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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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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릉 전투는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전투로, 북한군은 1948년부터 유격대를 남파하고 병력을 배치하여 남침을 준비했다. 북한군은 해안으로 상륙하여 강릉을 공격했고, 이에 국군 제8사단은 저항했으나, 열세에 몰려 철수했다. 이 전투로 인해 국군 제8사단은 원주, 제천을 거쳐 대구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혼란을 겪으며 북한군의 남침 속도를 늦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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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분쟁한국 전쟁
날짜1950년 6월 25일 ~ 1950년 6월 27일
장소강원도 강릉
결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대한민국
교전국 2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휘관
대한민국이정일 제8사단장 대령
고근홍 제10연대장 중령
박치옥 제1대대장 소령
조원영 제2대대장 소령
이도헌 제2대대장 소령 (7월 3일부터)
하병래 제3대대장 소령
김찬호 57mm 대전차포중대장 대위
최면호 57mm 대전차포중대장 중위 (6월 26일부터)
김용배 제21연대장 중령
박서권 제1대대장 소령
조규영 제2대대장 소령
최취성 제2대대장 대위 (6월 29일부터)
이창률 제3대대장 소령
서봉교 57mm 대전차포중대장 중위
이남구 제18포병대대장 대위
장경식 제18보병대대장 소령
정원하 야전공병대대장 대위
김묵 야전공병대대장 대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김광협 제2군단장 소장
마상철 제5사단장 소장
오진우 제766부대장 총좌
병력 규모
대한민국(정보 없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정보 없음)
사상자 규모
대한민국(정보 없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정보 없음)

2. 배경

1948년 11월부터 북한군은 설악산, 오대산, 태백산 줄기를 인민 유격대의 남파 통로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1950년 6월 중순, 기관총으로 무장한 유격대 60명을 오대산, 계방산으로 침투시켜 국군의 반응을 살피는 동시에 전투 병력을 분산시키고 후방 지역 교란을 꾀하였다. 이들은 5일 만에 55명이 사살되었지만, 북한군은 아군의 전투 병력을 분산시키는 목표를 달성하였다.

무장 유격대가 오대산 일대로 침투할 무렵, 양양을 중심으로 한 38도 분계선 일대에 붉은 계급장을 단 병력이 나타나 공격대기 지점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마상철(馬上喆) 소장이 이끄는 북한군 제5사단 병력이었다. 간성에는 오진우(吳振宇) 총좌가 이끄는 제766부대와 제549 부대가 아군의 후방 지역에 상륙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양양 일대에서는 군용 식량과 마초(馬草)를 현물세 형식으로 거둬들여 상당한 양을 비축했다.

2. 1. 북한군의 남침 준비

북한군은 1948년 11월부터 설악산, 오대산, 태백산 줄기를 인민 유격대의 남파 통로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1950년 6월 중순에는 기관총으로 무장시킨 유격대 60명을 오대산, 계방산으로 침투시켜 국군의 반응을 살피는 동시에 전투 병력 분산을 유도하고 후방지역 교란을 꾀하였다.

이들 유격대는 아군의 조직적인 토벌작전으로 작전 개시 5일 만인 6월 20일에 55명이 사살되었지만, 북한군은 아군의 전투 병력을 분산시키는 목표는 달성하였다.

무장 유격대가 오대산 일대로 침투할 무렵, 양양을 중심으로 한 38도 분계선 일대에 붉은 계급장을 단 병력이 나타나 공격대기 지점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마상철(馬上喆) 소장이 이끄는 북한군 제5사단 병력이었다.

간성(杆成)에는 오진우(吳振宇) 총좌가 이끄는 제766부대와 제549 부대가 아군의 후방지역에 상륙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양양 일대에서는 군용 식량과 마초(馬草)를 현물세 형식으로 거둬들여 상당한 양을 비축해 두기도 하였다.

2. 1. 1. 북한군 병력 배치

북한군이 설악산, 오대산, 태백산 줄기를 인민 유격대의 남파 통로로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1948년 11월부터였다. 1950년 6월 중순, 기관총으로 무장시킨 유격대 60명을 오대산, 계방산으로 침투시켜 국군의 반응을 살피는 동시에 전투 병력을 분산시키고 후방지역 교란을 꾀하였다.

이들 유격대는 아군의 조직적인 토벌작전으로 작전 개시 5일 만인 6월 20일에 55명이 사살되었지만, 북한군은 아군의 전투 병력을 분산시키는 목표는 달성하였다.

