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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루스 (마인츠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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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롤루스(820년? ~ 863/864년)는 아키텐의 피핀 1세의 아들이자 경건왕 루트비히 1세의 손자로, 동프랑크 왕국의 마인츠 대주교였다. 849년 대머리왕 카를 2세의 자객에게 납치되어 수도사가 되었으나 탈출에 성공하여 형의 재집권을 도왔다. 이후 동프랑크로 건너가 856년 마인츠 대주교가 되었으며, 863년 또는 864년 마인츠에서 사망하여 성 알바누스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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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루스 (마인츠 대주교)
기본 정보
이름카롤루스
출생825년/830년경, 아키텐
사망863년 6월 4일, 독일
직책마인츠 대주교
재임 시작856년
재임 종료863년
이전라반 마우루스
다음리우트베르투스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2. 생애

854년 형제 피핀 2세가 카를 2세와 싸울 때 극적으로 탈출, 이복 삼촌 카를 2세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 뒤 독일인 루트비히가 다스리는 동프랑크로 건너갔다. 한때 형 피핀 2세가 인망을 잃자 아키텐의 왕위를 주장하기도 했다. 856년 3월 8일 마인츠 성당의 대주교가 되었다. 857년 샤를은 마인츠 성당에서 동프랑크 왕국의 성직자 회의를 개최했다. 863년 혹은 864년 7월 4일 동프랑크 왕국 마인츠에서 사망, 시신은 마인츠의 성 알바누스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2. 1. 출생과 초기 생애

샤를은 피핀 1세와 그의 부인 인고베르그(Engelberga) 또는 린군다(Ringarde)의 아들로, 경건왕 루트비히 1세의 손자였다. 외할아버지는 마드리네 백작 테오도리히였는데, 그의 딸이 인고베르그인지 다른 딸인 린군다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생년은 정확하지 않아 820년생, 825년생, 830년생 설 등이 있다. 아버지 피핀 1세가 죽자 그는 큰아버지인 로타르 1세의 영지 이탈리아에서 848년 6월 6일경까지 보호받았다. 그러나 849년 5월 이탈리아에 침범한 대머리왕 카를 2세의 자객 마인 백작 비비안(Vivian)에 의해 납치되어 프랑스 데콘의 생 마르틴 수도원에 보내져 강제로 머리깎이고 수도사가 되었다가 곧 부제(가톨릭 성직자)가 되었다. 그러나 곧 탈출에 성공하여 형 피핀 2세의 재집권을 도왔다.

그는 자객에게 피습당해 오른쪽 턱 아래와 머리에 상처를 입고 종종 간질 발작을 보이기도 했다.

2. 2. 강제 성직 임명과 탈출

샤를은 피핀 1세와 그의 부인 인고베르그(Engelberga) 또는 린군다(Ringarde)의 아들로, 경건왕 루트비히 1세의 손자였다. 848년 6월 6일경까지 큰아버지인 로타르 1세의 영지인 이탈리아에서 보호받고 있었다. 그러나 849년 5월 이탈리아에 침범한 대머리왕 카를 2세의 자객인 마인 백작 비비안(Vivian)에 의해 납치되어, 프랑스 데콘의 생 마르틴 수도원에 보내져 강제로 머리가 깎이고 수도사가 되었다가 곧 부제가 되었다. 그러나 곧 탈출에 성공하여 형 피핀 2세의 재집권을 도왔다.

그러나 그는 자객에게 피습당해 오른쪽 턱 아래와 머리에 상처를 입고 종종 간질 발작을 보이기도 했다.

854년 형제인 피핀 2세가 카를 2세와 싸울 때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 이복 삼촌 카를 2세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 뒤 독일인 루트비히가 다스리는 동프랑크로 건너갔다.

2. 3. 부상과 간질

그는 자객에게 피습당해 오른쪽 턱 아래와 머리에 상처를 입었으며, 종종 간질 발작을 보이기도 했다.

2. 4. 동프랑크 망명과 마인츠 대주교

피핀 1세와 그의 부인 인고베르그(Engelberga) 또는 린군다(Ringarde)의 아들 샤를은 경건왕 루트비히 1세의 손자였다. 849년 5월 이탈리아에 침범한 대머리왕 카를 2세의 자객 마인 백작 비비안(Vivian)에 의해 납치되어 프랑스 데콘의 생 마르틴 수도원에 보내져 강제로 머리깎이고 수도사가 되었다가 곧 부제(가톨릭 성직자)가 되었다. 그러나 곧 탈출에 성공하여 형 피핀 2세의 재집권을 도왔다.

854년 형제 피핀 2세가 카를 2세와 싸울 때 극적으로 탈출, 이복 삼촌 카를 2세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 뒤 독일인 루트비히가 다스리는 동프랑크로 건너갔다. 아키텐의 왕위를 주장하기도 했던 그는 856년 3월 8일 마인츠 성당의 대주교가 되었다. 857년 샤를은 마인츠 성당에서 동프랑크 왕국의 성직자를 소집하여 총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2. 5. 사망

Carolusla863년 혹은 864년 7월 4일동프랑크 왕국 마인츠에서 사망하였다. 시신은 마인츠의 성 알바누스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3. 추가 문헌


  • 테오도어 쉬퍼(Theodor Schieffer), Karl von Aquitaniende, In: Neue Deutsche Biographiede (NDB). Band 11, Duncker & Humblot, Berlin 1977, S. 238 f.
  • 테오도어 쉬퍼(Theodor Schieffer), Karl von Aquitanien, Der Weg eines karolingischen Prinzen auf den Stuhl des heiligen Bonifatiusde, In: 루트비히 렌하르트(Ludwig Lenhart) (Hrsg.): Universitas, Festschrift für Bischof Albert Stohrde, II,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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