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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인천교구 김포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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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천주교 인천교구 김포성당은 1956년에 완공된 석조 성당으로,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542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19세기 후반 김포 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생겨났으며, 1909년 행주성당 산하 걸포리 공소가 설치되었다. 1946년 걸포리 성당으로 승격되었고, 1949년 김포 성당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한국 전쟁 중 김피득 신부가 성당 부지를 마련했으나, 신원식 신부가 부임하여 1955년 건축을 시작, 1956년에 완공했다. 성당 건축에는 신자들이 석재를 채취하고 해병대가 지원했으며, 1961년 천주교 인천교구에 편입되었다. 1999년 신축 성당이 세워졌으며, 2006년 스테인드 글라스가 제작되었다. 건축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되어 있으며, 종탑, 뾰족한 아치 창호, 단일 홀, 화강석 조적 구법 등 1950년대 석조 성당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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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인천교구 김포성당 - [지명]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성당 이름김포성당
통칭천주교 인천교구 김포성당
종파로마 가톨릭교회
관구서울관구
교구천주교 인천교구
소재지경기도 김포시 북변로 29-12
설립일1948년 11월 1일
주보 성인매괴의 모후
웹 사이트김포성당
사목 정보
문화재 정보
문화재 이름천주교 인천교구 김포성당
천주교 인천교구 김포성당
유형등록문화재
지정 번호542
지정일2013년 4월 18일
주소경기도 김포시 북변로 29-12 (북변동)
시대1950년대
소유자재단법인 인천교구 천주교회유지재단
면적374m2
수량2동

2. 역사

19세기 후반부터 김포, 통진, 강화 지역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존재했으며, 당시 조선의 천주교 박해로 인해 순교자가 발생하기도 했다.[2]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천주교 신앙이 허용되면서[3], 김포 지역에서도 1900년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 전교회장의 선교 활동을 시작으로 신자 공동체가 형성되었다.[4] 1909년에는 행주성당 산하의 걸포리 공소가 설립되었다.

1946년 걸포리 공소는 성당으로 승격되었고[6], 1949년에는 김포 성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성당 건축을 시작했으나 한국 전쟁으로 중단되었다.[6] 전쟁 이후 1955년 새로 부임한 신원식 신부가 건축을 재개하여 1956년에 현재의 성당 건물을 완공하였다.[2] 성당 건축에는 신자들이 직접 지역 석재를 운반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고, 인근 해병대의 중장비 지원도 있었다.[8]

1961년 천주교 인천교구가 서울교구에서 분리되면서 김포성당은 인천교구 소속이 되었으며, 이는 답동성당, 소사성당에 이어 인천교구 내 세 번째 성당이 되었다.[6] 약 40년간 본당으로 사용되던 옛 김포성당 건물은 1999년 바로 옆에 신축 성당이 세워지면서 교리실 등으로 활용되었다.[8] 2013년에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542호로 지정되어 건축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되어 보존되고 있다.[8]

2. 1. 조선 시대 천주교 박해와 초기 선교

19세기 후반부터 김포, 통진, 강화 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있었다. 당시 조선은 천주교를 박해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도 순교자가 발생하였다.[2]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이후 조선에서 천주교 신앙이 허용되면서, 전국적으로 교구가 설치되고 성당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3] 김포 지역에서는 1900년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의 전교회장 유공현이 선교 활동을 시작하면서 천주교 신자 공동체가 형성되었다.[4] 이후 1909년에는 행주성당 소속의 걸포리 공소가 설립되었다.

2. 2.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1946년 걸포리 공소[5]는 걸포리 성당으로 승격되었으나,[6] 건물은 여전히 12칸 초가집이었다.[7] 1949년에는 김포 성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사제관을 짓는 등 성당 건축을 시작했지만, 한국 전쟁 발발로 인해 중단되었다.[6]

전쟁 중이던 1952년, 김피득 신부가 현재 성당이 위치한 부지를 마련하여 전쟁 후에 성당을 건축하려 했으나, 1954년 건강 악화로 선종하였다.[6] 이후 1955년에 새로 부임한 신원식 신부가 성당 건축을 다시 시작하여 1956년에 완공하였다.[2] 성당 건축에는 신자들이 직접 지역의 돌을 캐어 나르는 등 힘을 보탰고, 인근 해병대에서도 중장비를 지원해주었다.[8]

이렇게 지어진 김포 성당은 약 40년 동안 본당으로 사용되다가, 1999년 바로 옆에 새로운 성당 건물이 세워지면서 기존 건물은 교리실이나 피정 장소 등으로 활용되었다.[8] 1961년에는 천주교 인천교구가 서울교구에서 분리되면서 김포성당은 인천교구 소속이 되었다. 이는 답동성당과 소사성당에 이어 인천교구 내 세 번째 성당이 된 것이었다.[6] 2006년에는 유리화 작가 조완희가 제작한 스테인드 글라스가 설치되었다.[9]

2013년, 김포 성당 구 건물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542호로 지정되었으며, 건축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되어 보존되고 있다.[8]

2. 3. 한국 전쟁과 성당 건축

1949년 김포 성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사제관을 짓는 등 성당 건축을 진행하였으나 한국 전쟁으로 중단되었다.[6]

