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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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은 1996년 9월, 북한 잠수함이 강릉 해안에 침투하여 무장공비가 상륙한 사건이다. 이들은 김영삼 대통령 암살을 시도하려 했으나, 잠수함 좌초로 인해 실패하고, 이후 49일간의 소탕 작전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한국군, 경찰, 예비군,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북한은 사과와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사건 이후, 잠수함은 통일공원에 전시되었고, 대한민국은 대북 안보 의식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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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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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정보 | |
장소 | 대한민국 강원도 강릉시 부근 해안 |
기본 정보 | |
사건명 | 강릉 침투 사건 |
다른 이름 | 강릉 지역 무장 공비 침투 사건 |
한글 표기 | 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 |
한자 표기 | 江陵地域武裝共匪浸透事件 |
일본어 표기 | こうりょうちいき ぶそうきょうひ しんとうじけん |
가타카나 표기 | カンヌンチヨク ムジャンコンビ チムトゥサゴン |
로마자 표기 | Gangneungjiyeok mujanggongbi chimtusageon |
영어 표기 | Gangneung submarine infiltration incident |
날짜 | 1996년 9월 17일 – 1996년 11월 5일 |
분쟁 종류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지 도발 |
결과 | 대한민국 승리. 대한민국군은 11월 7일에 소탕 작전 종료를 선언 |
교전 세력 | |
지휘관 | |
대한민국 지휘관 | 김동진 대장 |
북한 지휘관 (정리 전) | 김동원 대좌 |
북한 지휘관 (정리 후) | 정영구 중좌 |
전력 | |
대한민국 전력 | 43,000명 |
북한 전력 | 상어급 잠수함 1척, 공작원 및 승조원 26명 |
사상자 | |
대한민국 사상자 | 사망 18명 (군인 12명, 경찰 1명, 예비군 1명, 민간인 4명), 부상 27명 |
대한민국 사망자 상세 | 전사 8명 사고사 4명 비번 군인 살해 1명 |
북한 사상자 | 사망 24명 (15명 사살), 생포 1명, 실종 1명, 잠수함 1척 나포 |
북한 사망자 상세 | 전사 13명 자살 11명 |
민간인 사망자 | 4명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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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 중일신문 - 〔아리랑의 바람〕(3)41명 사망 사건으로부터 21년 |
2. 배경
1990년대 중반, 북한은 심각한 경제난과 식량난을 겪고 있었으며,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은 대남 도발을 통해 내부 결속을 강화하고, 미국과의 직접 대화를 시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생포된 간첩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은 1994년부터 간첩 활동에 잠수함을 투입하였고, 1995년 9월에는 제주도 서귀포의 간첩 침투를 지원하기도 했다.[29]
이번 침투 임무는 북한의 해상처장 김동원 대좌가 총책임자였는데, 그는 '''공화국 2중 영웅''' 칭호를 받은 고위 군관이었다. 공화국 영웅은 북한 핵심계층 중에서도 아무나 될 수 없는 직함이며, 1회 수여만으로도 전사에서 군관으로 신분이 바뀔 정도였다.
이 임무의 진짜 목적은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인 김영삼을 암살하는 것이었다.[30] 무장공비들은 1996년 10월 7일에 춘천시에서 전국체전이 개최된다는 첩보를 입수했으며, 전국체전 개막식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연설할 예정이라는 것까지 알아냈다. 이들은 강릉에 잠수함으로 침투한 후 춘천까지 도보로 이동하여, 전국체전 개막식에서 김영삼 대통령을 저격할 계획이었다.
