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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프랑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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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1892년 스페인에서 태어나 군인의 길을 걸었고, 1936년 스페인 내전에서 국민군을 이끌며 승리하여 1975년 사망할 때까지 스페인을 독재 통치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추축국에 협력하며 중립을 지켰으나, 연합국의 승리로 인해 처벌을 면했다. 프랑코는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며 반대 세력을 탄압했고, 가톨릭 국가 수호자를 자처하며 보수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의 통치 기간은 경제 성장을 이루었지만, 부정부패와 사회적 불평등 또한 심화되었다. 프랑코 사후, 스페인은 민주화 과정을 거쳤으며, 그의 유해 이장과 관련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프랑코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며, 그의 삶과 통치는 영화, 음악, 문학 등 다양한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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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프랑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64년의 프랑코
이름프란시스코 프랑코
로마자 표기Francisco Franco Bahamonde (프란시스코 프랑코 바아몬데)
출생일1892년 12월 4일
출생지페롤, 스페인
사망일1975년 11월 20일
사망지마드리드, 스페인
배우자카르멘 폴로
자녀마리아 델 카르멘
거주지엘 파르도, 마드리드
교육톨레도 보병학교
종교천주교
서명
정치
직책국가 원수
임기 시작1936년 10월 1일
임기 종료1975년 11월 20일
총리자신 (1938년–1973년 6월)
루이스 카레로 블랑코 (1973년 6월–12월)
카를로스 아리아스 나바로 (1973년 12월–1975년)
이전 국가 원수미겔 카바넬라스
마누엘 아사냐
다음 국가 원수후안 카를로스 1세 (스페인 국왕으로)
직책 2총리
임기 시작 21938년 1월 30일
임기 종료 21973년 6월 9일
이전 총리프란시스코 고메스-호르다나
후안 네그린
다음 총리루이스 카레로 블랑코
부총리프란시스코 고메스호르다나 (1938–1939)
없음 (1939–1962)
아구스틴 무뇨스 그란데스 (1962–1967)
루이스 카레로 블랑코 (1967–1973)
직책 3팔랑헤당 국가 주석
임기 시작 31937년 4월 19일
임기 종료 31975년 11월 20일
이전 국가 주석직책 신설
다음 국가 주석카를로스 아리아스 나바로
소속 정당팔랑헤당
군사 복무
군대스페인군
복무 기간1907년–1975년
계급대장
육군
공군
해군
지휘모든 군 (대원수)
참전제2차 멜리야 캠페인
리프 전쟁
1934년 혁명
스페인 내전
스페인 공화주의자 게릴라
이프니 전쟁
가족
친척니콜라스 프랑코 (형)
라몬 프랑코 (형)
(사촌)
(사촌)
기타
묻힌 곳전몰자의 계곡, 마드리드 (1975년 11월 23일–2019년 10월 24일)
밍고루비오 묘지, 마드리드 (2019년 10월 24일 이후)
소속
소속 국가스페인 왕국 (1907–1931)
스페인 공화국 (1931–1936)
스페인국 (1936–1975)

2. 초기 생애

프란시스코 프랑코 바하몬데는 1892년 12월 4일 갈리시아의 페롤에서 해군 가문에서 태어났다. 13일 후, 산 프란시스코 군 교회에서 프란시스코 파울리노 에르메네질도 테오둘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출생 당시 세례명은 '''프란시스코 파울리노 에르메네힐도 테오둘로 프랑코 바하몬데 살가도-아라우호 이 파르도 데 라마''' (Francisco Paulino Hermenegildo Teódulo Franco Bahamonde Salgado-Araujo y Pardo de Lamaes)였다.[127]

그는 다섯 형제 중 둘째였으며, 형 니콜라스, 여동생 필라르, 마리아 데 라 파스, 남동생 라몬이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해군 주계 준장까지 진급했다.[128] 프랑코는 어머니를 인생의 스승으로 여겼다. 프랑코와 바하몬데는 스페인에서 유대계 성씨로, 프랑코를 유대계로 보는 시각도 있다.[129]

스페인-미국 전쟁의 결과로 스페인은 해군과 식민지의 상당 부분을 잃었고, 해군사관학교는 1906년부터 1913년까지 신입생을 받지 않았다. 이에 프랑코는 육군에 입대하기로 결심하고, 1907년 톨레도의 육군 보병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10년에 졸업 후 소위가 되었다.

2. 1. 가족 및 성장 배경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1892년 12월 4일 갈리시아의 페롤에서 해군 가문에서 태어났다. 세례명은 프란시스코 파울리노 에르메네질도 테오둘로였다.

세례식 날인 1892년 12월 17일, 아기 프란시스코를 안고 있는 부모님


프랑코 가문은 스페인 해군에 종사했으며, 2세기에 걸쳐 6대에 걸쳐 해군 장교(여러 명의 제독 포함)를 배출했다. 프랑코의 아버지 니콜라스 프랑코 살가도-아라우호(1855-1942)도 해군 장교였다.

프랑코의 어머니 마리아 델 필라르 바하몬데 이 파르도 데 안드라데(1865-1934)는 중상류층 로마 가톨릭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 라디슬라오 바하몬데 오르테가는 페롤 항구의 해군 장비 관리관이었다. 프랑코의 부모는 1890년 페롤의 산 프란시스코 교회에서 결혼했다.

프랑코는 두 형제 니콜라스, 라몬과 두 자매 마리아 델 필라르, 마리아 데 라 파스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형 니콜라스는 스페인 해군 장교이자 외교관이었다. 라몬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비행사이자 프리메이슨이었으며, 좌익 정치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코의 아버지는 해군 장교로 중장 계급까지 올랐으나, 프랑코가 열네 살이었을 때 마드리드로 이사를 가면서 가족을 버렸다. 프랑코는 아버지에게서 큰 학대를 받지는 않았지만, 평생 그를 거의 무시했다. 반면 어머니에게서는 절제, 금욕, 자제, 가족 연대 및 가톨릭에 대한 존중을 배웠다.

스페인-미국 전쟁의 결과로 스페인은 해군의 상당 부분과 대부분의 식민지를 잃었다. 해군사관학교는 1906년부터 1913년까지 새로운 입학생을 받지 않았고, 프랑코는 스페인 육군에 입대하기로 결심, 1907년 톨레도에 있는 보병학교에 입학했다.

14세의 프랑코는 반에서 가장 어린 학생 중 한 명이었으며, 키가 작고 체구가 작아 괴롭힘을 당했다. 성적은 평균이었지만, 뛰어난 기억력 덕분에 학업적으로는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1910년 7월 소위로 졸업했는데, 312명의 생도 중 251등이었다.

프랑코는 1912년 6월 19세의 나이에 중위로 진급했다. 2년 후, 그는 모로코로 파견되었다.

프란시스코와 그의 형 라몬, 북아프리카, 1925년

2. 2. 군 입대 및 교육

해군 장교였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프랑코도 해군에 입대하려 했다.[128] 그러나 스페인-미국 전쟁의 결과로 스페인은 해군과 식민지의 상당 부분을 잃었고, 해군사관학교는 1906년부터 1913년까지 신입생을 받지 않았다. 이에 프랑코는 육군에 입대하기로 결심하고, 1907년 톨레도의 육군 보병 사관학교에 입학했다.[127]

14세의 프랑코는 사관학교에서 가장 어린 학생 중 한 명이었으며, 키가 작고 체구가 작아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 뛰어난 기억력 덕분에 학업에는 어려움이 없었지만, 체력 검사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1910년 7월, 프랑코는 312명의 생도 중 251등으로 소위로 졸업했다. 이는 성적보다는 작은 체격과 어린 나이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1912년, 19세의 나이에 중위로 진급한 프랑코는 2년 후 모로코로 파견되었다. 당시 모로코에서는 원주민들의 반란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스페인 장교들은 큰 손실을 입었지만, 전장에서 공로를 통해 승진할 기회도 얻었다. 프랑코는 유능한 장교로 빠르게 명성을 얻었다.

3. 군 경력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1931년 스페인 제2공화국 수립 당시 군주제 종식을 유감스럽게 생각했지만, 공화국의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1] 그러나 마누엘 아사냐 임시 전쟁장관이 사관학교를 폐쇄하면서 프랑코는 공화국과 충돌하게 되었다.[2] 아사냐는 프랑코의 작별 연설이 모욕적이라고 생각했고, 프랑코는 6개월 동안 감시를 받았다.[3]

1932년, 프랑코는 라 코루냐에서 지휘권을 받았고, 호세 산후르호의 쿠데타 시도에는 관여하지 않았다.[4] 1933년, 아사냐의 군사 개혁으로 준장 명단에서 24위로 강등되었으나, 곧 발레아레스 제도의 군 지휘권을 받았다.[5]

1934년 아스투리아스 광부 파업 진압 작전을 지휘하면서, 프랑코는 "마치 외국 적으로 스페인 민간인을 상대로 군대를 사용할 준비가 된 장교"로 부상했다.[6] 그는 이 반란을 "국경 전쟁"으로 묘사하며, 스페인 외인부대와 모로코 정규군 원주민으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었다.[7]

이후 프랑코는 아프리카 군대의 총사령관(1935년 2월)을 거쳐, 1935년 5월 19일부터 총참모장을 맡았다.[8] 1936년 총선에서 인민전선이 승리한 후, 프랑코는 호세 칼보 소텔로와 함께 군사 쿠데타를 옹호하며 반공주의 운동을 선동했다.[9] 그는 카나리아 제도의 군 사령관으로 파견되었으나, 에밀리오 몰라 장군이 주도하는 음모에 참여했다.[10]

3. 1. 모로코 전쟁 참전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벌어진 여러 전투에 참전하여 군사적 경력을 쌓았다. 특히 리프 전쟁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빠른 승진을 하였다.

3. 2. 군 내 승진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이력이 있는 프랑코는 갈리시아 지역 출신으로 육군 사관 학교에서 군사 교육을 받았다. 32세의 젊은 나이에 장군이 되어 군 내에서 빠르게 세력을 확장했다.[1]

1936년 2월 23일, 카나리아 제도의 군 사령관으로 파견되었는데, 프랑코는 이를 ''데스티에로''(추방)로 여겼다.[2] 같은 해 6월, 라 에스페란사 숲의 엘 로사리오에서 군사 쿠데타를 모의하는 비밀 회의가 열렸다.[3] 프랑코는 겉으로는 7월까지 모호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결국 반군에 합류하여 아프리카 군대 사령관을 맡았다.[4]

1936년 7월 18일 쿠데타(프론누시아미엔토) 이후, 아프리카 스페인군 3만 명의 지휘권을 장악했다.[5] 그는 공화국에 충성하는 고위 장교 200명가량을 요약 처형했다.[6] 베니토 무솔리니빌헬름 카나리스의 도움으로 군사 지원을 받아 병력을 이베리아 반도로 이동시켰다.[7][8]

1937년 2월, 소련의 군사 지원은 줄어들고 제한적인 경제 지원으로 대체되었다.

3. 3. 제2공화국 시기

1931년 공화 혁명 당시 프랑코는 공화 정부 측에 가담했다. 그러나 인민 전선이 1936년 총선거에서 승리하자, 프랑코는 중앙 정치에서 멀어지게 되었다.[138]

1936년 7월 17일, 프랑코는 모로코인 용병을 포함한 자신의 직속 군대를 이끌고 인민전선 정부에 반대하는 군사반란을 일으켰고, 이는 스페인 내전으로 이어졌다.[138]

프랑코와 다른 반군 지휘관들, 1936~1939년경


반란의 지정된 지도자였던 호세 산후르호 장군이 1936년 7월 20일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하면서, 국민군 지역에서는 "정치 생활이 중단되었다."[138] 초기에는 군사 지휘만이 중요했고, 지역 사령부로 나뉘었다. 에밀리오 몰라는 북부, 곤살로 케이포 데 야노는 세비야에서 안달루시아, 프랑코는 독립 사령부, 미겔 카바넬라스는 사라고사에서 아라곤을 지휘했다. 모로코 주둔 스페인군은 후안 야궤 장군과 호세 바렐라 대령이 지휘하는 두 개의 부대로 나뉘었다.

