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개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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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개남은 1853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난 동학 농민 혁명의 지도자이다. 그는 1873년 동학에 입문하여 접주 직책을 맡았으며, 1894년 동학 농민 혁명 당시 전봉준과 함께 백산에서 호남창의소를 설립하고 총관령주를 맡아 남원 등 전라도 지역을 장악했다. 김개남은 혁명 과정에서 과격한 노선을 취하며 체제 전복을 시도했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1894년 12월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며, 그의 죽음 이후에도 그의 혁명적인 면모와 지도력은 재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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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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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인물 정보 | |
![]() | |
이름 | 김개남 |
한글 이름 | 김개남 |
한자 이름 | 金開南 |
로마자 표기 | Kim Gae-nam |
매큔-라이샤워 표기 | Gim Kae-nam |
본명 | 김영주 |
한글 본명 | 김영주 |
한자 본명 | 金永疇 |
로마자 본명 | Kim Youngju |
매큔-라이샤워 본명 | Kim Yongchu |
자 | 기선 |
한자 자 | 箕先 |
로마자 자 | Giseon |
매큔-라이샤워 자 | Kyson |
호 | 기범 |
한자 호 | 箕範 |
로마자 호 | Gibum |
매큔-라이샤워 호 | Kibum |
별칭 | 자는 기선, 20대 기범, 개남장, 개남장군, 개남국왕 |
직업 | 훈장, 정치인, 종교지도자 |
종교 | 천도교(동학) |
배우자 및 자녀 | 전주 이씨, 1남 3녀 |
가족 | 김대흠(부), 7남매의 3형제중 막내 |
친척 | 김시풍(무과급제,전라감영 영장) |
웹사이트 | 웹사이트 |
기본 정보 | |
출생일 | 1853년 9월 15일 |
출생지 | 태인현 종송리 지금실 (현 정읍시 산외면 지금실) |
사망일 | 1894년 12월 3일 (42세) |
사망지 | 전주 초록바위 |
2. 생애
1853년(철종 4년)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에서 김대흠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키는 작지만 총명하였고 마을 소년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으며 말썽꾸러기로 인근에 소문이 자자했다. 유년기에 한학을 수학하였고 병서를 많이 탐독했으며 다산의 목민심서, 경세유표를 읽었다.[9] 그의 집안은 인근에서 글깨나 읽는 선비 집안으로 대접을 받았다.
19세에 연안 이씨와 결혼했으나 1년 만에 상처한 후 임실군 출신의 전주 이씨와 재혼하여 윗지금실로 분가하고, 1남 3녀를 두었다. 결혼 후 몇 년간 임실에서 훈장을 하기도 했다.[9] 1873년 21세에 최제우의 가르침을 처음 듣고 동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2]
1884년에서 1886년 사이로 추정되는 시기에, 김개남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권리를 보장한다는 평등주의적 신념, 인권을 강조하는 ‘인내천’ 사상, 그리고 부패한 세상을 뒤엎고자 하는 비전에 이끌려 동학에 입문했다.[2] 그는 자신의 이름을 김기범에서 ‘남쪽을 먼저 연다’는 뜻의 김개남으로 바꾸었다. 1891년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이 전라도 지역 포덕을 위해 태인현에 왔을 때, 지금실에 있는 김개남의 집에 머물렀으며, 김개남은 그에게 여름옷 다섯 벌을 지어 바쳤다.[10]
