족의 현실적 공동 이익을 위하여 투쟁하기를 기함

4. 활동



1927년 2월 15일,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대항하기 위해 정치·사회 사상의 이념을 초월한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를 창립했다. 창립 당시 강령은 다음과 같다.

신간회는 합법적 단체로 국내외에 100여 개가 넘는 지회를 조직했고, 회원은 많을 때는 4만여 명에 달했다.[1] 3·1 운동 이후 민족주의 내부의 '타협적 민족주의'와 '비타협적 민족주의'의 노선 갈등, 자유주의사회주의의 갈등이 있었으나, 신간회는 '비타협적 민족독립'을 중심으로 이들을 결합하는데 기여하였다.

1929년 6월, 신간회는 인근 지역대표의 대표를 뽑는 ‘복(複)대표대회’를 열어 새 임원을 뽑고 새 규약을 채택했다. 그 결과, 반수 가까운 사회주의자가 간부로 뽑히고, 허헌이 집행위원장이 되었다.[1]

신간회는 원산 총파업을 지원하는 등 노동 운동과 농민 운동을 지원하고, 광주학생운동을 지원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과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간의 견해차 등으로 인해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1931년 해산을 결의하게 되었다.[1]

4. 1. 민족 독립 이론 발전

3·1 운동 이후 한국에서는 공산주의, 사회주의 사상이 수용되면서 자유주의를 근거로 한 민족주의와 심한 갈등을 빚었다. 여기에 민족주의 내부에서도 '타협적 민족주의'와 '비타협적 민족주의' 노선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러던 것이 1927년 2월 15일 창립된 신간회에 의해 '비타협적 민족독립'을 상위개념으로 하는 자유주의사회주의 사상이 결합되었다. 한편, 자매 단체로 여성들이 창단한 근우회가 있었으나 계급 투쟁을 통한 민중해방을 주장하는 사회주의계와 계몽활동을 주장하는 기독교계의 사회참여 노선이 달라서 내분을 겪었다.[1]

4. 2. 노동 운동 및 농민 운동 지원

신간회는 원산 총파업을 지원하는 등 노동 운동과 농민 운동을 지원하였다. 신간회는 행동 강령으로 조선 농민의 교양에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조선 농민의 경작권을 확보하며, 일본인 이민을 방지하는 것 등을 제시하였다.

4. 3. 광주학생운동 지원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는 진상조사위원을 현장에 파견하여 시위를 지원하였다.[1] 신간회 중앙본부(경성부)는 언론사, 종교세력, 근우회, 조선청년총동맹, 조선노동총동맹 등과 함께 대규모 민중대회를 준비하다가 일제 경찰에 발각되었다. 이로 인해 조병옥, 이관용, 허헌 등 간부 44명, 총 90여 명이 체포되는 위기를 맞았다.(1929년 12월 13일)[1] 이 사건을 ‘민중대회사건’이라고 한다.[1]

4. 4. 교육 및 문화 운동

신간회는 조선인 본위의 교육 확보, 언론, 출판, 결사의 자유 확보 등을 위해 노력했다.[1] 또한 협동조합 운동을 지원하고, 염색 옷 입기, 단발 실시 등 생활 개선 운동을 전개했다.[1]

5. 해소

1927년 2월 15일 창립된 신간회는 일제강점기하에서 투쟁적인 강령을 내걸고 원산에서의 노동 운동 지원, 광주학생운동 조사단 파견 등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과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간의 견해 차이로 인해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다.[4] 최성기에는 150여 개의 지부와 4만 명이 넘는 회원을 가진 거대 조직이었으나, 1931년 해산을 결의하여 운동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안재홍, 조병옥, 김병로 등 해방 이후 정국을 주도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신간회에 참여했다.

5. 1. 지도부의 변화와 노선 갈등

광주학생운동을 계기로 조병옥, 허헌 등 간부들이 대규모 검거되었다. 이후 신간회는 회원 수가 증가하는 등 오히려 조직의 세가 확대되는 듯했으나, 문제는 지도부였다. 새로 집행위원장이 된 김병로가 자치론자들과 제휴를 모색하는 등 타협적인 노선으로 기운 것이다. 김병로최린, 송진우 등 자치론자들과 함께 신간회를 자치운동의 매개 조직으로 삼으려 했고, 이 과정에서 지방 지회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타협적인 지도부의 등장은 신간회 해소론의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했고, 조직은 급격한 쇠퇴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게 되었다.[4]

신간회 해소론은 1930년대 들어 구성된 집행부가 점차 민족주의 계열이 주도하게 되었고, 게다가 타협적 운동 노선을 적극 추진하는 등 우경화 현상이 심해졌으며, 외부적으로는 코민테른의 노선이 극단적으로 좌경화되는 가운데 일제의 탄압에 지도부가 미흡하게 대응하게 되면서 신간회의 역할에 대한 반성과 회의가 이어지는 가운데 새롭게 대두되었다. 1930년 부산지회에서 신간회의 활동에 의문을 던지며 처음으로 해소를 결의하자, 다른 지회도 덩달아 찬성하기 시작했다.