작전 일자보다 3주일 정도 전인 1996년 9월 13일에 원산항에서 출발했고, 원래 항해요원은 전투요원을 강릉에 상륙시킨 뒤 복귀하는 임무였으나 잠수함이 좌초되면서 항해요원들도 작전에 참여하게 되었고, 결국 전투요원들이 항해요원들을 총살하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이를 북한의 식량난으로 인한 붕괴 가능성과 흡수통일 논의에 대한 북한 내 위기의식의 표출로 보았고, 확전의 위험성을 예측하였다.[34]
2. 1. 남북 관계
김영삼 정부는 북한의 핵 개발 의혹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고, 남북 관계는 경색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34]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북한의 체제 불안정성이 높아지면서, 남북 간의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1996년 2월 초 동해에서 대한민국과 미국의 합동 훈련이 실시되었고,[31] 이에 4월 4일 북한은 한미연합훈련에 대한 불만을 표하면서 인민군 판문점대표부 담화를 통해 비무장지대와 관련된 규정들을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수일 간 판문점에서 무력시위를 벌였다.[32][33]
4월 19일 북한의 경비정 2척이 서해 북방한계선을 넘어 기동훈련을 실시하였고,[35] 5월 17일에는 중부전선에서 무장한 북한군 7명이 비무장지대를 넘었다가 돌아갔으며,[36] 5월 23일 새벽에는 북한 경비정 5척이 서해 북방 한계선을 넘었고,[37] 6월 14일에는 북한 경비정 3척이 북방 한계선을 넘었다.[38]
8월 14일에는 미군과 러시아군이 동해 북쪽 두만강 국경 부근 연안에서 합동으로 상륙과 구조 및 운송 훈련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한반도의 유사시에 대비한 것으로 추측되었다.[39]
한편, 북한은 1996년 초부터 미군의 유해 송환과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었고, 9월 21일에는 미국의 대표가 북한을 방문할 계획이었다.[40][41]
2. 2. 국제 정세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 이후에도 북한은 핵 개발 의혹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미국과의 관계 개선은 지지부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은 한미 연합 훈련에 반발하며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기도 했다.[31][32][33]1996년 2월 초, 동해에서 대한민국과 미국의 합동 훈련이 실시되었다.[31] 이에 북한은 1996년 4월 4일, 한미연합훈련에 대한 불만을 표하며 인민군 판문점대표부 담화를 통해 비무장지대와 관련된 규정들을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수일 간 판문점에서 무력시위를 벌였다.[32][33]
1996년 4월 19일, 북한 경비정 2척이 서해 북방한계선을 넘어 기동훈련을 실시했다.[35] 1996년 5월 17일에는 중부전선에서 무장한 북한군 7명이 비무장지대를 넘었다가 돌아갔고,[36] 5월 23일 새벽에는 북한 경비정 5척이 서해 북방 한계선을 넘었으며,[37] 6월 14일에는 북한 경비정 3척이 북방 한계선을 넘었다.[38]
1996년 8월 14일, 미군과 러시아군은 동해 북쪽 두만강 국경 부근 연안에서 합동으로 상륙, 구조 및 운송 훈련을 실시했는데, 이는 한반도의 유사시에 대비한 것으로 추측되었다.[39]
한편, 북한은 1996년 초부터 미군 유해 송환과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었고, 1996년 9월 21일에는 미국의 대표가 북한을 방문할 계획이었다.[40][41]
3. 사건 경위
1996년, 북한은 대한민국에 대한 도발을 감행했다. 1994년부터 잠수함을 이용한 간첩 침투를 시작했으며, 1995년 9월에는 제주도 서귀포에 간첩 침투를 지원하기도 했다.[29]
1996년 2월 초, 동해에서 대한민국과 미국의 합동 훈련이 실시되자,[31] 북한은 이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며 4월 4일 인민군 판문점대표부 담화를 통해 비무장지대 관련 규정을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수일 간 판문점에서 무력시위를 벌였다.[32][33]
이후에도 북한의 도발은 계속되었다. 4월 19일에는 북한 경비정 2척이 서해 북방한계선을 넘어 기동훈련을 실시했고,[35] 5월 17일에는 무장한 북한군 7명이 비무장지대를 넘었다가 돌아갔다.[36] 5월 23일과 6월 14일에도 북한 경비정이 서해 북방 한계선을 침범했다.[37][38]
8월 14일에는 미군과 러시아군이 동해 북쪽 두만강 국경 부근 연안에서 합동으로 상륙, 구조 및 운송 훈련을 실시했는데, 이는 한반도 유사시에 대비한 것으로 추측되었다.[39]
이러한 긴장 고조 상황 속에서, 북한은 1996년 초부터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었고, 9월 21일에는 미국 대표가 북한을 방문할 계획이었다.[40][41]
1996년 9월 13일 5시, 북한 상어급 잠수함은 승조원과 전투원 등 28명을 태우고 함경남도 원산항을 출발했다. 9월 15일 2시, 강릉 부근 해안에 3명을 상륙시켰고, 9월 17일 22시, 전투 요원 복귀를 위해 접근하던 중 잠수함이 좌초되었다.
