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네코 야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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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네코 야스지는 1920년 지바현에서 태어나 일본군에 징집되어 중국에서 복무했으며, 종전 후 소련군과 중국군에 억류되었다가 석방된 인물이다. 그는 1990년대부터 일본군의 전쟁 범죄를 증언하기 시작했으며, 일본군 위안부 강제 연행을 증언하고 다큐멘터리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가네코는 자신의 증언에 대한 신빙성을 의심하는 우익 학자들의 주장에 반박하며, 일본의 전쟁 범죄를 인정하고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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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코 야스지 | |
---|---|
기본 정보 | |
이름 | 가네코 야스지 |
출생 | 1920년 1월 28일 |
사망 | 2010년 11월 25일 |
경력 | |
직업 | 일본군 병사 |
주요 활동 | 중국 전선 참전, 전후 전범으로 포로 수용소에 수감, 푸순 전범 관리소에서 교육 및 사상 개조 경험 |
기타 | |
관련 인물 | 기무라 지로 후지타 스스무 |
관련 단체 | 푸순의 기적을 계승하는 모임 |
2. 이력
가네코 야스지는 1920년 지바현 우라야스시에서 태어나 1932년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940년 일본군에 지원하여 중화민국 칭다오시로 출병했으며, 1945년 조선에서 패전을 맞이했다. 이후 시베리아에 억류되었다가 1950년 푸순 전범 관리소로 이송되었고, 1956년 일본으로 귀국했다.[9] 2001년 영화 『일본귀자』에 출연했으며, 2005년에는 그의 취재 기록이 『가네코 씨의 전쟁: 중국 전선의 현실』로 출판되었다.
그의 이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연도 | 사건 |
---|---|
1920년 | 지바현 우라야스시에서 출생 |
1932년 | 초등학교 졸업 |
1940년 | 일본군 지원, 중화민국 칭다오시로 출병 |
1945년 | 조선에서 패전, 이후 시베리아 억류 |
1950년 | 푸순 전범 관리소로 이송 |
1956년 | 일본으로 귀국 |
2001년 | 영화 『일본귀자』 출연 |
2005년 | 취재 기록 『가네코 씨의 전쟁: 중국 전선의 현실』 출판 |
우익 성향의 학자 하타 이쿠히코와 와타나베 도시오는 1940년에 입대한 가네코가 1937년의 남경공략전에 참전했다고 하는 등의 증언 상의 오류를 들어 가네코의 증언에 신빙성을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10][11]
2. 1. 출생 및 징병
가네코 야스지는 1920년 지바현 우라야스시에서 태어났다.[9] 1940년 4월 징병 검사에서 갑종 합격 판정을 받고, 그해 가을 소집되어 북지나 방면군 독립 혼성 제10여단 44대대에 입대하여 이등병으로 중국에 종군했다.[9] 1945년 조선에서 패전을 맞이했다.[9]2. 2. 군 복무 및 전쟁 범죄
1940년 4월 징병검사에서 합격 판정을 받고 그해 가을 소집되어 이등병으로 북지나방면군 독립혼성제10여단 제44대대에 배속되었다.[14] 1945년 조선에서 일본의 항복을 맞이하였다.[14] 이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억류되어 5년간 시베리아에서 억류 생활을 하였고, 1950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인도되어 푸순의 전범관리소에 수용되었다.[14] 여기서 5년 동안 구금된 이후, 1956년 기소 면제 판정을 받고 석방되어 일본으로 돌아왔다.[14]가네코는 76세인 1996년경부터 공개 증언을 시작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1940년에 군에 입대하여 1943년 9월 린칭의 수계에 콜레라를 퍼뜨렸다. 1996년 9월 26일 재팬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고문으로 100명 이상을 살해했다."라고 진술했다. 그는 또한 많은 중국인을 살해하고 강간했다고 진술했다.[3]
2000년 12월 영어 교수이자 활동가인 윤정옥과의 인터뷰에서 "위안부는 비쌌다. 그래서 나는 중국 여성을 납치하고 강간하고 살해했다."라고 증언했다.[4]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중일 전쟁 동안 많은 중국 여성을 강간했다고 주장했다.[5]