무장 유격대가 오대산 일대로 침투할 무렵, 양양을 중심으로 한 38도 분계선 일대에 붉은 계급장을 단 수많은 병력이 나타나 공격대기 지점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1949년 8월 나남(羅南)에서 창설된 마상철(馬上喆) 소장이 이끄는 북한군 제5사단 병력이었으며, 중공군 제164사단 출신 한인 1만 명을 기간으로 하였다.

간성(杆成)에는 오진우(吳振宇) 총좌가 이끄는 유격부대인 제766부대와 육전대인 제549 부대가 아군의 후방지역에 상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양양 일대에서는 5월 초부터 감자나 호박을 말린 군용 식량과 마초(馬草)를 현물세 형식으로 거둬들여 상당한 양을 비축해 두기도 하였다.

6월 19일, 38도 분계선 우단의 기사문리(基士門里) 해변에서 적 제5사단 군사 1명이 귀순, “지금 양양 일대에 많은 인민군이 집결하여 공격 준비를 하고 있다”라고 진술하였다. 같은 날 서림리에서도 북한군 군사 1명이 투항하여 똑같은 내용의 첩보를 제공하였으나, 상급부대에서는 아무런 대책도 강구하지 않았다.

2. 1. 2. 북한군 귀순 병사의 증언

1950년 6월 19일, 38도 분계선 우단 기사문리 해변으로 북한군 제5사단 군사 1명이 귀순해 왔다. 이 군인은 18세 정도의 홍안 소년으로, "지금 양양 일대에서 많은 인민군이 집결하여 공격 준비를 하고 있다"라고 진술하였다.

같은 날 서림리에서도 북한군 군사 1명이 투항하여 똑같은 내용의 첩보를 제공하였으나, 상급부대에서는 아무런 대책도 강구하지 않았다.

3. 전투 과정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은 강릉 남쪽 정동진리 등명동에 상륙하여 주민들을 동원해 탄약과 보급품을 운반했다. 북한군 육전대는 발동선과 범선으로 주력 부대를 상륙시켰고, 옥계면 도직리에도 상륙을 시도했으나 수심 문제로 3명만 상륙하여 본대와 합류했다. 같은 날 07:00경, 북한군 제766부대는 삼척 남쪽 임원진리에 상륙하여 태백산맥으로 침투했다. 등명동에 상륙한 북한군 1개 연대는 강릉광업소를 급습, 직원 4명을 납치하고 강릉으로 북상했다. 7번 도로를 차단하던 북한군 1개 대대는 국군, 경찰, 대한청년단의 기습을 받고 격퇴되었다.

한편, 38도 분계선에서는 6월 25일 04:00부터 북한군 제15사단의 공격 준비 사격이 시작되었다. 북한군 제5사단은 7번 도로를 따라 주문진으로, 조공은 계곡 접근로를 따라 남쪽으로 진격했다. 국군 전방 부대는 북한군의 포병 화력에 압도되어 저지 진지로 철수했으나, 예비 중대가 전투 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북한군의 공격에 밀려 철수를 거듭했다. 제10연대 2대대는 화상천 저지 진지를 포기하고 주문진으로, 제1대대는 구룡령 일대에서 지연전을 펼치며 광원리 부근으로 철수했다.

국군 제8사단은 비상 발령 후 작전회의를 통해 제21연대의 강릉 이동과 연곡천~사천선 저지, 사단 공병대의 예비대 편성, 육군 본부에 1개 연대 증원을 요청했다. 작전개념은 38도 분계선을 경계 진지로, 화상천 일대를 전진진지로, 연곡천~광원리를 주저항선으로, 사천과 운두령을 예비 진지로 하여 지연전을 펼치는 것이었다. 육군 본부는 1개 연대 증원이 불가능하다고 통보했고, 모든 통신이 두절되었다.

사단장은 장기전을 대비하여 군수품을 진부리로 소산시키고, 계엄령 선포, 군경가족과 공공기관 후방 피난 및 소개, 민간 차량 징발 등의 조치를 취했다. 강릉 학도호국단 학생 1400여 명은 탄약 및 보급품 운반, 환자 구호, 연락 업무를 수행하며 학도병 참전의 효시가 되었다. 제10연대는 57mm 대전차포중대와 제4중대를 안목~안인진 일대로 급파, 적 선단을 격퇴하고 대포동에서 북한군 1개 중대 규모를 격멸했다.

