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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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은 경상북도 경산시에 위치한 삼국시대 고분군으로, 임당동, 조영동, 대동, 부적리 고분군을 포함한다. 임당동 고분군은 다양한 형식의 무덤과 유물을 통해 이 지역 지배자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경주 및 가야 문화와의 교류를 보여준다. 조영동 고분군은 3~5세기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대동 고분군은 압독국 최고 지배자의 묘역으로, 2016년에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에 추가 지정되었다. 부적리 고분군은 신라와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는 돌무지덧널무덤이 발견되었으며, 2018년에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에 추가 지정되었다. 이 고분군은 고대 압독국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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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 |
로마자 표기 | Gyeongsan Imdangdong-gwa Joyeongdong Gobungun |
지정 종류 | 사적 |
지정 번호 | 516 |
지정일 | 2011년 7월 28일 |
주소 | 경상북도 경산시 임당동 676-1 등 |
면적 | 97,572m² |
2. 임당동 고분군
경산시 임당동 서쪽 구릉에 위치한 삼국 시대 전기의 무덤들이다. 발굴 이전에는 10여 기의 고분이 훼손된 상태로 지표에서 확인되었다.
1982년 2월, 임당동 2호분이 도굴되어 순금제 귀걸이 및 장신구, 은제 허리띠, 곱은옥, 고리자루큰칼 등 중요한 문화재가 해외로 유출되기 직전에 회수되면서 임당동 고분군의 중요성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영남대학교 박물관 주도로 1982년 7월부터 12월까지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모든 경비는 영남대학교 박물관이 부담하였다. 이후 인근 북편 능선에서도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에 의해 원삼국시대 무덤들이 추가로 발굴되었다.
임당동 고분군은 본래 대한민국의 사적 제300호(1983년 2월 3일 지정)였으나, 2011년 7월 28일 인접한 경산 조영동 고분군과 통합되어 사적 제516호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으로 재지정되었다.
이곳에서는 널무덤, 독무덤, 돌무지덧널무덤, 굴식돌방무덤 등 다양한 형식의 무덤이 확인되었으며, 금·은제 장신구, 철기류, 토기류 등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는 당시 이 지역 지배 세력의 존재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고분의 구체적인 구조와 특징, 출토 유물의 상세 내용은 하위 문단에서 다룬다.
삼국사기에는 파사 이사금 23년(서기 102년)에 압독국 왕이 신라에 항복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학계에서는 압독국의 위치를 임당동 고분군이 있는 압량면 일대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임당동 고분군은 삼국 시대 초기 소국(小國)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또한 출토 유물과 무덤 구조는 경주 지역 초기 무덤 및 가야 문화와 유사성을 보여, 당시 신라 및 가야와의 문화 교류 가능성을 시사한다.
2024년 10월 30일에는 추가 발굴을 통해 신라의 간접적인 지배와 관련된 유물이 확인되기도 하였다.[3]
2. 1. 임당동 고분군의 구조와 특징
임당동 구릉 위에 있는 삼국시대 전기의 무덤들로, 1982년 영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하였다.무덤의 형식은 널무덤(목관묘), 독무덤(옹관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발굴된 고분 중 제2호분은 봉토의 3분의 1 정도가 파괴된 상태였으나, 조사를 통해 구조를 파악할 수 있었다. 봉토는 얇은 판석(청석)을 정성스럽게 둥글게 쌓아 올렸고, 바닥 일부는 흙으로 다지고 회를 사용한 흔적이 보인다. 구조는 표형분 형태로, 2개의 무덤을 남북으로 붙여 만들었으며 남쪽 무덤이 먼저 축조된 후 북쪽 무덤이 덧붙여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각 무덤은 으뜸덧널과 딸린덧널로 구성되는데, 으뜸덧널의 뚜껑은 큰 화강암 편평석을 사용했고 딸린덧널은 나무로 뚜껑을 만들었다.
제5·6·7호분 역시 제2호분과 유사한 방식으로 봉토를 쌓았으며, 봉토가 2개 또는 3개로 연결된 여러덧널식 구조를 보인다. 이들 고분 주변에서는 평면에 원형 또는 반원형으로 둘레돌(호석)이 돌려진 모습도 확인되었다. 제5호분과 제7호분에서는 각각 독무덤 1기가 추가로 발견되기도 했다.
