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드루 3세 (콩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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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드루 3세는 17세기 콩고 왕국의 군주로, 1669년 21세의 나이로 잠시 콩고 왕국의 왕위에 올랐다가 같은 해 퇴위했다. 그는 콩고 내전 중 킨라자 가문의 지지를 받아 즉위했으나, 킴판주 가문에 의해 쫓겨나 렘바에 망명 정부를 세웠다. 야카족을 군사력으로 활용하고, 상 살바도르를 탈환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684년 36세의 나이로 암살되었으며, 그의 죽음은 콩고 왕국의 내전을 더욱 격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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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루 3세 (콩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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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칭호 | 마니콩고(Mwene Kongo) |
왕조 | 킨라자 가문 |
재위 | |
재위 기간 | 1669년 1월 ~ 1669년 6월 |
이전 통치자 | 알바루 8세 |
다음 통치자 | 알바루 9세 |
개인 정보 | |
출생명 | 피에레 은심바 은탐바 페드루 (Pierre Nsimba Ntamba Pedro) |
출생일 | 1648년 3월 2일 |
출생지 | 콩고 왕국 상살바도르 |
사망일 | 1684년 6월 12일 |
사망 장소 | 콩고 왕국 상살바도르 상왕궁 앞쪽 마을 거리 (암살)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알바루 8세 |
친인척 | 알바루 7세(친조부) 베르나르두 2세(친증조부) 안토니우 1세(삼종조부) 주앙 2세(동복 남동생) 아폰소 응콘도(7촌 재종숙부) 라파엘 1세(사촌 형) 가르시아 3세(사촌 남동생) 알바루 9세(사촌 남동생) 앙드레 1세(사촌 남동생) 마누엘 1세(동복 조카) 알바루 10세(사촌 남동생) 페드루 4세(사촌 남동생) 피에르 콩스탕탱 다 실바(사촌 남동생) |
배우자 및 자녀 | |
배우자 | 왕비 1명, 후궁 2명 |
자녀 | 3남 3녀 |
기타 | |
총리 | 라파엘 1세 |
수상 | 라파엘 1세 |
2. 생애
페드루 3세는 알바루 8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 베르나르도 2세는 콩고 왕국의 제14대 마니콩고였으나, 조부 알바로 7세 대에 이르러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복잡한 가계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시절 조부와 아버지가 차례로 왕위에 오르는 과정을 지켜본 페드루 3세는 1666년 왕태자로 책립되었고, 1669년 부왕 알바루 8세가 붕어하자 21세의 나이로 제27대 마니콩고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당시 콩고 왕국은 내전의 혼란 속에 있었으며, 그는 즉위 약 3개월 만인 1669년 6월 8일 사촌 동생 알바루 9세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퇴위하였다.
2. 1. 초기 생애
알바루 8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 베르나르도 2세는 콩고 왕국 제14대 마니콩고였으나, 증조부가 붕어한 후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조부 알바로 7세는 왕가의 서족이었다. 페드루 3세는 어린 시절 조부 알바로 7세가 왕위 계승권을 맴도는 것을 보았다.1665년 11월 11일, 조부 알바로 7세가 콩고 왕국 제25대 군주로 즉위하였고, 아버지 알바루 8세는 왕태자로 책립되었다. 조부가 훙서한 후 1666년 7월 20일 아버지 알바루 8세가 제26대 군주로 즉위하자, 페드루 3세 자신도 1666년 8월 26일 왕태자로 책립되었다.
1669년 3월 23일, 부왕 알바루 8세가 붕어(崩御)하자 페드루 3세는 콩고 왕국 제27대 군주로 즉위하였다. 당시 콩고 왕국은 17세기 내전의 혼란 속에 있었으며, 그는 즉위 직후인 1669년 4월 6일 사촌 동생 알바루 음판주 이 은티빌라 공(公)을 후계공(後繼公)으로 책립하였다. 즉위 약 3개월 후인 1669년 6월 8일, 페드루 3세는 사촌 동생 알바루 음판주 아 은티빌라에게 왕위를 선위하였는데, 그가 바로 알바루 9세 콩고 왕국 제28대 군주이다. 페드루 3세는 21세의 나이로 즉위했다가 같은 해에 퇴위하였다.