제8사단장은 남쪽 협공에 대비, 군선강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기로 결정했다. 제10연대 3대대를 군선강에 투입하고 제18야전포병대대 3중대를 배속시켰다. 공병대대는 연곡천 주저항선에 배치하고 사단 전술 지휘소를 사천국민학교에 설치했다. 삼척의 제21연대는 민간차량을 징발하여 기동력을 확보하고, 옥계 일대 적정을 수집한 후 우회 이동하여 6월 26일 강릉에 도착, 군선강 방어 진지를 인수했다.

6월 25일 저녁, 제8사단은 연곡천 일대에 주저항선을 설정하고, 공병대대를 제10연대에 배속시켜 연곡천 주저항선 진지를 점령했다. 제18야전포병대대 1중대는 석교리에, 2중대는 사천 초등학교에 포진하여 화력을 지원했다. 6월 26일 오전, 제21연대가 증원되면서 연곡천 방어 배치가 재조정되었다.

연곡천 방어선의 부대 배치 상황 (6월 26일)
좌전방부대중앙전방부대우전방부대화력지원부대
공병대대(3개 중대)제10연대 제3대대
(제3대대장 지휘 하에 4개 중대(제1중대, 제2중대, 제4중대, 제12중대)를 7번 도로 좌우측에 배치)
제10연대 제2대대제18야전포병대대(2개 중대), 57mm 대전차포 2개 중대(제 21연대 대전차포 1개 중대 배속)



사천면에서는 대한청년단 단원 40명이 적정 수집에 나섰고, 면 부인회와 청년단은 야전 취사장을 설치해 군경에게 주먹밥을 제공했다.

연곡천~송림리(松林里) 간 4km 방어 정면과 사천까지 3km 방어 종심을 가진 지역에 제8사단의 주 방어지대가 형성되었다. 연곡천은 강폭이 200m~250m로 넓지만, 수심이 깊어 건너기 어려웠다. 국군은 7번 도로와 연곡천이 만나는 지점의 목교를 파괴하는 대신 살상지대를 설정하여 적을 유인 격멸하려 했다.

6월 26일 새벽, 북한군의 강습 도하 시도를 시작으로 교전이 벌어졌지만, 대규모 공격은 없었다. 제10연대는 주문진 공격을 위한 발판으로 천마봉(天馬峰) 공격을 시도했으나, 북한군의 공격 준비를 탐지하지 못했다.

6월 27일 새벽 04:00, 북한군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천마봉의 제2대대는 저항을 포기하고 무단 철수했고, 주저항선 부대들은 북한군을 아군으로 오인했다. 이때, 제21연대 제3대대가 강릉에 도착, 사천선에 투입되어 분산 철수하는 병력을 수습하고 북한군을 저지했다. 제21연대 제3대대의 증원은 제8사단에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다.

3. 1. 북한군의 수륙 양면 작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강릉 남쪽 정동진리 등명동에 나타나 마을 주민들을 동원, 수송선에서 탄약과 보급품을 뒷산으로 운반시켰다. 북한군은 이미 뒷산 중턱에 개인호를 파고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상륙 시간은 04:00 전후보다 1시간 전으로 짐작된다.

해두보(sea head)를 확보한 북한군 육전대는 발동선과 범선으로 주력 부대를 상륙시켰다. 등명동 남쪽 10km 지점 옥계면 도직리에 선박 접안을 시도했으나 수심 문제로 실패, 3명만 상륙 후 등명동 본대와 합류했다.

같은 날 07:00경, 북한군 제766부대가 삼척 남쪽 임원진리에 상륙, 태백산맥으로 침투했다. 등명동 상륙을 완료한 북한군 1개 연대는 산성우리 대한흑연무연탄 주식회사 강릉광업소를 급습, 심경섭 경리과장 등 직원 4명을 납치하고 밤재에 1개 대대를 배치 후 강릉으로 북상했다.

7번 도로를 차단하던 북한군 1개 대대는 옥계로 남하 중 국군 제21연대 1중대, 경찰, 옥계면 대한청년단의 기습을 받고 격퇴되었다. 북한군 대대장은 정동진리 해안 초소 경찰관 사살 실패 후 심경섭을 학살, 국군 제21연대의 강릉 이동을 예상하고 차단 진지를 구축했다.