5. 2. 코민테른의 노선 변화와 일제의 탄압

광주학생운동을 계기로 조병옥, 허헌 등 간부들이 대규모 검거되었다. 이후 신간회는 회원 수가 증가하는 등 오히려 조직이 확대되는 듯했으나, 지도부에 문제가 있었다. 새로 집행위원장이 된 김병로가 자치론자들과 제휴를 모색하는 등 타협적인 노선으로 기울었던 것이다. 김병로최린, 송진우 등 자치론자들과 함께 신간회를 자치운동의 매개 조직으로 삼으려 했고, 이 과정에서 지방 지회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타협적인 지도부의 등장은 신간회 해소론의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했고, 조직은 급격한 쇠퇴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게 되었다.[4]

1930년대 들어 구성된 집행부가 점차 민족주의 계열이 주도하게 되었고, 타협적 운동 노선을 적극 추진하는 등 우경화 현상이 심해졌다. 또한, 외부적으로는 코민테른의 노선이 극단적으로 좌경화되는 가운데 일제의 탄압에 지도부가 미흡하게 대응하게 되면서 신간회의 역할에 대한 반성과 회의가 이어졌다.이러한 상황에서 신간회 해소론이 대두하게 된다. 1930년 부산지회에서 신간회의 활동에 의문을 던지며 처음으로 해소를 결의하자, 다른 지회도 덩달아 찬성하기 시작했다.

1931년 5월 16일 창립대회 이후 처음으로 열린 전체 대회에서 찬성 43, 반대 3, 기권 30으로 신간회 해소안이 가결되어, 창립 4년여 만에 사실상 해체되었다. 이후 새 단체 조직을 안건으로 해 논의를 진행하려 했으나 일제 경찰의 강압으로 신간회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5. 3. 해소 과정

1931년 신간회 해소를 주장했던 책의 표지


광주학생운동을 계기로 조병옥, 허헌 등 간부들이 대규모 검거되었다. 이후 신간회는 회원 수가 증가하는 등 오히려 조직의 세가 확대되는 듯했으나, 문제는 지도부였다. 새로 집행위원장이 된 김병로가 자치론자들과 제휴를 모색하는 등 타협적인 노선으로 기운 것이다. 김병로최린, 송진우 등 자치론자들과 함께 신간회를 자치운동의 매개 조직으로 삼으려 했고, 이 과정에서 지방 지회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타협적인 지도부의 등장은 신간회 해소론의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했고, 조직은 급격한 쇠퇴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게 되어 간다.[4]

신간회 해소론은 1930년대 들어 구성된 집행부가 점차 민족주의 계열이 주도하게 되었고, 게다가 타협적 운동 노선을 적극 추진하는 등 우경화 현상이 심해졌고, 외부적으로는 코민테른의 노선이 극단적으로 좌경화되는 가운데 일제의 탄압에 지도부가 미흡하게 대응하게 되면서 신간회의 역할에 대한 반성과 회의가 이어지는 가운데 새롭게 대두하게 된다. 1930년 부산지회에서 신간회의 활동에 의문을 던지며 처음으로 해소를 결의하자, 다른 지회도 덩달아 찬성하기 시작한다.

결국 1931년 5월 16일 창립대회 이후 처음으로 연 전체 대회에서 찬성 43, 반대 3, 기권 30으로 신간회는 해소안을 가결하고, 창립 4년여 만에 사실상의 해체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새 단체 조직을 안건으로 해 논의를 진행하려 했으나 일제 경찰의 강압으로 신간회는 완전한 해체의 길을 걷게 되었다.

6. 의의와 한계

신간회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견해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일제의 탄압을 받는 등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다.[1] 최성기에는 150여 개의 지부와 4만 명이 넘는 회원을 가진 거대 조직이었으나, 1931년 해산을 결의하여 운동을 마무리하게 되었다.[1]

6. 1. 의의

신간회는 1920년대 후반, 좌우익 세력이 합작해 결성한 대표적인 항일단체로 '민족유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국내의 독립운동 가운데 커다란 의의를 남긴다.[1] 1920년대 조선에서는 민족주의자들 사이에 '타협파'와 '비타협파'의 분열이 나타났는데, 전자는 조선총독부의 통치 아래 자치를 추구했고, 후자는 총독부를 부정하고 독립을 목표로 했다.[1] 비타협파 민족주의자들은 사회주의 세력과의 연대를 모색했고, 사회주의 측에서도 정우회 선언 등을 통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의 연대를 주장했다.[1] 그 결과 1927년 2월 15일 양 세력이 결합하여 신간회가 발족했다.[1]

신간회는 원산(元山)에서의 노동 운동을 지원하거나, 광주학생항일운동을 둘러싸고 조사단을 파견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지만,[1] 일제의 탄압과 내부 갈등으로 인해 1931년 해산을 결의하며 운동을 마무리했다.[1] 그러나 안재홍, 조병옥, 김병로 등 해방 후 정국을 주도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신간회에 참여했다.[1]

6. 2. 한계

신간회는 합법적인 단체였기 때문에 일제 당국의 탄압 속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1] 1929년 광주학생운동 이후 신간회 지도부가 일제와 타협하려는 민족 개조론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비타협적인 반일 민족 연합 전선으로서의 신간회 노선은 계급 중심의 노선을 강조하게 되었다.[1] 이후 신간회는 '타협주의'를 내세워 공산주의계와 민족주의계 양쪽으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이 때문에 일제의 탄압뿐만 아니라 좌우 내부 분열로 인해 해산되었다는 한계가 있다.[1]

참조

[1] 텍스트
[2] 웹인용 좌절된 좌우연합의 꿈, 흩어져 맞은 독립 https://web.archive.[...] 2010-12-23
[3] 텍스트
[4] 웹인용 좌절된 좌우연합의 꿈, 흩어져 맞은 독립 https://web.archive.[...] 2010-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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