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화사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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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화사별서는 조선 개국공신 조준의 후손 조재희가 조성한 별서이다. 1890년대 초반에 처음 조성되었으나 동학농민운동으로 소실되었고, 1900년대 초 재건을 시작하여 16년에 걸쳐 안채, 사랑채, 대문채, 행랑채, 초당, 연못 등으로 구성된 별서를 완성했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일부 건축물이 소실되었지만, 안채 등 일부 건물이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하동의 대표적인 가옥으로 평가받는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 등장하는 최참판댁의 배경이 된 고택으로, 조선시대 별장 한옥의 특징과 풍류적 조원 수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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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동 화사별서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이름 | 하동 화사별서 |
| 한자 표기 | 河東 花史別墅 |
| 위치 |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정서리 808-1, 정서리 66 |
| 문화재 지정 정보 | |
| 국가 | 경상남도 |
| 유형 | 유형문화재 |
| 지정 번호 | 657 |
| 지정일 | 2019년 11월 14일 |
| 소유자 | 조** |
2. 역사
'''화사별서'''(花史別墅)는 조선 개국공신 조준의 직계손인 '''화사''' '''조재희'''가 조성한 별장(농사를 목적으로 지은 별장)이다. 1890년 초반에 조성되었으나 동학농민운동(1894년)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 1900년대 초 재건을 시작하여 16년에 걸쳐 안채, 사랑채, 대문채 겸 바깥행랑채, 안행랑채, 작은행랑채, 초당, 큰 방지(연못)를 갖추었다. 목재는 소나무를 쪄서 사용하였다고 전해진다.
안행랑채는 상량문에 "開國 五百二十年 辛亥四月上四日壬甲巳詩上樑"이라 적혀 있어 1911년에, 안채는 "開國 五百二十七年戊午立柱上樑"이라 적혀 있어 1918년에 완공되었음을 알 수 있다.[1]
한국 전쟁 등으로 일부 건축물이 소실되었으나, 안채 등은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가구 수법이나 규모는 하동의 대표적인 가옥으로 손색이 없으며, 별서 내 조원 수법은 근대 별장 한옥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취병(翠屛)은 ‘비취색 병풍’을 의미하며 살아있는 식물로 조성한 생울타리로, 조선 후기 조경의 한 형태이며 사생활을 보호하는 데 사용되었다. 화사별서 대문을 들어서면 우측에 동백나무로 취병을 조성하여 대문채 겸 바깥행랑채에서 사랑채의 공간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화사별서는 하동 지역에서 '조부잣집'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최참판댁’의 실제 모델로도 알려져 있다.[1]
2. 1. 조성 배경
이 별서는 조선의 개국일등공신이자 태조, 정종, 태종 3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조준의 직계 후손인 화사 조재희가 조성하였다. 조재희는 흥선대원군, 신정왕후와 교분이 두터웠던 경성(현 서울)의 상류층 인사였다. 그는 가까운 친척의 소개로 국풍(나라의 풍수를 보는 이)을 대동하고 아버지와 함께 따뜻한 남부 지방에 좋은 기운을 가진 별장 터를 물색하던 중 현재 위치에 자리 잡게 되었다.[1]2. 2. 건립 및 소실
화사별서는 1890년대 초반에 처음 조성되었으나 동학농민운동(1894년)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1]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재건을 시작하여 16년에 걸쳐 안채, 사랑채, 대문채, 행랑채, 초당, 연못 등으로 구성된 별서를 완성하였다.[1] 목재는 소나무를 쪄서 사용하는 등 정성을 들여 건축하였다.[1] 안행랑채는 1911년, 안채는 1918년에 완공되었다.[1]2. 3. 한국전쟁과 현재
한국 전쟁 (1950-1953) 등을 겪으며 사랑채, 대문채 겸 바깥행랑채, 작은행랑채, 별당(초당) 등 일부 건축물이 소실되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채 등은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그 가구 수법이나 규모가 하동의 대표적인 가옥으로 손색이 없는 뛰어난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또한 별서 내에 방지, 연정(蓮亭), 취병(翠屛, 비취색 병풍) 등 조선 시대의 풍류적 조원(造園) 수법이 잘 적용되어 있어 근대 별장 한옥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1]3. 건축적 특징
화사별서는 조선 말기 한양 상류층이 농사를 목적으로 지은 별장으로 건축적 가치를 지닌다. 또한 좋은 기운을 찾아 별장터를 선정하고 건물을 배치하는 등 풍수지리적 가치도 엿볼 수 있다.