7월 24일, 부르고스를 중심으로 국방위원회라는 조정 ''훈타''가 설립되었다. 최고위 장군인 카바넬라스가 명목상 지도자였고, 초기에는 몰라를 포함한 다른 세 명의 장군과 두 명의 대령이 포함되었으며, 프랑코는 8월 초에 추가되었다.[138] 9월 21일, 프랑코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기로 결정되었는데, 카바넬라스만 반대했다. 그리고 약간의 논의 끝에 케이포 데 야노와 몰라로부터 미온적인 동의를 얻어 정부 수반직도 맡게 되었다.[138] 7월 말 히틀러가 국민군에 대한 독일의 모든 지원을 프랑코에게 제공하기로 결정한 사실이 그의 우위 확보에 도움이 되었다.[138]

몰라는 쿠데타 시도의 주요 기획자로서 신뢰를 잃었고, 카를리스트 왕당파와 강하게 연계되어 있었지만, 팔랑헤와는 관계가 없었고, 독일과의 관계도 좋지 않았다. 케이포 데 야노와 카바넬라스는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의 독재에 반기를 들었기 때문에 신뢰를 잃었고, 팔랑헤 지도자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알리칸테에 수감되었다. 프랑코의 이전 정치적 무관심은 그가 달래야 할 모든 파벌들에 적극적인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는 최근 몇 달 동안 독일과 이탈리아 모두와 협력해 왔다.[138]

1936년 10월 1일, 부르고스에서 프랑코는 국민군의 ''헤네랄리시모''이자 ''헤페 델 에스타도''(국가 원수)로 공개적으로 선포되었다.[138] 1937년 6월 2일 몰라가 또 다른 항공 사고로 사망하면서, 1933년부터 1935년까지 공화국에 대한 음모를 조직했던 지도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138]

4. 스페인 내전

1935년 말, 알칼라-사모라 대통령은 알레한드로 레르욱스 총리를 축출하고, 새 선거를 발표했다.[7] 인민전선과 프렌테 나시오날의 대립 속에 치러진 선거는 사실상 무승부였으나, 좌파 폭도들이 개입하여 결과를 왜곡했다는 주장이 있다.[7] 스탠리 G. 페인은 이 과정이 광범위한 법률 및 헌법 위반을 포함한 노골적인 선거 부정이라고 주장한다.[8]

1936년 2월, 마누엘 아사냐가 이끄는 새 내각이 구성되었다.[7] 호세 칼보 소텔로는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군사 쿠데타를 옹호했고, 에밀리오 몰라 장군과 함께 모로코에서 반공 운동을 선동했다.[7] 프랑코는 카나리아 제도로 파견되었으나, 몰라 장군의 음모는 계속되었다.[7]

1936년 6월, 프랑코는 군사 쿠데타에 대한 비밀 회의에 참석했다.[9] 7월, 호세 카스티요 살해에 대한 보복으로 우익 야당 지도자 칼보 소텔로가 암살되면서 쿠데타가 촉진되었다.[12] 1936년 7월 17일, 아프리카 군대가 반란을 일으켰고, 다음 날 프랑코는 아프리카 군대 사령관에 취임했다.[13]

반군은 스페인의 3분의 1을 장악했지만, 해군 부대는 공화파에 남아 프랑코를 고립시켰다. 쿠데타는 실패했지만, 스페인 내전이 시작되었다. 프랑코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군사 작전을 직접 지휘하며, 조직, 행정, 군수, 외교에서 능력을 발휘했다.[28] 마드리드 공격 실패 후, 프랑코는 점진적인 접근 방식으로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주력했다.[28]

독일이탈리아는 프랑코에게 군사 지원을 제공했지만, 전쟁 지휘에 대한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29] 독일은 기술 강사와 물자를 지원했고,[29] 이탈리아군은 대규모 작전에 참여했다.[29] 프랑코는 독일과 이탈리아군의 최고 사령관이었지만, 그들은 국민군 지역의 정치에 간섭하지 않았다.[31]

국민군의 승리는 인민전선 정부의 실책, 프랑코의 리더십, 외교, 해군 활용, 외국 원조, 공군력 등 다양한 요인에 기인한다.[31] 공화파는 분열과 내분에 시달렸고, 종교에 대한 캠페인은 가톨릭의 지지를 약화시켰다.[31]

1939년 3월 28일, 마드리드가 함락되고 다음 날 발렌시아가 항복하면서, 1939년 4월 1일 프랑코의 승리가 선포되었다.

4. 1. 내전 발발 배경

1931년 공화 혁명으로 공화 정부가 들어섰지만, 프랑코는 이에 가담했다가 1936년 총선에서 인민전선이 승리하자 중앙 정치에서 멀어졌다. 1936년 7월 17일, 프랑코는 모로코인 용병을 포함한 자신의 직속 군대를 이끌고 인민전선 정부에 반대하는 군사반란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스페인 내전의 시작이었다.[3]

1936년 7월 20일, 반란의 원래 지도자였던 호세 산후르호 장군이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하면서 국민군 지역에서는 정치 생활이 중단되었다.[6] 초기에는 군사 지휘만이 중요했으며, 지역 사령부로 나뉘었다.[6] 에밀리오 몰라는 북부, 곤살로 케이포 데 야노는 세비야에서 안달루시아, 미겔 카바넬라스는 사라고사에서 아라곤을 지휘했고, 프랑코는 독립 사령부를 지휘했다.[6] 모로코 주둔 스페인군은 후안 야궤 장군과 호세 바렐라 대령이 지휘하는 두 부대로 나뉘었다.[6]

7월 24일, 부르고스를 중심으로 국방위원회라는 조정 ''훈타''가 설립되었다.[7] 최고위 장군인 카바넬라스가 명목상 지도자였고, 몰라 등 다른 세 명의 장군과 두 명의 대령이 포함되었으며, 프랑코는 8월 초에 추가되었다.[7] 9월 21일, 프랑코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기로 결정되었고, 케이포 데 야노와 몰라의 미온적인 동의를 얻어 정부 수반직도 맡게 되었다.[7] 히틀러가 국민군에 대한 독일의 모든 지원을 프랑코에게 제공하기로 결정한 것이 그의 우위 확보에 도움이 되었다.[7]

몰라는 쿠데타 시도의 주요 기획자였지만 신뢰를 잃었고, 카를리스트 왕당파와 강하게 연계되어 있었지만 팔랑헤와는 관계가 없었고, 독일과의 관계도 좋지 않았다.[8] 케이포 데 야노와 카바넬라스는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의 독재에 반기를 들었기 때문에 신뢰를 잃었고, 팔랑헤 지도자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알리칸테에 수감되었다.[8] 프랑코의 이전 정치적 무관심은 그가 달래야 할 파벌들에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는 독일과 이탈리아 모두와 협력해 왔다.[8]

1936년 10월 1일, 부르고스에서 프랑코는 국민군의 ''헤네랄리시모''이자 ''헤페 델 에스타도''(국가 원수)로 공개 선포되었다.[9]

4. 2. 군사 반란과 내전 초기

1936년 7월 17일, 프랑코모로코인 용병을 포함한 자신의 직속 군대를 이끌고 인민전선 정부에 반대해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스페인 내전의 시작이었다.[7] 스탠리 G. 페인은 이 과정이 광범위한 법률 및 헌법 위반을 포함한 노골적인 선거 부정이라고 주장한다.[8]

프랑코는 반란군 내에서 빠르게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는 아프리카 군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스페인 내전 발발 직후에는 국민 정부의 주석 및 군 총사령관이 되었다.[9]

프랑코는 뛰어난 군사 전략가였다. 그는 스페인 내전 초기 전투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그의 군대는 독일아돌프 히틀러이탈리아베니토 무솔리니의 도움으로 1939년 수도 마드리드를 함락시켰다.[10]

1937년 살라망카에서 열린 프랑코 지지 시위. 시위대는 프랑코의 초상이 그려진 깃발을 들고 있으며, 군중은 로마식 경례를 하고 있다.


내전 초기, 프랑코는 공화파 세력에 맞서 싸우기 위해 나치 독일콘도르 군단이탈리아 왕국의 자원군단 등 외국의 지원을 받았다. 특히, 마요르카에 주둔한 이탈리아 항공기는 바르셀로나를 13차례 폭격하여 민간인을 겨냥한 44톤의 폭탄을 투하했다.[11] 또한, 이탈리아와 독일 비행기는 프랑코의 요청으로 게르니카 바스크 마을을 폭격했다.[12]

1937년, 프랑코는 여러 정당을 통합하여 팔랑헤 에스파뇰라 트라디시오날리스타 이 데 라스 후타스 데 오펜시바 나시오날-신디칼리스타(FET y de las JONS)라는 단일 정당을 창설하고, 스스로 당수가 되었다.[13] 이 정당은 1939년에 유일한 합법 정당이 되었다.

4. 3. 권력 장악

1936년 7월 17일, 프랑코는 모로코인 용병을 포함한 자신의 직속 군대를 이끌고 인민전선 정부에 반대해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스페인 내전의 시작이었다.[15] 반란 초기, 프랑코는 스페인령 모로코 보호령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는 공화국에 충성하는 200명가량의 고위 장교들을 처형했고, 그의 경호원은 마누엘 블랑코에 의해 사살되었다.[15]

프랑코는 지브롤터 해협이 공화국군에 의해 봉쇄되자, 베니토 무솔리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무솔리니는 무기와 비행기를 제공했고,[16] 빌헬름 카나리스의 설득으로 아돌프 히틀러 역시 Ju 52 수송기 20대와 하인켈 복엽 전투기 6대를 지원했다.[17][18] 7월 20일부터 프랑코는 이 항공기를 이용하여 1,500명의 병력을 세비야로 수송했다.[19] 7월 25일부터 독일과 이탈리아로부터 더 많은 군사 지원을 받아 8월 5일에는 3,000명의 병력을 수송하는 데 성공했다. 7월 29일부터 8월 15일 사이에는 약 1만 5천 명의 병력이 추가로 이동했다.[19]

공산당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은 게오르기 디미트로프팔미로 톨리아티를 스페인으로 파견하여 인민전선을 지원했다. 8월부터 소련의 지원이 시작되어 1937년 2월까지 탄약, 소총, 기관총 등을 실은 배가 스페인 항구에 도착했다. 국제 여단도 조직되어 돌격대로 배치되었으나 많은 사상자를 냈다.

8월 초, 프랑코는 후안 야게의 지휘하에 마드리드로 진군하는 기둥을 조직했다. 8월 11일 메리다를, 8월 15일 바다호스를 함락시켰다.[20] 무솔리니는 ''코르포 트루페 볼론타리에''(CTV)를, 히틀러는 루프트바페 비행대를 지원했다. 9월 21일, 프랑코는 알카사르 요새의 수비대를 해방시키기 위해 톨레도로 우회하여 9월 27일에 목표를 달성했다.[21] 이 결정으로 인민전선은 마드리드 방어를 강화할 시간을 벌었다.[22] 소련의 지원도 있었다.[23]

히틀러는 프랑코의 완전한 승리보다는 전쟁의 지속과 지중해의 긴장 유지를 원했다.[26][27] 그는 프랑코가 스페인을 완전히 장악하면 이탈리아의 개입이 줄어들 것을 우려했다. 1937년 2월까지 소련의 군사 지원은 줄어들고 경제 지원으로 대체되었다.