1892년 12월, 전국의 동학 교도들이 전라도 삼례에서 탐관오리 제거와 교조신원운동을 벌일 때, 김개남은 전라도 지역 접주들과 함께 많은 교도들을 이끌며 뛰어난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1893년 3월, 충청도 보은 장내리에서 보국안민과 척왜양의 기치를 내건 보은 집회가 열렸을 때, 김개남은 전라도 교도들을 동원하여 최시형으로부터 태인포(泰仁包)라는 포명과 함께 대접주 임첩을 받았다. 이때 손병희, 김덕명, 손화중 등 19명도 함께 대접주로 임명되었다. 이후 김개남은 호남 지역 접주들과 교류하며 현실 비판과 사회 개혁에 뜻을 같이하는 정읍 대접주 손화중, 금구(원평) 대접주 김덕명, 주산 접주 최경선 등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11] 그는 동학의 시천주 사상과 후천개벽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수행과 포교 활동에 힘써 접주라는 높은 직책에 올랐다. 이 시기에 그는 전봉준,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등 호남의 주요 접주들과도 긴밀하게 협력했다.[1]
2. 1. 초기 생애
1853년(철종 4년)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에서 김대흠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키는 작지만 총명하였고 마을 소년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으며 말썽꾸러기로 인근에 소문이 자자했다. 유년기에 한학을 수학하였고 병서를 많이 탐독했으며 다산의 목민심서, 경세유표를 읽었다.[9] 그의 집안은 인근에서 글깨나 읽는 선비 집안으로 대접을 받았다.19세에 연안 이씨와 결혼했으나 1년 만에 상처한 후 임실군 출신의 전주 이씨와 재혼하여 윗지금실로 분가하고, 1남 3녀를 두었다. 결혼 후 몇 년간 임실에서 훈장을 하기도 했다.[9] 1873년 21세에 최제우의 가르침을 처음 듣고 동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2]
2. 2. 동학 입문과 활동
김개남이 동학에 입교한 시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1884년에서 1886년 사이로 추정된다.[10] 그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권리를 보장한다는 평등주의적 신념, 인권을 강조하는 ‘인내천’ 사상, 그리고 부패한 세상을 뒤엎고자 하는 비전에 이끌려 동학에 입문했다.[2] 그는 자신의 이름을 김기범에서 ‘남쪽을 먼저 연다’는 뜻의 김개남으로 바꾸었다. 1891년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이 전라도 지역 포덕을 위해 태인현에 왔을 때, 지금실에 있는 김개남의 집에 머물렀으며, 김개남은 그에게 여름옷 다섯 벌을 지어 바쳤다.[10]1892년 12월, 전국의 동학 교도들이 전라도 삼례에서 탐관오리 제거와 교조신원운동을 벌일 때, 김개남은 전라도 지역 접주들과 함께 많은 교도들을 이끌며 뛰어난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1893년 3월, 충청도 보은 장내리에서 보국안민과 척왜양의 기치를 내건 보은 집회가 열렸을 때, 김개남은 전라도 교도들을 동원하여 최시형으로부터 태인포(泰仁包)라는 포명과 함께 대접주 임첩을 받았다. 이때 손병희, 김덕명, 손화중 등 19명도 함께 대접주로 임명되었다. 이후 김개남은 호남 지역 접주들과 교류하며 현실 비판과 사회 개혁에 뜻을 같이하는 정읍 대접주 손화중, 금구(원평) 대접주 김덕명, 주산 접주 최경선 등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11] 그는 동학의 시천주 사상과 후천개벽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수행과 포교 활동에 힘써 접주라는 높은 직책에 올랐다. 이 시기에 그는 전봉준,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등 호남의 주요 접주들과도 긴밀하게 협력했다.[1]
3. 동학 농민 혁명
전봉준과 김개남은 전라도를 우도와 좌도로 나누어 호령했다. 전봉준은 금구, 원평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전라우도를, 김개남은 남원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무장, 순창, 진안, 장수, 용담, 순천, 낙안, 고흥 등 전라좌도를 호령했다. 이로써 전라도 53개 군현에 집강소가 설치되었는데,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민주자치행정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12] 전라좌도 지역에서는 김개남의 영향력으로 치안이 확립되어 범죄가 줄어들자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김개남은 남원을 거점으로 세력을 넓혀 전라좌도의 경계를 넘어 경상도 함양과 안의까지 세력권을 확대하려 했다.[13] 또한 부하 김인배를 순천에 보내 영호대회소를 설치하여 경상도 하동, 진주까지 진출했다.
