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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데바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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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헬데바두스는 6세기 동고트 왕국의 왕으로, 테우디스의 조카였다. 그는 비티게스가 포로로 잡힌 후 왕위에 올랐으며, 로마 제국에 항복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헬데바두스는 트레비소 전투에서 승리하며 세력을 확장했으나, 541년 암살당했다. 그의 사후, 토틸라가 동고트 왕국의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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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데바두스
기본 정보
군주 칭호동고트 국왕
이탈리아 왕
재위 기간540년 - 541년
계승 방식불명
별칭힐디발트 (Ildibald)
생애
출생 시기불명
사망 시기541년
사망 장소불명
가문
왕조불명
아버지불명
어머니불명
종교
종교불명
이전과 이후

2. 생애

헬데바두스(𐌷𐌹𐌻𐌳𐌹𐌱𐌰𐌳|got, Ildibadus|일디바두스lat, Ιλδίβαδος|일디바도스grc, ? ~ 541년 5월)는 6세기 중반 동고트 왕국의 왕이었다. 그는 서고트 왕국의 왕 테우디스의 조카였다.[1]

비티게스 왕이 540년 동로마 제국의 장군 벨리사리우스에게 라벤나에서 사로잡히자, 동고트족 귀족들은 새로운 왕을 추대해야 했다. 유력한 후보였던 우라이아스가 왕위를 고사하고 헬데바두스를 추천하면서 그가 왕위에 올랐다.[2] 당시 헬데바두스는 베로나를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2][3]

왕이 된 헬데바두스는 수도를 파비아로 옮기고 동로마 제국에 맞서 세력을 확장했다. 그는 리구리아와 베네치아 지역을 장악하고, 541년 트레비소 전투에서 동로마 군대를 격파하며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다.[3][2] 이 승리로 그의 조카 토틸라트레비소의 지휘관이 되었다.[2] 그의 통치 아래 동고트 왕국은 잠시 세력을 회복하는 듯 보였고, 동로마 제국의 과도한 세금과 지휘관들의 무능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합류하기도 했다.[2]

그러나 541년, 헬데바두스는 내부 갈등으로 인해 자신을 왕으로 추천했던 우라이아스를 살해했다.[3] 얼마 지나지 않은 541년 5월, 그 역시 왕궁 연회에서 게피드족 경호원에게 암살당했다.[4][3]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루기족 출신의 에라릭이 잠시 왕위를 차지했으나, 곧 토틸라가 에라릭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라 동고트 왕국의 마지막 부흥기를 이끌게 된다.[2][3]

2. 1. 즉위 전

헬데바두스는 스페인서고트 왕국의 동고트 왕이었던 테우디스의 조카였다. 역사학자 피터 헤더는 이를 근거로 두 사람 모두 강력한 비왕족 가문 출신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1]

서기 540년, 당시 동고트 왕 비티게스동로마 제국의 장군 벨리사리우스에게 라벤나에서 포로로 잡혔다. 이때 헬데바두스의 자녀들도 함께 포로가 되었다.[2] 헬데바두스는 당시 포 강 북쪽에 남아 로마 당국에 항복하기를 거부하던 고트족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비티게스가 사로잡힌 후, 헬데바두스는 자녀들의 안전을 위해 벨리사리우스와 항복 조건을 협상하려 시도하기도 했다.[2]

비티게스가 체포되면서 동고트 왕위 계승 문제가 떠올랐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비티게스의 조카이자 숙련된 군 지휘관으로 티키눔(현재의 파비아)을 책임지고 있던 우라이아스였다. 그러나 우라이아스는 자신의 가문이 "왕족의 운"을 갖지 못했다는 이유로 왕위를 거절하고, 대신 당시 베로나를 책임지고 있던 헬데바두스를 추천했다.[2] 당시 티키눔과 베로나는 동고트족이 점유하고 있던 유일한 주요 도시였다.[3]

이에 따라 540년 헬데바두스는 동고트의 왕으로 선출되었고, 수도를 티키눔(파비아)으로 옮겼다.[2]

2. 2. 즉위와 통치

일디바드는 스페인서고트족 왕이었던 테우디스의 조카였다. 역사학자 피터 헤더는 이를 근거로 두 사람 모두 강력한 비왕족 가문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1] 540년, 당시 동고트족의 왕 비티게스라벤나에서 벨리사리우스에게 사로잡혔을 때, 일디바드의 자녀들도 함께 포로가 되었다.[2] 일디바드는 포 강 북쪽에 남아 동로마 제국에 항복하지 않은 고트족 중 한 명이었다. 비티게스가 체포된 후, 그는 자녀들의 안위 때문에 벨리사리우스와 항복 조건을 협상하려 시도하기도 했다.[2]