3. 1. 잠수함 좌초
1996년 9월 18일 새벽, 강원도 강릉시 해안에서 20m 떨어진 해상에서 좌초된 잠수함이 택시운전사에 의해 발견되어 인근 강동경찰서에 신고되었다.[47][48] 택시 기사는 "바다 위에 소형 잠수함이 떠 있고, 그 안에서 섬광이 번뜩이고 비명이 들린다"고 진술했다. 신고를 받은 경찰과 택시기사는 인근 해안초소에 잠수함 발견 사실을 알렸다.생포된 승조원은 잠수함이 기관 고장을 일으켰다고 주장하였으나, 대한민국의 군 당국은 좌초된 잠수함이 무장간첩을 침투시키고 귀환하려던 중 좌초한 것으로 추측하였다.[61] 생포된 승조원의 진술에 따르면, 잠수함은 강릉 해안에서 300~400m 떨어진 연해에서 잠수하던 중 좌초되었다.[63] 인양 작업 중 스크루에는 해초가 단단히 감겨 있었고,[64] 스크루 커버는 암초에 걸려 있었다.[65]
3. 2. 무장공비 침투
생포된 간첩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은 1994년부터 간첩 활동에 잠수함을 투입하였고, 1995년 9월에는 제주도 서귀포의 간첩 침투를 지원하기도 했다.[29]이번 침투 임무는 북한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임무였다. 무장공비 요원 중 총책임자인 김동원 대좌는 해상처장이자 '''공화국 2중 영웅'''으로, 장래가 매우 촉망되는 고위 군관이었다. 공화국 영웅은 북한 핵심계층 중에서도 아무나 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위치이며, 공화국 영웅 칭호 1회 수여만으로도 전사에서 군관으로 신분이 변경될 정도였다. 김동원 대좌는 이 칭호를 두 번이나 수여받았다.
이들의 진짜 목적은 당시 대한민국의 대통령인 김영삼을 암살하는 것이었다.[30] 이들은 1996년 10월 7일에 춘천시에서 전국체전이 개최된다는 첩보를 입수했고, 전국체전 개막식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연설할 예정이라는 것까지 알아냈다. 이들은 강릉에 잠수함으로 침투한 후 강릉에서 춘천까지 도보로 이동,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전국체전 개막식에 참석해 김영삼 대통령을 저격할 계획이었다.
1996년 9월 13일 원산항에서 출발한 이들은, 원래 전투요원을 강릉에 상륙시킨 뒤 복귀하는 임무였다. 그러나 잠수함이 강릉에서 정박이 아닌 좌초를 당하면서 원산항으로 돌아갈 방법이 없어졌고, 이로 인해 항해요원들도 작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결국 전투요원들이 항해요원들을 총살하기에 이르렀다.
1996년 9월 15일, 북한 상어급 잠수함은 강원도 강릉시 정동진에서 남동쪽으로 20km 떨어진 강릉 인근 동해안에 3명의 특수정찰 작전팀을 상륙시켰다. 그들의 임무는 지역 해군 시설을 정찰하고 귀환하는 것이었지만, 더 큰 임무는 김영삼 대통령 암살이었다.[5] "정찰팀"은 "암살팀"을 상륙시키고 정부 시설을 정찰한 후 귀환하는 역할을 맡았다.[2]
잠수함은 16일에 팀을 수습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다음 날인 17일에 좌초되었다. 잠수함을 해상에서 띄우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했다.[2] 승무원들은 잠수함 내부에 불을 지르는 방식으로 중요 장비를 파괴하기로 결정했다.[2] 그들은 눈에 띄지 않게 여러 그룹으로 나뉘어 이동했으나, 새벽 1시경 한 그룹이 지역 택시 기사에게 발견되었다. 택시 기사는 그들의 복장과 행동이 수상하다고 판단하고 당국에 신고했고, 당국은 즉시 대응에 나섰다.[2][6]
대한민국 국방부와 국가안전기획부의 발표와 증언에 따르면, 잠수함에 탑승한 인원은 모두 26명이며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부 소속으로 대좌와 상좌 등 고위급 장교를 포함하며, 소위 이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45] 그 중 19명이 승조원인 것으로 파악되었다.[46]
4. 무장공비 소탕 작전
1996년 9월 18일, 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발생하자 대한민국 군과 경찰은 즉각 무장공비 소탕 작전을 개시했다.[2] 무장공비들은 해안에서 30m 높이의 절벽을 타고 도주하였으며, 이에 군경은 49일 동안 대규모 작전을 펼쳐 대부분의 공비를 사살하거나 생포했다.