1894년 초 전봉준이 고부 봉기를 일으키자 김개남과 손화중은 동학군을 일으켰다. 4월에는 백산(白山)에 동학 운동의 본부인 호남창의소(湖南倡義所)를 설립하고 전봉준을 동도대장(東道大將)으로, 김개남을 총관령주(總管領主)로 임명했다. 김개남은 남원을 점령하고 전라좌도를 통치하며 정치 개혁을 추진했다.[1]
3. 1. 제1차 봉기
1894년 1월 10일,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맞서 전봉준과 함께 고부 관아를 습격하고 봉기를 일으켰다.(고부 봉기)[11] 말목장터에서 거병하여 고부관아를 습격,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을 구출하고 무기를 압수하였으나 조병갑을 체포하지는 못했다.[11] 전창혁이 출소 3일 만에 사망하자, 김낙삼, 김문행 등 1,300여 명을 이끌고 고부 백산에 모여 농민전쟁의 본부인 호남창의소(湖南倡義所)를 설치하고 전봉준, 손화중과 함께 창의문을 발표했다.[11]이후 동학농민혁명군은 황토현 전투에서 전라관찰사 김문현이 보낸 관군 천여 명을 상대로 4월 7일 승리한다.[11] 이 승리로 동학농민혁명군의 위세에 위기를 느낀 정부는 장통위이며 청주병사인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고 장위영의 병정을 경군으로 명한다. 4월 23일, 황룡촌 전투에서 홍계훈의 경군과 동학혁명군이 격돌, 동학농민혁명군이 또다시 승리한다. 이후 파죽지세로 전진하여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한다.[11]
1892년 고부군수가 된 조병갑은 이미 기능하는 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보수로 농민들을 동원하여 만석보를 건설하였다. 만석보 완공 후에는 만석보의 물을 사용하는 농민들에게 과도한 수세를 부과하였고, 아버지의 기념비 건립을 명목으로 돈을 징수하는 등 각종 부정부패를 저질렀다.[1]
1894년 1월, 약 60명의 농민이 고부관에 모여 조병갑의 악행을 항의하고 개혁을 요구하였으나, 조병갑은 농민들의 요구를 외면하고 여러 사람들을 구금하여 심한 구타를 가하거나 추방하였다. 농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2월 14일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 동학 농민들을 중심으로 1,000명이 넘는 농민들이 고부관을 습격하였다. 농민군은 불법적으로 징수된 수세를 농민들에게 돌려주고 만석보를 파괴하였다. 2월 15일 조병갑은 유배되었고,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온 안핵사 이용태는 동학 농민군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 결과 동학 농민군은 자발적으로 해산하여 질서를 회복하였다.[1]
그러나 안핵사 이용태는 배후 세력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농민들을 체포하고 재산을 약탈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전라감사는 재물 축적에 몰두하여 고부 백성들을 동학 농민 운동에 강제로 참여시키고 재산을 빼앗았다. 1894년 3월 21일, 동학 농민군은 안핵사와 전라감사의 횡포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다시 봉기하였다. 손화중을 중심으로 수천 명의 동학 농민들이 무장 거점에 모여들었고, 백산과 황토현으로 거점을 이동하면서 많은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다.[1]
황토재 전투와 황룡강 전투에서 승리한 뒤 동학농민군은 4월 27일 전주성에 평화적으로 입성하였다.[1]
3. 2. 집강소 시기
1894년 전주 화약 이후 동학농민군은 전라도 각 지역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 개혁을 추진했다.[1] 김개남은 남원에 대도소(大都所)를 설치하고 전라좌도를 통치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1] 그는 수창(遂昌), 용담(龍潭), 금산(金山), 장수(長水) 등 전라도 북동부 지역의 동학 조직을 장악하고, 경상남도 함양군과 안의(安義)로 세력을 확장하려 했다.[1]3. 3. 제2차 봉기
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침략과 내정 간섭에 맞서 전봉준과 함께 재봉기했다. 김개남은 남원에서 출발하여 전주, 금산, 진잠, 회덕, 신탄진을 거쳐 청주성을 공격했으나,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실패했다.[1] 전봉준 부대는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하였다.[1]김개남은 남원에 머문 후 5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10월 16일 전주성에 입성하였다. 친일파로 지목된 남원부사 이용헌(李容憲)을 처형하고, 고부군수 양필환(楊必煥)과 순천부사 이수홍(李壽洪)을 처벌하였다.[1]
10월 말, 김개남은 주변 지역에서 금산으로 군대를 파견하여 그곳을 점령했다. 금산에 진입한 김개남의 군대는 과도한 폭력으로 보복 행위를 저질렀고, 이로 인해 민심을 잃었다.[1]
11월, 김개남은 북상하여 충청도 진잠현을 점령했다.[1]
다음 날, 청주를 공격하여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김개남과 손천민은 1894년 12월 9일 청주 전투에서 청주를 공격하기 위해 협력했다. 김개남의 2만 5천 명 군대는 웅천 전투 이후 공격을 시작했고, 12월 9일 청주성에 도착했다.
