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하르트 바르크호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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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게르하르트 바르크호른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공군의 에이스 전투기 조종사로, 300기 이상의 적기를 격추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1919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난 그는 1937년 공군에 입대하여 전투기 조종사 훈련을 받았고, 프랑스 침공과 영국 본토 항공전에 참전했다. 이후 동부 전선에서 활약하며 뛰어난 격추 기록을 세웠고, 중대장 및 비행대장을 역임했다. 전쟁 후에는 독일 연방 공군에 재입대하여 요직을 거쳤으며, 1975년 은퇴 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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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하르트 바르크호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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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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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 게르트(Gerd) |
출생일 | 1919년 3월 20일 |
사망일 | 1983년 1월 11일 |
출생지 | 쾨니히스베르크, 프로이센 자유주 |
사망지 | 프레헨/쾰른, 서독 |
묘지 | 테게른제 |
소속 | |
충성 | 나치 독일 서독 |
군종 | 독일 국방군 공군 독일 연방군 공군 |
복무 기간 | 1937년–1945년 (국방군) 1956년–1975년 (연방군) |
최종 계급 | 국방군: 소령 연방군: 소장 |
지휘 | |
부대 | 제4./JG 52 I./JG 52 II./JG 52 JG 6 야보G 31 "뵐케" |
참전 부대 | 제2전투비행단, 제52전투비행단, 제6전투비행단, 제44전투단 |
참전 | |
전투/전쟁 | 제2차 세계 대전 프랑스 공방전 영국 본토 항공전 독소전쟁 바르바로사 작전 청색 작전 쿠르스크 전투 크림 공세 (1944년) 바그라티온 작전 독일 본토 항공전 |
훈장 | |
주요 훈장 | 백엽검 기사철십자훈장 |
경력 | |
전투 기록 (일본어 정보) | |
격추 기록 | 301기 |
사령관 (일본어 정보) | |
직책 | 제6전투항공단 사령관 |
2. 초기 생애 및 경력
게르하르트 바르크호른은 1919년 3월 20일 바이마르 공화국 프로이센 자유국의 쾨니히스베르크(현재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주 칼리닌그라드)에서 태어났다.[1] 아버지 빌헬름은 도로 건설 감독관이었고, 어머니는 테레제였다. 바르크호른은 4남매 중 셋째였으며, 헬무트, 디터, 메타라는 두 형제와 한 자매가 있었다. 1925년부터 1929년까지 쾨니히스베르크의 ''Volksschule''(초등학교)와 Wilhelms-Gymnasium에서 중등학교를 다녔으며, 1937년 초에 ''Abitur''(졸업장)를 받았다.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의 소련 침공인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동부 전선이 열렸다. 바르크호른은 침공 지원을 위해 5번의 출격 임무를 수행했고, 세 번째 임무에서 폴리카르포프 I-15 전투기를 격추하여 지상 승리를 기록했다.[2] 7월 2일에는 120번째 출격에서 붉은 공군의 일리우신 DB-3 폭격기를 격추하여 첫 공중전을 기록했다.[2] II. ''Gruppe''는 민스크 동쪽의 슬로보다 비행장에 잠시 머문 뒤, 레펠로 이동하여 제2 기갑군과 제3 기갑군의 비테브스크와 폴로츠크로의 진격을 지원했다.
1937년 4월 1일, 바르크호른은 의무적인 ''Reichsarbeitsdienst''(제국 노동 봉사)를 시작했다. 1937년 11월 1일, 나치 독일 공군에 ''Fahnenjunker''(사관 생도)로 입대하여 드레스덴에 있는 항공 전쟁 학교 클로츠체에 배치되었다. 1938년 3월 ''Luftkriegsschule'' 2에서 비행 훈련을 시작했다. 가토우에서 그의 동기생으로는 율리우스 마임베르크와 에곤 마이어가 있었다. 1939년 8월 1일 바르크호른은 ''Oberfähnrich''(상사에 해당)로 진급했고, 동시에 8월 27일 Leutnant(소위) 계급을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은 1939년 9월 1일 금요일 독일군이 폴란드 침공을 하면서 유럽에서 시작되었고, 바르크호른은 전문 전투기 조종사 훈련을 받도록 선발되었다. 훈련을 마친 후, 1940년 1월 10일, 그는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의 이름을 딴 ''야크트게슈봐데르'' 2 "리히트호펜"(JG 2—제2 전투 비행단)의 3. ''슈타펠''(제3 비행대대)에 배치되었다.[1] 당시, 비행대대는 프랑크푸르트-레브스톡 비행장에 주둔했으며, ''하우프트만'' 헤닝 슈트륌펠이 지휘했다. 비행대대는 ''하우프트만'' 위르겐 로트가 이끄는 JG 2의 I. ''그루페''(제1 그룹)에 예속되었다. 이 ''그루페''는 Bf 109 E를 장비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의 "가짜 전쟁" 기간 동안 독일 서부 국경을 따라 전투 공중 초계를 수행했다.