1937년 4월 19일, 프랑코는 파랑헤와 카를리스트 왕당파를 파랑헤 에스파뇰라 트라디시오날리스타 이 데 라스 후타스 데 오펜시바 나시오날-신디칼리스타(FET y de las JONS)로 강제 합병했다. 이 정당은 1939년에 유일한 합법 정당이 되었다. 프랑코는 자신을 FET의 ''헤페 나시오날''(국가 원수)로 임명하고, 4월 24일 파랑헤의 거수 경례를 공식 경례로 채택했다. 1937년에 “마르차 레알”이 국가로 복원되었으나, 파랑헤는 이를 반대하고 “카라 알 솔”을 불렀다.

프랑코는 라몬 세라노 수녜르를 통해 FET JONS를 장악하고 당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FET JONS는 파시스트 정당 정권을 수립하지 못하고 종속적인 지위로 밀려났다. 프랑코는 카를리스트 마누엘 팔 콘데를 가택 연금하고, 마누엘 에디야를 포함한 수백 명의 구 파랑헤주의자들을 투옥했다. 프랑코는 공화파의 반교권주의를 이용하여 카를리스트들을 달랬고, 자신을 "가톨릭 스페인"의 수호자로 묘사했다.

4. 4. 내전 수행 과정

1936년 7월 17일, 프랑코는 모로코인 용병을 포함한 자신의 직속 군대를 이끌고 인민전선 정부에 반대해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스페인 내전의 시작이었다.[9]

프랑코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직접 군사 작전을 지휘했다. 그는 군사 전략적 천재는 아니었지만, 조직, 행정, 군수 및 외교에서 매우 효과적이었다.[28] 1936년 11월 마드리드 공격 실패 후, 프랑코는 과감한 기동보다는 점진적인 접근 방식으로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주력했다. 1938년 6월 카탈루냐 대신 발렌시아로 진격하는 것을 선호한 그의 결정은 군사 전략적 관점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28] 발렌시아, 카스테욘, 알리칸테에서는 마지막 공화파 군대가 프랑코에게 패배했다.

독일이탈리아는 프랑코에게 군사 지원을 제공했지만, 두 강대국의 전쟁 지휘에 대한 영향력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이탈리아군은 항상 효과적이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대규모 작전에 다수 참여했다. 독일은 스페인에 미미한 수의 전투 인원을 파견했지만, 기술 강사와 현대적인 물자를 통해 국민군을 지원했다.[29] 여기에는 약 200대의 탱크와 600대의 항공기가 포함되어 있었는데,[30] 이는 국민군 공군이 전쟁 대부분 기간 동안 하늘을 지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프랑코의 독일과 이탈리아군 지휘는 특히 콘도르 군단 지휘에 있어 제한적이었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그들의 최고 사령관이었고, 그들은 국민군 지역의 정치에 간섭하지 않았다.[31] 명예를 위해 전쟁이 끝날 때까지 프랑코를 계속 지원하기로 결정되었고, 이탈리아와 독일군은 마드리드에서 최종 승리의 날에 열병식을 거행했다.

국민군의 승리는 다양한 요인에 기인한다. 인민전선 정부는 전쟁 직전 몇 주 동안 잠재적 위험을 무시하고 반대파를 소외시키는 정책을 펼쳐 더 많은 사람들이 반란에 가담하도록 부추겼다. 반란군은 프랑코가 권력을 강화하고 다양한 우익 세력을 통합하는 데 필요한 리더십을 제공함으로써 우수한 군사적 결속력을 갖추었다.[31] 그의 외교는 이탈리아와 독일로부터 군사 원조를 확보했고, 영국과 프랑스를 전쟁에서 멀리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반란군은 소규모 해군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스페인 함대에서 가장 강력한 함선을 확보하고 기능적인 장교단을 유지한 반면, 공화파 수병들은 1936년 카르타헤나[31]와 엘 페롤[31]에서 반란군에 가담한 많은 해군 장교들을 암살했다. 국민군은 공화파의 소극적인 해군 전략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함선을 사용하여 반대파를 추격했다.

국민군은 전쟁 수행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외국 원조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원조를 더 효율적으로 사용했다.[31] 그들은 공화파로부터 획득한 무기로 병력을 증강했고,[31] 공화파 포로의 절반 이상을 국민군에 성공적으로 통합했다.[31] 반란군은 더 큰 공군을 건설하고, 특히 지상 작전 지원과 폭격에서 공군을 더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고, 1937년 중반 이후로 일반적으로 공중 우세를 누렸다. 이러한 공군력은 국민군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31]

공화파는 분열과 내분에 시달렸고,[31] 공화파 지역의 혁명으로 인해 방해를 받았다. 동원이 방해받고, 공화파의 이미지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손상되었고, 종교에 대한 캠페인은 국민군에 대한 압도적이고 확고한 가톨릭의 지지를 불러일으켰다.[31]

1939년 초에는 마드리드(마드리드 역사)를 비롯한 몇몇 지역만 정부군의 통제하에 있었다. 1939년 3월 28일, 마드리드는 시내 내부의 프랑코 친정부 세력("제5열" – 1936년 몰라 장군이 선전 방송에서 언급했던 세력)의 도움으로 국민군에 함락되었다. 다음 날, 국민군의 포화 속에서 거의 2년 가까이 버텨온 발렌시아도 항복했다. 마지막 공화파 세력이 항복한 1939년 4월 1일 승리가 선포되었다.

4. 5. 내전 종결

1936년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는 국민 정부의 주석 및 군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독일의 히틀러이탈리아의 무솔리니의 도움으로 1939년 수도 마드리드를 함락시켰다.[32]

1939년 초, 마드리드(마드리드 역사)를 비롯한 몇몇 지역만이 정부군의 통제하에 있었다. 1939년 3월 28일, 마드리드는 시내 프랑코 지지 세력("제5열" – 1936년 모라 장군이 선전 방송에서 언급)의 도움으로 국민군에 함락되었다. 다음 날, 거의 2년 가까이 국민군의 포화 속에서 버텨온 발렌시아도 항복했다. 1939년 4월 1일, 마지막 공화파 세력이 항복하면서 승리가 선포되었다. 같은 날, 프랑코는 자신의 칼을 교회 제단에 놓고 스페인이 침략당하지 않는 한 다시는 칼을 들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내전 기간과 그 이후 백색 테러 시기에는 공화파와 국민군의 적들이 대량 학살되었다. 이는 전시의 적색 테러와 대조적이다. 역사적 분석 및 조사에 따르면 이 기간 프랑코 정권의 처형 숫자는 10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추산된다.

스탠리 G. 페인은 공화파 지역에서 약 5만 6천 명, 국민군 지역에서 최소 7만 명이 처형되었고, 전쟁 후 추가로 2만 8천 명이 처형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33] 역사 기억 회복 협회(ARMH)는 국민군에 의해 살해된 3만 5천 명 이상이 여전히 무덤에서 실종되었다고 추산한다.[33]

훌리안 카사노바 루이스[34], 호세프 폰타나, 휴 토마스는 백색 테러로 인한 사망자 수를 총 15만 명으로 추산한다. 폴 프레스턴에 따르면 프랑코 지역에서 15만 명의 전시 민간인 처형, 공화파 지역에서 5만 명, 전쟁 후 프랑코 정권에 의한 민간인 처형은 약 2만 명이었다.[35] 헬렌 그레이엄은 스페인 노동 계급이 프랑코주의 프로젝트에서 유대인이 독일 민족 공동체에서 차지했던 역할과 같았다고 보았다.

가브리엘 잭슨과 앤서니 비보어에 따르면 1939년부터 1943년 사이 "백색 테러"(처형, 감옥에서의 기아 또는 질병) 희생자 수는 20만 명이었다. 비보어는 "프랑코의 '백색 테러'로 2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적색 테러'는 이미 3만 8천 명을 살해했다"라고 말한다.[35] 줄리우스 루이스는 "공화파 지역에서 최소 3만 7,843건, 국민군 스페인에서 최대 15만 건(전쟁 후 5만 건 포함)의 처형이 있었다"라고 결론짓는다.

1939년 프랑코가 무어 경비대의 호위를 받으며 산세바스티안에 도착


전쟁이 끝났음에도 프랑스에 망명한 스페인 게릴라전 세력인 "마키스"는 피레네 산맥에서 프랑코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며 파괴 행위와 강탈을 자행했다. 일부 망명 공화파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점령하의 비시 프랑스에서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맞서 싸웠다. 1944년, 프랑스 레지스탕스 출신 공화파 참전 용사들은 발 다란을 침공했지만 곧 패배했다. 마키스 활동은 1950년대까지 이어졌다.

전쟁 종식으로 수십만 명의 스페인 공화파 망명자가 발생했으며, 주로 프랑스, 멕시코, 칠레, 쿠바, 미국으로 망명했다.[36] 피레네 산맥 반대편에서는 난민들이 프랑스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프랑스의 구르 수용소나 베르네 수용소와 같은 열악한 환경에서 1만 2천 명(대부분 두루티 사단 출신 병사)[37]이 수용되었다. ''구다리스''(바스크인)와 조종사들은 쉽게 지역 후원자와 일자리를 찾아 수용소를 나갔지만, 프랑스에서 관계를 찾을 수 없었던 농부와 일반 사람들은 프랑코 정부와 합의한 프랑스 정부의 권유로 스페인으로 돌아가도록 장려되었다. 대다수가 그렇게 했고, 이룬에서 프랑코 당국에 인계되어 정치적 책임 법에 따라 "정화"를 위해 미란다 데 에브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원수 페탱비시 프랑스 정권을 선포한 후, 난민들은 정치범이 되었고, 프랑스 경찰은 수용소에서 석방된 사람들을 체포하려 했다. 이들은 다른 "불필요한 사람들"과 함께 드랑시 수용소로 보내진 후 나치 독일에 강제 수용되었다. 5천 명의 스페인인이 마우트하우젠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했다.[38]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페드로 아기레 세르다 칠레 대통령에 의해 파리 이민 특별 영사로 임명되어, 프랑스 수용소에 있던 2천 명 이상의 스페인 난민을 낡은 화물선 ''위니펙''에 태워 칠레로 수송하는 "가장 고귀한 사명"을 담당했다.[39]

5. 독재 정권 수립과 통치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1939년 스페인 내전에서 승리한 후, 1975년까지 스페인을 철권 통치했다. 1939년 2월, 영국, 프랑스, 아르헨티나는 프랑코를 스페인 국가 원수로 인정했다.[57][58] 그는 1936년 10월 이미 국민주의자들의 ''헤네랄리시모'' 및 ''헤페 델 에스타도''(국가 원수)로 선포되었으며, 이후 "''수 엑셀렌시아 엘 헤페 델 에스타도''"("각하 국가 원수")라는 공식 칭호를 사용했다.[57][58]

이론적으로 프랑코는 이전이나 이후 어떤 스페인 지도자보다 더 큰 권력을 행사했다.[150] 마드리드 점령 후 초기 4년 동안 그는 거의 독점적으로 법령을 통해 통치했다. 1942년 코르테스 의회가 소집되었으나, 실질적인 권한은 거의 없었다. 특히, 정부 지출에 대한 통제권이 없었고, 정부는 의회에 책임을 지지 않았다. 장관은 프랑코에 의해서만 임명되고 해임되었다.