김개남의 상대는 구와바라 에이지로(桑原永二郎)와 그의 일본 대대, 그리고 사기가 저하된 정부군이었다. 김개남 군대는 선봉대 일부가 청주성에 접근했다. 1만 5천 명이 남쪽에서 공격하고, 손천민의 1만 명이 북쪽에서 공격했다. 대전 학살로 인해 청주 방어군 사기는 저하되었고, 김개남은 거의 남문을 돌파할 뻔했다. 구와바라 에이지로가 갑자기 반란군을 공격하자 김개남은 무의로 후퇴했지만 다시 패배했다.[1]
청주 전투에서 반란군 200명이 사망했다. 반란군은 또한 많은 무기를 잃었는데, 여기에는 많은 반란군 깃발, 수천 개의 활과 화살, 소총 140정, 화승총 2,000정, 화약 150kg, 대포 2문, 말 50마리가 포함된다.[4]
3. 4. 체포와 최후
김개남은 일본군에 패하여 태인으로 돌아와 은신하던 중, 매부 서영기의 집에 피신해 있었다. 그러나 1894년 12월 1일, 이웃 주민이자 의병장이었던 임병찬의 밀고로 강화병방 황헌주에게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다.[17] 임병찬은 김개남을 더욱 안전한 곳으로 유인하는 척하며 전라도 관찰사 이도재에게 고발하였고, 이도재는 황헌주에게 강화병 80명을 주어 김개남을 체포하게 했다.[17]1895년 1월 8일(1894년 음력 12월 13일), 전라 감사 이도재는 김개남을 즉결 처형했다.[1] 그의 시신은 한성부로 이송되어 서소문 밖에 효수되었다.[17] 나주 현감은 김개남의 창자와 간을 먹었다고 전해진다.[1]
4. 동학 농민 혁명 이후
동학 농민 혁명 이후 살아남은 동학 농민군들은 산속이나 섬으로 피신하였고, 죽음을 면한 처자식은 재산을 빼앗기고 뿔뿔이 흩어졌다.[17] 김인배의 경우처럼 많은 후손들은 농민군의 시신을 찾지 못해 고인이 쓰던 용품이나 나무 인형을 만들어 묻는 가묘(假墓)를 만들고 제사를 지냈다.[17]
4. 1. 가족과 후손
김개남은 19세에 연안 이씨와 결혼했으나 1년 만에 상처하고, 임실군 출신의 전주 이씨와 재혼하여 윗지금실로 분가하여 1남 3녀를 두었다.[9] 둘째 부인은 90세까지 생존하였다. 김개남의 아들 김백술(金伯述)은 1952년에 사망했으며, 경주 김씨와 결혼하여 2남 5녀를 두었다.[22]동학 농민 혁명 이후 살아남은 동학 농민군들은 산속이나 섬으로 피신하였고, 죽음을 면한 처자식은 재산을 빼앗기고 뿔뿔이 흩어졌다.[17] 김인배의 경우처럼 많은 후손들은 농민군의 시신을 찾지 못해 고인이 쓰던 용품이나 나무 인형을 만들어 묻는 가묘(假墓)를 만들고 제사를 지냈다.[17]
김개남의 가족 및 후손들은 다음과 같다.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김대흠(金大欽) | 1817년 출생, 3남 4녀 |
어머니 | 익산 이씨 | |
형 | 김영백(金永百) | |
형 | 김영수(金永秀) | |
첫째 부인 | 연안 이씨 | 1868년 결혼, 1869년 사별, 자녀 없음 |
둘째 부인 | 전주 이씨 | 1남 3녀, 90세까지 생존 |
아들 | 김백술(金伯述) | ? ~ 1952년, 경주 김씨와 결혼, 2남 5녀 |
손자 | 김환옥(金煥鋈) | 1919년 ~ 1997년, 4남 4녀 (상기(호영, 호준), 종기(호진), 정기(승민), 진기) |
손자 | 김환섭 | 2남 2녀 (인기, 대완) |
손녀 (5명) | 김일덕, 정관택(태기, 태수), 이경진, 송영록, 이대우(김오례- 상술, 상국, 상수)의 배우자 |
5. 쟁점과 논란
김개남에 대한 쟁점과 논란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 전봉준과의 관계: 동학 농민 혁명 초기에는 협력 관계였으나, 전주화약 이후 노선 차이로 갈등을 겪었다는 주장이 있다. 전봉준은 《전봉준공초》에서 김개남과 나중에는 전혀 상의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11]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는 두 사람이 전략적으로 역할을 분담하고 협력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2차 봉기 당시 전봉준은 금구, 김개남은 남원에서 각각 군수물자를 확보하는 등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다. 또한 청주 공격은 공주 공격과 함께 서울로 가는 주요 길목을 장악하고, 관군과 일본군의 전력을 분산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전략적 협력으로 볼 수 있다.