사건 발생 직후, 군경은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했다.
- 9월 18일
- 오전 1시 30분경: 강원도 강릉시 안인진리 대포동 해변에서 약 30m 떨어진 지점에서 소형잠수함이 좌초되어 있는 것을 택시기사가 발견하여 신고.[56][57][58]
- 오전 1시 45분경: 신고를 받은 경찰과 택시기사가 해안경비를 담당하고 있는 인근 해안초소에 잠수함 발견사실 신고.
- 오전 2시 5분: 해안경계부대가 모든 병력을 잠수함 발견현장에 투입.
- 오전 2시 15분: 현장지휘관(중대장)과 5분 대기부대 출동.
- 오전 3시 40분: 간첩 발자국 발견, 현지부대 '진돗개 하나' 발령.
- 오전 4시 49분: 해군 1함대 작전과장이 미확인물체는 "잠수정"으로 확인됐다고 보고.
- 오전 4시 55분: 해군 1함대 외곽차단조치 (경비함 5척, P-3CK 대잠초계기 1대).
- 오전 5시: 1군 관할지역 전체에 진돗개 하나 발령.
- 오전 5시 10분: 전군 경계태세 발령, 합참 위기조치반 소집.
- 오전 5시 11분: 공군 비상전력 대기.
- 오후 7시경: 동해안 일대 통행 금지 발령.
9월 18일부터 11월 5일까지 49일간 대규모 검거 작전이 펼쳐졌다.[2] 작전 결과, 침투한 북한 무장공비 26명 중 1명이 생포되었고, 24명이 사살되었다. 나머지 1명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지만, 당국은 11월 5일 이 무장공비가 북한으로 도주했거나 사망했을 것으로 판단하고 검거 작전을 종료했다.[11]
무장공비들은 M16A1 소총(5.56mm NATO 탄약 포함)과 대한민국 군복을 모방한 위장복을 소지하고 있었으며,[7][8] 네슬레 크런치 초콜릿 바도 발견되었다.[9] 일부 사망자의 시체는 언론에 공개되었고,[10] 일부는 위장용 대한민국 군복을 착용하고 있었다.
4. 1. 검거 및 교전
9월 18일 오후 4시 30분경, 강동면 청학산 정상에서 청바지와 운동화 차림의 무장간첩 11명이 권총에 맞아 사망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이들은 동료 무장간첩들에 의해 처형당한 것으로 밝혀졌는데, 처형 기준은 보직으로, 전투원들이 나머지 보직자들을 처형한 것이었다. 희생자 중에는 공화국 2중 영웅이자 해상처장으로 무장공비 서열 1위인 김동원 대좌와 해상부처장이자 무장공비 서열 2위인 김강훈 상좌도 포함되어 있었다.[50][51] 전투가 불가능한 인원들을 정리한 후, 전투요원으로 전환된 이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총살 처리되었다.[52]같은 날 오후 4시 45분경, 강릉시 모전1리 동해고속도로 굴다리 밑 숲속에서 이광수(31)가 인근 농민과 얘기를 나누다가 주민 신고로 출동한 경찰에 붙잡혔다.[48][50][51]
이후 9월 19일부터 11월 5일까지 각지에서 대한민국 군경과 무장공비 간의 교전이 벌어졌다.