1947년 7월 26일, 프랑코는 스페인을 군주국으로 선포했지만, 군주를 지명하지는 않았다. 그는 왕위를 공석으로 남겨두고 자신을 종신 ''사실상'' 섭정으로 선포했다. 그는 대장의 군복을 입고 엘파르도 궁전에 거주했으며, 천개 아래를 걷고, 그의 초상화는 대부분의 스페인 화폐와 우표에 등장했다. 그는 또한 군주의 스타일에 "하느님의 은총으로"라는 구절을 추가했다.

프랑코는 여러 집단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그의 정부는 경제 현대화를 추진한 오푸스 데이 관련 기술관료를 선호하며 파시스트 이데올로그를 소외시켰다.[59] 프랑코는 파시스트의 허식을 채택했지만,[60][61][62] 스탠리 페인은 그를 "핵심 파시스트"로 여기는 학자는 거의 없다고 주장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스페인은 국제 경제로부터 고립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스페인은 마셜 플랜에서 제외되었다.[68] 그러나 냉전 긴장과 스페인의 전략적 위치를 고려하여 미국이 프랑코와 무역 및 군사 동맹을 맺으면서 상황이 부분적으로 개선되었다. 1953년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스페인 방문으로 마드리드 조약이 체결되었고, 1955년 스페인은 유엔에 가입했다.[69]

프랑코 통치 기간 동안, 비정부 노동조합과 모든 정치적 반대자들은 폭력적인 경찰 탄압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억압되거나 엄격하게 통제되었다.[72] ''국가노동연맹(Confederación Nacional del Trabajo)''(CNT)와 ''일반노동자연맹(Unión General de Trabajadores)''(UGT) 노동조합은 불법화되었고, 1940년에 신디카토 베르티칼(Sindicato Vertical)이라는 조합주의적 조직으로 대체되었다. 스페인 사회당과 ''카탈루냐 공화 좌파(Esquerra Republicana de Catalunya)''(ERC)는 1939년에 금지되었고, 스페인 공산당(PCE)은 지하로 들어갔다. 바스크 민족당(PNV)은 망명했고, 1959년에는 프랑코에 맞서 저강도 전쟁을 벌이기 위해 에타(ETA)(분리주의 단체) 무장 단체가 만들어졌다.

프랑코의 스페인 민족주의는 단일 국가 정체성을 증진시키기 위해 투우플라멩코[73]를 국가 전통으로 홍보하고, "스페인적"이지 않다고 여겨지는 전통들은 억압했다. 모든 문화 활동은 검열 대상이었고, 많은 것들이 금지되었다. 프랑코는 언어 정책을 통해 국가적 동질성을 확립하려 했다. 그는 카스티야어 사용을 장려하고 카탈루냐어, 갈리시아어, 바스크어와 같은 다른 언어를 억압했다.

대부분의 소도시와 시골 지역은 시민을 위한 군 경찰인 ''스페인 시민경비대(Guardia Civil)'' 2명이 순찰했고, 이들은 프랑코의 주요 사회 통제 수단이었다. 대도시와 수도는 대부분 무장경찰(Policia Armada)의 관할 아래 있었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 대학에서 발생한 학생 반란은 중무장한 ''무장경찰(Policía Armada)''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되었다.

프랑코는 정권 운영 방식에 대해 궁극적으로는 왕정으로 이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149] 1947년 프랑코는 「왕위 계승법」을 제정하여 스페인을 「왕국」으로 하고, 프랑코가 국가 원수가 되며, 후계 국왕의 지명권이 부여되는 등을 규정했다. 1969년 후안 카를로스를 자신의 후계자(황태자)로 지명했다. 1975년 11월 20일 프랑코는 암으로 사망했고, 후안 카를로스는 프랑코의 유언에 따라 11월 22일에 즉위하여 왕정을 부활시켰다.

프랑코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으로 "'''반자유주의'''", "'''반프리메이슨'''", "'''반마르크스주의'''" 등으로 정의될 수 있다.[151][152] 그의 주된 강박 관념은 스페인의 이익에 대한 "국제(자유주의)", "유대-프리메이슨", 공산주의(마르크스주의)의 음모 가정에 있었다.[156] 프랑코 정권에서 군대는 항상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가톨릭 교회는 적극적으로 도덕적 정당성을 제공하고 사회 규범을 모델화하려 했다.[159]

프랑코 독재 정권 시대에는 광범위한 부정부패가 존재했다. 프랑코는 측근들에게 정치적 유대감을 통한 관용을 호소하며 스캔들을 은폐했다. 이는 언론이 억압되고 자유가 없었기에 가능했다.

스페인 내전으로 스페인 경제는 황폐화되었다.[78] 프랑코는 처음에 거의 모든 국제 무역을 차단하는 자급자족 정책을 추진했다. 이 정책은 파괴적인 영향을 미쳐 경제는 침체되었다. 파산 직전, 미국과 IMF의 압력으로 정권은 자유 시장 경제를 채택하게 되었다. 1959년 안정화 및 자유화 계획의 개혁으로 국가를 세계 경제에 통합하는 과정이 더욱 용이해졌다.[69] 프랑코가 이념적 장관들을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기술관료로 교체했을 때, 정권은 심오한 경제 개혁을 포함한 여러 개발 정책을 시행했다. 불황 이후 1959년부터 성장이 시작되어 1974년까지 지속된 경제 호황을 가져왔고, 이는 "스페인의 기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5. 1. 독재 체제 구축

1936년 7월 17일, 모로코인 용병을 포함한 자신의 직속 군대를 이끌고 인민전선 정부에 반대해 군사반란을 일으켜 스페인 내전을 일으켰다. 내전에서 그는 국민 정부의 주석 및 군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의 도움으로 1939년 수도 마드리드를 함락시켰다.[57][58]

1937년 스스로 팔랑헤당의 당수가 되었다. 1937년 4월 19일, 프랑코는 국가-신디칼리스트 정당인 파랑헤와 카를리스트 왕당파를 단일 정당인 “파랑헤 에스파뇰라 트라디시오날리스타 이 데 라스 후타스 데 오펜시바 나시오날-신디칼리스타(FET y de las JONS)”로 강제 합병했다. 이 정당은 1939년에 유일한 합법 정당이 되었다.

프랑코는 카를리스트 마누엘 팔 콘데를 가택 연금하고, 당 지도자 마누엘 에디야를 포함한 수백 명의 구 파랑헤주의자들을 투옥하여 자신의 정치적 미래를 확보했다. 프랑코는 특히 "전쟁 순교자"에 관한 선전에서 공화파의 반교권주의를 이용하여 카를리스트들을 달랬다. 공화파는 전쟁을 파시즘에 맞선 공화국 수호의 투쟁으로 제시한 반면, 프랑코는 자신을 "무신론적 공산주의"에 맞선 "가톨릭 스페인"의 수호자로 묘사했다.

그는 이론적으로 이전이나 이후 어떤 스페인 지도자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마드리드를 점령한 후 처음 4년 동안 그는 거의 독점적으로 법령으로 통치했다. 1939년 8월 통과된 "국가 원수법"은 모든 통치권을 프랑코에게 "영구적으로 위임"했으며, 그는 대부분의 법률이나 법령에 대해 내각과 상의할 필요가 없었다.

1947년 7월 26일, 프랑코는 스페인을 군주국으로 선포했지만 군주를 지명하지는 않았다. 프랑코는 왕위를 공석으로 남겨두고 자신을 종신 ''사실상'' 섭정으로 선포했다. 동시에 프랑코는 왕의 특권을 많이 빼앗았다. 그는 대장(전통적으로 왕에게만 허용된 계급)의 군복을 입고 엘파르도 궁전에 거주했다. 또한 그는 천개 아래를 걷기 시작했고, 그의 초상화는 대부분의 스페인 화폐와 우표에 등장했다. 그는 또한 군주의 스타일의 일부인 "하느님의 은총으로"라는 구절을 자신의 스타일에 추가했다.

5. 2. 국내 정치 탄압

프랑코는 스페인 내전이 끝난 후 모든 민주주의를 철저하게 탄압했다.[182] 군대, 팔랑헤당, 로마 가톨릭 교회의 지지를 바탕으로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182]

그는 무정부주의자,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하고, 정치 단체나 노동조합을 파괴했다.[182] 반정부 성향 언론사는 폐쇄되었고, 언론인들은 투옥되었다.[182] 이러한 억압을 피해 1950~60년대에 25만 명 이상의 국민이 프랑스 등지로 이민을 떠났다.[182]

1937년 4월 19일, 프랑코는 파랑헤와 카를리스트 왕당파를 단일 정당으로 강제 합병했다. 이 정당은 1939년에 유일한 합법 정당이 되었다. 프랑코는 자신을 새로운 FET (''Falange Española Tradicionalista''; 전통주의 스페인 파랑헤)의 ''헤페 나시오날''(국가 원수)로 임명했다. 1939년까지 파시스트 양식이 우세해지면서 "프랑코, 프랑코, 프랑코"라는 의식적인 집회 구호가 등장했다.

프랑코는 카를리스트들을 달래기 위해 공화파의 반교권주의를 이용했다. 공화파는 전쟁을 파시즘에 맞선 공화국 수호의 투쟁으로 제시한 반면, 프랑코는 자신을 "무신론적 공산주의"에 맞선 "가톨릭 스페인"의 수호자로 묘사했다.

1950년대 초가 되자 프랑코의 국가는 폭력성이 줄었지만, 그의 통치 전반에 걸쳐 비정부 노동조합과 공산주의 및 무정부주의 단체에서 자유주의 민주주의자와 카탈루냐 또는 바스크 분리주의자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반대자들은 폭력적인 경찰 탄압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억압되거나 엄격하게 통제되었다.[72] ''국가노동연맹(Confederación Nacional del Trabajo)''(CNT)와 ''일반노동자연맹(Unión General de Trabajadores)''(UGT) 노동조합은 불법화되었고, 1940년에 신디카토 베르티칼(Sindicato Vertical)이라는 조합주의적 조직으로 대체되었다. 스페인 사회당과 ''카탈루냐 공화 좌파(Esquerra Republicana de Catalunya)''(ERC)는 1939년에 금지되었고, 스페인 공산당(PCE)은 지하로 들어갔다. 바스크 민족당(PNV)은 망명했고, 1959년에는 프랑코에 맞서 저강도 전쟁을 벌이기 위해 에타(ETA)(분리주의 단체) 무장 단체가 만들어졌다.

프랑코는 좌파 인사들의 유아 납치를 지시했으며, 여기에는 가톨릭 교회 수녀들까지 가담했다.[184] 2008년 스페인의 발타사르 가르손 판사는 프랑코 정권 당시 자행된 유아 납치 건수가 약 3만 건을 넘을 것으로 추정했다.[184] 유괴된 아이들은 매장되거나 입양 등을 위해 팔렸으며, 일부 수녀들은 유아를 매매했다고 고백했다.[184] 유아 납치는 프랑코 정권이 끝난 후에도 1990년대까지 이어졌다.[185] 이 사건은 2012년 대한민국의 MBC '서프라이즈'에 방송되어 널리 알려졌다.[186]

5. 3. 가톨릭 국가 수호자

프랑코는 스페인 내전에서 승리한 후, "나는 오직 하느님과 역사 앞에서만 책임을 질뿐이다."라는 말과 함께 강력한 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는 자신을 "무신론 공산주의에 맞선 로마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의 수호자"로 묘사하며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했다.[72]

1936년 7월 17일 스페인 내전 발발 당시, 프랑코는 자신을 무신론적 공산주의에 맞선 로마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의 수호자로 묘사했다.[72]

내전에서 승리한 뒤, 프랑코는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독재를 하였다.