- 흥선대원군과의 관계: 동학 농민 혁명 2차 봉기가 흥선대원군의 사주로 일어났다는 주장과 농민군의 자발적인 봉기였다는 주장이 대립한다. 이상백 등은 흥선대원군이 전봉준과 김개남에게 밀지를 보내 봉기를 지시했다고 주장한다.[18] 김개남은 체포 후 흥선대원군의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전봉준은 이를 부인했다.[19]
- 왕조 타도 또는 새 왕조 건설 의혹: 김개남은 스스로 '개남국왕(開南國王)'이라 칭했다는 기록이 있으며,[20] 최근 발견된 《소모사실》에는 김개남에게 보내는 상소 초안이 발견되어 이러한 의혹을 뒷받침한다.[21]
5. 1. 전봉준과의 관계
金開南|김개남중국어과 전봉준은 동학 농민 혁명 초기에는 협력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노선 차이로 갈등을 겪었다는 주장이 있다. 전봉준은 《전봉준공초》에서 金開南|김개남중국어에 대해 "처음에는 상의했지만, 나중에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11]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는 두 사람이 전략적으로 역할을 나누고 협력했다는 주장도 나온다.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의형제처럼 지냈다. 金開南|김개남중국어이 12살 때 고창에서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이 전봉준을 데리고 이사와 훈장을 하면서, 두 살 아래인 전봉준과 같은 학동이자 의형제로 친해졌다.[8] 전봉준의 큰 딸 전옥례는 金開南|김개남중국어의 중매로 지금실의 강만복과 결혼해 같은 마을에 살았다.[8]
1894년 1월 10일 말목장터에서 동학 농민 혁명군이 봉기했을 때, 전봉준과 金開南|김개남중국어은 손화중, 김덕명 등과 연합하여 백산에 동학농민군 창의소를 세우고 창의문을 발표했다.[11] 이들은 황토현 전투(4월 7일)와 장성 황룡촌 전투(4월 23일)에서 승리하고 전주성을 점령(4월 27일)했다.[11]
전주화약(5월 7일) 이후, 金開南|김개남중국어은 강경론을, 전봉준은 온건론을 주장하며 노선 차이를 보였다. 2차 봉기(9월) 때, 처음 재봉기를 주장한 것은 金開南|김개남중국어이었다. 전봉준은 8월 25일 남원으로 金開南|김개남중국어을 찾아가 재봉기를 만류했으나, 결국 9월 8일 재봉기를 결정한다.[14]
9월 8일 재봉기 결정 후, 전봉준과 金開南|김개남중국어은 서로 합의하에 재봉기를 준비했다. 전봉준은 금구 도회소 휘하 농민군을 무장시켰고, 金開南|김개남중국어은 남원대도소에서 군수물자를 확보했다.
전봉준이 9월 12일 재봉기를 시작했지만, 본격적인 북상은 10월 12일에 이루어졌다. 전봉준은 북상이 늦어진 이유를 [전봉준공초]에서 "몸이 아프고 또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움직이기 어려웠고 겸하여 신곡이 나오지 않아 자연히 10월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또한, 최시형이 봉기를 허락한 사실이 10월 11일경 알려지면서, 전봉준은 10월 12일 논산에 도착, 손병희와 합류했다.
金開南|김개남중국어은 거의 같은 때인 10월 14일 8000여 명을 이끌고 남원을 떠나 16일 전주에 도착했다.[14] 손화중, 최경선은 광주와 나주로 가서 해로를 통한 협공에 대비했다.
전봉준과 손병희가 공주감영으로 향할 때 金開南|김개남중국어은 청주병영으로 북상했다. 전봉준과 손병희가 11월 8일~10일 공주를 공격할 때, 金開南|김개남중국어은 11월 10일 진잠을 점령하고, 11일 회덕·신탄진을 거쳐 13일 청주를 공격했다.
이처럼 金開南|김개남중국어과 전봉준의 실제 북상 시기는 2~3일 차이로, 서로 긴밀한 협의하에 진행되었으며, 공격 방향은 달랐지만 동학농민군의 전략적 필요에서 온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청주는 공주와 함께 서울로 가는 주요 통로였고, 당시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농민군에게 함락되지 않은 곳은 충청감영인 공주와 병영인 청주뿐이었다. 또한, 청주 공격은 동학농민군의 세력 확대를 의미함과 동시에 관군과 일본군의 전투력이 공주로 집중되는 것을 예방하는 방편이기도 했다.