일본 다큐멘터리 ''일본의 악마들''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일본이 저지른 전쟁 범죄에서 일본 군인 14명이 자신의 역할을 이야기하는데, 가네코는 자신과 부대가 어떤 위협도 제공하지 않았음에도 단지 재미로 마을 전체를 포위하고 몰살시킨 사건을 묘사한다.[6]
우익 성향의 학자인 하타 이쿠히코와 와타나베 도시오는 1940년에 입대한 가네코가 1937년의 남경공략전에 참전했다고 하는 등의 증언 상의 오류를 들어 가네코의 증언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2. 3. 전후 행적
1945년 조선에 배치되었다가 일본의 항복 이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억류되어 5년간 시베리아에서 억류생활을 하였다. 1950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인도되어 푸순의 전범관리소에 수용되었다.[14] 여기서 5년 동안 구금된 이후, 1956년 기소면제 판정을 받고 석방되어 일본으로 돌아왔다.[9] 중국 귀환자 연락회 회원이 되었으며, 1990년대부터 자신이 체험한 일본군의 잔혹 행위를 증언하는 활동을 시작하였다.[14] 2000년에는 국제여성전범재판에서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 연행을 증언하기도 했다. 2001년에는 다큐멘터리 영화 《일본귀자》(日本鬼子)에 출연하여 증언했다.[14] 2005년에는 취재 기록이 『가네코 씨의 전쟁: 중국 전선의 현실』로 출판되었다. 한편 가네코와 함께 이 영화에 나와 증언을 한 일본군 출신들 중에는 중국의 포로 수용 시설에 있었을 때, 세뇌 교육을 받았을 수도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일본의 잘못을 부정하려는 이도 있다.[14]우익 성향의 학자인 하타 이쿠히코와 와타나베 도시오는 1940년에 입대한 가네코가 1937년의 남경공략전에 참전했다고 하는 등의 증언 상의 오류를 들어 가네코의 증언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10][11]
2. 4. 증언 활동
가네코 야스지는 1990년대부터 자신이 체험한 일본군의 잔혹 행위를 증언하기 시작했다. 2000년에는 국제여성전범재판에서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 연행을 증언했으며,[14] 2001년에는 다큐멘터리 영화 《일본귀신》(日本鬼子, にほんおにっこ|니혼 오니코일본어)에 출연하여 증언했다.1996년 재팬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고문으로 100명 이상을 살해했다."라고 진술했으며, 많은 중국인을 살해하고 강간했다고 증언했다.[3] 2000년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도 중일 전쟁 동안 많은 중국 여성을 강간했다고 주장했다.[5]
2007년 TV 도쿄 인터뷰에서는 "저는 동료들과 주둔지 근처 마을을 돌며 여성들을 납치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여성 국제 전범 법정에서는 위안부에 관한 증언을 했는데, NHK의 프로그램에서는 편집되어 방송되지 않았다.[13]
검사역: "당신이 본 위안소는 여성들이 스스로의 의지로 온 사람들입니까?"
가네코: "아닙니다. 일본에는 공창 제도라는 것이 있어서, 그것은 영업이고 돈벌이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힘들어서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돈에 묶여 있어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 위안부의 위안부다운 점이 있습니다."
검사역: "위안소가 있는 것이 강간 방지에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가네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위안소에 가서 1.5JPY를 낸다면, 강간이라면 무료입니다. 저희 월급은 대략 일등병이 8.8JPY 정도, 상등병이 11JPY 정도입니다. 그 중에서 강제로 저금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돈이 별로 없기 때문에, 1.5JPY를 내는 것보다 작전에 가서 강간을 하는 것이 공짜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검사역: "당신 자신도 그런 생각 속에서 강간에 가담한 적이 있습니까?"
가네코: "있습니다. 쇼와 18년(1943년), 작전에 갔습니다. 그때 어떤 부락에서 젊은 병사가 젊은 여성 한 명을 데려왔습니다. 21, 2살 정도였을까요. 그것을 6명의 병사가 제비를 뽑아 순서를 정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여자를 윤간했습니다. 이런 사실이 있습니다."