날짜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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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9일 | |
9월 20일 | |
9월 21일 | 9시 30분: 강동면 언별리 칠성산 망기봉 일대에서 도주 간첩 2명 발견, 교전 중 특전사 소속 이병희 중사(25)가 간첩의 조준사격으로 머리에 총상을 입고 사망 |
9월 22일 | 6시 15분: 언별리 칠성산 계곡에서 무장간첩 2명 발견, 교전 후 사살. 교전 중 노도부대 소속 송관종 일병(21), 화랑부대 소속 강정영 상병(21)이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되던 중 사망 |
9월 23일 | 오전 6시 30분: 칠성산 군경합동수색대 간첩소탕작전에서 민간인 1명이 오인 사격으로 사망, 군인 2명 중상[60] |
9월 28일 | 오전 6시 45분경: 성산면 어흘리 왕제산 정상 부근에서 잠수함 부함장 유림 사살 |
9월 29일 | 오후 8시경: 고성군 간성읍 진부리에서 을지부대 소속 한대성 병장(21)이 야간 매복 근무 중 근무지를 무단이탈, 오인 사격으로 사망 |
9월 30일 | 오후 3시 18분: 왕산면 도마리 칠성산 서쪽에서 무장간첩 리철진 소위 발견, 교전 후 사살 |
10월 9일 | 오후 2시 50분: 평창군 진부면 탑동리 활산목 인근에서 버섯을 채취하던 민간인 3명이 피살체로 발견. 군은 "M16 탄피 4개가 발견됐으나 탄피에는 일련번호가 없다"며 "무장간첩의 잔당에 의해 살해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힘 |
10월 12일 | 오후 8시 40분경: 연곡면에서 매복 작전 중이던 철벽부대 중대장 홍동진 대위(26)가 오인 사격으로 사망 |
10월 22일 | 양구와 인제 일대의 사격장에서 싸리나무 벌목 작업 중이던 표종욱 일병(22)이 간첩에 의해 사살, 이후 간첩은 표 일병의 전투복을 빼앗아 입음 |
11월 4일 | 오후 3시경: 인제군 서화면 서화2리 민통선 북방에서 거동수상자 2명 발견 |
11월 5일 |
무장공비들은 M16A1 소총(5.56mm NATO 탄약 포함)과 대한민국 군복을 모방한 위장복을 소지하고 있었다.[7][8] 일부 사망자의 시체는 언론에 공개되었고,[10] 일부는 위장용 대한민국 군복을 착용하고 있었다.
49일간의 검거 작전 결과, 침투한 26명의 북한 무장공비 중 1명이 생포되었고, 11명은 잠수함 좌초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지 못했다는 이유로 다른 대원들에 의해 사살되었으며, 13명은 대한민국 육군과의 교전 중 사망했다. 나머지 1명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지만, 당국은 11월 5일 이 무장공비가 국경을 넘어 도주했거나 사망했을 것으로 판단하고 검거 작전을 종료했다.[11]
4. 2. 대한민국 측 피해
대한민국 측에서는 군인 11명, 경찰 1명, 예비군 1명, 민간인 6명이 사망하고, 27명이 부상을 입었다.[54][55]사망자 및 부상자 발생 일자별 상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날짜 | 사건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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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1일 | 강릉시 강동면 언별리 칠성산 망기봉 일대에서 도주 간첩과 교전 중 특전사 소속 이병희 중사(25)가 간첩의 조준사격으로 머리에 총상을 입고 사망 |
9월 22일 | 강릉시 언별리 칠성산 계곡에서 무장간첩 2명 발견, 교전 후 사살. 교전 중 노도부대 소속 송관종 일병(21), 화랑부대 소속 강정영 상병(21)이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되던 중 사망 |
9월 23일 | 칠성산 군경합동수색대 간첩소탕작전에서 민간인 1명이 오인 사격으로 사망, 군인 2명 중상[60] |
9월 29일 | 고성군 간성읍 진부리에서 을지부대 소속 한대성 병장(21)이 야간매복근무중 근무지를 무단이탈, 오인사격으로 사망 |
10월 9일 | 평창군 진부면 탑동리 활산목 인근에서 버섯을 채취하던 민간인 3명이 피살체로 발견 |
10월 12일 | 강릉시 연곡면에서 매복작전 중이던 철벽부대 중대장 홍동진 대위(26)가 오인사격으로 사망 |
10월 22일 | 양구와 인제 일대의 사격장에서 싸리나무 벌목 작업중이던 표종욱 일병(22)이 간첩에 의해 사살[11] |
11월 5일 |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서 무장간첩 2명과 교전. 교전 중 오영안 대령(49), 강민성 상병 등 4명 전사, 13명 부상. 우황룡 소위는 숙영지로 귀환 도중 무장공비의 총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으나 후송되어 생존 |
무장공비들은 M16A1 소총(5.56mm NATO 탄약 포함)과 대한민국 군복을 모방한 위장복을 소지하고 있었다.[7][8]
4. 3. 북한 측 피해
침투한 북한 무장공비 26명 중 11명은 동료에게 살해되었고, 13명은 대한민국 군경과의 교전 중 사살되었으며, 1명은 생포되었다.[54][55] 나머지 1명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으나, 당국은 11월 5일 이 무장공비가 북한으로 도주했거나 사망했을 것으로 판단하고 수색을 종료했다.[11]9월 18일 오후 4시 30분경, 강동면 청학산 정상에서 권총으로 사망한 무장간첩 11명의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전투 능력이 없는 보직자들이 전투원들에 의해 처형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처형된 이들 중에는 무장공비 서열 1위인 김동원 대좌와 서열 2위인 김강훈 상좌도 포함되어 있었다.[48][50][51] 같은 날 오후 4시 45분경에는 강릉시 모전1리 동해고속도로 굴다리 밑에서 이광수(31)가 주민 신고로 출동한 경찰에 생포되었다.