5. 2. 흥선대원군과의 관계
동학 농민 혁명 2차 봉기와 관련하여 "흥선대원군 사주론"과 "자발적 봉기론"으로 견해가 대립되고 있다. 이상백, 유영익 등은 "대원군 사주론"을 주장하고 있으며, 정창열, 신복룡, 서영희, 김양식, 배항섭 등은 "자발적 봉기론"을 주장하고 있다.전봉준을 비롯한 대다수의 동학군 지도자들은 흥선대원군과의 만남을 끝까지 부인하고 처형되었으나, 김개남은 사형 직전 흥선대원군을 만났다고 진술하였다.
이상백에 따르면, 흥선대원군은 전봉준의 친척(8촌)이자 전주대도소 도집장인 송희옥을 선공주사로 임명하고, 자신의 측근인 박동진과 정인덕을 통해 송희옥과 접선하여 전봉준에게 밀지(密旨)를 보내 재봉기를 지시하였다.[18] 또한 김개남에게는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을 통해 전 승지 이건영과 접촉하게 하였고, 이건영은 김개남을 만났다. 이에 전봉준과 김개남이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김개남은 체포 후 재판 과정에서 전라감사 이도재가 국문하자 대원군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곧 처형되었다.[19] 김개남의 부하들이 그를 탈출시킬 수 있다는 우려와 함께, 흥선대원군과의 관계를 숨기기 위해 이도재가 김개남을 즉결 처분했다는 설이 있다. 한편, 전봉준은 체포 후 재판 과정에서 흥선대원군과의 연계설을 부정하였다.
5. 3. 왕조 타도 또는 새 왕조 건설 의혹
김개남은 스스로 개남국왕(開南國王)이라 칭하고 조선의 이씨 정부를 타도하려 했다는 의혹이 있다.[20] 최근 김산소모사로 임명된 조시영이 1894년 11월 21일부터 1895년 1월 22일까지 각급 기관과 주고받은 공문을 날짜별로 기록해 놓은 자료인 《소모사실》이 발견되었다. 김산소모영에서 을미년 정월 6일 의정부, 군무아문, 내무아문에 보낸 보고서에는 김산과 관련하여 동학농민군을 체포하고 처리하는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대목은 ‘개남의 처소로 보낸 신하라고 일컫는 소초(疏草)’라는 부분이다.이는 신하로서 김개남에게 보내기 위해 작성한 상소의 초안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전라도 남원에 있던 김개남의 동학농민군과 경상도 김천의 동학농민군이 매우 깊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김개남이 왕을 자처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이 자료는 전라도와 경상도의 연결 정도, 그리고 김개남의 성격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21]
경상도 김산의 한 유생은 김개남의 명성을 듣고, 김개남이 왕을 칭하고 남원을 점거하고 있다는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다.
"김기범이란 자가 개남왕이라며 참칭하고 남원부를 분할하여 점거하였다고 한다."
6. 평가
김개남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과감하고 급진적인 노선을 추구했다. 기존의 온건한 방식으로는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체제 전복을 꾀하는 새로운 방식을 시도했다. 전봉준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을 이끌었던 핵심 지도자였지만, 전봉준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최근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그의 혁명적인 면모와 탁월한 지도력이 재조명되고 있다.[17]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 김개남을 모델로 한 '김개주'라는 인물이 등장하면서 대중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박경리는 어린 시절 통영에서 김개남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자랐고, 소설 《토지》에서 김개남을 세계적인 혁명가로 묘사하며 후배 작가들에게 그의 작품화를 권고하기도 했다. 소설 속 '김개주'는 중인 출신으로 압제자의 목을 베는 동학 의병장이자 상민의 영웅이며, 신비로운 모습으로 표현된다.[17]
김개남은 단순한 종교 지도자를 넘어,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개혁하고 민중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꿨던 혁명가였다. 그의 사상과 행동은 당시 민중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한국 근대 민족 운동과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17]
7. 관련 작품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에는 김개남을 모델로 한 인물 '김개주'가 등장한다. 김개주는 중인 출신으로 동학 의병장이자 상민의 영웅이며, 신비로운 모습으로 표현된다. 작가 박경리는 어린 시절 통영에서 김개남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자랐고, 그를 세계적인 혁명가로 평가하며 후배 작가들에게 그의 작품화를 권고하기도 했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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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ond Revolt of the Gabo Peasant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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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heongju.g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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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동학농민전쟁 인물열전
한겨레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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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南朝鮮)의 왕을 꿈꾼 인물, 김개남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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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 소모영의 설치와 동학농민군 진압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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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서적
다시 피는 녹두꽃
역사비평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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