3. 1. 1. 38도 분계선상의 교전 상황

6월 24일 낮부터 영동 일대에는 단비가 내리다가 밤에는 부슬비로 바뀌어 온 세상을 촉촉이 적시고 있었다. 6월 25일 04:00부터 강릉에서는 북한군 제15사단의 공격 준비 사격이 시작되었다. 그보다 앞서 강릉군 강동면 정동진리 등 영동 해안으로 상륙한 북한군 육전대의 선발대가 해두보(sea head)를 확보하고 후속 부대가 속속 상륙하고 있었다.

북한군 제5사단은 주공을 7번 도로 축선에 투입하여 주문진으로 진격을 시작하였고, 조공은 양야~서림리, 남양리(南洋里)~원일전리(元日田里)의 계곡 접근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소대 및 분대 단위로 경계 진지를 구축하여 38도 분계선을 경계하던 국군 전방 부대 5개 중대는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엄청난 적의 포병 화력에 압도되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으며, 제대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에서 분계선 남쪽에 준비된 저지 진지로 철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방 대대의 예비 중대가 저지 진지에서 전투 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북한군의 포화가 국군 진지에 집중되었고 압도적인 적의 공격에 밀린 국군은 철수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7번 도로 축선 일대에 배치되었던 조원영(趙原英) 소령이 이끄는 제10연대 2대대는 화상천(和尙川)의 저지 진지마저 포기하고 주문진(注文津)으로 물러서게 되었고, 좌전방 서림리 일대의 박치옥(朴致玉) 소령이 이끄는 제1대대는 구룡령(九龍嶺) 일대에서 축차적인 지연전을 전개하면서 광원리(廣院里) 부근으로 철수하였다.

3. 1. 2. 북한군의 상륙 작전

6월 25일 이른 새벽, 강릉 남쪽 정동진리 등명동에 북한군이 나타나 마을 주민들을 동원, 수송선에서 탄약과 보급품을 뒷산으로 운반시켰다.

북한군은 이미 뒷산 중턱에 개인호를 파고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6월 25일 04:00 전후였으므로, 북한군 선발대 상륙 시간은 그보다 1시간 전으로 짐작된다.

해두보를 확보한 북한군 육전대는 발동선과 범선으로 주력 부대를 상륙시켰다. 등명동 남쪽 10km 지점 옥계면 도직리에 선박 접안을 시도했으나 수심 문제로 실패, 3명만 상륙 후 등명동 본대와 합류했다.

같은 날 07:00경, 북한군 제766부대가 삼척 남쪽 임원진리에 상륙, 태백산맥으로 침투했다. 등명동 상륙을 완료한 북한군 1개 연대는 산성우리 대한흑연무연탄 주식회사 강릉광업소를 급습, 심경섭 경리과장 등 직원 4명을 납치하고 밤재에 1개 대대를 배치 후 강릉으로 북상했다.

7번 도로를 차단하던 북한군 1개 대대는 옥계로 남하 중 국군 제21연대 1중대, 경찰, 옥계면 대한청년단의 기습을 받고 격퇴되었다.

북한군 대대장은 정동진리 해안 초소 경찰관 사살 실패 후 심경섭을 학살, 국군 제21연대의 강릉 이동을 예상하고 차단 진지를 구축했다.

3. 1. 3. 국군 제8사단의 대응

강릉에 사령부를 둔 국군 제8사단이 비상을 발령한 시간은 05:30였다. 얼마 후 38도 분계선의 전황이 상세하게 보고되었고, 강릉 경찰서장은 북한군의 상륙 상황과 그들의 주력이 강릉을 목표로 북상 중이라는 상황을 보고했다.

제8사단은 작전회의를 소집하여 제21연대의 강릉 이동과 연곡천~사천선에서 적을 저지 격멸하여 강릉을 사수하고, 사단 공병대로 예비대를 편성하는 동시에 육군 본부에 1개 연대의 증원을 긴급 요청했다.

제8사단의 작전개념은 38도 분계선을 경계 진지로, 화상천 일대의 횡격실능선을 전진진지로, 연곡천~광원리를 주저항선으로, 사천과 운두령을 예비 진지로 하여 축차적으로 지연전을 펼치다가 주저항선에서 적을 저지 격멸하고 공세로 전환한다는 것이었다.

육군 본부로부터 “적의 전면 남침이 개시되었으니 사단장의 재량권에 따라 최선을 다할 것이며 1개 연대의 증원은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은 직후 모든 통신이 두절되었다.

