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발세위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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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흐발세위 교회는 그린란드에 건설된 14세기 초의 교회로, 동부 정착지에 있던 여러 교구 교회 중 하나였다. 1408년 토르스테인 올라프손과 시그리드 비외른스도티르의 결혼식이 이 교회에서 거행되었으며, 이는 그린란드 노르드인의 마지막 기록으로 남아 있다. 건축 양식은 13세기 초 앵글로노르드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화강암 자연석을 사용했다. 현재 이 부지는 양 목장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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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발세위 교회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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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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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름 | 흐발쇠 키르케 |
현지 언어 이름 (덴마크어) | Hvalsø Kirke |
현지 언어 이름 (고대 노르드어) | Hvalseyjarfjarðarkirkja |
위치 | 흐발세위 |
국가 | 그린란드 |
상세 정보 | |
교단 | 로마 가톨릭교회 |
설립 시기 | 12세기 |
상태 | 유적 |
길이 | 16m |
너비 | 8m |
교구 | 가르다르 |
2. 역사
사가에 따르면, 흐발세위 주변의 땅은 에리크 더 레드의 친척인 토르켈 파르세르크가 차지했다.[6] 기독교는 서기 1000년경 그린란드에 전파되었고, 교회는 이 나라에서 건설되기 시작했다.[1][6] 흐발세위 교회는 14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지만,[2][7]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이곳에 처음 세워진 교회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1][6] 이 교회는 여러 중세 후기 문서에 동부 정착지의 10~14개 교구 교회 중 하나로 언급되어 있다.
이 교회에서는 1408년 9월 14일 또는 16일에 토르스테인 올라프손과 시그리드 비외른스도티르의 결혼식이 열렸다.[1][6] 이 결혼식은 가르다르, 그린란드의 사제와 여러 아이슬란드인들이 보낸 편지에서 언급되었으며, 그린란드 노르드의 마지막 기록이다. 이 부부는 나중에 올라프손의 고향인 아이슬란드에 정착했다.[1][6]
이누이트 전설에 따르면, 노르드 족장 운고르토크와 이누크 지도자 카이싸페 사이에 공개적인 전쟁이 벌어졌다. 이누이트는 흐발세위에 대규모 공격을 가해 노르드족을 집 안에서 불태웠지만 운고르토크는 가족과 함께 탈출했다. 카이싸페는 케이프 페어웰 근처에서 끝난 긴 추격전 끝에 그를 물리쳤다. 그러나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화재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3][8]
현재 이 부지는 양 목장의 일부이다.
2. 1. 노르드인 정착과 기독교 전래
사가문학에 따르면, 흐발세위 일대의 지주는 에이리크 라우디의 친척 토르켈 파르세르쿠르였다.[6] 그린란드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기원후 1000년경이며, 이 때부터 곳곳에 교회당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6][1] 흐발세위 교회는 14세기 초엽에 지어진 것으로 생각되나,[7][2] 고고학적 증거를 보건대 지금 남아 있는 교회가 최초의 교회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6][1] 이 교회는 중세 말기의 여러 사료에 언급되며, 에위스트리뷔그드에 산재한 10-14여개 교구교회들 중 하나였다.1408년 9월 14일 또는 16일, 이 교회에서 토르스테인 올라프손(Thorstein Olafsson)과 시그리드 뵤른스도티르(Sigrid Bjǫrnsdóttir)가 결혼식을 올렸다.[6][1] 가르다르 주교와 여러 아이슬란드인들이 쓴 서한에 이 결혼식이 언급된다. 이 부부는 남편의 고향인 아이슬란드로 건너갔다고 하며, 이것이 그린란드의 노르드인 정착민들에 대하여 역사상 남아 있는 마지막 기록이다.[6][1]
에스키모들 사이에 전해져 오는 전설에 따르면, 노르드인 지도자 웅고르톡(Ungortoq)과 에스키모 지도자 크아잇사페(K'aissape) 사이에 전쟁이 벌어져서, 에스키모들이 흐발세위에 쳐들어가서 노르드인들을 집째로 불태워 죽였고, 가족들과 함께 도망친 웅고르톡을 그린란드 최남단 작별의 곶까지 쫓아가서 거기서 죽였다고 한다. 하지만 고고학적 연구 결과, 방화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8][3]
2. 2. 1408년의 결혼식과 노르드인 최후의 기록
사가문학에 따르면, 흐발세위 일대의 지주는 에이리크 라우디의 친척 토르켈 파르세르쿠르였다.[6] 그린란드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기원후 1000년경이며, 이 때부터 곳곳에 교회당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6] 흐발세위 교회는 14세기 초엽에 지어진 것으로 생각되나,[7][2] 고고학적 증거를 보건대 지금 남아 있는 교회가 최초의 교회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6][1] 이 교회는 중세 말기의 여러 사료에 언급되며, 에위스트리뷔그드에 산재한 10-14여개 교구교회들 중 하나였다.1408년 9월 14일 또는 16일, 이 교회에서 토르스테인 올라프손(Thorstein Olafsson)과 시그리드 뵤른스도티르(Sigrid Bjǫrnsdóttir)가 결혼식을 올렸다.[6][1] 가르다르 주교와 여러 아이슬란드인들이 쓴 서한에 이 결혼식이 언급된다. 이 부부는 남편의 고향인 아이슬란드로 건너갔다고 하며, 이것이 그린란드의 노르드인 정착민들에 대하여 역사상 남아 있는 마지막 기록이다.[6][1]
에스키모들 사이에 전해져 오는 전설에 따르면, 노르드인 지도자 웅고르톡(Ungortoq)과 에스키모 지도자 크아잇사페(K'aissape) 사이에 전쟁이 벌어져서, 에스키모들이 흐발세위에 쳐들어가서 노르드인들을 집째로 불태워 죽였고, 가족들과 함께 도망친 웅고르톡을 그린란드 최남단 작별의 곶까지 쫓아가서 거기서 죽였다고 한다. 하지만 고고학적 연구 결과, 방화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8][3] 현재 이 부지는 양 목장의 일부이다.