프랑코는 전쟁 순교자에 관한 선전에서 공화파의 반교권주의를 이용하여 카를리스트들을 달랬다. 공화파는 전쟁을 파시즘에 맞선 공화국 수호의 투쟁으로 제시한 반면, 프랑코는 자신을 "무신론적 공산주의"에 맞선 "가톨릭 스페인"의 수호자로 묘사했다.[72][73]

5. 4. 나치 협력과 유대인 학살

프랑코는 제2차 세계 대전스페인 내전 때 자신을 지원해 준 독일이탈리아와 동맹을 맺고, 여러 수용소를 지어 반대파뿐만 아니라 망명 온 유대인들까지 학살하였다.[48] 그는 "유대인-프리메이슨-볼셰비키 음모"의 존재를 믿었고,[49] 스페인 내전을 의도적으로 유대인과 볼셰비키에 대한 투쟁으로 묘사했다.[50]

1941년 5월 13일, 프랑코는 추축국과의 동맹을 협상하는 동안 지방 주지사들에게 유대인 명단을 작성하라고 명령했다.[51] 그는 나치의 최종 해결책 설계자인 히틀러의 친위대 대장 하인리히 힘러에게 스페인에 있는 6,000명의 유대인 명단을 제공했다.[51]

하지만 전세가 연합군 쪽으로 유리하게 되자, 동맹을 끊었다. 따라서 프랑코는 나치 협력자이면서도 나치 협력자들과 달리 처벌받지 않았다.

전쟁 기간 동안 프랑코가 몇 명의 유대인을 구했는지는 역사적 논쟁의 대상이다. 프랑코는 약 3만 명에서 6만 명의 유대인을 구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추정치는 4만 5천 명이라는 수치다.[52]

스페인은 수천 명의 프랑스 유대인들에게 나치를 피해 포르투갈로 가는 길에 스페인을 통과하는 비자를 제공했다. 스페인 외교관들은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에 거주하는 약 4,000명의 유대인들을 보호했다. 적어도 2만 명에서 3만 명의 유대인들이 전쟁 초기 스페인을 통과하도록 허용되었다. 그러나 스페인에 입국할 수 없었던 유대인들은 미란다 데 에브로 강제 수용소로 보내지거나 프랑스로 추방되었다. 1943년 1월, 스페인 주재 독일 대사관이 스페인 정부에 서유럽에서 유대인 시민들을 2개월 안에 제거하라는 통보를 한 후, 스페인은 비자를 엄격하게 제한했고, 800명의 유대인만이 입국할 수 있었다.[52]

전쟁 후 프랑코는 스페인의 세계적 이미지를 개선하고 국제적 고립을 종식시키기 위해 유대인 구출에 대한 자신의 공헌을 과장했다.[52]

5. 5. 권위주의 통치

1936년 스페인 내전에서 승리한 프랑코1975년까지 스페인을 철권 통치했다. 1939년 2월, 영국, 프랑스, 아르헨티나는 프랑코를 스페인 국가 원수로 인정했다.[57][58] 이론적으로 프랑코는 이전이나 이후 어떤 스페인 지도자보다 더 큰 권력을 행사했다.[150] 마드리드 점령 후 초기 4년 동안 그는 거의 독점적으로 법령을 통해 통치했다.[150] 1942년 코르테스 의회가 소집되었으나, 실질적인 권한은 거의 없었다. 특히, 정부 지출에 대한 통제권이 없었고, 정부는 의회에 책임을 지지 않았다. 장관은 프랑코에 의해서만 임명되고 해임되었다.

1947년 7월 26일, 프랑코는 스페인을 군주국으로 선포했지만, 군주를 지명하지는 않았다. 그는 왕위를 공석으로 남겨두고 자신을 종신 ''사실상'' 섭정으로 선포했다. 그는 대장의 군복을 입고 엘파르도 궁전에 거주했으며, 천개 아래를 걷고, 그의 초상화는 대부분의 스페인 화폐와 우표에 등장했다.

프랑코는 여러 집단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그의 정부는 경제 현대화를 추진한 오푸스 데이 관련 기술관료를 선호하며 파시스트 이데올로그를 소외시켰다.[59] 프랑코는 파시스트의 허식을 채택했지만,[60][61][62] 스탠리 페인은 그를 "핵심 파시스트"로 여기는 학자는 거의 없다고 주장했다.[62]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스페인은 국제 경제로부터 고립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스페인은 마셜 플랜에서 제외되었다.[68] 그러나 냉전 긴장과 스페인의 전략적 위치를 고려하여 미국이 프랑코와 무역 및 군사 동맹을 맺으면서 상황이 부분적으로 개선되었다. 1953년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스페인 방문으로 마드리드 조약이 체결되었고, 1955년 스페인은 유엔에 가입했다.[69]

프랑코 통치 기간 동안, 비정부 노동조합과 모든 정치적 반대자들은 폭력적인 경찰 탄압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억압되거나 엄격하게 통제되었다.[72] ''국가노동연맹(Confederación Nacional del Trabajo)''(CNT)와 ''일반노동자연맹(Unión General de Trabajadores)''(UGT) 노동조합은 불법화되었고, 1940년에 신디카토 베르티칼(Sindicato Vertical)이라는 조합주의적 조직으로 대체되었다. 스페인 사회당과 ''카탈루냐 공화 좌파(Esquerra Republicana de Catalunya)''(ERC)는 1939년에 금지되었고, 스페인 공산당(PCE)은 지하로 들어갔다. 바스크 민족당(PNV)은 망명했고, 1959년에는 프랑코에 맞서 저강도 전쟁을 벌이기 위해 에타(ETA)(분리주의 단체) 무장 단체가 만들어졌다.

프랑코의 스페인 민족주의는 단일 국가 정체성을 증진시키기 위해 투우플라멩코[73]를 국가 전통으로 홍보하고, "스페인적"이지 않다고 여겨지는 전통들은 억압했다. 모든 문화 활동은 검열 대상이었고, 많은 것들이 금지되었다. 프랑코는 언어 정책을 통해 국가적 동질성을 확립하려 했다. 그는 카스티야어 사용을 장려하고 카탈루냐어, 갈리시아어, 바스크어와 같은 다른 언어를 억압했다.

대부분의 소도시와 시골 지역은 시민을 위한 군 경찰인 ''스페인 시민경비대(Guardia Civil)'' 2명이 순찰했고, 이들은 프랑코의 주요 사회 통제 수단이었다. 대도시와 수도는 대부분 무장경찰(Policia Armada)의 관할 아래 있었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 대학에서 발생한 학생 반란은 중무장한 ''무장경찰(Policía Armada)''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되었다.

프랑코는 정권 운영 방식에 대해 궁극적으로는 왕정으로 이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149] 1947년 프랑코는 「왕위 계승법」을 제정하여 스페인을 「왕국」으로 하고, 프랑코가 국가 원수가 되며, 후계 국왕의 지명권이 부여되는 등을 규정했다. 1969년 후안 카를로스를 자신의 후계자(황태자)로 지명했다. 1975년 11월 20일 프랑코는 암으로 사망했고, 후안 카를로스는 프랑코의 유언에 따라 11월 22일에 즉위하여 왕정을 부활시켰다.

프랑코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으로 "'''반자유주의'''", "'''반프리메이슨'''", "'''반마르크스주의'''" 등으로 정의될 수 있다.[151][152] 그의 주된 강박 관념은 스페인의 이익에 대한 "국제(자유주의)", "유대-프리메이슨", 공산주의(마르크스주의)의 음모 가정에 있었다.[156] 프랑코 정권에서 군대는 항상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가톨릭 교회는 적극적으로 도덕적 정당성을 제공하고 사회 규범을 모델화하려 했다.[159]

프랑코 독재 정권 시대에는 광범위한 부정부패가 존재했다. 프랑코는 측근들에게 정치적 유대감을 통한 관용을 호소하며 스캔들을 은폐했다. 이는 언론이 억압되고 자유가 없었기에 가능했다.

5. 6. 경제 정책

스페인 내전으로 스페인 경제는 황폐화되었다.[78] 기반 시설이 파괴되고, 노동자들이 사망했으며, 일상적인 사업은 심각하게 방해받았다. 프랑코의 승리 후 10년 이상 동안 황폐화된 경제는 매우 느리게 회복되었다. 프랑코는 처음에 거의 모든 국제 무역을 차단하는 자급자족 정책을 추진했다. 이 정책은 파괴적인 영향을 미쳐 경제는 침체되었다. 암시장 상인들만이 풍요를 누릴 수 있었다.

프랑코의 모습과 "프란시스코 프랑코, 신의 은총으로 스페인의 지도자"라는 글자가 새겨진 1963년 스페인 페세타 동전


파산 직전, 미국과 IMF의 압력으로 정권은 자유 시장 경제를 채택하게 되었다. 프랑코의 초기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제를 담당하는 많은 구체제 인사들이 기술관료로 대체되었다. 정권은 자급자족이라는 허황된 주장을 버리고 스페인 경제 시스템을 변혁하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1950년대 초에는 내전 이전의 산업 생산 수준을 회복했지만, 농업 생산량은 1958년까지 내전 이전 수준보다 낮았다. 1951년부터 1956년까지는 상당한 경제 발전이 있었지만, 개혁은 산발적으로 시행되었고 조정이 잘 되지 않았다. 1950년대 중반부터 경제 활동이 느리지만 꾸준히 가속화되었지만, 서유럽의 다른 지역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성장률이 부족하여 프랑코 정권은 1950년대 후반에 자유주의 경제 정책 도입을 허용해야 했다. 1957년부터 1959년까지 안정화 이전 시기에 스페인 경제 기획자들은 온건한 인플레이션 억제 조정과 스페인을 세계 경제에 통합하기 위한 점진적인 조치와 같은 부분적 조치를 시행했지만, 대외적 발전과 악화되는 국내 경제 위기로 인해 더 광범위한 변화를 채택해야 했다. 1957년 초 각료회의 개편으로 경제학 교육을 받고 경험이 있는 젊은 남성 그룹이 주요 부처에 합류했다. 1959년 안정화 및 자유화 계획의 개혁으로 국가를 세계 경제에 통합하는 과정이 더욱 용이해졌다.[69]

1959년 12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프랑코와 미국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


프랑코가 이념적 장관들을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기술관료로 교체했을 때, 정권은 심오한 경제 개혁을 포함한 여러 개발 정책을 시행했다. 불황 이후 1959년부터 성장이 시작되어 1974년까지 지속된 경제 호황을 가져왔고, 이는 "스페인의 기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사회 개혁의 부재와 경제력의 이동과 동시에 다른 유럽 국가들과 남미로의 소규모 이민이 시작되었다. 이민은 두 가지 방식으로 정권에 도움이 되었다. 국가는 고용을 유지할 수 없었던 인구를 제거했고, 이민자들은 국가에 꼭 필요한 금전적 송금을 제공했다.

1960년대 동안 프랑코주의 스페인의 부유층, 특히 정치적으로 충실한 사람들은 더 많은 부를 축적했고, "경제 기적"이 진행됨에 따라 급증하는 중산층이 눈에 띄게 되었다. 국제 기업들은 임금이 낮고, 기업 세금이 매우 낮으며, 파업이 금지되고, 노동자의 건강이나 국가 보호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스페인에 공장을 설립했다. 자동차 제조업체 SEAT, 트럭 제조업체 Pegaso, 정유업체 INH와 같은 국영 기업들은 생산을 대폭 확장했다. 또한 스페인은 사실상 새로운 대규모 시장이었다. 스페인은 1959년부터 1973년까지 일본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가 되었다. 1975년 프랑코 사망 당시 스페인은 여전히 서유럽 대부분의 국가보다 뒤처져 있었지만, 1인당 GDP와 선두 서유럽 국가들과의 격차는 크게 줄었고, 스페인은 대규모 산업 경제를 발전시켰다.

