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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뢰뤼스 전투 (17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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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플뢰뤼스 전투는 1794년 6월 26일에 벌어진 프랑스 혁명 전쟁의 중요한 전투이다. 프랑스군은 코부르크 공작이 이끄는 오스트리아-네덜란드 연합군을 상대로 승리하여, 벨기에에서 연합군의 퇴각을 이끌어냈다. 이 승리로 프랑스는 네덜란드 진격을 용이하게 했으며, 혁명 정부의 공포 정치를 지속해야 할 명분이 약화되었다. 또한, 이 전투는 항공 정찰이 처음으로 실전에 활용된 사례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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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94년 6월 - 영광스러운 6월 1일
    영광스러운 6월 1일 해전은 1794년 6월 1일에 영국 함대와 프랑스 함대 간에 벌어진 해전으로, 영국이 승리했으나 프랑스는 식량 호송대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플뢰뤼스 전투 (1794년)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플뢰뤼스 전투
[[장바티스트 주르당|주르당]]이 플뢰뤼스에서 [[프랑스 항공대|기구 '렌트르프레낭']]을 배경으로 있다. [[장바티스트 모제스|모제스]]가 1837년에 그린 그림; [[베르사유 궁전|베르사유]]의 [[갤러리 데 바타유]]에 전시됨.
주르당이 플뢰뤼스에서 기구 '렌트르프레낭'을 배경으로 있다. 모제스가 1837년에 그린 그림; 베르사유의 갤러리 데 바타유에 전시됨.
일부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의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의 로우 국가 전역
날짜1794년 6월 26일
장소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플뢰뤼스
결과프랑스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프랑스 공화국
교전국 2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

지휘관 및 지도자
프랑스장바티스트 주르당
장바티스트 클레베르
루이 앙투안 드 생쥐스트
동맹군코부르크 공 요지아스
오라녜 공 빌럼
병력 규모
프랑스군보병 70,000명
기병 12,000명
대포 100문
기구 1대
동맹군보병 45,000명
기병 14,000명
대포 111문
피해 규모
프랑스군5,000명 사상, 대포 1문 손실
동맹군5,000명 사상, 대포 1문 손실

2. 서막

1794년 5월 17일-18일 사이에 벌어진 투르쿠앵 전투 이후, 장바티스트 주르당은 ''아르덴군''(Army of the Ardennes)과 북방군 4개 사단의 지휘권을 받아 총 96,000명 가량의 병력을 통솔하게 되었다. 주르당이 지휘하게 된 이 신생군은 ''상브르-뫼즈 군''(Army of the Sambre-Meuse)이라 불리게 되었다.[14] 주르당은 샤를루아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6월 12일 프랑스군은 공안위원회 소속 루이 드 생 쥐스트의 감독 아래 약 7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샤를루아를 공격했다. 6월 16일 약 43,000명의 오스트리아-네덜란드 연합군이 짙은 안개를 틈타 반격하여 프랑스군은 3,000명 가량의 사상자를 내고 상브르 너머로 퇴각해야 했다. 6월 18일 주르당은 다시 공격을 감행했고, 샤를루아 공성전을 재개했다. 코부르크 휘하 구원군이 도착하기 직전인 6월 26일, 샤를루아는 항복했다.

2. 1. 초기 전투 (1794년 5월 ~ 6월)

1794년 5월 17일-18일 사이에 벌어진 투르쿠앵 전투 이후, 장바티스트 주르당은 ''아르덴군''(Army of the Ardennes)과 북방군 4개 사단의 지휘권을 받아 총병력 약 96,000명을 통솔하게 되었다. 주르당이 지휘하게 된 이 신생군은 ''상브르-뫼즈 군''(Army of the Sambre-Meuse)이라 불리게 되었다.[14] 주르당은 상브르 강 북쪽 제방을 확보하고 샤를루아 요새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랑랭 전투, 에르켈린 전투, 고슬리 전투에서 패배하며 이 임무는 세 번이나 실패했다.