1943년 9월에는 린칭의 수계에 콜레라를 퍼뜨렸다고 증언했다.[12]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전쟁론』을 비판하며 "일본이 15년 동안 지속한 중국 침략 전쟁 속에서 수많은 죄과를 범해온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라고 말했다.[9] 또한 하타 이쿠히코가 일본군 병사의 범죄・가해 행위가 군의 방침이 아닌 개인적인 것이라고 보고, 가네코처럼 자신의 행위를 고백하는 전직 병사를 "일부 극악인"이라고 평가하는 것에 대해 비판했다.[9]
한편, 우익 성향의 학자인 하타 이쿠히코와 와타나베 도시오는 1940년에 입대한 가네코가 1937년의 남경공략전에 참전했다고 하는 등의 증언 상의 오류를 들어 가네코의 증언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14]
3. 증언 내용
가네코 야스지는 1996년부터 자신의 전쟁 범죄 경험을 공개적으로 증언하기 시작했다. 그의 증언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중일 전쟁 당시 일본군의 잔혹 행위, 그리고 일본 우익 인사들의 역사 왜곡 문제 등을 포괄한다.
가네코는 1996년 9월 26일 재팬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총을 쏘거나 고문하여 100명 이상을 죽였다"라고 진술했으며,[3] 2007년 3월 10일 TV 도쿄 인터뷰에서는 "나는 동료들과 함께 주둔지 근처의 마을에서 여성을 납치했다"고 증언했다.[12] 또한, 산둥성 린칭현에서 콜레라균을 이용한 제방 파괴 작전에 참여했다고 밝혔다.[12]
여성 국제 전범 법정에서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증언을 했으나, NHK에서는 해당 내용이 삭제되어 방영되지 않았다.[13] 그는 위안부 제도가 강간 방지에 효과가 없었으며, 자신도 강간에 가담했다고 증언했다.[13]
그는 일본의 전쟁 범죄를 부정하거나 축소하려는 우익 인사 고바야시 요시노리와 하타 이쿠히코를 비판하며, 전쟁의 참혹함과 역사적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9]
3. 1. 전쟁 범죄 관련 증언
- 1996년 9월 26일 일본의 영자지 ''재팬 타임스''에서 가네코는 "총으로 쏘거나 고문하여 100명 이상을 내가 죽였다. 이런 일을 다시는 되풀이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3]
- 2007년 3월 10일 TV 도쿄의 인터뷰에서는 "나는 동료들과 함께 주둔지 근처의 마을에서 여성을 납치했다"고 증언하였다.[12]
- 산둥성 린칭현에 제59사단 예하 독립혼성보병 제44대대가 주둔했는데, 1943년 9월 운하에 콜레라를 퍼트리려고 제방을 무너뜨렸다고 증언했다. "44대 대장인 히로세 도시요시 중좌로부터, '웨이허 제방을 파괴하여 해방구를 매몰시켜 콜레라균을 퍼트려라'고 명령을 받았다. 당시 중기관총 소대장 오시마 소위와 8명은 파괴작업을 행했고, 그밖의 사람은 제방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가장했다. 당시 나는 중기관총 분대의 상등병이었고, 이 파괴행위에 참가하여 삽으로 50센치의 제방을 무너뜨렸다."[12]
- 여성 국제 전범 법정에서 일본군 위안부에 관하여 증언했으나, NHK의 방송분에서는 스즈키 요시오의 증언과 함께 삭제되어 방영되지 않았다.[13]
::'''질문''': "당신이 본 위안소의 여성들은 자신의 의지로 왔다는 사람들입니까?"
:::'''가네코''': "아니오. 일본에는 공창 제도가 있습니다만, 이것은 영업으로 이익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고통스럽게 일하고 있었습니다. 빚으로 속박되어 자유행동은 불가능했습니다. 이곳에 위안부의 위안부라고 할만한 것이 있었습니다."
::'''질문''' "위안소의 존재가 강간방지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까?"