5. 7. 사회 및 문화 정책

프랑코의 스페인 민족주의는 단일 국가 정체성을 증진하기 위해 스페인의 문화적 다양성을 억압했다.[72] 투우플라멩코[73]는 국가 전통으로 홍보되었지만, "스페인적"이지 않다고 여겨지는 전통들은 억압되었다. 프랑코의 스페인 전통에 대한 견해는 다소 인위적이고 임의적이었다. 일부 지역 전통이 억압되었지만, 안달루시아 전통인 플라멩코는 더 큰 국가 정체성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모든 문화 활동은 검열의 대상이었고, 카탈루냐의 국가 무용인 사르다나(Sardana)와 같이 많은 것들이 명백히 금지되었다(종종 불규칙적인 방식으로). 이러한 문화 정책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특히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에 완화되었다.

프랑코는 또한 언어 정책을 사용하여 국가적 동질성을 확립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카스티야어 사용을 장려하고 카탈루냐어, 갈리시아어, 바스크어와 같은 다른 언어를 억압했다. 카스티야어가 아닌 언어의 법적 사용은 금지되었다. 모든 정부, 공증, 법률 및 상업 문서는 카스티야어로만 작성되어야 했으며, 다른 언어로 작성된 문서는 무효로 간주되었다. 학교, 광고, 도로 및 상점 표지판에서 다른 언어의 사용이 금지되었다. 비공식적인 용도로 시민들은 계속해서 이러한 언어를 사용했다. 이는 1940년대 내내, 그리고 1950년대에도 다소간 지속되었지만, 1960년 이후 비카스티야어 스페인어는 자유롭게 구사되고 쓰여졌고, 서점과 무대에도 진출했지만, 공식 지위는 얻지 못했다.

대부분의 소도시와 시골 지역은 시민을 위한 군 경찰인 스페인 시민경비대(Guardia Civil) 2명이 순찰했는데, 이들은 프랑코의 주요 사회 통제 수단으로 기능했다. 대도시와 수도는 대부분 무장경찰(Policia Armada) 또는 ''그리세스(grises)''(회색, 유니폼 색깔 때문에)의 관할권 아래 있었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 대학에서 발생한 학생 반란은 중무장한 ''무장경찰(Policía Armada)''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되었고, 사복 경찰이 스페인 대학 강의에 참석했다.[74] 공공 당국에 의한 전통적인 가톨릭 사회교리의 시행은 주로 마누엘 아사냐(Manuel Azaña)가 제정한 법률(''Ley de Vagos y Maleantes'', 방랑자법)을 사용하여 체제의 명시된 의도였다.[75] 스페인의 남은 유목민(집시(Gitanos)과 메르체로(Merchero)와 같은 엘 루테(El Lute))이 특히 영향을 받았다. 이 법을 통해 동성애와 매춘은 1954년에 범죄로 규정되었다.[76]

6. 제2차 세계 대전

프랑코는 스페인 내전 당시 아돌프 히틀러베니토 무솔리니로부터 지원을 받았으며, 반코민테른 조약에 서명하는 등 추축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131] 그러나 내전으로 인해 스페인의 경제와 군사력이 약화된 상태였기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직접적인 참전 대신 "비전투적" 정책을 추구했다.

1940년 10월 23일, 프랑코는 프랑스 헨다예에서 히틀러와 만나(앙다이 회담) 스페인의 추축국 참전 가능성에 대해 논의했다. 프랑코는 지브롤터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 대한 스페인의 통제권, 식량과 연료의 대량 공급 등을 요구했지만, 히틀러는 비시 프랑스와의 관계 악화를 우려하여 이를 거절했다. 일각에서는 프랑코가 히틀러가 받아들일 수 없는 무리한 요구를 하여 참전을 회피하려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전으로 피폐해진 스페인이 추축국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40]

프랑코는 청색 사단을 조직하여 동부 전선에 파병하여 소련과의 전쟁을 지원했지만, 서방 연합국과의 직접적인 전투는 피했다. 1941년 겨울, 프랑코는 스페인, 포르투갈, 비시 프랑스, 바티칸, 이탈리아로 구성된 "라틴 블록" 구상을 제안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42]

1940년 6월, 프랑코는 히틀러에게 참전 의사를 전달했지만, 히틀러는 프랑코의 카메룬 할양 요구에 불만을 표했다.[133] 프랑코는 지브롤터 침공을 고려했지만, 영국의 강력한 방어와 스페인의 취약한 군사력 때문에 포기했다. 1941년 2월, 프랑코는 이탈리아 보르디게라에서 무솔리니와 회담을 가졌지만, 무솔리니는 프랑코의 지원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44]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후, 프랑코는 청색 사단을 편성하여 동부 전선에 파병했다. 프랑코는 풀헨시오 바티스타 쿠바 대통령의 반감을 샀는데, 바티스타는 스페인에 대한 공동 선전포고를 제안하기도 했다.[45] 1941년 11월, 프랑코는 개정된 반코민테른 조약에 서명했다. 스페인은 독일과 텅스텐을 거래했다.[40] 1941년 12월진주만 공격에 대해서는 일본에 축전을 보내 미국의 불쾌감을 샀다.[136]

전세가 연합군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스페인은 점차 중립적인 입장으로 선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의 중립은 연합국 지도자들에게 인정받았다. 1942년 11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프랑코에게 "양국은 최고의 의미에서 친구"라는 서한을 보냈다.[106] 1944년 5월,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하원에서 스페인의 중립 정책이 연합국에 도움이 되었다고 언급했다.

전후 스페인 정부는 추축국과의 협력 증거를 파기하려 했다. 1940년 6월, 스페인군은 탕헤르 국제 지대를 점령했고, 1945년까지 유지했다. 전후 프랑코는 오토 스코르체니레옹 드그렐 등 전 나치 인사들에게 정치적 망명을 허용했다.[47]

6. 1. 중립 정책

1940년 레우스에서 프랑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프랑코는 스페인 내전에서 아돌프 히틀러베니토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았고, 반코민테른 조약에 서명하는 등 추축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131] 그러나 스페인은 내전의 후유증으로 경제와 군사력이 약화된 상태였기 때문에, 프랑코는 직접적인 참전 대신 "비전투적" 정책을 추구했다.[40]

1940년 10월, 프랑코는 프랑스 헨다예에서 히틀러와 회담을 갖고 스페인의 추축국 참전 가능성을 논의했다.(앙다이 회담) 프랑코는 지브롤터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 대한 스페인의 통제권, 식량 및 연료의 대량 공급 등을 요구했지만, 히틀러는 비시 프랑스와의 관계 악화를 우려하여 이를 거절했다.[132] 일설에 따르면, 프랑코는 히틀러가 받아들일 수 없는 무리한 요구를 하여 참전을 회피하려 했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전으로 피폐해진 스페인이 추축국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프랑코는 청색 사단을 조직하여 동부 전선에 파병하여 소련과의 전쟁을 지원했지만, 서방 연합국과의 직접적인 전투는 피했다.[135]

1941년 겨울, 프랑코는 스페인, 포르투갈, 비시 프랑스, 바티칸, 이탈리아로 구성된 "라틴 블록" 구상을 제안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42]

1940년 6월, 프랑코는 히틀러에게 참전 의사를 전달했지만, 히틀러는 프랑코의 카메룬 할양 요구에 불만을 표했다.[133] 프랑코는 지브롤터 침공을 고려했지만, 영국의 강력한 방어와 스페인의 취약한 군사력 때문에 포기했다.

1941년 2월, 프랑코는 이탈리아 보르디게라에서 무솔리니와 회담을 가졌지만, 무솔리니는 프랑코의 지원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44]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후, 프랑코는 청색 사단을 편성하여 동부 전선에 파병했다.

프랑코는 풀헨시오 바티스타 쿠바 대통령의 반감을 샀는데, 바티스타는 스페인에 대한 공동 선전포고를 제안하기도 했다.[45]

1941년 11월, 프랑코는 개정된 반코민테른 조약에 서명했다. 스페인은 독일과 텅스텐을 거래했다.[40]

1941년 12월진주만 공격에 대해서는 일본에 축전을 보내 미국의 불쾌감을 샀다.[136]

전세가 연합군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스페인은 점차 중립적인 입장으로 선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의 중립은 연합국 지도자들에게 인정받았다. 1942년 11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프랑코에게 "양국은 최고의 의미에서 친구"라는 서한을 보냈다.[106] 1944년 5월,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하원에서 스페인의 중립 정책이 연합국에 도움이 되었다고 언급했다.

전후 스페인 정부는 추축국과의 협력 증거를 파기하려 했다.

1940년 6월, 스페인군은 탕헤르 국제 지대를 점령했고, 1945년까지 유지했다.

전후 프랑코는 오토 스코르체니레옹 드그렐 등 전 나치 인사들에게 정치적 망명을 허용했다.[47]

6. 2. 전쟁 중의 외교 관계



1939년 3월 27일, 프랑코는 반코민테른 협정에 가입했고, 같은 해 5월 국제 연맹에서 탈퇴했다.[131]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 프랑코는 스페인이 내전으로 황폐해져 참전이 어렵다고 판단,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1940년 6월 10일 이탈리아 참전 직후, 독일의 승세에 힘입어 중립을 포기하고 비교전을 선언, 추축국에 정보 제공 및 함선 보급 등 편의를 제공했다. 며칠 뒤 국제 관리 도시였던 탕헤르를 침공, 11월에 스페인령 모로코에 병합했다. 프랑코는 영국 항복 직전 스페인이 참전하여 전후 처리 회의에서 발언권을 확보하려 했고, 독일과 영국의 휴전을 중재하여 지브롤터와 북아프리카 영토 요구를 독일에 인정받으려 했으나, 아돌프 히틀러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132]

1940년 10월, 프랑코는 앙다이에서 히틀러와 회담을 갖고, 스페인의 영토 요구(프랑스령 북아프리카 대폭 할양 불가, 영국 식민지 보상)를 논의했다. 프랑코는 지브롤터 공략 작전(펠릭스 작전)을 위한 지상 루트 제공, 독일-이탈리아 강철 동맹 및 독일-이탈리아-일본 삼국 동맹 참가를 약속하고, 군사·경제적 “막대한 전략 물자”를 요구하며 참전 의사를 밝혔으나,[133] 영국 본토 항공전과 지중해 전선, 특히 그리스 전선에서의 영국의 선전과 영국, 미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으로 참전 의욕이 감퇴, 이듬해 합의를 무효화하고[134] 참전 요구를 얼버무렸다.

1941년 6월, 히틀러의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후, 프랑코는 청색 사단을 창설, 독일 국방군 의용 부대로 동부 전선에 파병했다. 이는 국내의 친독·이탈리아 참전 추진파를 견제하고, 소련에 대한 국내 여론과 독일 지원에 대한 보답을 위한 조치였다.[135]

1941년 12월 진주만 공격에 대해 일본에 축전을 보내 미국의 불쾌감을 샀고,[136] 필리핀일본군이 침공하자 이권 처리를 둘러싸고 양국 간 마찰이 발생했다.[137]

7. 독재 정권의 말기와 사망

프랑코는 1947년 스페인을 군주국으로 선포했지만, 군주를 지명하지 않고 자신을 사실상의 섭정으로 선포했다. 그는 대장 계급의 군복을 입고 엘파르도 궁전에 거주했으며, 그의 초상화는 대부분의 스페인 화폐와 우표에 등장했다.