사단장은 이때서야 비로소 북한군의 전면 남침이 개시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필시 이 전쟁이 장기화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다음과 같은 대책을 강구하여 즉시 실천에 옮기도록 엄명하였다.

제8사단의 지휘조치



제8사단장 대령 이정일은 장병 가족에게 6개월분의 봉급과 식량을 지급하고 계엄업무를 담당할 민사부장을 임명하는 동시에 강릉 일대의 주민을 피난시킬 계획까지 준비하였다. 이를 위해 강릉 학도호국단 산하 1400여 명의 학생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탄약 및 보급품의 운반과 환자 구호와 연락업무를 수행하였는데 이것이 학도병 참전의 효시가 되었다. 6월 25일 오후에는 장기전에 대비한 군수품의 차량 적재작업이 완료되어 언제든지 이동할 수 있는 태세가 갖추어졌다.

한편 고근홍 중령이 이끄는 제10연대는 북한군이 등명동에 상륙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57mm 대전차포중대와 제4중대를 안목~안인진 일대로 급파하였다.

그 무렵에는 적의 상륙선단의 일부가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고 있었으며, 그 일부는 안인진 해변에 접안을 시도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안인진에 도착한 대전차포중대가 적의 선단에 맹렬한 포격을 집중하여 격퇴시켰다.

또한 제4중대는 등명동~강릉간의 방어에 유리한 대포동에 방어진지를 급편하여 때마침 북상 중이던 북한군의 1개 중대 규모의 군사들을 격멸함으로써 위급한 국면을 타개하였다.

3. 2. 군선강 방어선 구축

안인진, 대포동의 교전상황을 보고받은 제8사단장은 남쪽에서 협공하는 북한군에 대비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하고, 강릉 남쪽 12km 지점의 군선강에 방어진지를 급편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당시 38도선이 무너져 전방부대들이 철수를 거듭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10연대의 예비대인 제3대대의 전방 증원이 시급했다. 따라서 어느 부대를 군선강에 투입할 것인지 결정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무장공비 토벌을 위해 계방산, 오대산, 대관령 일대에 투입된 부대와 삼척에 있던 제21연대가 강릉까지 이동할 수 있을지도 불확실했다.

당시 사단장이 가용할 수 있는 부대는 사단 공병대대뿐이었다. 사단장은 제10연대장에게 제21연대가 증원될 때까지 군선강 방어 임무를 맡기고, 제18야전포병대대 3중대를 배속시켰다. 또한 공병대대를 연곡천 주저항선에 배치하고 사단 전술 지휘소를 사천국민학교에 설치하였다. 이에 따라 제10연대장은 하병래 소령이 이끄는 제3대대를 군선강에 투입하여 방어진지를 급편하였다.

삼척의 김용배 중령이 이끄는 제21연대장은 강릉으로 이동하기 전, 지역 내 민간차량을 징발하여 기동력을 확보하고, 북평에 주둔하던 제1대대로 하여금 옥계 일대의 적정을 수집하게 하였다. 그 결과, 적이 밤재에 차단진지를 구축한 것을 확인하였다.

연대장은 강릉 상황이 위급함을 고려하여 최단거리이며 차량 및 도보 이동이 가능한 7번 도로를 이용할지, 아니면 부평~백봉령~삽당령~구산리로 우회할지를 고심한 끝에 우회 이동하기로 결정하였다.

제21연대는 2개 행군제대를 편성하고, 6월 25일 19시에 삼척을 출발하여 6월 26일 10시 30분경 강릉에 도착, 곧바로 군선강 방어 진지를 인수하였다. 이창률 소령이 이끄는 제3대대는 장성임계리에 배치한 2개 중대를 삼척으로 집결시킨 후 행군하게 되었다.

3. 2. 1. 학도병 참전

제8사단은 장병 가족에게 6개월분의 봉급과 식량을 지급하고 계엄 업무를 담당할 민사부장을 임명하는 동시에 강릉 일대 주민을 피난시킬 계획까지 준비하였다. 이를 위해 강릉 학도호국단 산하 1400여 명의 학생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탄약 및 보급품 운반, 환자 구호와 연락 업무를 수행하였는데, 이것이 학도병 참전의 효시가 되었다. 6월 25일 오후에는 장기전에 대비한 군수품의 차량 적재 작업이 완료되어 언제든지 이동할 수 있는 태세가 갖추어졌다.

