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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데 레온 왕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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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테레사 데 레온 왕녀는 레온의 알폰소 6세의 서녀로, 1093년 포르투갈 백작 엔리케와 결혼하여 포르투갈 백국을 다스렸다. 남편 사후 아들 아폰수 엔리케스를 섭정하며 통치했으나, 영토 확장을 시도하다 이복 여동생 우라카와 대립했다. 이후 아들 아폰수와의 권력 다툼에서 패배하여 폐위되었고, 1130년 사망했다. 그녀는 포르투갈의 초대 국왕 아폰수 1세의 어머니이며, 페르난도 페레스 데 트라바 백작과의 사이에서 두 딸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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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데 레온 왕녀
기본 정보
이름테레사
작위포르투갈 백작부인
다른 작위(논쟁 중) 포르투갈 여왕
출생일1080년경
사망일1130년 11월 11일
사망 장소갈리시아, 몬테데라모 수도원
매장 장소포르투갈, 브라가, 브라가 대성당
배우자엔리케
자녀아폰수 1세
(사생) 테레사, 레온 여왕
가문히메노
아버지알폰소 6세
어머니히메나 무뇨스
통치
백작부인포르투갈 백작
재위1096년 - 1128년 6월 24일
공동 통치엔리케(1096년–1112년), 아폰수(1112년–1128년)
후임아폰수
여왕(논쟁 중) 포르투갈 여왕
재위1116년 – 1128년 6월 24일
후임아폰수 1세 (1139년부터)
기타

2. 초기 생애 및 결혼

1126년 이베리아 반도 북부


테레사는 레온알폰소 6세와 히메나 무뇨스 사이에서 태어난 서출이었다.[3] 1093년, 테레사의 아버지는 그녀를 프랑스 귀족이자 포르투갈 백작인 앙리와 결혼시켰다. 앙리는 레콩키스타에 참여하여 이베리아 반도에 왔으며, 알폰소 6세를 위해 무슬림과 싸우는 군사 지원을 제공하고 있었다. 포르투갈 지방은 테레사의 지참금 일부였고, 이를 통해 앙리는 포르투갈 백작이 되었다. 앙리는 처음에는 알폰소 6세의 신하였으나, 1109년 알폰소 6세가 죽고 그의 장녀 우라카가 왕위에 오르자, 영토 확장의 야망으로 레온 왕국을 침공하였다.

앙리는 1112년에 죽었고, 테레사는 자신과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노력했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아폰수 엔리케스(후의 포르투갈 왕 아폰수 1세)가 백작령을 계승했기 때문에, 테레사는 아직 어린 아폰수를 후견하였다. 그녀는 섭정으로서 백작령을 통치하였으나, 몬데구 강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여 무어인의 재정복 위협에 직면하였다.

1116년, 영토 확장의 야망은 아들 아폰수에게 이어졌고, 테레사는 이복여동생 우라카와 싸웠다. 포르투갈과 레온 양국의 군대는 1120년에 다시 전투를 벌였다. 1121년, 테레사는 포위되어 카스트루 데 란호수(현 브라가 현의 도시)에서 구금되었다. 이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와 브라가의 두 대주교가 중재에 나서 평화가 협상되었다. 테레사는 석방되었지만, 포르투갈 백작령은 레온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2. 1. 레온 왕국의 공주

테레사는 레온알폰소 6세와 히메나 무뇨스 사이에서 태어난 서출이었다.[3] 1093년, 테레사의 아버지는 그녀를 프랑스 귀족인 포르투갈 백작 앙리와 결혼시켰다. 앙리는 부르고뉴의 콘스탄스 왕비의 조카이자 부르고뉴 공작의 형제였으며, 남계로 프랑스 국왕의 후손이었다. 앙리는 장인을 위해 포르투갈 국경에서 무슬림과 싸우는 군사 지원을 제공하고 있었다.