1940년 7월 1일, II. ''그루페''의 비행대대인 ''야크트게슈봐데르'' 52 (JG 52—제52 전투 비행단)의 4. ''슈타펠''에 배치되었다. 8월 18일 직후, 그는 6. ''슈타펠''로 전출되었다. 1940년 10월 23일, 철십자 훈장 2급(Eisernes Kreuz zweiter Klassede)을 수여받았다. 10월 27일, 그의 38번째 전투 임무에서 영국 해협 상공에서 슈퍼마린 스핏파이어와 교전했다. 그의 Bf 109 E-7 (''베르크넘머'' 5922—공장 번호)는 수많은 피탄을 받아 영국 해협에 비상 착륙해야 했다. 그는 작은 팽창식 구명보트에서 두 시간 동안 표류하다가 독일 해상 구조 서비스인 ''제노트디엔스트''에 의해 구조되었다. 1940년 12월 3일, 철십자 훈장 1급(Eisernes Kreuz erster Klassede)을 수여받았다.
3. 동부 전선에서의 활약
7월 28일, 바르크호른은 폴리카르포프 I-16 전투기를 격추하여 두 번째 공중전을 기록했고, 다음 날 DB-3 폭격기 1대를 격추하여 세 번째 공중전을 기록했다.[2] 8월에는 일멘 호 서쪽의 솔체로 이동하여 지상 지원, 전투 초계 비행 및 융커스 Ju 87 급강하 폭격기 호위 임무를 수행했다. 8월 19일에는 미코얀-구레비치 MiG-1 전투기의 초기 독일 지정인 I-18 전투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2] 8월 25일에는 폴리카르포프 I-153 전투기 1대와 I-18 전투기 1대를 격추하여 두 번의 공중전을 기록했다.[2]
9월, II. ''Gruppe''는 류반으로 이동하여 슐리셀부르크, M가 및 레닌그라드를 상대로 임무를 수행했다. 바르크호른은 1941년 11월 1일에 ''Oberleutnant''(대위)로 진급했고,[2] 11월 30일에는 I-61(미코얀-구레비치 MiG-3 전투기의 초기 독일 지정)을 상대로 기상 정찰 임무(Wetterflugde)에서 10번째이자 1941년 마지막 공중전을 기록했다.[2]
1942년 1월 24일, II. ''Gruppe''는 동부 전선에서 철수하여 쾨니히스베르크 근처의 예사우에서 휴식과 보충을 받았다.[2] 1942년 3월 1일, 바르크호른은 JG 52의 4. ''슈타펠''의 ''슈타펠카피탄''으로 임명되었다.[2] 5월, II. ''그루페''는 케르치 반도 전투 중 독일의 반격 작전인 작전명 '트라펜야그트'에 참여했고, 이후 제2차 하르코프 전투에서 독일군을 지원했다.[2]
6월 22일, 독일군은 쿠피안스크 공격 작전인 작전명 프리데리쿠스 II를 시작했고, 바르크호른은 처음으로 "하루 만에 에이스"가 되어 5대의 라보츠킨 LaGG-3 전투기를 격추하여 총 26대의 공중전 승리를 기록했다.[2] 7월 19일에는 4번의 임무를 수행하며 6대의 소련 전투기를 격추하여 총 51대의 공중전 승리를 기록했고, 다음 날에는 발데마르 셈엘카 소위를 윙맨으로 하여 LaGG-3 전투기 5대를 격추하여 다시 "하루 만에 에이스"가 되었다.[2]
7월 25일, 바르크호른의 Bf 109 F-4/R1 (''Werknummer'' 13388—공장 번호)는 대공포화에 맞아 불시착했고, 다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어 후송되었다.[2] 1942년 7월, 바르크호른은 소련 항공기 30대를 파괴했고,[2] 8월 21일에는
9월 말, 요양을 마친 바르크호른은 4. ''슈타펠''로 복귀했다.[2] 12월 19일에는 101승을 기록하여 100승을 달성한 32번째 루프트바페 조종사가 되었다.[2] 바르크호른은 소련 조종사들을 존경했으며, LaGG-3와 40분 동안 공중전을 벌인 경험을 회상하며 "샤워에서 나온 것처럼 땀이 쏟아졌다"고 말했다.[2]
1943년 1월 9일, 바르크호른은 105번째 공중전 승리를 기록했고, 1월 11일에는 철십자 기사 십자 훈장 - 오크 잎](Ritterkreuz des Eisernen Kreuzes mit Eichenlaub)]을 수여받았다.[2]
3. 1. 초기 성과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이 발동되어 나치 독일은 소비에트 연방을 침공했고, JG52도 동부 전선으로 배치되었다. 7월 2일, 바르크호른은 120번째 출격에서 소련 공군의 DB-3 폭격기를 격추하여 첫 공중전 승리를 기록했다.[2] 11월 말까지 바르크호른은 10기를 격추했고, 11월 11일 중위로 진급했다.
