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퉁갸 롱코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퉁갸 롱코도는 강희제의 외사촌이자 처남으로, 강희제 말년에 요직을 두루 거치며 옹정제의 즉위에 기여했으나, 이후 옹정제의 견제를 받아 몰락한 인물이다. 1688년 황실 근위병으로 시작하여 정람기 몽고 부도통, 수도 경비대 사령관, 이판원 상서를 역임했다. 강희제 사후 유조를 발표하여 옹정제의 즉위를 도왔으나, 권력 다툼 속에서 41가지 죄목으로 기소되어 가택 연금된 후 사망했다. 그는 권력 암투를 보여주는 인물로서, 여러 역사 드라마와 소설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퉁기야 할라 - 효의인황후
    효의인황후는 청나라 강희제의 황후이자 옹정제의 양모로, 귀비에서 황귀비를 거쳐 황후가 되었으나 자녀는 없었고 옹정제 교육에 힘썼으며, 옹정제 즉위 후 시호를 받고 태묘에 배향되었다.
  • 퉁기야 할라 - 각혜황귀비
    각혜황귀비는 강희제의 후궁으로, 효의인황후의 여동생이자 효강장황후의 조카이며, 귀비에 책봉된 후 황귀비, 황조수기황귀태비로 추존되었고, 숙혜라는 시호를 받았다.
  • 청나라의 이부상서 - 장정옥
    장정옥은 청나라 3대에 걸쳐 활약한 한족 관료로, 옹정제의 신임을 받아 군기처의 초기 구성원이 되어 주요 정책 결정에 관여하고 《명사》 편찬을 주도했으며, 사후 태묘에 배향되는 영예를 누렸으나 만년에는 건륭제와의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
  • 청나라의 이부상서 - 문상
    청나라 말기의 관료 문상은 도광제 시기에 진사가 되어 함풍제와 동치제 시기에 군기대신, 총리아문 대신 등 요직을 역임하며 양무운동 추진과 서양 국가들과의 외교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 청나라의 1등 공작 - 연갱요
    연갱요는 청나라 초기 옹정제의 총애를 받으며 권세를 누렸으나 오만함으로 옹정제의 분노를 사 자결한 무관으로, 옹정제 즉위 기여, 사천 및 칭하이 반란 진압 등의 공을 세웠으나 권력 남용과 오만함으로 몰락하여 청나라 초기 권력 다툼과 옹정제 통치 스타일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 청나라의 1등 공작 - 푸차 푸헝
    푸차 푸헝은 건륭제 시대의 만주족 고위 관료로, 황후의 남동생이자 황실 부마의 형으로서 황실과 깊은 인척 관계를 맺었으며, 사후 대중 문화 속 인물로 묘사되기도 한다.
퉁갸 롱코도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롱코도
원어 이름 (만주어)ᠯᠣᠩᡴᠣᡩᠣ (longkodo)
한자 표기佟佳 隆科多 (퉁자 융커다)
몽골어 표기ᠲᠦᠩᠭᡳᠶᠠ ᠯᠣᠩᠺᠣᠳᠣ (Tunggiya Longkodo)
관직
관직명이부상서 (吏部尚書)
임기 시작1722년
임기 종료1726년
전임자푸닝가
후임자순주
같이 역임한 관료장펑허(1723년까지), 톈총뎬(1723년–1725년), 차이팅(1725년부터)
개인 정보
사망1728년
가족 관계퉁궈웨이(아버지), 칭푸(형), 효의인황후(누이), 각혜황귀비(누이)

2. 생애

롱코도는 퉁궈웨이의 셋째 아들이자 강희제의 셋째 황후인 효의인 황후의 남동생이었다. 다른 누이는 강희제의 후궁으로 귀비 품계를 받았다. 롱코도의 아버지 퉁궈웨이는 한족 팔기군 출신 귀족이었고, 어머니는 효강장 황후였다. 따라서 롱코도는 강희제의 외사촌이자 처남이었다.[1]

1688년, 롱코도는 황실 근위병으로 복무했고, 이후 몽골 정람기 부사령관이 되었다. 1705년 부하들의 비리로 직위에서 해임되었으나,[1] 1711년 수도 경비대 사령관인 ''주문제독''(九門提督)으로 복귀했다. 1720년에는 이번원을 담당하는 대신으로 임명되었다.[1]

1722년 강희제 사망 당시, 롱코도는 황제가 사망한 창춘위안에 있던 유일한 고위 관료였다. 그의 군사력은 옹정제 즉위 과정에 대한 음모론의 대상이 되었고, 옹정제의 의심을 샀다. 옹정제 즉위 후, 롱코도는 4인 황실 의회에 임명되고 호부 상서(尚書)가 되었으나, 이후 불명예를 안고 41가지 죄목으로 기소되어 가택 연금되었다. 그는 약 1년 후 사망했다.[1]

2. 1. 강희제 시대

롱코도는 퉁궈웨이의 셋째 아들이자 효의인 황후의 남동생으로, 강희제의 외사촌이자 처남이었다.[1] 1688년, 황실 근위병으로 복무를 시작하여 몽골 정람기 부사령관 등을 역임했다.[1] 1720년, 병든 강희제에 의해 이번원 상서 겸 보군통령에 임명되어 소수 민족 국경 지역 업무와 수도 경비를 담당했다.[1]

1722년 강희제가 사망할 당시, 롱코도는 병든 황제가 사망한 창춘위안에 있던 유일한 고위 관료였다. 그의 군사력은 옹정제 즉위 과정에 대한 음모론에서 그를 명백한 희생양으로 만들었고, 옹정제에게 깊은 의심을 받았다.