1096년에서 1105년 사이에 앙리와 그의 사촌인 부르고뉴의 레이몽(우라카 왕비의 남편)은 합의에 도달했다. 레이몽은 알폰소 왕 사후 톨레도 왕국(카스티야 왕관)과 왕실 재산의 3분의 1을 앙리에게 주겠다고 약속했고,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 앙리는 갈리시아 왕국을 받는다고 맹세했다. 앙리는 대신 사촌인 레이몽이 왕의 모든 영토와 재산의 3분의 2를 확보하는 것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알폰소 6세는 1096년 테레사와 앙리에게 포르투갈 백국을 맡겼다.[1] 이 계약의 날짜를 1096년에 가깝게 보는 역사가들은 알폰소 왕이 이 계약을 알게 된 후, 레이몽이 그때까지 통치했던 미뉴 강과 산타렝 사이의 모든 땅의 총독으로 앙리를 임명하여, 그의 사위의 통치를 갈리시아로 제한했다고 가정한다. 그러면 두 사촌은 동맹이 아니라 각각 왕의 총애를 얻으려는 경쟁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역사가들은 이 계약이 두 백작이 각각의 칭호를 받은 지 몇 년 후인 1103년 이전에는 이루어질 수 없었음을 보여주었다. 앙리의 임명은 남서부의 군사 지휘의 필요성에 대한 답변이었다.

알폰소 왕이 죽자, 앙리와 테레사는 미뉴 강 남쪽에서 몬데구 강과 계곡까지, 그리고 나중에는 1111년 12월 우라카 여왕의 통치하에 사모라를 계속 통치했다.

2. 2. 포르투갈 백작과의 결혼

레온의 알폰소 6세와 히메나 무뇨스 사이에서 태어난 서출인 테레사는 1093년, 프랑스 귀족이자 포르투갈 백작인 앙리와 결혼했다.[3] 앙리는 레콩키스타에 참여하여 이베리아 반도에 왔으며, 알폰소 6세를 위해 무슬림과 싸우는 군사 지원을 제공하고 있었다.

1096년, 알폰소 6세는 테레사와 앙리에게 포르투갈 백국을 맡겼다.[1] 포르투갈 지방은 테레사의 지참금 일부였고, 이를 통해 앙리는 포르투갈 백작이 되었다. 앙리는 처음에는 알폰소 6세의 신하였으나, 1109년 알폰소 6세가 죽고 그의 장녀 우라카가 왕위에 오르자, 영토 확장의 야망으로 레온 왕국을 침공하였다.

2. 3. 앙리와 레이몽의 밀약

1096년에서 1105년 사이에 앙리와 그의 사촌인 부르고뉴의 레이몽(우라카 왕비의 남편)은 합의에 도달했다. 레이몽은 알폰소 6세 왕 사후 톨레도 왕국(카스티야 왕관)과 왕실 재산의 3분의 1을 앙리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다. 만약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 앙리는 갈리시아 왕국을 받기로 했다. 앙리는 대신 사촌인 레이몽이 왕의 모든 영토와 재산의 3분의 2를 확보하는 것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3]

알폰소 6세는 1096년 테레사와 앙리에게 포르투갈 백국을 맡겼다.[1] 이 계약의 날짜를 1096년에 가깝게 보는 역사가들은, 알폰소 왕이 이 계약을 알게 된 후, 레이몽이 그때까지 통치했던 미뉴 강과 산타렝 사이의 모든 땅의 총독으로 앙리를 임명하여, 그의 사위의 통치를 갈리시아로 제한했다고 가정한다. 이 경우 두 사촌은 동맹이 아니라 각각 왕의 총애를 얻으려는 경쟁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역사가들은 이 계약이 두 백작이 각각의 칭호를 받은 지 몇 년 후인 1103년 이전에는 이루어질 수 없었음을 보여주었다. 앙리의 임명은 남서부의 군사 지휘 필요성에 대한 대응이었다.

3. 포르투갈 통치

1093년, 레콩키스타에 참여하여 이베리아 반도에 온 엔히크와 결혼하여, 포르투갈(Portucale) 지방을 지참금으로 받았다. 이를 통해 엔히크는 포르투갈 백작이 되었다.[1]

남편 엔히크는 알폰소 6세의 신하였으나, 1109년 알폰소 6세가 죽고 장녀 우라카가 왕위에 오르자, 영토 확장의 야망으로 레온 왕국을 침공하였다. 1112년 엔히크가 사망하자, 테레사는 섭정으로서 어린 아들 아폰수 엔리케스를 대신하여 백작령을 통치하였다.