3. 2. 중대장 및 에이스 등극
1942년 5월 21일, 바르크호른은 JG 52 제4중대(4./JG 52de)의 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2] 이때부터 바르크호른의 격추수는 놀라운 증가를 보였다. 당시 탑승기는 메서슈미트 Bf109 F형이었다. 7월 19일, 바르크호른은 하루에 6기를 격추하여 "하루 만에 에이스"가 되었고, 격추수는 50기를 넘었다.[2] 7월 25일, 바르크호른은 피탄 부상으로 2개월간 휴식을 취하게 되었지만,[2] 휴가 중이던 8월 23일, 64기 격추 공로로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2] 10월에 전선에 복귀한 바르크호른은 다시 격추수를 늘리기 시작하여, 12월 19일까지 101기 격추를 달성했다.[2] 1943년 1월 11일, 105기 격추로 백엽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2] 이 시기, 제52 전투 항공단은 메서슈미트 Bf109 G형으로 장비를 전환하고 있었다.
3. 3. 비행대장 및 200기 격추 돌파
1943년 9월 1일, 바르크호른은 대위로 진급하고, JG 52 제2 비행단(II. ''Gruppe'')의 ''Gruppenkommandeur''(비행단장)으로 임명되었다.[1] 전임자는 퀼레였다. 제4 비행대(4. ''Staffel'')의 지휘는 하인리히 슈투름에게 넘어갔다. 9월 5일, 그는 소련 영웅이자 소련 공군 에이스인 10회의 개인 격추와 32회의 공동 격추 기록을 가진 니콜라이 클레피코프를 격추했다. 같은 날, JG 52 제2 비행단은 173기 격추 에이스 하인츠 슈미트를 잃었다. 바르크호른이 격추한 두 대의 라보츠킨 La-5는 그의 165번째와 166번째 공중전 승리였다.
바르크호른은 1943년 11월 30일 200기 격추를 달성했다. 이 업적으로 12월 2일 ''국방군 보고서''에 언급되었다. 같은 날, 투즐라 섬 근처 전투에서 네 번째로 "하루 에이스"가 되었다. 12월 28일, 다시 한번 "하루 에이스"가 되어 총 공중전 승수를 222기로 늘렸다. 다음날, JG 52 제2 비행단(II. ''Gruppe'')의 총 2,500번째 공중전 승리를 기록했다. 1944년 1월 23일, 독일 조종사 중 처음으로 1,000회 전투 임무를 완수했다. 당시 바르크호른의 정규 윙맨은 하인츠 에발트였다.
1943년 12월부터 1944년 2월 13일까지 3개월 동안, 크림반도와 쿠반을 담당하는 주요 독일 전투기 부대인 JG 52 제2 비행단(II. ''Gruppe'')은 350기를 격추했으며, 이 중 50기는 바르크호른 개인의 승리였다. 1944년 2월 13일, 250회 공중전 승리를 달성한 바르크호른은 이 기록을 달성한 세 번째 조종사가 되었으며, 2월 14일 ''국방군 보고서''에 두 번째로 언급되었다. 며칠 동안 출격하지 못하고 전투 임무를 수행하지 않다가, 2월 25일 페틀랴코프 Pe-2 폭격기를 격추하며 공중전 승리를 다시 기록했다.