3. 3. 주저항선 전투

6월 25일 저녁, 제8사단은 연곡천 일대에 주저항선을 설정하고 방어 준비에 들어갔다. 김묵 소령이 이끄는 사단 공병대대는 제10연대에 배속되어 연곡천 주저항선 진지를 점령, 공병이 보병 전투를 수행하는 첫 사례를 기록했다. 제18야전포병대대 1중대는 석교리에, 2중대는 사천 초등학교에 포진하여 화력을 지원했다.

6월 26일 오전, 제21연대가 증원되면서 연곡천 방어 배치가 재조정되고 반격의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연곡천 방어선의 부대 배치 상황 (6월 26일)
좌전방부대중앙전방부대우전방부대화력지원부대
공병대대(3개 중대)제10연대 제3대대
(제3대대장 지휘 하에 4개 중대(제1중대, 제2중대, 제4중대, 제12중대)를 7번 도로 좌우측에 배치)
제10연대 제2대대제18야전포병대대(2개 중대), 57mm 대전차포 2개 중대(제 21연대 대전차포 1개 중대 배속)



사천면에서는 대한청년단 단원 40명이 자발적으로 적정 수집에 나섰고, 면 부인회와 청년단은 야전 취사장을 설치해 군경에게 주먹밥을 제공하는 등 민간의 지원도 활발했다.

연곡천~송림리(松林里) 간 4km 방어 정면과 그 남쪽 사천까지 3km 방어 종심을 가진 지역에 제8사단의 주 방어지대가 형성되었다. 연곡천은 강폭이 200m~250m로 넓지만, 수심이 깊어 교동(校洞)과 송림리의 여울 외에는 건너기 어려웠다. 7번 도로와 연곡천이 만나는 지점의 목교는 중장비 통과가 불가능했기에, 국군은 이 목교를 파괴하는 대신 그 부근에 살상지대를 설정하여 적을 유인 격멸하려 했다.

6월 26일 새벽, 북한군의 강습 도하 시도를 시작으로 산발적인 교전이 벌어졌지만, 대규모 공격은 없었다. 제10연대는 주문진 공격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자 감제고지인 천마봉(天馬峰) 공격을 시도했으나, 북한군의 공격 준비 사실을 탐지하지 못했다.

6월 27일 새벽 04:00, 국군보다 1시간 먼저 북한군의 공격 준비 사격이 시작되었다. 북한군의 맹렬한 포격에 천마봉의 제2대대는 저항을 포기하고 무단 철수했고, 이로 인해 주저항선 부대들은 북한군을 아군으로 오인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때, 제21연대 제3대대가 강릉에 도착, 즉시 사천선에 투입되어 분산 철수하는 병력을 수습하고 북한군을 저지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했다. 제21연대 제3대대의 증원은 제8사단에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다.

3. 3. 1. 연곡천 방어선

김묵(金默) 소령이 이끄는 사단 공병대대는 예하 3개 중대로 전투편성을 마치고 제10연대에 배속되어 연곡천 주저항선 진지를 점령함으로써 공병이 보병전투를 수행하는 첫 번째 기록을 세웠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제18야전포병대대 1중대는 주저항선 후방의 석교리에, 2중대는 사천 초등학교에 포진하였다.

주저항선을 사전에 확보한 국군은 전방대대인 제10연대 2대대의 철수를 효과적으로 엄호할 수 있었으며, 6월 26일 오전에는 제21연대가 증원됨에 따라 연곡천의 방어배치를 재조정하고 반격의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연곡천 방어선의 부대배치 상황 (6월 26일)
좌전방부대중앙전방부대우전방부대화력지원부대
공병대대(3개 중대)제10연대 제3대대
※제3대대장 지휘 하에 4개 중대(제1중대, 제2중대, 제4중대, 제12중대)를 7번 도로 좌우측에 배치
제10연대 제2대대제18야전포병대대(2개 중대), 57mm 대전차포 2개 중대(제 21연대 대전차포 1개 중대 배속)



제10연대가 주저항선에서 방어진지를 재편성하고 있을 때 사천면 대한청년단은 사명감이 투철한 대원 40명을 선발하여 적정수집을 자원하고 나섰으며, 면 부인회와 청년단은 야전 취사장을 설치하여 군경에게 주먹밥을 공급함으로써 군 작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3. 3. 2. 주문진 탈환 시도와 북한군의 선제 공격