1116년, 테레사는 이복여동생 우라카와 영토 분쟁을 벌였고, 1120년에는 양국 군대가 다시 전투를 벌였다. 1121년, 테레사는 브라가의 카스트루 데 란호수에 포위되어 구금되었으나,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브라가의 두 대주교의 중재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포르투갈 백작령은 레온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아들 아폰수가 성년이 된 후에도, 테레사는 권력을 되찾으려 하였다. 그녀는 애인인 트라바 백작 페르난도 페레스와 5년 이상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고, 이는 아폰수와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1128년, 아폰수는 친정을 선포하고 기마랑이스 근교에서 테레사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테레사는 체포되어 신분을 박탈당하고 갈리시아의 수도원에 들어갔다.

3. 1. 섭정 통치

1093년, 레콩키스타에 참여하여 이베리아 반도에 온 엔히크와 결혼하였다.[1] 포르투갈(Portucale) 지방은 그녀의 지참금 일부였고, 이를 통해 엔히크는 포르투갈 백작이 되었다.

처음에 남편 엔히크는 알폰소 6세의 신하였으나, 알폰소 6세가 1109년에 죽고 장녀 우라카가 왕위에 오르자, 영토 확장의 야망으로 레온 왕국을 침공하였다. 엔히크는 1112년에 죽었고, 테레사는 자신과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노력했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아폰수 엔리케스(후의 포르투갈 왕 아폰수 1세)가 백작령을 계승했기 때문에, 테레사는 아직 어린 아폰수를 후견하였다. 그녀는 섭정으로서 백작령을 통치하였으나, 몬데고 강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여 무어인의 재정복 위협에 직면하였다.

1116년, 영토 확장의 야망은 아들 아폰수에게 이어졌고, 테레사는 이복여동생 우라카와 싸웠다. 포르투갈과 레온 양국의 군대는 1120년에 다시 전투를 벌였다. 1121년, 테레사는 포위되어 브라가의 카스트루 데 란호수(Castro de Lanhoso)에서 구금되었다. 이에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브라가의 두 대주교가 중재에 나서 평화가 협상되었다. 테레사는 석방되었지만, 포르투갈 백작령은 레온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테레사는 아폰수가 성년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백작령 통치권을 되찾으려고 했다. 5년 이상 그녀는 애인인 트라바 백작 페르난도 페레스와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이러한 행동은 아폰수와 외국 출신 십자군 참가자였던 귀족 대다수의 이반을 불러일으켰다. 1128년, 친정을 선포한 아폰수에 의해 테레사의 군대는 기마랑이스 근교에서 패배하였고, 그녀는 체포되었다. 테레사는 신분을 박탈당하고 갈리시아의 수도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3. 2. 우라카 여왕과의 대립

테레사는 처음에는 아버지 알폰소 6세의 신하였던 엔히크와 함께 통치했다. 1109년 알폰소 6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적출 딸인 우라카 여왕이 왕위를 계승했다.[4] 엔히크는 레온을 침략하여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려 했고, 1112년에 사망했다. 테레사는 군사적, 정치적 상황에 대처하며 정부의 책임을 맡았다. 그녀는 주로 남쪽 영토, 즉 최근에 무어인들로부터 재정복한 몬데구 강까지의 지역에 주력했다. 코임브라 방어에서 승리하여 교황 파스칼 2세로부터 "여왕"으로 불렸으며,[5] 1117년 문서에서 명시적으로 여왕이라고 불렸다.[6]

1116년, 테레사는 자신의 권력을 확장하기 위해 이복동생인 우라카 여왕과 싸웠다. 1120년에도 다시 싸웠으며, 그 목적으로 가장 강력한 갈리시아 귀족이자 미망인이었던 트라바 백작 페르난도 페레스와 동맹을 맺었다. 1121년, 테레사는 갈리시아와의 북쪽 국경인 라뇨소에서 여동생 우라카와 싸우는 동안 포위되어 사로잡혔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주교와 브라가 대주교의 도움으로 협상된 평화(라뇨소 조약)가 조정되었다.[7] 그 조건에는 그녀가 처음 받았던 것처럼 레온 왕국의 신하로서 포르투갈 백국을 유지해야만 석방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8]

3. 3. 갈리시아 귀족과의 관계

1093년, 테레사는 레콩키스타에 참여하여 이베리아 반도에 온 엔리케와 결혼하였다.[1] 포르투갈 지방은 그녀의 지참금 일부였고, 이를 통해 엔리케는 포르투갈 백작이 되었다.

