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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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세 부에나벤투라 두루티는 스페인 내전 당시 무장 저항 세력을 이끌었던 아나키스트 지도자이다. 레온에서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UGT 노조 활동을 시작했으며, 1917년 파업 참여 후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후 스페인으로 돌아와 로스 솔리다리오스를 결성하고, 알폰소 13세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의 집권 이후에는 라틴 아메리카로 망명했다가 귀국하여 FAI와 CNT에서 활동했다. 스페인 내전 발발 후에는 바르셀로나 방어에 기여하고, 두루티 부대를 이끌었으며, 1936년 마드리드 방어 중 사망했다. 그는 억압받는 노동자 계급의 해방을 위해 헌신한 혁명가로 기억되며, "우리는 폐허가 두렵지 않다"는 그의 말은 아나키즘 운동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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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세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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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
| 본명 | 호세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두망게 |
| 출생일 | 1896년 7월 14일 |
| 출생지 | 레온, 스페인 |
| 사망일 | 1936년 11월 20일 |
| 사망지 | 마드리드, 스페인 |
| 직업 | 정비공 출신 사회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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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 | |
| 정당 | 무소속 |
| 사상 | |
| 관련 이념 | 아나키즘 자율주의 |
2. 생애
스페인 레온에서 철도 노동자이자 자유지상주의를 신봉한 아버지 산티아고 두루티와 어머니 아나스타샤 두만주 사이에서 8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두루티의 형제 중 한 명은 1934년 아스투리아스 봉기에서, 다른 한 명은 마드리드 전선에서 파시스트와 싸우다 목숨을 잃었다.[1]
14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철도 정비공으로 일했으며, 아버지처럼 노동총동맹(UGT])에 가입하여 노동 운동에 참여했다. 1917년 파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나 정부의 무력 진압으로 많은 사상자와 체포자가 발생하자, 프랑스로 망명하여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며 아나키즘 사상을 확립했다.[1]
스페인으로 돌아온 후 바스크 지방 산세바스티안에서 여러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준군사 조직 en:로스 호스티시에로스(복수자들)를 결성하고 알폰소 13세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후 전국노동자연합(CNT) 대표의 권유로 바르셀로나로 이동하여 노동자 조직화에 힘썼으며, en:로스 솔리다리오스를 결성하여 활동했다. 이들은 추기경 후안 솔데비아 로메로 암살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 집권 이후 바르셀로나 병영 공격을 감행했으나 실패하고 라틴 아메리카로 망명했다.[1]
이후 스페인으로 돌아와 전국노동자연합(CNT)와 en:이베리아 아나키스트 연합(FAI) 내에서 전투적인 그룹으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이로 인해 CNT 내 개혁주의자들은 앙헬 페스타냐(en)를 중심으로 en:신디칼리스트당을 결성하며 분리되었다.[1]
2. 1. 젊은 시절
스페인 레온에서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두루티는 1910년, 14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레온 철도 조차장에서 정비공으로 일했다. 그는 아버지처럼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며 UGT(노동총동맹) 노조에 가입했다. 1917년 8월, 정부가 고용주와 노조 간의 합의를 번복하자 두루티는 파업에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파업을 무력 진압했고, 70여 명이 사망하고 500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2000여 명은 재판 없이 투옥되었다.[1]두루티는 프랑스로 망명하여 망명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며 아나키즘 사상을 확립했다. 1917년 가을부터 1920년 초까지 파리에서 기계공으로 일하다가 스페인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바스크 지방 산세바스티안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수베르비올라, 루이즈, 알다바트레쿠, 마르셀리노 델 캄포 등 아나키스트들을 만나 준군사 조직인 en:로스 호스티시에로스(복수자들)를 결성했다. 1921년, 이들은 알폰소 13세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1]
이후 전국노동자연합(CNT) 대표의 설득으로 바르셀로나로 가서 노동자 조직화에 힘썼다. 바르셀로나는 아나키스트와 생디칼리스트들이 억압받던 곳이었다. 두루티는 후안 가르시아 올리버, 프랑시코스 아스카소 등과 함께 en:로스 솔리다리오스를 결성했다. 1923년, 이들은 추기경 후안 솔데비아 로메로 암살 사건에 연루되었다. 같은 해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가 정권을 잡자, 두루티와 동지들은 프랑스 인근 국경에서 바르셀로나 병영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사망했다. 이후 두루티, 아스카소, 올리버는 라틴 아메리카로 망명했다.[1]
두루티와 동지들은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돌아와 en:이베리아 아나키스트 연합(FAI)와 전국노동자연합(CNT) 내에서 전투적 그룹으로 영향력을 키웠다. CNT 내에서 두루티의 영향력이 커지자 en:앙헬 페스타냐를 따르는 개혁주의자들은 en:Syndicalist Party를 결성하며 분리되었다.[1]
2. 2. 스페인 내전
1936년,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군사 쿠데타에 맞서 민병대를 조직하고, 고데드 장군이 바르셀로나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려 했던 시도를 저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1] 아타라사나스 병영 전투에서 두루티의 오랜 동지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아스카소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1] 일주일도 안 돼서 1936년 7월 24일 두루티는 바르셀로나에서 사라고사까지 무장 아나키스트들을 이끌었다. (이들은 이후 두루티 부대로 알려진다.)[1] 카스페에서의 피묻은 전투 후에 그들은 육군 장교의 조언에 따라 사라고사에 대한 공격을 연기하고 피나 데 에브로에 멈춰서게 된다.[1]3. 죽음
1936년 11월 12일, 아나키스트 지도자 페데리카 몬세니의 설득으로 두루티는 마드리드 방어를 위해 민병대를 이끌고 이동했다. 11월 19일, 카사 데 캄포에서 역습을 이끌던 중 총상을 입었다. 아벨 파스의 ''Durruti: The People Armed''(1976)에 따르면, 두루티는 프랑코 세력이 점령한 임상 병원 근처에서 총격전을 벌이다 총상을 입었다.[2]
앤터니 비버의 ''스페인 내전''(1982)에서는 두루티가 동료의 기관권총 오발 사고로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두루티는 1936년 11월 20일 리츠 호텔에 마련된 임시 수술실에서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총알은 심장에 박혔으며, 기록된 사인은 "흉막 출혈로 인한 사망"이었다. 의사들은 총알의 경로와 상처의 성격을 기록했지만, 총알의 구경은 기록하지 않았다.[2]
두루티의 죽음은 사기를 고려하여 즉시 발표되지 않았다. 그의 시신은 장례를 위해 바르셀로나로 운송되었으며, 몬주이크 묘지로 향하는 장례 행렬에는 50만 명 이상의 추모객들이 동행했다.[2]
4. 유산
처음에 두루티의 죽음은 사기를 이유로 발표되지 않았다. 그의 시신은 장례를 위해 바르셀로나로 운송되었다. 몬주이크 묘지로 향하는 장례 행렬에는 50만 명 이상의 추모객들이 동행했다.[2]
5. 갤러리

참조
[1]
서적
Durruti in the Spanish Revolution
AK
[2]
뉴스
Durruti Dumange, José Buenaventura: 2 000 000 anarchists fight for revolution says Spanish leader
193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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