이후 9월 19일부터 11월 5일까지 강릉 일대에서 대한민국 군경과 북한 무장공비 사이에 여러 차례 교전이 벌어졌다. 주요 교전 및 사살 결과는 다음과 같다.
5. 사건의 여파 및 논란
대한민국 군 당국은 생포된 승조원이 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인 점, 표류로 보기에는 해류의 속도가 느린 점을 들어 북한이 무장간첩을 남파한 것으로 보았다.[61] 이들은 좌초된 잠수함이 무장간첩을 침투시키고 귀환하려던 중 좌초한 것으로 추측하였고, 북한이 남북간 대화 거부를 부각시켜 미국과의 대화를 유도하기 위해 간첩을 파견한 것으로 보았다. 일부에서는 남북관계의 경색을 그 원인으로 추측하였다.[61]
북한은 9월 23일 인민무력부 담화를 통해 ‘원산항을 출발한 잠수함이 훈련 중 표류하였으며 강릉 앞바다 해안에서 좌초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발표하였다.[62]
생포된 승조원의 진술에 의하면, 잠수함은 강릉 해안에서 300 ~ 400 m 떨어진 연해에서 잠수하던 중 좌초되었다.[63] 인양 작업 중에는 스크루에 해초가 단단히 감겨 있었고,[64] 스크루 커버는 암초에 걸려 있었다.[65]
5. 1. 남북 관계 영향
대한민국의 김영삼 대통령은 이 사건을 중대한 도발로 간주하고 추가적인 행동은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발표했다.[2] 권영해 국가정보원장은 이를 "게릴라전을 수행하기 위한 무장 도발"이라고 규정했다.[13] 대한민국 정부 관계자들과 주요 언론들은 군이 잠수함을 탐지하지 못한 것에 대해 비판했다.[13]1953년 한국 전쟁 종전 이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한반도 문제를 다룬 첫 번째 사례로, 10월 15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의 행동을 공식적으로 비난했다.[14] 중국은 신중한 검토 끝에 이에 동참했다.[14]
북한은 1996년 12월 29일 이 사건과 인명 피해에 대해 사과했다.[2]
5. 2. 대한민국 내 영향
김영삼 대통령은 이 사건을 중대한 도발로 간주하고 추가적인 행동은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발표했다.[2] 권영해 국가정보원장은 이를 "게릴라전을 수행하기 위한 무장 도발"이라고 규정했다.[13] 여당과 야당 모두의 대한민국 정부 관계자들과 주요 언론들은 군이 잠수함을 탐지하지 못한 것에 대해 비판했다.[13]5. 3. 논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초기 대응 미흡, 오인 사격, 과잉 진압 등의 논란이 제기되었다.[66] 특히, 북한이 대한민국과 국제 사회의 도움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무장 간첩을 남파한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었다.[67]군 당국의 초기 대응이 늦어 경비 태세에 허점이 있었고, 신속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66] 또한, 오인 사격으로 인한 인명 피해도 발생했다. 9월 23일에는 칠성산 군경합동수색대의 간첩소탕작전에서 민간인 1명이 오인 사격으로 사망하고 군인 2명이 중상을 입었으며,[60] 9월 29일에는 고성군 간성읍 진부리에서 을지부대 소속 한대성 병장(21)이 야간 매복 근무 중 근무지를 무단 이탈하여 오인 사격으로 사망했다. 10월 12일에는 연곡면에서 매복 작전 중이던 철벽부대 중대장 홍동진 대위(26)가 오인 사격으로 사망했다.