엔리케는 알폰소 6세의 신하였으나, 1109년 알폰소 6세가 죽고 장녀 우라카가 왕위에 오르자 영토 확장을 위해 레온 왕국을 침공하였다. 1112년 엔리케가 죽은 뒤, 테레사는 자신과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노력했다.

테레사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아폰수 엔리케스(후의 포르투갈 왕 아폰수 1세)가 백작령을 계승함에 따라 어린 아들을 후견하며 섭정으로서 백작령을 통치하였다. 그러나 몬데구 강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여 무어인의 재정복 위협에 직면하였다.

1116년, 테레사는 영토 확장을 위해 이복여동생 우라카와 싸웠다. 1120년에는 포르투갈과 레온 양국 군대가 다시 전투를 벌였다. 1121년, 테레사는 포위되어 브라가 현 카스트루 데 란호수에 구금되었다.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브라가의 두 대주교가 중재하여 평화가 협상되었고, 테레사는 석방되었지만 포르투갈 백작령은 레온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테레사는 아폰수가 성년이 되었음에도 백작령 통치권을 되찾으려 했다. 5년 이상 애인인 트라바 백작 페르난도 페레스와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이는 아폰수와 외국 출신 십자군 참가자였던 귀족 대다수의 반발을 샀다. 1128년, 친정을 선포한 아폰수에 의해 테레사의 군대는 기마랑이스 근교에서 패배하여 체포되었다. 테레사는 신분을 박탈당하고 갈리시아의 수도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4. 아폰수와의 갈등 및 몰락

1128년 아폰수가 성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테레사는 레온 왕국으로부터 통치권을 되찾으려 했다. 1116년, 영토 확장의 야망을 가진 아폰수는 이복 누이 우라카와 갈등을 빚었다. 포르투갈과 레온 양국 군대는 1120년에 다시 전투를 벌였다. 1121년, 테레사는 카스트루 데 란호수(현 브라가 현의 도시)에 포위되어 구금되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와 브라가의 두 대주교가 중재에 나서 평화가 협상되었고, 테레사는 석방되었지만 포르투갈 백작령은 레온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1]

4. 1. 권력 투쟁

1128년, 브라가 대주교와 주요 포르투갈 봉건 귀족들은 테레사가 갈리시아와 맺은 동맹에 반발하였다. 브라가 대주교는 갈리시아의 디에고 헬미레스가 성 야고보의 유물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며 권력을 키우는 것에 위협을 느꼈다.[1]

아폰수는 기마랑이스 근처 산 마메데 전투에서 테레사의 군대를 물리치고, 테레사를 트라바 백작과 함께 포르투갈 국경 근처 갈리시아 왕국으로 추방했다. 테레사는 1130년에 사망했고, 아들 아폰수는 포르투갈을 독립 왕국으로 이끌었다.[1]

테레사는 아폰수가 성년이 되었음에도 통치권을 되찾으려 했다. 5년 이상 애인인 트라바 백작 페르난도 페레스와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이는 아폰수와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1128년, 아폰수는 친정을 선포하고 테레사의 군대를 기마랑이스 근교에서 격파하여 그녀를 체포했다. 테레사는 신분을 박탈당하고 갈리시아의 수도원에 들어갔다.[1]

4. 2. 산 마메데 전투

1128년, 브라가 대주교와 주요 포르투갈 봉건 귀족들은 테레사가 갈리시아와 동맹을 맺는 것에 반발하였다. 브라가 대주교는 갈리시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주교 디에고 헬미레스가 성 야고보의 유물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며 권력을 키우는 것에 위협을 느꼈다.

브라가 대성당에 위치한 포르투갈의 테레사 백작 부인 묘.


포르투갈 귀족들과 군벌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짧은 내전 끝에 테레사 여왕은 폐위되었다. 그녀의 아들이자 상속자인 아폰수는 기마랑이스 근처 산 마메데 전투에서 테레사의 군대를 물리치고, 테레사는 트라바 백작과 그들의 자녀들과 함께 포르투갈 국경 근처 갈리시아 왕국으로 추방되었다.

