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봉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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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서봉행은 1185년(분지 원년)경 규슈의 고케닌 통솔과 군사 경찰을 담당하기 위해 아마노 토오카게가 다자이후에 수호소를 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진서봉행의 성격과 후임자에 대한 여러 설이 존재하며, 가마쿠라 막부의 정식 관직명이 아니었다는 주장도 있다. 나카하라 치카요시, 무토 스케요리가 진서봉행에 취임했다는 설이 있으며, 1293년(에이닌 원년) 진서탐제가 설치된 이후에는 호조 씨가 진서탐제를 계승하면서 쇼니 씨와의 대립이 가마쿠라 막부 멸망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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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봉행 | |
---|---|
개요 | |
유형 | 일본 가마쿠라 막부의 관직 |
설치 시기 | 가마쿠라 시대 |
폐지 시기 | 무로마치 시대 전기 |
관할 지역 | 규슈 |
상세 정보 | |
역할 | 규슈의 통치 및 진압, 서쪽 지역의 통괄 |
역사적 맥락 | |
배경 | 몽골의 일본 원정 이후 규슈 지역 방비 강화 필요성 증대 |
주요 직책 | |
다른 이름 | 진서수호 (鎮西守護, 친제이슈고) |
참고 자료 | |
관련 연구 | 瀬野精一郎, 鎮西奉行考 (세노 세이이치로, 친제이부교우 고) |
2. 연혁 및 쟁점
1185년(문치 원년) 말부터 1186년(문치 2년)경까지 규슈 지역의 고케닌(무사)들을 통솔하고 군사 및 경찰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아마노 토오카게가 다자이후에 파견되어 수호소를 설치한 것이 진서봉행의 시작이다.[2]
그러나 아마노 토오카게 이후 진서봉행에 취임했다고 알려진 인물들은 권한이 작아서, 이들을 같은 직책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
『사가시사』에 따르면, 나카하라 치카요시와 무토 스케요리가 진서봉행에 취임했으며, 다자이쇼니에 취임한 무토 스케요리가 아들 스케요시에게 다자이쇼니와 진서봉행을 물려주어 대대로 이 직책을 세습했다고 한다.[2] 그러나 1293년(에이닌 원년)에 진서탐제가 설치되고 히젠국 수호 직을 호조 씨가 계승하면서, 진서탐제와 쇼니 씨의 대립이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2]
2. 1. 초대 봉행 아마노 도카게
초대 봉행은 1185년(분지 원년) 말부터 1186년(분지 2년)경에 규슈의 고케닌 통솔과 군사 경찰을 담당하기 위해 다자이후에 파견된 아마노 도카게였다.[2]그러나 아마노 도카게 이후 진서봉행에 취임했다고 여겨지는 인물은 권한이 작아, 같은 직책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 논쟁이 있다. 도카게의 후임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이 있다.[3]
- 아마노 도카게만으로 폐지되었다는 설 (아이다 지로의 설[1])
- 나카하라 지카요시가 취임했다는 설
- 무토 스케요리가 취임했다는 설
- 나카하라 지카요시와 무토 스케요리 모두 취임했다는 설 (이시이 스스무의 설[1])
세노 세이이치로는 도카게 이후의 후계자에 대해 여러 설이 있는 것을 정리한 뒤, "진서봉행은 일반적인 호칭일 뿐, 가마쿠라 막부의 정식 관직명이 아니었다는 설 (사토 신이치의 설)도 있는 것처럼, 그 성격이 아직 불분명한 점이 많은 것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4]고 지적했다.
2. 2. 후임자에 대한 여러 설
아마노 토오카게 이후 진서봉행에 취임했다고 여겨지는 인물들은 권한이 작아, 동일한 직책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 쟁점이 있다. 토오카게의 후임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들이 있다.[3]- 아마노 토오카게만으로 폐지되었다는 설 (아이다 지로의 설[1])
- 나카하라 치카요시가 취임했다는 설
- 무토 스케요리가 취임했다는 설
- 나카하라 치카요시와 무토 스케요리가 모두 취임했다는 설 (이시이 스스무의 설[1])
세노 세이이치로는 토오카게 이후의 후계자에 대해 여러 설이 있는 것을 정리한 뒤, "진서봉행은 일반적인 호칭일 뿐, 가마쿠라 막부의 정식 관직명이 아니었다는 설(사토 신이치의 설)도 있는 것처럼, 그 성격이 아직 불분명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4]
『사가시사』에 따르면, 진서봉행에 나카하라 치카요시와 무토 스케요리가 취임하고, 다자이쇼니에 취임한 무토 스케요리가 아들 스케요시에게 다자이쇼니와 진서봉행을 계승시켜 대대로 이 직책을 세습했다고 한다.[2] 그러나 1293년 진서탐제가 설치되어 히젠국 수호와 함께 호조 씨가 계승하게 되면서, 진서탐제와 쇼니 씨의 대립이 가마쿠라 막부 멸망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2]
2. 3. 진서탐제(鎮西探題) 설치 이후
1185년(분지 원년) 말부터 1186년(분지 2년)경에 규슈의 고케닌 통솔과 군사 경찰을 담당하기 위해 아마노 도카게가 파견되어 다자이후에 수호소를 둔 것이 진서봉행의 시작이다[2]。그러나 아마노 도카게에 비해 이후 진서봉행에 취임했다고 여겨지는 인물은 권한이 작아 동일한 직책이라고 할 수 있는지도 포함하여 쟁점이 되고 있으며, 도카게의 후임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이 나뉜다[3]。
- 아마노 도카게만으로 폐지되었다는 설 (아이다 지로의 설[1])
- 나카하라 지카요시가 취임했다는 설
- 무토 스케요리가 취임했다는 설
- 나카하라 지카요시도 무토 스케요리도 취임했다는 설 (이시이 스스무의 설[1])
세노 세이이치로는 도카게 이후의 후계자에 대해 여러 설이 있는 것을 정리한 뒤, "진서봉행은 일반적인 호칭에 지나지 않으며 가마쿠라 막부의 정식 관직명이 아니었다는 설 (사토 신이치의 설)도 있는 것처럼, 그 성격이 아직 불명료한 점이 많은 것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4]고 지적하고 있다.
『사가시사』는 진서봉행에 나카하라 지카요시, 무토 스케요리가 취임하고, 다자이쇼니에 취임한 무토 스케요리가 아들 스케요시에게 다자이쇼니와 진서봉행을 계승시켜 대대로 이 직책을 세습했다고 하고 있다[2]。그러나 그 후, 1293년(에이닌 원년)에 진서탐제가 설치되어, 히젠국 수호와 함께 호조 씨가 계승하게 되면서 진서탐제와 쇼니 씨의 대립이 가마쿠라 막부 멸망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2]。
참조
[1]
논문
鎮西奉行考
https://catalog.lib.[...]
九州文化史研究所
[2]
웹사이트
一 鎌倉時代
https://www.city.sag[...]
2024-09-22
[3]
웹사이트
鎮西奉行天野遠景
https://www.city.daz[...]
2024-09-22
[4]
서적
国史大辞典第9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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