비티게스가 잡혀간 후, 동고트 왕위의 유력한 후보는 그의 조카이자 티키눔(현재의 파비아)을 지키던 숙련된 군사령관 우라이아스였다. 그러나 우라이아스는 자신의 가문이 "왕가의 운"을 가지지 못했다며 왕위를 거절하고, 당시 베로나를 책임지고 있던 일디바드를 추천했다.[2] 당시 티키눔과 베로나는 동고트족이 장악하고 있던 유일한 주요 도시였다.[3] 540년 왕으로 선출된 일디바드는 수도를 파비아로 옮겼다. 그는 다시 항복 협상을 시도했지만, 벨리사리우스가 비티게스 및 일디바드의 가족과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떠나면서 협상은 결렬되었고 전쟁이 재개되었다.[2] 당시 고트족의 영토는 파비아와 베로나 사이의 좁은 지역에 불과했고, 군대 규모도 1,000명이 채 되지 않았으나 점차 증가하는 추세였다.[2]

이후 일디바드는 이탈리아에 남아 있던 비잔티움 제국 지휘관들 사이의 조율 부족을 틈타 리구리아와 베네치아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했다.[3] 541년, 그는 트레비소 시 외곽에서 비잔티움 군사령관 비탈리우스와 다수의 헤룰리족 용병들과 전투를 벌였다.[2] 이 전투는 고트족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고, 비탈리우스는 간신히 도망쳤으며 헤룰리족 지도자는 전사했다.[3] 이 승리 후 일디바드는 자신의 조카 토틸라를 트레비소의 군 지휘관으로 임명했다.[2] 일디바드는 계속해서 포 계곡 전역으로 지배력을 넓혔다. 그의 군사적 성공은 고트족 사이에서 큰 지지를 얻게 했으며, 동시에 동로마 제국의 과도한 세금 징수와 지휘관들의 무능함에 불만을 품은 많은 동로마 제국 탈영병들이 그의 휘하로 들어왔다.[2]

541년, 일디바드는 자신을 왕으로 추천했던 우라이아스를 살해했다.[3] 역사가 프로코피우스는 이 사건이 일디바드의 아내가 우라이아스 아내의 사치스러운 생활에 모욕감을 느껴 촉발되었다고 기록했다.[3] 그러나 헤르비히 볼프람은 이를 프로코피우스가 정치적 사건을 개인적인 문제로 축소하려는 경향이 반영된 것이라고 보며, 실제 이유는 비티게스 가문이 루기족 등 비(非)고트족 세력과 연합하여 일디바드에 대항하려는 음모를 꾸몄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2]

어느 쪽이든, 우라이아스 살해 직후인 541년 5월, 일디바드는 왕궁 연회 도중 자신의 게피드족 경호원 벨라스에게 살해당했다. 벨라스는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자신의 고트족 연인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된 것에 앙심을 품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전해진다.[4][3] 일디바드 사후 마땅한 고트족 후계자가 없자, 루기족은 그들의 지도자 에라릭을 왕으로 추대했다.[2] 그러나 에라릭은 고트족을 배신하고 비밀리에 제국 측에 돈을 받고 왕국을 넘기려 했다.[3] 이에 파비아의 고트족들은 일디바드의 조카인 토틸라에게 왕위를 제안했다.[2] 당시 토틸라는 라벤나의 제국 사령관과 협상 중이었으나, 왕위를 수락하는 조건으로 에라릭의 제거를 요구했다.[2] 541년 10월, 에라릭이 살해되자 토틸라는 동고트족의 새로운 왕으로 즉위하여 이후 10년 이상 왕국을 이끌게 된다.[2]

2. 3. 죽음

541년, 헬데바두스는 우라이아스를 살해했다.[3] 프로코피우스는 헬데바두스의 아내가 우라이아스 아내의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에 불만을 품어 살해가 일어났다고 기록했지만,[3] 헤르비히 볼프람은 이를 프로코피우스가 정치적 사건의 원인을 개인적인 문제로 돌리려는 시도로 보았다. 볼프람은 우라이아스 살해의 실제 이유가 비티게스 가문이 루기족 등 비고트족과 손잡고 헬데바두스에 대항하려는 음모를 꾸몄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2]

어쨌든, 541년 5월 헬데바두스는 왕궁 연회 도중 자신의 게피드족 경호원 벨라스에게 살해당했다. 벨라스는 자신의 고트족 연인이 자신이 없는 사이에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된 것에 앙심을 품고 범행을 저질렀다.[4][3] 헬데바두스 사후 마땅한 고트족 후계자가 없자, 루기족은 자신들의 지도자 에라릭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다.[2] 그러나 에라릭은 고트족을 배신하고 비잔틴 제국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돈을 받고 왕국을 넘기려 했다.[3] 이에 파비아의 고트족들은 헬데바두스의 조카인 토틸라에게 왕위를 제안했다.[2] 당시 라벤나의 제국 사령관과 협상 중이던 토틸라는 에라릭을 제거하는 조건으로 왕위를 수락했다.[2] 결국 541년 10월, 에라릭이 살해되고 토틸라동고트족의 왕으로 즉위하여 이후 10년 이상 통치하게 된다.[2]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Rome Resurgent: War and Empire in the Age of Justinian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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