4. 3. 추방과 죽음

1128년, 브라가 대주교와 주요 포르투갈 봉건 귀족들은 테레사가 갈리시아와 동맹을 맺는 것에 반발했다. 브라가 대주교는 갈리시아 디에고 헬미레스가 성 야고보의 유물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며 권력을 키우는 것을 우려했다.

포르투갈 귀족들과 군벌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짧은 내전 끝에 테레사 여왕은 폐위되었다. 그녀의 아들이자 상속자인 아폰수는 기마랑이스 근처 산 마메데 전투에서 테레사의 군대를 물리치고, 테레사를 트라바 백작과 그들의 자녀들과 함께 포르투갈 국경 근처 갈리시아 왕국으로 추방했다. 트라바 가문은 그곳에 톡소스 오우토스 수도원을 세웠다. 테레사는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130년에 사망했다. 그녀의 뒤를 이은 아들 아폰수는 결국 포르투갈을 완전한 독립 왕국으로 이끌었다.

5. 자녀

포르투갈의 헨리 백작과의 사이에서 우라카 헨리케스, 산차 헨리케스, 테레사 헨리케스, 아폰수 헨리케스를 낳았고, 페르난도 페레스 데 트라바 백작과의 사이에서는 테레사 페르난데스 데 트라바, 산차 페르난데스 데 트라바 두 딸을 낳았다.

5. 1. 포르투갈의 헨리 백작과의 자녀

포르투갈의 헨리 백작과의 자녀
이름출생년도사망년도배우자비고
우라카 헨리케스1095년/1097년경1173년경베르무도 페레스 데 트라바자녀 있음
산차 헨리케스1097년경1163년산초 누네스 데 바르보사, 페르난도 멘데스 데 브라간사첫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자녀 있음, 두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는 자녀 없음
테레사 헨리케스1098년경?
아폰수 헨리케스1109년1185년포르투갈 왕국의 초대 국왕. 외조부의 이름을 따서 지음.


5. 2. 페르난도 페레스 데 트라바와의 자녀

테레사 데 레온 왕녀는 페르난도 페레스 데 트라바 백작과의 사이에서 두 딸을 두었다.

  • 테레사 페르난데스 데 트라바(1180년 사망): 누뇨 페레스 데 라라 백작과 결혼했고, 과부가 된 후 레온의 페르난도 2세 국왕의 두 번째 왕비가 되었다.
  • 산차 페르난데스 데 트라바(1181년 3월 이후 사망): 1150년 이전에 알바로 로드리게스 데 사리아 백작과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과부가 된 후 페드로 알폰소 백작의 두 번째 부인이 되었고, 다시 과부가 된 후 곤살로 루이스 백작과 결혼했으나, 이 두 결혼에서는 자녀가 없었다.

참조

[1] 서적 The Medieval Spains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06-03
[2] 웹사이트 PT-TT-OCCT-A-5-1-1_m0001.TIF - Carta de doação de D. Teresa, rainha de Portugal, do Castelo de Soure concedida ao Templo de Salomão - Arquivo Nacional da Torre do Tombo - DigitArq http://digitarq.dgar[...] 2015-12-07
[3] 서적 The New Cambridge Medieval History: Volume 4, c. 1024–c. 1198, Part II Cambridge University Press
[4] 서적 The Reconquest Kings of Portugal: Political and Cultural Reorientation on the Medieval Frontier https://books.google[...] Springer 2008
[5] 뉴스 D. Teresa utilizou armas de homens Jornal de Notícias 2008-07-13
[6] 웹사이트 Bula "Fratrum nostrum" do papa Pascoal II dirigida a D. B., bispo de Toledo e D. Maurício Burdino, bispo de Braga e D. A., bispo de Tui, e D. J., bispo de Salamanca e à rainha D. Teresa, mandando, depois das queixas do bispo de Coimbra, que seja restituído à igreja de Coimbra, tudo o que lhe tinha sido tirado, inclusive a igreja de Lamego que fora concedida à igreja do Porto – Arquivo Nacional da Torre do Tombo – DigitArq https://digitarq.arq[...] 2022-11-29
[7] 웹사이트 Casa Teresa de Leão http://guesthousevim[...] 2024-06-20
[8] 웹사이트 Desconstrução do conceito sexo frágil a exemplo da governança na Península Ibérica Alves Revista Veredas da História http://www.seer.vere[...] 2024-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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