2. 3. 이누이트와의 갈등과 멸망
사가문학에 따르면, 흐발세위 일대의 지주는 에이리크 라우디의 친척 토르켈 파르세르쿠르였다.[6] 아이슬란드인들 사이에 전해져 오는 전설에 따르면, 노르드인 지도자 웅고르톡(Ungortoq)과 에스키모 지도자 크아잇사페(K'aissape)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8][3] 에스키모들은 흐발세위에 쳐들어가서 노르드인들을 집째로 불태워 죽였고, 가족들과 함께 도망친 웅고르톡을 그린란드 최남단 작별의 곶까지 쫓아가서 거기서 죽였다고 한다.[8] 하지만 고고학적 연구 결과, 방화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8][3]1408년 9월 14일 또는 16일, 이 교회에서 토르스테인 올라프손(Thorstein Olafsson)과 시그리드 뵤른스도티르(Sigrid Bjǫrnsdóttir)가 결혼식을 올렸다.[6] 가르다르 주교와 여러 아이슬란드인들이 쓴 서한에 이 결혼식이 언급된다.[6] 이 부부는 남편의 고향인 아이슬란드로 건너갔다고 하며, 이것이 그린란드의 노르드인 정착민들에 대하여 역사상 남아 있는 마지막 기록이다.[6] 현재 이 부지는 양 목장의 일부이다.
3. 건축
세로 16 미터, 가로 8 미터 크기로, 13세기 초의 앵글로노르드 양식으로 지어졌다.[7] 30-35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9] 묘지 경계를 표시하는 제방이 교회를 둘러싸고 있다.[6]
건축 재질은 화강암 자연석이다.[6] 돌 하나 하나의 무게는 4-5톤 이상이며, 모르타르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돌과 돌 사이에 발라서 찰쌓기를 한 것인지, 아니면 메쌓기를 한 뒤 외장재로서만 칠한 것인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조개껍데기를 부숴서 모르타르를 만들었기 때문에, 처음 지었을 때는 건물이 흰 색이었을 것이다. 이 지역의 현재 지명인 이누이트어 “카콕톡”(Qaqortoq)은 “하얀 장소”를 의미하며 피오르 입구에 있는 현대 도시 이름은 교회와 관련되어 이름이 지어졌을 수 있다.
벽의 두께는 1.5 미터 정도다.[6] 나무지붕을 올리고 떼로 덮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문과 창문은 모두 상인방식으로 만들었는데, 다만 동쪽 박공의 창문 하나만 홍예식으로 만들었다.[10] 창문은 밖보다 안이 더 넓은데, 이는 아이슬란드 교회건축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더 멀리 브리튼 제도에서 발견되는 요소다.
정성껏 지은 덕분에 흐발세위 교회는 다른 노르드 건축물들에 비해 세월의 풍파를 잘 견뎌냈다. 하지만 그래도 부분적으로 무너져 있는데, 주요 원인은 묘지 위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교회를 짓기 전에 묘지의 무덤들을 철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침강이 일어나서 토대가 꺼져버린 것이다.[2][4][1][5]
3. 1. 위치와 구조
세로 16 미터, 가로 8 미터 크기로, 13세기 초의 앵글로노르드 양식으로 지어졌다.[7] 30-35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9] 묘지 경계를 표시하는 제방이 교회를 둘러싸고 있다.[6]건축 재질은 화강암 자연석이다.[6] 돌 하나 하나의 무게는 4-5톤 이상이며, 모르타르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돌과 돌 사이에 발라서 찰쌓기를 한 것인지, 아니면 메쌓기를 한 뒤 외장재로서만 칠한 것인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조개껍데기를 부숴서 모르타르를 만들었기 때문에, 처음 지었을 때는 건물이 흰 색이었을 것이다.