프랑코가 톨로사를 방문한 모습, 1948년


1970년 마드리드 근처 파르도 저택에서 프랑코와 전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스페인은 국제 경제로부터 고립되었으나, 냉전 긴장과 스페인의 전략적 위치 덕분에 미국과의 무역 및 군사 동맹을 통해 상황이 개선되었다. 1953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문으로 마드리드 조약이 체결되었고, 1955년 스페인은 유엔에 가입했다.[69]

1975년 10월, 혼수상태에 빠지기 약 일주일 전 프랑코의 자택에서 만난 카를로스 아리아스 나바로와 프랑코


1974년, 고령의 프랑코는 건강 문제로 후안 카를로스 1세에게 국가 원수 직무대행을 맡겼다. 1975년 10월 1일, 프랑코는 마지막 공개석상에서 "스페인을 겨냥한 프리메이슨, 좌익, 공산주의 음모"를 경고했다. 이후 혼수상태에 빠진 그는 1975년 11월 20일 심부전으로 사망했다.[83] 그의 시신은 죽음의 계곡에 안치되었다.

7. 1. 정권의 위기

1960년대 후반,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고령으로 인해 자신의 후계자를 지명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면서 정권 내부의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카를리스트당과 알폰소파 사이의 왕위 계승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1969년 프랑코는 후안 카를로스 드 보르본 왕세자를 공식 후계자로 지명했다.[79] 이는 부르봉-파르마의 하비에르 왕자(Prince Xavier of Bourbon-Parma)와 후안에게 놀라움을 안겨주었다.[81]

프랑코의 말년으로 접어들면서, ''무비미엔토'' 내 여러 파벌 간의 권력 다툼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들은 국가의 미래를 장악하기 위해 경쟁하며 스페인 정치 상황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7. 2. 후계자 지명

1969년, 프랑코는 스페인에서 직접 교육한 후안 카를로스 드 보르본 왕세자를 공식 후계자로 지명했다.[79] 후안 카를로스에게는 라우레아노 로페스 로도가 제안한 스페인 왕세자 칭호가 부여되었는데,[80] 이는 그의 아버지인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 드 보르본과의 갈등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80] 이 지명은 카를리스트 왕위 계승자 부르봉-파르마의 하비에르 왕자와 후안에게 놀라움을 안겨주었다.[81]

프랑코와 후안 카를로스 1세 왕세자 (1969년)

7. 3. 사망과 장례

1974년 7월 19일, 고령의 프랑코는 여러 건강 문제로 병이 들었고, 후안 카를로스 1세가 국가 원수 직무대행을 맡았다. 프랑코는 회복되어 9월 2일 국가 원수직을 재개했다. 1년 후 그는 다시 병들었고, 파킨슨병과의 오랜 투병을 포함한 더 많은 건강 문제로 고통받았다.[83] 1975년 10월 1일, 프랑코는 마지막 공개석상에서 수척하고 허약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마드리드 왕궁 발코니에서 군중들에게 "스페인을 겨냥한 프리메이슨, 좌익, 공산주의 음모"가 있다고 경고했다. 1975년 10월 30일 그는 혼수상태에 빠져 생명 유지 장치에 연결되었다. 프랑코의 가족은 생명 유지 장치를 제거하는 데 동의했다.[83] 공식적으로 그는 1975년 11월 20일 자정 직후 심부전으로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이는 1936년 파랑주의 창시자인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가 사망한 날과 같은 날짜였다. 그러나 역사가 리카르도 데 라 시에르바는 11월 19일 오후 6시경 프랑코가 이미 사망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주장했다.[83]

프랑코의 사망 소식이 공개되자 정부는 30일간의 공식적인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11월 22일 후안 카를로스는 공식적으로 스페인 국왕으로 선포되었다. 왕궁 예배당에서 프랑코의 시신을 조문하는 자리가 마련되었고, 장례식 날에는 추도 미사와 군사 퍼레이드가 거행되었다.

프랑코의 시신은 스페인 내전 양측 희생자들을 기리는 명분으로 정치범들의 강제 노역으로 건설된 거대한 기념물인 죽음의 계곡(스페인어: ''Valle de los Caídos'')에 안치되었다.[84] 필립 2세가 건설한 엘 에스코리알의 궁전, 수도원, 왕가 능묘에서 불과 1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1959년 4월 1일 프랑코는 자신의 기념비이자 능묘로서 거대한 지하 바실리카의 문을 열며 "스페인을 지배하려던 공산주의에 대한 나의 승리를 기념하여 건설되었다"라고 말했다. 프로젝트 건축가인 디에고 멘데스는 1956년 교회 제단 뒤 횡단부 바닥 아래에 프랑코를 위한 납으로 안감을 댄 무덤을 만들었는데, 이 사실은 거의 30년 후까지 스페인 국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프랑코는 내전 중에 사망하지 않은 유일한 죽음의 계곡 안장자였다.[84] 그는 파랑주의 창시자 호세 안토니오의 무덤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 묻혔다.[85]

1975년 11월 23일 장례식 날, 추도 미사와 군사 퍼레이드가 열렸다. 프랑코의 시신을 실은 행렬이 죽음의 계곡에 도착하자, 파랑당원의 파란색 셔츠를 입은 약 7만 5천 명의 우익들이 내전 당시 반란군의 노래와 파시스트 경례를 하며 환영했다.[86]

프랑코 정권을 비난했던 주요 유럽 정부들은 그의 장례식에 고위급 대표를 파견하지 않았다.[87] 장례식에 참석한 소수의 외국 고위 인사와 정부 대표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넬슨 록펠러 미국 부통령,[88] 셰퍼드 경 영국의 상원 원내대표,[89] (해럴드 윌슨은 영국 정부를 대표하기 위해 그를 파견함으로써 영국 노동당 내에서 논란을 야기했다),[90] 모나코의 라니에르 3세,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 이멜다 마르코스 필리핀의 영부인이자 필리핀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부인,[91] 볼리비아의 군사 독재자 우고 반체르,[85] 그리고 스페인의 ''카우딜료''를 롤모델로 삼았던 칠레의 독재자 장군 아우구스토 피노체트[88]였다. 피노체트 장군에게는 후안 카를로스의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분명히 전달되었다.[92]

8. 사후

프랑코의 외동딸인 카르멘 프랑코 이 폴은 왕정복고 직후 프랑코 여공작에 서임되었다.[169]

프란시스코 프랑코에 대한 평가는 스페인 국내외에서 매우 복잡하고 논쟁적이다. 그의 장기 집권, 정치적 반대 세력 탄압, 그리고 효과적인 정부 선전 활동은 객관적인 평가를 어렵게 만든다.[104]

스페인 내에서 프랑코는 매우 분열적인 인물로 여겨진다. 지지자들은 그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스페인의 중립을 유지하고 침략을 막았다고 칭찬한다. 또한 그의 강력한 반공주의, 민족주의적 견해, 경제 정책, 그리고 사회주의 반대가 스페인의 전후 경제적 성공과 국제 통합에 기여했다고 강조한다.[105] 윈스턴 처칠, 샤를 드골,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전쟁 중 스페인의 중립 유지를 칭찬했다.[106][107]

반면, 좌파 비판가들은 프랑코를 수천 명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폭군으로 규탄하며, 추축국에 대한 지지로 인해 그들이 저지른 잔혹 행위에 연루되었다고 주장한다.

1975년 프랑코 사망 당시, 스페인의 주요 정당들은 망각의 협약에 따라 스페인 내전이나 프랑코와 관련된 조사나 기소를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2000년 이후 역사적 기억 회복 협회(ARMH)가 설립되고 공개 토론이 시작되면서 이 합의는 사실상 종료되었다.[110] 2006년 여론 조사에 따르면 스페인 국민의 거의 3분의 2가 "전쟁에 대한 새로운 조사"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111]

프랑코 통치하에 고통받았던 스페인 사람들은 그의 정권 기념물을 제거하려고 노력해왔다. 대부분의 정부 건물과 거리는 원래 이름으로 되돌아갔고, 2007년 스페인 정부는 프랑코 정권에 대한 모든 공식적인 공공 언급을 금지하고 관련된 모든 동상, 거리 이름, 기념물을 철거하기 시작했다.[116]

2004년 유럽 평의회는 프랑코 정권의 인권 침해를 규탄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119] 같은 해 스페인에서는 "프랑코주의 희생자들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기억을 되살리는 위원회"가 승인되었다.[119]

8. 1. 스페인 민주화 과정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하자 그의 유언에 따라 스페인에는 부르봉 왕조가 복고되었다. 국왕에 즉위한 후안 카를로스 1세는 그 밑에서 왕정론 교육을 받았던 탓에 독재 정치를 그대로 계승할 것으로 보였으나, 급변하여 정치 민주화를 추진하고 서유럽식 자유주의 국가로의 전환을 도모했다. 1977년에는 41년 만에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1978년에 신헌법이 승인됨으로써 스페인은 입헌군주제 국가로 재건되었다.[169]

2007년 10월 31일, 스페인 하원은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 정권 하의 희생자 명예 회복, 공공장소에서의 프랑코 숭배 금지 등을 담은 「내전과 독재 시대 박해와 폭력을 당한 사람들을 위한 권리 승인 및 조치를 규정한 법률(La Ley por la que se reconocen y amplían derechos y se establecen medidas en favor de quienes padecieron persecución o violencia durante la Guerra Civil y la Dictadura)」을 여당인 사회노동당 등의 찬성 다수로 가결(Historical Memory Bill)했다. 같은 해 상원에서도 가결되어 법률로 성립되었다.

2008년 10월부터 「역사의 기억법」에 따라, 발타사르 가르손 예심판사는 내전 피해자 조사에 착수했다. 10월에는 스페인 내전 중과 프랑코 정권 초기 반란군에 의해 주민이 학살당하는 등의 반인도적 범죄, 전쟁범죄가 행해졌다며, 스페인 전역에 1,400곳으로 추정되는 희생자 매장 집단묘지의 발굴 및 관련자 기소 등 인도 범죄 조사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한편, 하비에르 사라고사 검찰총장은 1977년에 제정된 특사법 「이행 협정」에 따라 사면이 성립되었다며, 프랑코 정권하의 범죄는 모두 면책되었다고 주장하며 갈등이 발생했다.

10월 16일, 가르손 판사는 내전 중 및 독재 정권 시대 주민 살해 및 납치를 지시했다며, 이미 사망한 프랑코를 포함한 35명의 정권 요인을 반인도적 범죄 등으로 기소했다.