3. 1. 구조 및 배치
화사별서는 1890년대 초반에 조성되었으나 동학농민운동(1894년)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화사 조재희는 화사별서를 안채, 사랑채, 대문채 겸 바깥행랑채, 안행랑채, 작은행랑채, 초당, 큰 방지(연못)으로 구성하여 재건을 시작하였다. 구전에 의하면 16년에 걸쳐 건축하였으며 목재는 소나무를 쪄서 사용하였다고 한다.[1]안행랑채는 상량에「開國 五百二十年」「辛亥四月上四日壬甲巳詩上樑」이라 되어 있어 1911년에 완공되었고, 안채의 상량에「開國 五百二十七年戊午立柱上樑」이라 되어 있어 1918년에 완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화사별서는 사랑채, 대문채 겸 바깥행랑채, 작은행랑채, 별당(초당) 등 일부 건축물이 한국 전쟁(1950-1953) 등 세월의 풍파를 겪으며 소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채 등에서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1] 별서 내에는 방지, 연정(蓮亭), 취병(翠屛, 비취색 병풍) 등 조선시대의 풍류적 조원(造園) 수법이 잘 적용되어 있어 근대 별장 한옥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1]
취병(翠屛)은 ‘비취색 병풍’을 의미하며 살아있는 식물로 조성한 생울타리로, 조선 후기 조경의 한 형태이며 사생활을 보호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화사별서 대문을 들어서면 우측에 동백나무로 취병을 조성하여 대문채 겸 바깥행랑채에서 사랑채의 공간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3. 2. 건축 양식
화사별서는 조선 말기 상류층이 농사를 목적으로 지은 별장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가구 수법과 규모가 뛰어나며, 하동 지역의 대표적인 가옥으로 손색이 없다.[1] 특히 별서 내에 방지, 연정, 취병 등 조선시대의 풍류적 조원 수법이 잘 적용되어 있어 근대 별장 한옥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취병은 살아있는 식물로 조성한 생울타리로, 조선 후기 조경의 한 형태이며 사생활을 보호하는 데도 사용되었다.4. 조경
화사별서는 조선 말기 한양 상류층이 농사를 목적으로 지은 별장으로, 좋은 기운을 찾아 별장터를 선정하고 건물을 배치하는 등 풍수지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별서 내에는 방지(方池), 취병(翠屛) 등 조선 시대의 풍류적 조원 수법이 적용되었다.[1]
4. 1. 방지(方池)와 연정(蓮亭)
별서 내에는 방지(方池, 연못), 연정(蓮亭), 취병(翠屛, 비취색 병풍) 등 조선 시대의 풍류적 조원(造園) 수법이 적용되어 있어 근대 별장 한옥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1]4. 2. 취병(翠屛)
취병(翠屛)은 '비취색 병풍'을 의미하며 살아있는 식물로 조성한 생울타리로, 조선 후기 조경의 한 형태이며 사생활을 보호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화사별서 대문을 들어서면 우측에 동백나무로 취병을 조성하여 대문채 겸 바깥행랑채에서 사랑채의 공간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5. 문학적 가치
화사별서는 하동 지역에서 '조부잣집'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최참판댁'의 실제 모델로도 알려져 있다.[1] 소설 《토지》를 통해 화사별서의 역사와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6. 지정 사유
화사별서는 조선 말기 한양 상류층이 농사를 목적으로 지은 별장이라는 건축적 가치를 지닌다. 좋은 기운을 찾아 별장터를 물색하여 건물을 배치한 풍수지리적 가치, 박경리의 소설 토지 최참판댁의 모델로서 가지는 문학사적 가치를 가진 고택이다.[1] 가구 수법이나 규모가 하동의 대표적인 가옥으로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건축물이며, 별서 내에는 방지, 연정(蓮亭), 취병(翠屛, 비취색 병풍) 등 조선시대의 풍류적 조원(造園) 수법이 잘 적용되어 있어 근대 별장 한옥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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