벽의 두께는 1.5 미터 정도다.[6] 나무지붕을 올리고 떼로 덮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문과 창문은 모두 상인방식으로 만들었는데, 다만 동쪽 박공의 창문 하나만 홍예식으로 만들었다.[10] 창문은 밖보다 안이 더 넓은데, 이는 아이슬란드 교회건축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더 멀리 브리튼 제도에서 발견되는 요소다.
정성껏 지은 덕분에 흐발세위 교회는 다른 노르드 건축물들에 비해 세월의 풍파를 잘 견뎌냈다. 하지만 그래도 부분적으로 무너져 있는데, 주요 원인은 묘지 위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교회를 짓기 전에 묘지의 무덤들을 철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침강이 일어나서 토대가 꺼져버린 것이다.
흐발세위는 피오르의 어귀에 있는 좁은 땅에 위치해 있으며, 교회는 물에서 약 70 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교회는 고전적인 그린란드 노르드 농가[1]에 위치해 있으며, 여러 부속 건물들이 있다. 이 농가는 약 1300 제곱미터 규모의 대형 건물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건물은 11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생활 공간, 8 미터 x 5 미터 규모의 연회장, 그리고 가축 우리를 갖추고 있었다. 주요 건물 외에도 다른 가축 우리, 방문객들이 말을 보관할 수 있는 말 울타리, 언덕 위에 있는 창고, 그리고 물가에 있는 창고가 있었다.
이 주거지는 에리크 붉은머리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초기 건물 위에 지어졌으며, 토르켈 파르세르크의 집이었을 수도 있다.[1]
3. 2. 건축 양식과 특징
흐발세위 교회는 세로 16 미터, 가로 8 미터 크기로, 13세기 초의 앵글로노르드 양식으로 지어졌다.[7] 30-35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9] 묘지 경계를 표시하는 제방이 교회를 둘러싸고 있다.[6]건축 재질은 화강암 자연석이다.[6] 돌 하나 하나의 무게는 4-5톤 이상이며, 모르타르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돌과 돌 사이에 발라서 찰쌓기를 한 것인지, 아니면 메쌓기를 한 뒤 외장재로서만 칠한 것인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모르타르는 조개껍데기를 부숴서 만들었기 때문에, 처음 지었을 때는 건물이 흰 색이었을 것이다. 이 지역의 현재 지명인 이누이트어 “카콕톡”(Qaqortoq)은 “하얀 장소”를 의미하며 피오르 입구에 있는 현대 도시 이름은 교회와 관련되어 이름이 지어졌을 수 있다.
벽의 두께는 1.5 미터 정도다.[6] 나무지붕을 올리고 떼로 덮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문과 창문은 모두 상인방식으로 만들었는데, 다만 동쪽 박공의 창문 하나만 홍예식으로 만들었다.[10] 창문은 밖보다 안이 더 넓은데, 이는 아이슬란드 교회건축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더 멀리 브리튼 제도에서 발견되는 요소다.
정성껏 지은 덕분에 흐발세위 교회는 다른 노르드 건축물들에 비해 세월의 풍파를 잘 견뎌냈다. 하지만 그래도 부분적으로 무너져 있는데, 주요 원인은 묘지 위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교회를 짓기 전에 묘지의 무덤들을 철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침강이 일어나서 토대가 꺼져버린 것이다.[2][4][1][5]
4. 현대적 의의
4. 1. 대한민국의 관점
참조
[1]
문서
"Hvalsey Church" Blue Ice Explorer
[2]
서적
The Frozen Echo: Greenland and the Exploration of North America, ca. A.D. 1000–1500
https://books.google[...]
Stanford University Press
[3]
서적
The Art of Greenland: Sculpture, Crafts, Painting
Gyldendal
[4]
서적
Polar Imperative: A History of Arctic Sovereignty in North America
Douglas & McIntyre
[5]
뉴스
Abandoned Colony in Greenland: Archaeologists Find Clues to Viking Mystery
http://www.spiegel.d[...]
Der Spiegel
2009-01-13
[6]
문서
"Hvalsey Church" Blue Ice Explorer
[7]
서적
The Frozen Echo: Greenland and the Exploration of North America, ca. A.D. 1000–1500
https://books.google[...]
Stanford University Press
[8]
서적
The Art of Greenland: Sculpture, Crafts, Painting
Gyldendal
[9]
서적
Polar Imperative: A History of Arctic Sovereignty in North America
Douglas & McIntyre
[10]
뉴스
Abandoned Colony in Greenland: Archaeologists Find Clues to Viking Mystery
http://www.spiegel.d[...]
Der Spiegel
2009-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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