6월 12일 프랑스군은 공안위원회의 일원인 루이 드 생 쥐스트의 감독하에 약 7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샤를루아 공격을 시작했다. 같은 날 주르당의 군대는 네 번째로 삼브르 강을 건너 샤를루아 요새를 포위했다. 6월 16일 약 43,000명의 오스트리아-네덜란드 연합군이 짙은 안개를 틈타 반격했고, 프랑스군은 3,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상브르 강 너머로 퇴각해야 했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비교적 잘 정돈된 상태로 퇴각하여 큰 피해는 없었고, 이틀 만에 다시 공격할 준비를 갖추었다. 6월 18일 주르당은 다시 공격을 감행하여 샤를루아 공성전을 재개했고, 6월 26일 코부르크 휘하의 구원군이 도착하기 직전 샤를루아는 항복했다.

2. 2. 샤를루아 공방전 (1794년 6월)

1794년 6월 12일, 장바티스트 주르당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공안위원회 소속 루이 드 생 쥐스트의 감독 아래 샤를루아를 공격했다.[14] 6월 16일, 약 43,000명의 오스트리아-네덜란드 연합군이 짙은 안개를 틈타 반격했고, 프랑스군은 3,000명의 사상자를 내며 상브르 강 너머로 퇴각했다.[14]

삼브르 강 다섯 번째 도하 및 샤를루아 3차 포위 공격 직전 프랑스군 초기 위치


프랑스군은 잘 정돈된 상태로 퇴각했고, 6월 18일 주르당은 다시 공격, 샤를루아 공성전을 재개했다. 프랑스 사단들은 이전과 거의 같은 위치에 배치되었다.

지휘관담당 지역
기욤 필리베르 뒤쉠오렌 수도원과 랑들리를 건너 피에통과 수브레 마을 사이
안 샤를 바세 몽테귀뤼와 랑들리를 건너 뒤쉠의 오른쪽
앙투안 모르로, 장 조제프 앙주 도폴 (기병 여단)마르시엔 오 퐁에서 건너 고슬리 북쪽
장-에티엔 샹피오네, 기욤 안셀름 필리베르 드 솔랑 (기병 여단)마르시엔 오 퐁에서 건너 헤피니와 와그네 사이
프랑수아 조제프 르페브르샤틀레에서 건너 와그네와 캄피네르 술집 사이
자크 모리스 아트리샤틀레에서 건너 샤를루아로 진군
프랑수아 세베린 마르소테르네를 건너 캄피네르에서 코피오 숲 북쪽 가장자리



프랑스군은 참호와 요새를 건설, 포위 공격을 보호했다. 연합군은 프랑스군의 재공격을 예상하지 못하고 분산 배치되어 있었다.

샤를루아 공방전은 6월 19일 공식 시작되었다. 레이낙 대령 휘하 2,800명의 수비대는 프랑스군의 빠른 재공격에 대비하지 못했고, 이전 공방전 시설도 파괴하지 못했다. 프랑스군은 두 번째 공방전 시설을 재사용, 유리하게 공성전을 진행했다.

6월 20일, 클레베르는 뒤쉠과 몽테규 사단을 이끌고 샤펠레즈에를렘몽을 공격, 적군을 몰아냈다. 6월 21일, 샹피오네와 모르로는 카트르브라를 공격, 연합군을 몰아냈다. 6월 22일, 클레베르는 다시 샤펠레즈에를렘몽을 공격, 연합군을 몰아냈다.

1794년 6월 25일 오전 7시, 레이낙은 항복 조건을 요청했으나, 루이 앙투안 생쥐스트는 즉각 항복을 요구하며 거부했다.[7] 생쥐스트는 프랑스군이 아직 공격 준비가 안 되었음에도 불구, 연합군 주력이 근처에 있음을 알고 레이낙을 위협, 항복을 받아내려 했다.[7]

같은 날, 코부르크 군대 일부가 헤피니 언덕에 도착, 신호 로켓을 발사하려 했으나 챔피오네에게 쫓겨났다. 라데츠키 백작은 프랑스군 진영에 잠입했으나 부상당하고 쫓겨났다.