연곡천~송림리(松林里) 간 4km의 방어 정면과 그 남쪽으로 사천까지 3km 정도의 방어종심을 가진 지역에 제8사단의 주방어지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연곡천은 강폭이 200m~250m 정도이지만 수심이 깊어 교동(校洞)과 송림리의 여울 외에는 건널 수 없었다. 또한 7번 도로와 연곡천이 만나는 지점에는 목교가 가설되어 있었으나 자주포를 포함한 중장비는 통과할 수 없었다. 국군은 이 목교를 파괴하지 않고 그 부근에 살상지대를 설정하여 적을 유인하여 격멸하려고 하였다.

6월 26일 이른 새벽 북한군은 공병 대대 제3중대 정면에서 강습 도하를 시도한 것을 계기로 산발적인 교전이 있었으나 대대적인 공격은 없었다.

제10연대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제2대대로 하여금 주저항선 전방의 감제고지인 천마봉(天馬峰)을 공격 탈취하게 하여 주문진을 공격하기 위한 발판을 확보하고, 곧이어 사단에서는 주문진 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런데 그 무렵에는 북한군 또한 공격준비를 완료하고 공격개시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국군은 그와 같은 적정을 전혀 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음날 6월 27일 새벽 04:00, 즉 국군의 공격 개시 시간보다 1시간 전에 북한군의 공격 준비 사격이 개시되어 천마봉과 주저항선을 강타하였는데, 이때 북한군의 화력의 강도는 국군 장병들의 상상을 초월한 맹렬한 포격이었다.

그러한 와중에서 천마봉의 제2대대는 북한군이 공격을 개시한 후 얼마 후에 저항을 포기하고 연대에 보고도 하지 않은 채 임의로 철수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천마봉에 국군이 배치되어 있다고 믿고 있던 주저항선의 부대들은 어둠 속에서 측방으로 접근하는 북한군을 제2대대 병력으로 오인하였으며, 마침내 방어진지의 일각이 무너지고 연쇄적으로 방어진지가 붕괴되어 혼전이 벌어졌다.

이 급박한 때에 제21연대의 후발대인 제3대대가 군가를 부르면서 강릉에 도착하자, 타개책 모색에 골몰하던 국군은 즉시 제3대대를 사천선에 투입하여 분산 철수하는 병력을 수습하고 북한군을 사천선에서 저지함으로써 최고조에 달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우연의 일치라는 말이 있듯이 제21연대 제3대대의 적시적인 증원과 전선투입은 절망의 늪에 빠진 제8사단에 다시 생기를 불어 넣는 활력소가 되었다.

3. 3. 3. 제21연대 제3대대의 투입

6월 27일 새벽, 제8사단은 주문진 공격을 위한 발판을 확보하고자 천마봉을 공격하려 했으나, 북한군의 선제 포격으로 인해 큰 혼란에 빠졌다. 천마봉의 제2대대는 저항을 포기하고 무단 철수했고, 이로 인해 주저항선 부대들은 북한군을 아군으로 오인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제21연대의 후발대인 제3대대가 강릉에 도착했다. 국군은 즉시 제3대대를 사천선에 투입하여 분산 철수하는 병력을 수습하고 북한군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제21연대 제3대대의 증원은 절망에 빠진 제8사단에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다.

4. 전투 결과 및 영향

북한군의 기습 남침과 강릉 전투로 제8사단은 강릉에서 철수하여 원주를 목표로 철수하였으나, 원주를 빼앗기는 것이 시간문제라는 판단에 제천을 목표로 하여 평창으로 철수로를 변경하였다. 평창을 거쳐 제천에 집결한 8사단은 잘못된 정보로 인해 열차편으로 대구로 이동, 다시 전선으로 복귀하는 혼란을 겪으면서 북한군의 남침 속도를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4. 1. 국군 제8사단의 철수

북한군의 기습 남침과 강릉 전투로 제8사단은 강릉에서 철수하여 원주를 목표로 철수하였으나, 원주를 빼앗기는 것이 시간문제라는 판단에 제천을 목표로 하여 평창으로 철수로를 변경하였다.

평창을 거쳐 제천에 집결한 8사단은 잘못된 정보로 인해 열차편으로 대구로 이동, 다시 전선으로 복귀하는 혼란을 겪으면서 북한군의 남침 속도를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4. 2. 전술적 교훈 및 역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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