11월 6일, 가르손 판사의 조사가 종료되고 전국 25곳의 집단묘지에서 희생자 발굴을 명령했다. 다음 날 7일, 사라고사 검사는 사건이 전국 관구 재판소의 관할권 밖이라며 이의를 제기했고, 이에 따라 11월 28일, 전국 관구 형사 법정은 집단묘지에서의 유골 발굴 명령을 중지하기로 결정했다. 동 법정의 페드라사 판사는 이의 제기 처리가 끝날 때까지 가르손 판사의 발굴 명령과 프랑코 재판을 중지해야 한다고 요청했고, 동 법정 전체 회의에 상정되어 이것이 인정되었다.[170]

국제앰네스티는 내전 중 및 프랑코 정권하에서 시민 11만 4천 명이 살해되거나 실종되었다며, 스페인 정부에 희생자를 위한 진실 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스페인에는 많은 프랑코 동상이 있었지만, 2008년 12월 산탄데르 광장에 있던 7미터 높이의 청동상(1964년 건립)을 마지막으로 본토에서 모두 철거되었다.[171]

2021년 2월 23일, 모로코에 둘러싸인 스페인의 튀어나온 땅인 멜리야에서 스페인 영토에 남아있는 공공장소의 마지막 프랑코 동상이 철거되었다.[172]

8. 2. 유해 이장

2018년 8월 24일, 스페인 정부는 스페인 내전 희생자들과 멀리 떨어진 다른 장소로 무덤을 이장하기 위해 전몰자의 계곡에서 프랑코(Francisco Franco)의 유해를 개장하는 법안을 승인했다. 페드로 산체스 총리는 2007년에 승인된 역사적 기억법(la Ley de memoria histórica) 적용을 근거로, 국제기구의 권고와 마찬가지로 민주 국가에 독재자를 높이 평가하는 공공 건축물이 존재할 필요는 없다고 밝혔다.[176]

2018년 9월 13일, 스페인 하원은 정부가 제시한 법안을 PSOE, 우니도스 포데모스, PNV, ERC, PDeCAT, Compromís, EH Bildu, 카나리아 연합과 새로운 카나리아 등의 172표 찬성으로 가결했다.[177][178]

2019년 6월 4일, 스페인 대법원은 프랑코의 유해 발굴에 반대하는 그의 후손들의 항소가 심리되는 동안 발굴을 일시 중단하는 결정을 내렸지만,[179] 소송은 기각되었고,[180] 10월 24일, 발굴된 유해는 전몰자의 계곡에서 옮겨져 밍고루비오 묘지에 있는 그의 아내의 묘 옆에 재매장되었다.[181]

8. 3. 역사적 평가

프란시스코 프랑코에 대한 평가는 스페인 국내외에서 매우 복잡하고 논쟁적이다. 그의 장기 집권, 정치적 반대 세력 탄압, 그리고 효과적인 정부 선전 활동은 객관적인 평가를 어렵게 만든다.[104]

스페인 내에서 프랑코는 매우 분열적인 인물로 여겨진다. 지지자들은 그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스페인의 중립을 유지하고 침략을 막았다고 칭찬한다. 또한 그의 강력한 반공주의, 민족주의적 견해, 경제 정책, 그리고 사회주의 반대가 스페인의 전후 경제적 성공과 국제 통합에 기여했다고 강조한다.[105] 윈스턴 처칠, 샤를 드골,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전쟁 중 스페인의 중립 유지를 칭찬했다.[106][107]

반면, 좌파 비판가들은 프랑코를 수천 명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폭군으로 규탄하며, 추축국에 대한 지지로 인해 그들이 저지른 잔혹 행위에 연루되었다고 주장한다.

1975년 프랑코 사망 당시, 스페인의 주요 정당들은 망각의 협약에 따라 스페인 내전이나 프랑코와 관련된 조사나 기소를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2000년 이후 역사적 기억 회복 협회(ARMH)가 설립되고 공개 토론이 시작되면서 이 합의는 사실상 종료되었다.[110] 2006년 여론 조사에 따르면 스페인 국민의 거의 3분의 2가 "전쟁에 대한 새로운 조사"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111]

프랑코 통치하에 고통받았던 스페인 사람들은 그의 정권 기념물을 제거하려고 노력해왔다. 대부분의 정부 건물과 거리는 원래 이름으로 되돌아갔고, 2007년 스페인 정부는 프랑코 정권에 대한 모든 공식적인 공공 언급을 금지하고 관련된 모든 동상, 거리 이름, 기념물을 철거하기 시작했다.[116] 2008년 산탄데르 시에서 마지막 동상이 철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116]

2004년 유럽 평의회는 프랑코 정권의 인권 침해를 규탄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119] 스페인에서는 2004년 "프랑코주의 희생자들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기억을 되살리는 위원회"가 승인되었다.[119] 2007년에는 스페인 역사적 기억법이 통과되어 내전과 독재 시대에 박해나 폭력을 당한 사람들의 권리를 인정하고 조치를 마련했다.[121][122]

국제앰네스티는 스페인 정부에 내전 및 프랑코 정권하에서 살해되거나 실종된 시민 11만 4천 명에 대한 진실 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2008년 10월부터 「역사의 기억법」에 따라, 발타사르 가르손 예심판사는 내전 피해자 조사에 착수했다. 그는 스페인 내전 중과 프랑코 정권 초기 반란군에 의해 주민이 학살당하는 등의 반인도적 범죄, 전쟁범죄가 행해졌다며, 스페인 전역에 1,400곳으로 추정되는 희생자 매장 집단묘지의 발굴 및 관련자 기소 등 인도 범죄 조사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한편, 하비에르 사라고사 검찰총장은 1977년에 제정된 특사법 「이행 협정」에 따라 사면이 성립되었다며, 프랑코 정권하의 범죄는 모두 면책되었다고 주장하며 갈등이 발생했다.[170]

2008년 12월 산탄데르 광장에 있던 7미터 높이의 프랑코 청동상을 마지막으로 본토에서 모든 프랑코 동상이 철거되었다.[171] 2021년 2월 23일, 모로코에 둘러싸인 스페인의 튀어나온 땅인 멜리야에서 스페인 영토에 남아있는 공공장소의 마지막 프랑코 동상이 철거되었다.[172]

8. 4. 대중문화 속의 프랑코

2008년에 철거된 산탄데르의 프랑코 동상


2008년에 산타 크루스 데 테네리페의 거리 이름이 프랑코의 이름에서 산타 크루스 람블라로 변경된 것을 알리는 표지판


프랑코는 영화, 음악, 문학 등 다양한 대중문화에서 묘사되어 왔다. 그의 이미지는 다양한 방식으로 재현되었으며, 그 의미 또한 시대와 맥락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었다.

분야작품명연도감독/작가/배우비고
영화라사 (Espíritu de una Razaes)1941각본: 프랑코 ("하이메 데 안드라데"라는 필명 사용), 배우: 알프레도 마요반자전적 영화
영화프랑코, 그 남자 (Franco, ese hombrees)1964호세 루이스 사엔스 데 에레디아프랑코 찬양 다큐멘터리
영화드래곤 래피드 (Dragon Rapidees)1986배우: 후안 디에고스페인 내전 이전 사건 다룸
영화천국에서 나를 기다려줘 (Espérame en el cieloes)1988배우: 호세 "페페" 소리아노프랑코와 대역 모두 연기
영화훌륭한 여정, 각하! (¡Buen Viaje, Excelencia!es)2003배우: 라몬 폰트세레
TV 영화20-N: 프랑코의 마지막 날들 (20-N: Los ultimos dias de Francoes)2008배우: 마누엘 알렉산드레
영화트럼펫의 슬픈 발라드 (Balada triste de trompetaes)2010감독: 알렉스 데 라 이글레시아, 배우: 후안 비아다스
TV 시리즈시간부 (El Ministerio del Tiempoes) 에피소드 "시간을 다시 쓰는 방법"2015배우: 페프 미라스1940년 10월 프랑코와 아돌프 히틀러의 앙다이 회담 배경
영화스페인의 여왕 (La reina de Españaes)배우: 카를로스 아레세스마카레나 그라나다(페넬로페 크루즈)에게 침을 뱉는 장면
음악"프랑코의 죽음" (Franco la muerte프랑스어)1964레오 페레(Léo Ferré)앨범 페레 64(Ferré 64) 수록곡, 프랑코 사망 시까지 스페인 공연 거부
문학《마드리드의 겨울》 (Winter in Madrid영어)C. J. 샌섬
문학《…그리고 3년 만에 다시 살아났다》 (…Y al tercer año resucitóes)1980프랑코 부활 가정
문학《트리아주》 (Triage영어)1998스콧 앤더슨(Scott Anderson)
문학《프랑키시모 장군 또는 죽어가는 군인의 시민적 죽음》 (El general Franquisimo o La muerte civil de un militar moribundoes)안드레스 바스케스 데 솔라(Andrés Vázquez de Sola)풍자 작품[124]
문학《발렌시아 물 속의 복수》 (Vengeance in the Valencian Water영어)캐롤라인 앵거스 베이커(Caroline Angus Baker)1957년 발렌시아 홍수 배경
문학《발렌시아 먼지 속의 죽음》 (Death in the Valencian Dust영어)캐롤라인 앵거스 베이커(Caroline Angus Baker)1975년 마지막 사형 집행 관련
문학『프랑코와 대일본제국』2012플로렌티노 로다오(Florentino Rodao) 저, 심택안보 외 역, 晶文社[http://www.kufs.ac.jp/toshokan/bibl/bibl198/pdf/198-21.pdf]
문학『카스트로와 프랑코 냉전기 외교의 무대 뒤』2016세타 하루코 저, 筑摩書房 <치쿠마 신쇼>카스트로와의 말년 교류


9. 기타

프랑코는 스페인 내전의 주역이자, 이후 독재자로 군림했던 인물이다. 그의 통치는 스페인 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외동딸 카르멘 프랑코는 후안 카를로스 1세로부터 공작 작위를 받았다.[1]

프랑코의 문장과 깃발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개인 문장 (1940–1975)
[82]
프란시스코 프랑코 국가 원수 깃발


9. 1. 가족 관계

프랑코의 외동딸 카르멘 프랑코는 훗날 후안 카를로스 국왕으로부터 공작 작위를 받았다.[1]

프랑코의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카르멘 프랑코정치인


9. 2. 훈장 및 상징

문장과 깃발
[8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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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논문 Ley organizando la Administración Central del Estado https://www.boe.es/d[...] Agencia Estatal Boletín Oficial del Estado 1938-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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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뉴스 カルメン・フランコさん死去 スペインのフランコ元総統の1人娘 https://www.iza.ne.j[...] 共同通信 2017-12-29
[170] 뉴스 http://www.spain-ya.[...] 2008-11-07
[171] 뉴스 朝日新聞 2008-12-23
[172] 뉴스 スペインの独裁者フランコ総統、最後の銅像を撤去 https://www.cnn.co.j[...] CNN.co.jp 2021-12-29
[173] 법률문서 Juzgado Central de Instrucción n.º 5. Audiencia Nacional. Madrid. Diligencias previas (proc. abreviado) 399/2006 V. Auto Administración de Justicia 2008-11-16
[174] 법률문서 Auto del 16 de octubre de 2008 del Juzgado Central de Instrucción n.º 5 de la Audiencia Nacional 2008-10-16
[175] 법률문서 Juzgado Central de Instrucción n.º 5. Audiencia Nacional. Madrid. Sumario (proc. ordinario) 53/2008 E. Auto Administración de Justicia 2008-11-18
[176] 뉴스 null https://elpais.com/p[...] 에르파이스 2018-08-24
[177] 뉴스 null https://elpais.com/p[...] 에르파이스 2018-09-13
[178] 뉴스 Parliament approved the exhumation, 172 to 2, with 164 abstentions, and the two who voted against were reported to have done so in error. The two main center-right opposition parties refused to take part in the vote, and the conservative Popular Party plans to appeal the decision before the Constitutional Court, arguing that Prime Minister Pedro Sánchez unjustifiably fast-tracked the measure. https://www.nytimes.[...] 뉴욕타임즈 2018-09-13
[179] 웹사이트 프랑코 총통의 유체 옮기기를 일시 중단, 스페인 최고재판소가 판단 https://www.afpbb.co[...] 2021-12-29
[180] 웹사이트 프랑코 총통의 관, 다른 무덤으로 옮겨 스페인 https://www.cnn.co.j[...] 2021-12-29
[181] 웹사이트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 총통의 유해, 옮겨짐 아내 옆에 매장 https://www.afpbb.co[...] 2021-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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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 간행물 프랑코 정권의 기억 만들기와 그 기억의 변화 호남사학회
[184] 뉴스 스페인 프랑코시대 대규모 유아유괴 수사 http://www.yonhapnew[...] 연합뉴스 2011-07-08
[185] 뉴스 아버지가 친부모 죽인 원수였다니… 30년만에 찾은 ‘진실’ http://www.munhwa.co[...] 문화일보 2012-07-13
[186] 뉴스 '서프라이즈' 스페인 수녀, 40년간 30만 명의 영아 납치 매매 '경악' https://news.naver.c[...] 한국일보 2012-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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