전쟁 중이던 1952년 김피득 신부가 현재의 부지를 마련하고 전쟁 후 건축을 하고자 하였으나 1954년 건강 악화로 선종하였고[6], 1955년 새로 부임한 신원식 신부가 성당 건축을 시작하여 1956년 완공하였다.[2]

성당의 건축 자재는 신도들이 지역의 석재를 직접 캐어 날라 마련하였다. 인근 해병대에서도 중장비를 지원하였다.[8]

2. 4. 인천교구 편입과 근현대

1961년 천주교 인천교구가 서울교구에서 분리되면서 김포성당은 인천교구에 속하게 되었다. 이로써 김포성당은 답동성당과 소사성당에 이어 인천교구의 세 번째 성당이 되었다.[6]

1999년 바로 옆에 신축 성당이 세워지면서 기존 성당 건물은 40여 년간의 본당 역할을 마치고 교리실, 피정소 등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8] 2006년에는 유리화 작가 조완희가 제작한 스테인드 글라스가 설치되었다.[9]

2013년, 김포성당 구 본당 건물은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542호로 지정되었으며, 이후 건축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되어 보존되고 있다.[8]

3. 건축

김포 성당 건물은 1955년 신원식 신부의 주도로 착공되어[7] 한국전쟁 직후에 지어진 석조 성당이다. 당시 건축된 성당의 전형적인 의장적 특징과 공간적 특징, 화강석 조적 구법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어 1950년대 건물로서 건축적 가치가 크다고 평가받는다.[1]

3. 1. 건축 개요

김포 성당 건물은 한국전쟁 직후에 건축된 석조 성당의 전형적인 의장적 특징(종탑과 뾰족한 아치창호)과 공간적 특징(단일 홀로 구성된 강당형 평면), 화강석 조적 구법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는 1950년대 건물로 건축적 가치가 크다.[1]

누가 성당을 설계하였는 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시공은 한국인 건축업자가 하였는데 그의 세례명이 가밀로였다는 것만 전하고 있다. 폭 16m 길이 31m로 건축 면적 99 평이며 높이는 지붕까지 11m, 첨탑은 20m이다.[11]

3. 2. 건축 과정과 참여

1955년 새로 부임한 신원식 신부가 김포 성당 건축을 시작하였다.[7] 건축 과정에는 신자들이 직접 석재를 캐어 날랐고, 해병대가 공사를 지원하였다. 또한 미국 가톨릭 주교회의 산하 전국 가톨릭 복지위원회(National Catholic Welfare Council|내셔널 가톨릭 웰페어 카운슬eng, NCWC)에서 제공한 미국의 구호물자 일부가 사용되었다.[10][11]

성당을 누가 설계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시공은 한국인 건축업자가 맡았으며, 그의 세례명이 가밀로였다는 사실만 전해진다.[11]

3. 3. 건축 양식 및 특징

김포 성당 건물은 한국전쟁 직후에 건축된 석조 성당의 전형적인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어 1950년대 건물로서 건축적 가치가 크다.[1] 성당 건축은 1955년 새로 부임한 신원식 신부가 시작하였으며[7], 신자들이 직접 석재를 캐어 나르고 해병대가 공사를 지원하였다. 또한 미국 가톨릭 주교회의 산하 전국 가톨릭 복지위원회(National Catholic Welfare Council|NCWCeng)가 제공한 구호물자도 일부 사용되었다.[10][11]

성당의 주요한 외관 특징은 정면에 세워진 종탑과 뾰족한 모양의 아치 창호이다. 내부는 기둥 없이 하나의 넓은 공간으로 이루어진 강당형 평면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외벽은 화강석을 직접 쌓아 올리는 조적 구법으로 만들어졌다.[1] 누가 성당을 설계하였는지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시공은 세례명이 가밀로였던 한국인 건축업자가 담당한 것으로 전해진다.[11]

성당의 규모는 폭 16m, 길이 31m이며, 건축 면적은 99평이다. 지붕까지의 높이는 11m이고, 첨탑의 높이는 20m이다.[11] 2006년에는 내부에 스테인드 글라스가 설치되었다.

참조

[1] 간행물 문화재 등록 고시 문화재청 2013-04-18
[2] 웹사이트 역사 http://www.cakimpo.o[...] 2021-06-19
[3] 웹사이트 명동성당 http://contents.hist[...]
[4] 웹사이트 옛 김포성당 https://maria.cathol[...]
[5] 백과사전 공소 http://encykorea.aks[...]
[6] 웹사이트 김포성당 http://caminokorea.o[...] 2021-06-26
[7] 뉴스 땀방울 스며있는 옛 석조 성당 그대로 보존 http://m.cpbc.co.kr/[...] 평화신문 2004-03-07
[8] 웹사이트 믿음으로 쌓아올린 사랑과 찬미, 구 김포성당 https://ncms.ncultur[...]
[9] 뉴스 조완희씨 유리화 완성, 김포본당 60주년 기념 https://www.catholic[...] 가톨릭뉴스 2006-12-03
[10] 뉴스 인천교구 김포본당 ‘옛 성당’, 국가등록문화재 제542호로 지정 https://www.catholic[...] 가톨릭신문 2013-04-28
[11] 간행물 김포성당 https://www.auric.or[...] 월간 건축문화 198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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