1944년 3월 2일,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참나무 잎과 검)(Ritterkreuz des Eisernen Kreuzes mit Eichenlaub und Schwerternde)을 수여받았다. 검 수여식은 3월 24일 ''총통 관저''(Führer Headquarter)에서 열렸다. 1944년 4월 1일, 소령으로 진급했다.
3. 4. 부상과 복귀, 그리고 300기 격추
1944년 5월 31일, 바르크호른은 273번째 공중전 승리를 기록했지만,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되어 4개월 동안 입원했다. 그날, 바르크호른은 한스-울리히 루델 ''소령''이 지휘하는 제2 지상 공격 비행단 (SG 2) III. ''Gruppe'' 소속 Ju 87 급강하 폭격기를 호위하여 프루트 강 지역 지상 지원 임무를 수행했다. 바르크호른은 P-39 전투기 2대, Il-2 지상 공격기 1대, Yak-9 전투기 1대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후 자신의 Bf 109 G-6 (''Werknummer'' 163195)가 P-39 전투기에 격추되었다. 오른쪽 팔과 다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이아시 근처에 불시착했다.[1] 이날은 바르크호른의 여섯 번째 임무였으며, 소련 폭격기를 공격하던 중 뒤에서 공격을 받았다. 잦은 전투로 인한 피로 누적으로 집중력이 저하되어 적기 접근을 늦게 알아차린 것이 원인이었다. 후시의 야전 병원에서 즉시 치료를 받은 후, 바트 비제로 후송되어 요양했다. 바르크호른이 전선을 이탈한 동안 에리히 하르트만이 그의 기록을 넘어 301번째 공중전 승리를 기록했다.
바르크호른이 요양하는 동안, 9월까지는 ''하우프트만'' 헬무트 립페르트가, 10월에는 ''하우프트만'' 하인리히 슈투름이 일시적으로 II. ''Gruppe''를 지휘했다. 부대 복귀 후, 바르크호른은 심리적 피해와 전투 스트레스를 겪었다. 조종석에 앉으면 불안감을 느꼈고, 아군기가 뒤에 있어도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이 상태를 극복하는 데 몇 주가 걸렸다. 바르크호른은 11월 14일에 275번째 승리를 기록했다. 이 기간 동안 에리히 하르트만이 제III비행대대 제9중대장에서 제7중대장으로 전속되어 바르크호른의 부하가 되었다. 1945년 1월 5일, 바르크호른은 에리히 하르트만에 이어 역사상 두 번째로 300기 격추를 달성했다.
4. 독일 본토 항공전
1945년 1월 16일, 바르크호른은 독일 본토 방공을 담당하는 제6 전투비행단(JG 6)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Fw 190 D로 기종을 전환했다. 그러나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해 "숙련 훈련에 50시간은 더 필요했다"고 회고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다.[1] JG 6는 대부분 신참 조종사나 Bf 110에서 기종 전환을 한 조종사로 구성되었고,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못한 채 실전에 투입되어 미국 공군을 상대로 큰 손실을 입었다. 바르크호른은 1945년 4월 10일까지 JG 6를 지휘했지만, 과로로 건강이 악화되어 입원하면서 사령관 직에서 해임되었다.
당시 독일 공군은 궤멸 상태였다. 전투기대 총감에서 해임된 아돌프 갈란트 중장은 Me 262 제트 전투기로 구성된 제44 전투단(JV 44)을 결성하여 독일 공군 정예들을 모아 최후의 전투를 준비했다. 바르크호른은 입원 중이었음에도 자원하여 1945년 4월 15일 JV 44로 전속되었다. 그러나 전황이 절박했고, 제대로 된 제트기 전환 훈련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바르크호른은 JV 44에서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1945년 4월 21일, 바르크호른은 1104번째이자 마지막 출격을 하게 되었다. 미군 폭격기 편대에 접근하던 중 엔진 고장으로 비상 착륙하던 중, 여러 대의 P-51에게 공격받았다. 바르크호른은 피탄되어 불타는 Me 262를 간신히 착륙시키고 탈출했지만, 그 과정에서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되어 그대로 종전을 맞이했다.
5. 전후 생애
바르크호른은 1945년 9월 3일 전쟁 포로에서 석방되었다. 이후 테게른제(Tegernsee)로 돌아가 가족과 재회했다. 그곳에서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탈출한 어머니와 합류했다. 10월, 뮌헨에 본사를 둔 카메라 제조업체 린호프(Linhof)에서 보조 작업자로 첫 직장을 얻었다. 1년 후, 그륀발트에서 직장을 구했으나 1949년에 그만두었다. 잠시 실업 상태를 겪은 후, 1949년 11월 폭스바겐(Volkswagen)에서 과정을 수료했다. 12월, 트리어에 있는 폭스바겐 딜러 ''오토 융크''(Auto Junk)에 기술 현장 서비스 책임자로 취직했다. 4년 후, 시설 및 서비스 관리 책임자로 승진했다.