결국 레이낙은 1794년 6월 25일 오후 무조건 항복에 동의했고, 자크 모리스 아트리 사단 병력이 도시를 점령했다. 이는 프랑스군에게 아슬아슬하게 제때 이루어진 항복이었다. 바로 다음 날 아침, 연합군은 샤를루아 구원을 위한 플뢰뤼스 전투를 시작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3. 플뢰뤼스 전투 (1794년 6월 26일)

6월 26일, 코부르크 공이 이끄는 52,000명의 오스트리아-네덜란드 연합군은 샤를루아를 탈환하기 위해 프랑스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샤를루아는 이미 항복한 뒤였다. 코부르크는 군대를 다섯 개 부대로 나누어 공격을 감행했다.[10][11]

프랑스군은 정찰 기구 ''르앙트레프르낭''을 통해 오스트리아군의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10][11]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 양쪽 측면을 돌파하려 했고, 마르소 장군이 지휘하던 프랑스군 우익과 몽테규 장군이 지휘하던 좌익은 후퇴했다. 그러나 르페브르가 지휘하던 중앙군은 적의 공격을 막아내고 반격을 시작하여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코부르크는 공세 기회를 놓쳤고, 전황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여 브리안느 르 알류드(Braine-l'Alleud)와 워털루 근처로 퇴각하면서 프랑스군은 예상치 못한 승리를 거두었다.[3]

3. 1. 전투의 전개

6월 26일, 코부르크는 52,000명의 오스트리아-네덜란드군을 이끌고 프랑스군을 격파하여 도시를 구원하기 위해 샤를루아 근교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도시는 이미 항복한 뒤였다. 오스트리아 사령관은 휘하 부대를 5개의 종대로 나누어 프랑스군을 공격했다. 프랑스군의 정찰 기구 ''르엔트레프레낭''은 계속하여 주르당에게 오스트리아군의 움직임을 알려왔다.[10][11]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의 양익을 돌파하려 하였고, 마르소(Marceau) 장군이 맡은 프랑스군의 우익과 몽테규(Montaigu) 장군이 맡은 프랑스군의 좌익은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르페브르가 맡은 중앙은 적의 공격에도 진형을 유지했고, 이윽고 반격을 개시했다. 이에 오스트리아군의 돌격은 실패하였다. 코부르크는 적을 압박할 기회를 놓친 데다가 결과가 어떻게 될지 확신도 없었기에 더 이상 싸울 용기를 잃고, 브리안느 르 알류드(Braine-l'Alleud)와 워털루 근교로 퇴각하여 프랑스군에게 기대하지 않은 승리를 안겨주었다.[3]

3. 2. 전투의 결과

연합군은 이 전투에서 승리한 프랑스군에 의해 벨기에에서 전면 퇴각했고, 프랑스군은 네덜란드 북쪽으로 진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프랑스를 위협하는 외세가 존재하는 한 프랑스 혁명 정부가 공포 정치를 계속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다.

플뢰뤼스 전투는 양측 모두에게 매우 치열하고 끈질긴 전투였다. 술트(Soult)는 "내 생애 가장 필사적인 15시간의 전투"였다고 회고했다.[1] 프랑스군은 퇴각하는 연합군을 추격하지 않고 이틀간 휴식을 취했고, 연합군은 브레인-랄레(Braine l’Alleud)와 워털루(Waterloo)로 후퇴했다.