2. 2. 콩고 내전과 통치
1669년, 콩고 내전이 한창일 때 킨라자 가문의 지지를 받아 콩고 왕국의 군주로 즉위하였다.[2] 그러나 그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같은 해 6월, 경쟁 가문인 킴판주 가문에 의해 수도 상 살바도르( São Salvador|상 살바도르pt, 또는 Mbanza-Kongo|음반자-콩고kg)에서 쫓겨나 렘바로 망명하여 망명 정부를 세웠다.[2]망명 중에도 페드루 3세는 상당한 지지 세력을 유지하며 왕위 탈환을 시도했다. 1674년에는 그의 군대가 상 살바도르로 진격하여 당시 도시를 점령하고 있던 알폰수 3세를 살해하는 데 성공했으나, 다시 수도에서 밀려났다.[2] 1676년에도 수도를 공격했지만, 이번에는 소요의 스테팡 2세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격퇴당했다.[2]
페드루 3세는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야카족을 용병으로 고용하기 시작했다. 야카족은 과거 로앙고 등을 섬겼던 용병 집단으로, 일부는 약 20년간 콩고 지역을 약탈하며 식인 행위를 한다는 소문도 있었다.[3]
1678년, 페드루 3세는 야카족 용병을 포함한 군대를 이끌고 다시 상 살바도르로 진격했다. 당시 수도는 킴판주 가문의 다니엘 1세가 장악하고 있었다.[1] 치열한 전투 끝에 페드루 3세는 다니엘 1세를 살해하고 수도를 점령했지만, 이 과정에서 상 살바도르는 크게 파괴되었다.[1] 이 사건 이후 콩고 왕국의 주요 왕위 계승자들은 파괴된 수도를 떠나 렘바, 키방구, 맘바 루보타 등 각자의 거점으로 흩어져 대립을 이어갔다.[1]
2. 3. 권력 회복 시도와 최후
망명 중에도 페드루 3세는 여전히 많은 지지자를 확보하고 있었으며, 1674년 그의 군대는 콩고 왕국의 수도인 상 살바도르(São Salvador)로 돌아왔다. 그는 직접 또는 대리인을 통해 당시 왕위를 차지하고 있던 알폰수 3세를 살해했으나, 결국 다시 수도에서 쫓겨났다.[2] 1676년, 페드루 3세는 다시 한번 수도를 공격했지만, 소요(Soyo)의 스테팡 2세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격퇴되었다.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페드루 3세는 야카족을 용병으로 고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과거 로앙고(Loango)와 그레이트 마코코(Great Makoko)를 섬겼던 이들로, 일부는 약 20년간 콩고를 약탈하며 식인 행위를 했다는 기록도 있다.[3]
1678년, 페드루 3세는 군대를 이끌고 상 살바도르로 진격했다. 당시 수도는 킴판주 가문의 다니엘 1세가 장악하고 있었다.[1] 이어진 전투에서 페드루 3세는 다니엘 1세를 살해하고 승리했지만, 그 과정에서 도시는 크게 파괴되었다. 이 사건 이후 왕위 계승 경쟁자들은 렘바(Lemba), 키방구(Kibangu), 맘바 루보타(M'bamba Luvota) 등 각자의 산악 요새로 흩어져 대립을 이어갔다.
1680년경 페드루 3세는 렘바를 통치하며 콩고 왕위를 주장했고, 소요 남부 루보타(Luvota) 지역에 기반을 둔 킨판주 가문 지지자들과 대립했다.[1] 살해된 다니엘 1세의 형제인 마누엘 드 노브레가(Manuel de Nóbrega)는 복수를 다짐하며 페드루 3세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소요의 왕자가 주선한 거짓 휴전 협상의 일환으로, 페드루 3세는 소요의 통치자 안토니우 2세 바레타 다 실바(António II Baretto da Silva)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평화를 공고히 할 생각으로 함정에 빠졌다. 페드루 3세는 이 과정에서 살해당했다. 일설에 따르면 마누엘 자신이 신부로 변장하여 결혼 행렬에 나타나 페드루 3세를 총으로 쏘고 도주했다고 전해지지만, 이 이야기는 후대에 꾸며진 것일 가능성이 높다.[1] 이 사건은 콩고 귀족들 사이의 불신을 심화시켜 지속적인 평화를 이루는 데 큰 장애물이 되었다.
3. 사망과 콩고 내전에 끼친 영향
페드루 3세의 사망 시기와 경위에 대해서는 상반된 기록이 존재한다.
한 기록에 따르면, 그는 콩고 왕국 군주 자리에서 물러나 상왕으로 지낸 지 15년이 지난 1684년 6월 12일, 변장하고 행차하던 중 테케 소왕국 출신 게릴라 세력에게 향년 36세로 암살되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그의 사후 자녀들(3남 3녀)이 왕위 계승에서 영구히 배제되는 비극을 겪었다고 덧붙인다.
다른 기록은 1680년 당시 상황과 다른 암살 경위를 제시한다. 1680년, 페드루 3세는 렘바 지역을 통치하며 소요 남부 루보타 지방의 킨판주 가문 지지자들에 맞서 콩고 왕국의 왕위를 주장하고 있었다.[1] 이전에 살해된 다닐 왕의 형제인 마누엘 드 노브레가는 페드루 3세에게 복수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소요의 왕자가 주선한 거짓 휴전을 통해, 페드루 3세는 소요의 통치자 안토니우 2세 바레타 다 실바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평화를 이룰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함정에 빠졌다. 그러나 이는 계략이었고, 페드루 3세는 결국 살해당했다. 일설에 따르면 마누엘 자신이 신부로 변장하여 결혼 행렬에 나타나 페드루 3세를 총으로 쏘아 살해하고 도주했다고 전해지지만,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1]
어떤 경위로든, 페드루 3세의 암살 사건은 이후 콩고 왕국 귀족들이 지속적인 평화를 이루는 데 큰 걸림돌 중 하나로 작용했다.[1]
참조
[1]
서적
"The Kongolese Saint Anthony: Dona Beatriz Kimpa Vita and the Antonian Movement, 1684-1706"
Cambridge University
1998
[2]
서적
'History of West Central Africa'
[3]
서적
'History of West Central Af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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