10월 22일에는 양구와 인제 일대의 사격장에서 싸리나무 벌목 작업 중이던 표종욱 일병(22)이 간첩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군 당국은 처음에 표 일병이 근무 중 이탈했다고 주장했으나, 나중에 공비를 사살한 후 공비 중 한 명이 표 일병의 전투복을 입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표 일병이 공비에게 사살된 것을 인정했다. 표 일병의 시신은 속옷과 양말만 착용한 채로 발견되었고, 사망 원인은 교수에 의한 질식사였다. 이는 군 당국의 은폐 의혹으로 번지기도 했다.
6. 사후 처리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에 공식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을 요구했고, 북한은 1996년 12월 29일 이례적으로 잠수함 사고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고 재발 방지 노력을 약속하는 공식적인 사과 성명을 발표하였다.[72]
이 사건으로 강원도 도민들은 고성 산불, 철원 홍수 피해와 함께 겹쳐 큰 어려움을 겪었다.[68][69] 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관광 수입 감소, 농림어업 손실 등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가 25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54]
이후 대한민국 육군은 보병 분대 편제를 개편했다. 기존 소총수 10명에서 소총수 6명, 유탄발사기 사수 2명, 기관총 사수 1명, 기관총 부사수 1명으로 변경하여, 알보병의 화력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2011년 9월에는 사건 15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육군이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대규모 훈련을 실시하였다.[75]
6. 1. 시신 송환
1996년 12월 30일, 사망한 무장공비 24명의 시신이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송환되었다.[73] 이들 시신은 통상 적군묘지에 안장되지만, 북한의 송환 요구로 보관하던 중 화장되었다. 생존자에 의해 확인된 유골에는 이름이 붙여졌고, 나머지는 키와 몸무게, 혈액형을 기재하여 식별할 수 있게 하였다. 이날 있었던 시신 송환은 남북한 사이의 첫 시신 송환으로 기록되었다.[73] 이후 사망한 24명의 유골은 북한으로 이송되었으며 이들은 전원 공화국 영웅으로 추서되었다. 이 중 김동원 대좌는 이미 공화국 2중 영웅이었기 때문에 공화국 3중 영웅으로 추서되었다.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공화국 4중 영웅은 김일성과 김정일 뿐이며, 공화국 3중 영웅도 이미 사망한 김동원이 유일하다. 나머지는 급이 높아봤자 공화국 2중 영웅에 불과하다.6. 2. 생존자 처리
유일하게 생포된 이광수는 조사를 받은 뒤 대한민국으로 전향, 1997년 해군에 입대해 2013년 기준으로 군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다.[70] 조사를 받는 중에 '광어회와 쇠고기가 먹고 싶다'고 한 일화가 있다.[71] 이후 대한민국 여성과 결혼하여 슬하에 2녀를 두고 있다. 이광수 본인은 딸들이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매우 꺼리는데, '''무장공비의 딸'''이라는 낙인이 찍힐 것을 우려해서이다.6. 3. 통일공원 조성
1997년 7월, 국방부는 사건 현장에 통일공원을 조성하여 좌초된 잠수함을 영구적으로 전시할 것을 발표하였다.[74] 인양된 상어급 잠수함은 통일공원에 전시되어 있다.
7. 관련 부대
- 육군 특수전사령부 제3공수특전여단(비호부대)
- 제1야전군사령부
- * 제36향토보병사단(백호부대)
- * 제11기계화보병사단(화랑부대)
- * 제8군단
- ** 제22보병사단(율곡부대)
- ** 제68동원보병사단(동해충용부대) (현 제23보병사단(철벽부대))
- ** 제102보병여단(일출부대) (현재 제102기갑여단으로 개편)
- * 제3군단
- ** 제703특공연대(가리산특공대)
- ** 제2보병사단(노도부대)
- ** 제12보병사단(을지부대)
- * 제2군단
- ** 제27보병사단(이기자부대)
- ** 제702특공연대(쌍용불사조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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