2. 2. 옹정제 즉위와 권력

1722년(강희제 61년), 강희제가 붕어할 당시 창춘위안에 있던 유일한 고위 관료는 롱코도였다.[1] 그는 보군통령으로서 북경 성 내성과 외성의 경비를 책임지고 있었다. 강희제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롱코도는 강희제의 곁에서 유조를 받아적으며 고명대신이 되었다.[3] 그는 강희제의 유조에 따라 제4황자 옹친왕 윤진(훗날의 옹정제)에게 황위를 넘겨주었다.[3]

하지만 이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롱코도는 본래 제8황자 윤사의 편이었으나, 보군통령의 직무를 잘 알고 있던 윤진이 그를 포섭하였다. 야사에 따르면 롱코도가 강희제의 유조를 ‘14황자 윤제에게 물려준다.’에서 ‘4황자 윤진에게 물려준다.’로 고쳤다는 소문이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황실 문서에서는 ‘어조사 우’(于) 자 대신 ‘어조사 어’(於) 자를 사용했고, 유조에는 만주 문자와 한자를 모두 써야 하는데 해당 유조는 한자로만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황자들은 태어난 순서에 따라 이름 앞에 황(皇) 자를 붙여 표기했는데, 현존하는 강희제의 유조에는 황4자 옹친왕 윤진(皇四子雍親王胤禛)이라고 명확하게 적혀 있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롱코도가 윤진의 즉위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며, 황자들 간의 권력 다툼에서 윤진의 책사 역할까지 했기 때문에 이러한 소문이 퍼진 것으로 보인다. 롱코도의 군사적 지원은 강희제와 옹정제 사이의 비폭력적인 권력 이양을 보장했다.[1]

옹정제 즉위 후, 롱코도는 4인 황실 의회에 임명되었고, 이부상서, 태보에 임명되는 등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1]

2. 3. 몰락과 숙청

옹정제는 즉위 공신인 연갱요와 롱코도의 세력이 커지자 이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연갱요는 자신이 능력 있는 장군이며 누이(돈숙황귀비)가 옹정제의 후궁이라는 점을 과신하여 횡령, 엽관을 일삼았다. 롱코도는 연갱요와 부패 커넥션을 형성하고 있었다.[3] 옹정제는 롱코도를 소인배라고 비난하고, 신하들에게 그들과 거리를 둘 것을 종용하였다.[5]

옹정 4년(1726년), 롱코도가 황실 족보인 옥첩을 사사로이 보관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탄핵의 빌미가 되었다. 옹정제는 옥첩을 사사로이 가진 죄를 시작으로 불경, 기만, 당파 형성, 조정 문란 등 갖은 죄상을 들어 롱코도를 탄핵했는데, 죄상 중에는 “감히 건방지게 스스로를 제갈량에 비유한 죄” 따위 황당한 것도 있었다.[6]

옹정제는 롱코도를 창춘원 밖 초가삼간에 유폐했고, 롱코도는 연금된 지 1년만인 옹정 6년(1728년)에 사망했다.

3. 평가

퉁궈웨이의 셋째 아들이자 강희제의 셋째 황후인 효의인 황후의 남동생이었던 롱코도는 강희제 말기부터 옹정제 초반까지 청나라 정국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롱코도는 강희제의 외사촌이자 처남으로, 황실 근위병으로 시작하여 몽골 정람기 부사령관, 수도 경비대 사령관, 이판원 담당 대신 등을 역임했다.[1]

1722년 강희제가 사망할 당시, 롱코도는 창춘위안에 있던 유일한 고위 관료였으며, 그의 군사력은 옹정제의 즉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옹정제 즉위 후, 롱코도는 4인 황실 의회에 임명되고 호부 상서가 되는 등 권세를 누렸으나, 1727년 41가지 죄목으로 기소되어 가택 연금되었고, 이듬해 사망했다.[1]

4. 미디어

롱코도는 권력 암투와 배신, 몰락이라는 극적인 요소를 모두 갖춘 인물로서, 여러 역사 드라마와 소설의 소재로 활용되었다.[1]


  • 《견환전》
  • 《옹정황제의 딸》

참조

[1] 뉴스 第04臣 隆科多 http://www.quanxue.c[...] Quanxue
[2] 문서 実際には嫡母(義母)の弟であったが、雍正帝の祖母である孝康章皇后の甥という血縁関係もあった。
[3] 서적 옹정제 이산 2001
[4] 서적 옹정 原典 치국 시아출판사 2004
[5] 서적 위의 책
[6] 서적 위의 책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