프랑스군은 이 전투에서 5천 명에서 6천 명 사이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추정된다.[2] 연합군의 피해 규모는 논쟁의 여지가 있으나, 전사 208명, 부상 1,017명, 포로 361명으로 집계되었으며, 프랑스군은 박격포 1문, 탄약 상자 3개, 기치 1개를 노획했고, 오스트리아군은 대포 1문과 기치 1개를 노획했다.[3]

플뢰뤼스 전투는 전술적으로 결정적인 전투는 아니었지만, 1794년 로우컨트리(Low Countries)에서 벌어진 프랑스 작전의 전략적으로 결정적인 전투였다. 오스트리아는 이 전투 이후 로우컨트리를 포기하고 프랑스에 넘겨주었다.[4]

플뢰뤼스 전투 이후, 조르당(Jourdan)의 부대는 삼브르-뫼즈 육군으로 통합되어 동부 로우컨트리를 점령하고 코부르크 군대를 추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프랑스군은 메헬렌(Mechelen), 루뱅(Louvain), 나뮈르(Namur), 리에주(Liege), 브뤼셀(Brussels), 안트베르펜(Antwerp) 등을 점령했다.[5]

프랑스군의 진격을 막을 수 없게 되자 코부르크는 뫼즈강(Meuse) 동쪽으로 후퇴했고, 결국 마스트리흐트(Maastricht)에서 강을 건너 독일로 들어갔다. 이로써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주요 전장은 벨기에에서 독일과 라인강으로 옮겨졌다.[6]

오스트리아가 플뢰뤼스에서 패배하면서 북부 연합군도 붕괴되었다. 오스트리아가 로우컨트리를 포기하자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군대는 오스트리아군에서 벗어나 네덜란드를 방어하기 위해 북쪽으로 철수했다. 결국 1795년 1월 18일, 암스테르담에서 바타비아 혁명이 일어나 네덜란드 공화국은 소멸되고 친프랑스 바타비아 공화국으로 대체되었다.[7]

정치적으로 이 전투는 프랑스의 생존을 위해 혁명적인 공포 정치의 지속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무력화했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플뢰뤼스에서의 승리가 한 달 후 테르미도르 반동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파리에 도착한 생 쥐스트(Saint-Just)는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한 다른 주요 자코뱅 당원들과 함께 처형되었다.[8]

4. 전투의 영향

플뢰뤼스 전투는 1794년 프랑스 작전에서 전략적으로 결정적인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가 승리하면서 연합군벨기에에서 전면 퇴각했고, 프랑스군은 북쪽 네덜란드로 진격할 수 있게 되었다.[3]

오스트리아는 이 전투 이후 로우컨트리(Low Countries)를 프랑스에게 넘겨주었다. 빈(Vienna) 궁정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더 이상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3]

이후 조르당(Jourdan)의 부대는 삼브르-뫼즈 육군으로 통합되어 동부 로우컨트리를 점령하고 코부르크 군대를 추격했다. 프랑스군은 메헬렌(Mechelen)과 루뱅(Louvain)(7월 15일), 나뮈르(Namur)(7월 17일), 리에주(Liege)(7월 27일)를 점령했으며, 피슈그뤼(Pichegru)는 브뤼셀(Brussels)(7월 11일)에 입성하고 안트베르펜(Antwerp)(7월 27일)을 점령했다.[3]

프랑스군의 진격을 막을 수 없게 되자, 코부르크는 7월 15일 뫼즈강(Meuse) 동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고, 24일 마스트리흐트(Maastricht)에서 강을 건너 독일로 들어갔다. 이로써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의 주요 전장은 벨기에에서 독일과 라인강으로 옮겨졌다.[3]

오스트리아의 패배는 북부 연합군의 붕괴로 이어졌다. 오스트리아가 로우컨트리를 포기하면서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군대는 북쪽으로 철수했다. 요크 공작(Duke of York)의 군대는 7월 24일 네덜란드로 건너갔고, 로우컨트리는 완전히 비워졌다.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는 프랑스군을 막을 수 없었고, 1795년 1월 18일 암스테르담에서 바타비아 혁명으로 네덜란드 공화국은 소멸되고 친프랑스 바타비아 공화국으로 대체되었다.[3]

플뢰뤼스 전투는 프랑스 혁명정부의 공포 정치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무력화했다. 그 결과, 테르미도르 반동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생 쥐스트는 승리 후 파리에 도착했지만,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한 다른 자코뱅파 지도자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4. 1. 정치적 영향