:::'''가네코''' "소용없었습니다. 위안소는 1엔 50전을 지불해야했지만, 강간은 공짜였습니다. 나의 월급은 이등병으로서 8엔 80전쯤 되었고, 상등병으로서 11엔 정도였습니다. 이중의 일부는 강제적으로 저금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돈도 없었기 때문에 1엔 50전을 지불하는 것보다는 작전에 나가서 강간을 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일본이 (만주사변을 기점으로) 15년이나 계속되었던 중국 침략에서 수많은 죄를 범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코바야시 씨에게 말한다. 거짓말하지 말아라. 예로부터 거짓말은 도둑질의 씨가 된다고 했다. 하물며 《전쟁론》에 나오는 침략 전쟁은 살인 강도와 똑같다. 무기를 들고 다른 나라에 들어가 재물을 약탈하고 반항하면 죽이는 것이다. 《전쟁론》을 그리려면 전쟁의 무서움과 잔혹함, 그리고 슬픔을 그려서 두 번의 이런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역사의 사실을 정확히 알려야 한다."[9]
- 일본의 전쟁 범죄를 줄여서 해석하려는 하타 이쿠히코의 발언[11]을 비판하여
::하타 이쿠히코는 일본군 병사의 범죄, 가해 행위가 군의 방침이 아닌 개인적인 것이라고 보고, 가네코와 같이 자신의 행동을 고백하는 전직 병사를 "일부 극악인"이라고 평하고 있다. "확실히 우리들은 극악인이었다. 피해자도 우리를 악귀로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우리를 악귀로 만들었나? 누구도 좋아서 악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라고 배우는 게 아닌가? 군대는 극악인이 되도록 교육하지 않았나? 하타도 군대에 가면 알게 될 것이다. 군대는 죽이라고 하면 죽여야 한다. 전쟁에 나간다면 하타도 똑같은 "극악인"이 될 것이다."[9]
3. 2. 일본군 위안부 관련 증언
가네코 야스지는 일본군 위안부에 관하여 여성 국제 전범 법정에서 증언했으나, NHK의 방송분에서는 스즈키 요시오의 증언과 함께 삭제되어 방영되지 않았다.[13]다음은 여성 국제 전범 법정에서의 가네코 야스지의 증언 내용이다.
- '''질문:''' "당신이 본 위안소의 여성들은 자신의 의지로 왔다는 사람들입니까?"
- '''가네코:''' "아니오. 일본에는 공창 제도가 있습니다만, 이것은 영업으로 이익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고통스럽게 일하고 있었습니다. 빚으로 속박되어 자유 행동은 불가능했습니다. 이곳에 위안부의 위안부라고 할 만한 것이 있었습니다."
- '''질문:''' "위안소의 존재가 강간 방지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까?"
- '''가네코:''' "소용없었습니다. 위안소는 1엔 50전을 지불해야 했지만, 강간은 공짜였습니다. 나의 월급은 이등병으로서 8엔 80전쯤 되었고, 상등병으로서 11엔 정도였습니다. 이 중 일부는 강제적으로 저금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돈도 없었기 때문에 1엔 50전을 지불하는 것보다는 작전에 나가서 강간을 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000년 12월 영어 교수이자 활동가인 윤정옥과의 인터뷰에서 "위안부는 비쌌다. 그래서 나는 중국 여성을 납치하고 강간하고 살해했다."라고 증언했다.[4]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중일 전쟁 동안 많은 중국 여성을 강간했다고 주장했다.[5]
3. 3. 일본 우익 비판
- 1996년 9월 26일 일본의 영자지 ''재팬 타임스''에서 "총을 쏘거나 고문하여 100명 이상을 살해했습니다. 이런 일은 절대로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12]
- 2007년 3월 10일 TV 도쿄 인터뷰에서 "저는 동료들과 주둔지 근처 마을을 돌며 여성들을 납치했습니다"라고 말했다.[12]
- 산둥성 린칭현에 제59사단 예하 독립보병 제44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1943년 9월에 운하에 콜레라를 살포하여 둑을 무너뜨렸다고 증언하고 있다. "44대대장 히로세 도시요시 중령으로부터 웨이허 둑을 파괴하고 해방구를 매몰시켜 콜레라균을 살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중기관총 소대장 코지마 소위 등 8명은 파괴를 실행했고, 다른 사람들은 둑을 지키는 것처럼 보였다. 당시 저는 중기관총 분대 상등병으로, 그 파괴 활동에 참가하여 삽으로 50cm 둑을 무너뜨렸다."[12]
- 여성 국제 전범 법정에서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증언을 했지만, NHK의 프로그램에서는 스즈키 요시오의 증언과 함께 편집되어 방송되지 않았다.[13]
- * 검사역: "당신이 본 위안소는 여성들이 스스로의 의지로 온 사람들입니까?"
