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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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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열문은 강소성 출신의 청나라 말기 인물로, 증국번의 막료로 활동하며 태평천국 진압에 참여했다. 그는 상군의 학살을 비판하고, 청나라의 멸망을 예견하는 등 당시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그는 또한 《능정거사일기》를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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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열문
기본 정보
조열문
조열문
자(字)혜보(惠甫)
호(號)염당(濂堂)
국적중국 청나라
민족한족(漢族)
출생1832년
사망1881년
출생지장쑤성 상숙시(常熟市)
사망지집에서 사망
묘소 위치상숙시(常熟市) 해우진(海虞鎮)
경력
주요 경력이홍장 막료
강남제조국 회계
관직후보도원(候补道员)
가족
부친조용건(趙湧建)
배우자손씨(孫氏)
자녀장남: 조동손(趙同孫)
차남: 조준손(趙准孫)
삼남: 조모손(趙謨孫)
저서
주요 저서《능정거사일기》(能靜居士日記)
《염당문집》(濂堂文集)

2. 생애

조열문은 강소성 양호(현재의 창저우시) 명문가 출신으로, 조상 중 조신교는 강희제 시대에 호부상서를 지냈다. 젊어서 문명을 알렸으나, 성시에 세 번 낙방했다.

저서로는 《능정거사일기(能静居士日記)》, 《조위보선생경신피난일기》(趙偉甫先生庚申避亂日記)》, 《낙화춘우소일기》(落花春雨巢日記)》가 있다.

2. 1. 증국번의 막료

1855년 12월, 증국번남창에서 태평천국군에 고전하고 있을 때, 고향 사람 주등호의 추천으로 조열문은 증국번의 막하에 들어갔다. 그날 장수진에 주둔하는 상군을 보았는데, "육군의 사기가 떨어져 있어, 의지할 수 있을지 불안하다"고 지적했다. 과연 얼마 후 장수진의 부대는 대패했다.

2. 2. 태평천국의 난 진압 참여와 비판

1864년 증국전태평천국의 수도 천경(지금의 난징)을 함락했을 때, 그 현장에 있었던 조열문은 《능정거사일기》(能静居士日記)에서 다음과 같이 상군의 학살을 고발했다.

"... 길가에 구르는 사망자는 10명 중 9명이 노인이다. 또한 유아도 장난으로 칼로 마구 살해되어 노상에 방치되어 있다. 40세 이하의 여성은 한 명도 보이지 않고, 상처가 없는 노인은 없었으며, 수십 개의 칼자국 상처가 나 있었다."

2. 3. 청나라에 대한 비판적 시각

趙烈文|조열문중국어은 1867년 6월 20일(그레고리력 7월 21일), 증국번과의 대화에서 "청나라를 흔드는 재난이 일어나 지방은 분열될 것이며, 그러한 사태가 50년 이내에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했다. 증국번이 "황제 폐하에게 덕이 있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하자, 조열문은 "청나라가 (이자성이 명나라를 멸망시킨 후 오삼계의 안내로 산해관에 들어와) 쉽게 천하를 빼앗고, (양주와 가정 등) 각지에서 학살을 저질렀다. 선악은 서로 보완되는 것이 아니므로, 후세 군주의 덕은 믿을 만한 것이 아니다"라며 청나라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러한 조열문의 발언은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이고 위험한 것으로, 그의 비판적인 역사 인식과 현실 인식을 보여준다.

3. 저서


  • 《능정거사일기》
  • 《조위보선생경신피난일기》
  • 《낙화춘우소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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