이 전투의 승리로 연합군벨기에에서 전면 퇴각했고, 프랑스군은 북쪽 네덜란드로 진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전투는 프랑스를 위협하는 외국 세력이 존재하는 한 프랑스 혁명정부의 공포 정치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무력화했다. 그 결과, 플뢰뤼스 전투는 한 달 후 벌어진 테르미도르 반동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생 쥐스트는 승리 후 파리에 도착했지만,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한 다른 자코뱅파 지도자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4. 2. 군사적 영향

플뢰뤼스 전투는 전술적으로 결정적인 전투는 아니었지만, 1794년 프랑스 작전에서 전략적으로 결정적인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가 승리하면서 연합군벨기에에서 전면 퇴각해야 했고, 프랑스군은 북쪽의 네덜란드로 진격할 수 있게 되었다.[3]

오스트리아는 이 전투 이후 로우컨트리(Low Countries)를 다투는 것을 포기하고 프랑스에게 넘겨주었다. 빈(Vienna) 궁정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더 이상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고, 코부르크는 동쪽으로 철수하기 위해 승리의 기회를 포기했다는 의심을 받았다.[3]

플뢰뤼스 전투 이후, 조르당(Jourdan)의 부대는 삼브르-뫼즈 육군으로 통합되어 동부 로우컨트리를 점령하고 코부르크 군대를 추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프랑스군은 한 달 후, 메헬렌(Mechelen)과 루뱅(Louvain)(7월 15일), 나뮈르(Namur)(7월 17일), 리에주(Liege)(7월 27일)를 점령했으며, 피슈그뤼(Pichegru)는 브뤼셀(Brussels)(7월 11일)에 입성하고 안트베르펜(Antwerp)(7월 27일)을 점령했다.[3]

프랑스군의 진격을 막을 수 없게 되자, 코부르크는 7월 15일 뫼즈강(Meuse)으로 동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고, 24일 마스트리흐트(Maastricht)에서 강을 건너 독일로 들어갔다. 이로써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의 주요 전장은 벨기에에서 독일과 라인강으로 옮겨졌다.[3]

오스트리아의 패배는 북부 연합군의 붕괴로 이어졌다. 오스트리아가 로우컨트리를 포기하면서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군대는 오스트리아군에서 벗어나 네덜란드를 방어하기 위해 북쪽으로 철수했다. 요크 공작(Duke of York)의 군대는 7월 24일 마스트리흐트에서 뫼즈강을 건너는 코부르크와 같은 날 로젠달(Roosendaal)에서 네덜란드로 건너갔고, 로우컨트리는 완전히 비워졌다. 분열되고 수적으로 열세였던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는 프랑스군을 스스로 막을 수 없었고, 1795년 1월 18일 암스테르담에서 바타비아 혁명으로 전복되어 네덜란드 공화국은 소멸되고 친프랑스 바타비아 공화국으로 대체되었다.[3]

참조

[1] 서적 A Short History of France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2013-04-17
[2] 서적 Origins of Political Extremism: Mass Violence in the Twentieth Century and Beyond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3-04-20
[3] 웹사이트 The Ferraris Map https://www.kbr.be/e[...] 1770–1778
[4] 웹사이트 The Ferraris Map https://www.kbr.be/e[...] 1770–1778
[5] 웹사이트 The Ferraris Map https://www.kbr.be/e[...] 1770–1778
[6] 웹사이트 The Ferraris Map https://www.kbr.be/e[...] 1770–1778
[7] 서적 Relation des trois attaques de la place de Charleroy Archives du Service Historique de l'Armee
[8] 서적 British Campaigns in Flanders, 1690–1794 Macmillan
[9] 웹사이트 The Ferraris Map https://www.kbr.be/e[...] 1770–1778
[10] 서적 Memoires du Marechal Soult, Duc de Dalmatie Librairie Amyot
[11] 서적 Souvenirs du General Championnet Flammarion
[12] 문서 Smith, D. p.86.
[13] 문서 Smith, D. p.87.
[14] 문서 상브르-뫼즈군이라는 칭호는 플뢰뤼스 전투의 승전을 기념해서 붙여진 명예로운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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