1956년, 서독 공군에 입대하여 1976년 소장으로 퇴역했다.
1983년 1월 6일, 바르크호른은 아내 크리스토르와 친구들을 태우고 쾰른 시내 아우토반을 자동차로 주행하던 중, 플레헨 인터체인지에서 차량이 도로 결빙으로 미끄러져 인터체인지 콘크리트 벽에 충돌했다. 크리스토르는 차 밖으로 튕겨져 즉사했고, 친구도 사망했다. 바르크호른도 중상을 입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1월 11일 사망했다. 향년 63세였다.
6. 평가 및 유산
바르크호른은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이 많았던 독일 공군 내에서도 조용하고 겸손한 인물이었다. 동부 전선에서 격추 결과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었을 때에도 기꺼이 전과를 부하에게 양보했으며, 동료의 전적에 경의를 표하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 바르크호른이 300기 격추를 앞두고 부상을 입어 요양 중에 에리히 하르트만이 그의 격추 기록을 넘어 300기 격추에 도달했을 때, 그 위업 달성을 누구보다 기뻐하고 축복한 것은 바로 바르크호른 자신이었다. 전투 중 적기에 치명타를 가한 후, 피탄된 기체와 나란히 비행하며 탑승기의 윈드실드를 통해 적 조종사에게 탈출하라고 재촉하는 바르크호른의 모습을 하르트만 등 여러 동료들이 목격하기도 했다. 하르트만은 바르크호른의 그 행위에 대해 확실히 격추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바르크호른은 그에게 '''"부비, 자네는 이 일을 잊지 말게. 그도 아름다운 러시아 여인의 귀여운 아기였네. 그에게는 생명과 사랑을 가질 권리가 있어. 우리와 똑같아."'''라고 타이르었다고 한다. 하르트만이 "몸을 던져 후회할 일이 없는 단 한 사람의 지휘관이며, 아버지로서, 형으로서, 동료로서, 친구로서, 내가 아는 사람들 중 최고의 인물"이라고 그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내며 평생 존경했던 것처럼, 전투기 조종사로서의 능력 이상으로 그의 뛰어난 인격을 높이 평가하는 상관과 부하가 많았으며, 그 인품은 연합군 사이에서도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7. 훈장
미국 역사가 데이비드 T. 자베키에 따르면, 바르크호른은 1,100번의 전투 임무에서 301번의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그는 9번 격추되었고, 1번 탈출했으며, 2번 부상을 입었다. 저자 슈피크는 그의 총 전투 임무 횟수를 1,104회로 기록했다. ''Luftwaffe Aces – Biographies and Victory Claims''의 저자인 매튜스와 포어먼은 독일 연방 기록 보관소를 연구하여 300번의 공중전 승리 주장과 추가로 확인되지 않은 1건의 주장에 대한 기록을 발견했다. 그의 모든 공중전 승리는 동부 전선에서 기록되었다. 저자 다니엘과 가보르 호르바스는 헝가리 상공에서 바르크호른의 주장에 대한 소련군의 손실 보고서를 비교했다. 1944년 10월 26일부터 1945년 1월 5일까지 바르크호른은 28번의 공중전 승리, 즉 273번째에서 300번째 공중전 승리를 주장했다. 이 기간 동안 저자들은 22건의 일치하는 소련군 손실을 발견하여 79%의 일치율을 보였다.
8. 계급
국방군 (Wehrmach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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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8월 27일 | 소위 (Leutnant) |
1941년 11월 1일 | 대위 (Oberleutnant) |
1943년 4월 1일 | 대위 (Hauptmann) |
1944년 4월 1일 | 소령 (Major) |
연방군 (Bundeswehr) | |
1956년 6월 19일 | 소령 (Major) |
1958년 5월 12일 | 중령 (Oberstleutnant) |
1960년 9월 28일 | 대령 (Oberst) |
1969년 9월 10일 | 준장 (Brigadegeneral) |
1973년 10월 1일 | 소장 (Generalmajor) |
참조
[1]
문서
Organisation of the Luftwaffe during World War II
[2]
문서
Istrebitelny Aviatsionny Po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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