- * 가네코: "아닙니다. 일본에는 공창 제도라는 것이 있어서, 그것은 영업이고 돈벌이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힘들어서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돈에 묶여 있어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 위안부의 위안부다운 점이 있습니다."[13]
- * 검사역: "위안소가 있는 것이 강간 방지에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 * 가네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위안소에 가서 1.5JPY을 낸다면, 강간이라면 무료입니다. 저희 월급은 대략 일등병이 8.8JPY 정도, 상등병이 11JPY 정도입니다. 그 중에서 강제로 저금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돈이 별로 없기 때문에, 1.5JPY을 내는 것보다 작전에 가서 강간을 하는 것이 공짜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13]
- * 검사역: "당신 자신도 그런 생각 속에서 강간에 가담한 적이 있습니까?"
- * 가네코: "있습니다. 쇼와 18년(1943년), 작전에 갔습니다. 그때 어떤 부락에서 젊은 병사가 젊은 여성 한 명을 데려왔습니다. 21, 2살 정도였을까요. 그것을 6명의 병사가 제비를 뽑아 순서를 정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여자를 윤간했습니다. 이런 사실이 있습니다."[13]
-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전쟁론』을 비판하며
: "일본이 15년 동안 지속한 중국 침략 전쟁 속에서 수많은 죄과를 범해온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 "고바야시 씨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거짓말은 안 됩니다. 옛날부터 거짓말은 도둑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더군다나 『전쟁론』에 나오는 침략 전쟁은 살인 강도와 같습니다. 무기를 들고 타국에 들어가 물건을 약탈하고 거스르면 죽입니다. 『전쟁론』을 쓴다면 전쟁의 무서움과 잔혹함, 그리고 슬픔을 잘 검증해서 두 번 다시 이런 과오가 없도록 역사의 진실을 정확하게 가르쳐야 합니다."[9]
- 하타 이쿠히코의 잡지 발언[11]을 비판하며
: 하타 이쿠히코는 일본군 병사의 범죄・가해 행위가 군의 방침이 아닌 개인적인 것이라고 보고, 가네코처럼 자신의 행위를 고백하는 전직 병사를 "일부 극악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확실히 우리는 극악인이었습니다. 피해자에게는 귀신으로 보였겠지요. 하지만 누가 우리를 귀신으로 만들었습니까? 아무도 좋아서 귀신이 된 것은 아닙니다.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을 배운 것이 아닙니까? 군대에서 극악인이 되도록 교육받은 것이 아닙니까? 하타도 군대에 갔으면 알았을 겁니다. 병사는 죽이라고 하면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전쟁에 가면 하타도 똑같은 '극악인'이 되었을 겁니다."[9]
4. 증언에 대한 논란
일본의 역사학자 하타 이쿠히코는 가네코의 증언이 널리 알려진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타 이쿠히코에 따르면 가네코의 부대는 칭다오에 주둔했으므로, 중국 북부 만주에 위치한 731 부대의 일원이었을 리가 없다.[7] 그는 만약 가네코가 어떤 만행을 저질렀다면, 그것은 그의 독자적인 행동이었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가네코는 이에 대해 하타가 전쟁의 참상을 겪어보지 못했고, 그 심정을 모른다고 응수했다.[1]
참조
[1]
서적
金子さんの戦争——中国戦線の現実
リトルモア
[2]
간행물
撫順の奇蹟を受け継ぐ会会報『前へ前へ』第32号
2010-12-01
[3]
뉴스
Kill all, rob all, burn all
Japan Times
199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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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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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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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Japan's Abe: No Proof of WWII Sex Sla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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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뉴스
Face to face with Imperial evil
http://search.japant[...]
Japan Times
2008-01-17
[7]
간행물
終戦特集を検証する-「空想虚言症」の記憶にさいなまれる『朝日新聞』
1998-11
[8]
간행물
撫順の奇蹟を受け継ぐ会会報『前へ前へ』第32号
2010-12-01
[9]
서적
金子さんの戦争——中国戦線の現実
リトルモア
[10]
서적
検証旧日本軍の「悪行」——歪められた歴史像を見直す
自由社
[11]
간행물
終戦特集を検証する——「空想虚言症」の記憶にさいなまれる『朝日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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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731部隊「コレラ作戦」
http://home.att.ne.j[...]
[13]
웹사이트
NHK・ETV特集から消された戦場の証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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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Face to face with Imperial 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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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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