출토 유물로는 금·은제 각종 치레거리(장신구), 고리자루큰칼(환두대도)을 비롯한 철기류와 토기류가 다수 발견되었다. 이러한 유물들은 당시 이 지역 지배 계층의 무덤임을 보여준다. 임당동 고분군에서 확인된 유물과 무덤 구조는 경주 지역 초기 무덤 및 가야 문화와 유사성을 보여, 당시 신라, 가야와의 활발한 문화 교류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2024년 10월 30일 추가 발굴에서는 신라의 간접적인 지배와 관련된 유물이 확인되기도 했다.[3]
3. 조영동 고분군
경산시 조영동 일대에 위치한 고분군으로,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의 일부를 이룬다. 1983년 2월 3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31호로 지정되었으나, 2011년 7월 28일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으로 통합 지정되면서 해지되었다. 이 고분군은 삼국 시대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다양한 형태의 무덤과 유물이 출토되어 당시 사회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3. 1. 조영동 고분군의 구조와 특징
경산시 조영동 일대의 낮고 평평한 구릉지대에 약 10여 기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다. 무덤을 덮는 흙 부분인 분구는 대부분 사라졌으나, 남아 있는 것들은 원형의 형태를 띠고 있다.무덤 내부 구조는 항아리에 시신을 넣는 독무덤(옹관묘), 구덩이를 파고 돌로 덧널을 만든 구덩식 돌덧널무덤(수혈식 석곽묘), 돌로 널방을 만들고 옆으로 드나드는 굴을 낸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묘) 등이 확인되었다. 이 가운데 구덩식 돌덧널무덤이 가장 많이 발견되며, 그 구조도 시신을 넣은 널만 있는 형태와 시신 넣는 널과 부장품을 넣는 덧널을 함께 갖춘 형태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출토된 유물로는 다양한 토기류를 비롯하여 금동관, 허리띠, 귀걸이 등의 장신구, 무기류, 말갖춤(마구류), 흙으로 만든 토제품 등이 있다.
무덤 내부 구조와 출토 유물의 특징으로 미루어 볼 때, 조영동 고분군은 대략 3세기에서 5세기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4. 대동 고분군
대동 고분군은 압독국 최고 지배자의 묘역으로 추정되며,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받아 2016년 6월 1일 사적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에 추가 지정되었다.[2]
4. 1. 대동 고분군의 발굴 성과
2016년부터 경산시와 한빛문화재연구원은 임당 1호분의 구조와 성격을 밝히고 정비 복원을 위해 학술 발굴 조사를 진행했다.[4]먼저 축조된 1A호분은 다행히 도굴 피해를 입지 않아 매장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1A호분은 타원형 봉분 안에 으뜸덧널과 딸린덧널을 '창'(昌)자 모양으로 배치했는데, 이는 임당지구 고총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으뜸덧널 바닥에서는 무덤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인골이 발견되었다. 이 인골은 은제 허리띠, 순금제 가는고리 귀걸이, 금동관모와 관장식, 고리자루칼 등 당시 최고 지배자임을 상징하는 금속 공예품을 착용하고 있었으며, 머리는 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주인공의 발치에서는 금제 귀걸이를 착용한 어린아이 인골 1점도 확인되었다.[4]
딸린덧널에서는 큰항아리, 짧은목항아리, 긴목항아리, 굽다리접시 등 다양한 토기류가 빈틈없이 가득 채워진 상태로 출토되었고, 금동제 말안장과 철제 발걸이 등도 나왔다. 또한, 딸린덧널 서쪽 가장자리에서는 따로 부장된 많은 제사용 토기류와 함께 금동제 귀걸이를 착용한 어른 인골 1구도 확인되었다.[4]
이 고분군은 압독국 최고 지배자의 묘역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인정되어, 2016년 6월 1일 사적으로 지정된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에 추가되었다.[2]
5. 부적리 고분군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상세 내용을 다루므로 중복을 피하기 위해 이 섹션은 비워둠)
5. 1. 부적리 고분군의 특징과 의의
부적리 고분군은 경산 임당유적 구릉의 북동쪽 끝자락에 위치하며, 사적 제516호로 지정된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과 함께 고대 경산 지역에 있었던 옛 압독국(押督國) 최고 지배자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5] 이전에는 정식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역사적 성격이 불명확하다는 이유로 2007년 사적 지정 신청이 부결된 바 있다.[5]현재 이곳에는 봉분 직경 20m~30m, 높이 6.5m 정도의 대형 고분 5기가 분포하고 있다. 2016년부터 2017년까지 이 중 한 기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는데, 그 결과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 사이에 만들어진 돌무지덧널무덤으로 밝혀졌다. 이는 같은 시기 신라의 왕족들이 주로 사용했던 무덤 양식으로, 당시 압독 지역이 신라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보여주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5] 또한, 부적리 고분군 일대에 대한 지표조사와 부분 발굴조사 결과, 조영동 고분군과 이어지는 구릉 위에도 삼국시대 고분이 밀집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5]
부적리 고분군은 발굴조사를 통해 고분 축조 방식과 구조, 출토 유물 등에서 인접한 임당동 및 조영동 고분군과 동일한 성격을 지닌 유적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신라에 편입된 옛 압독국 유력 세력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받아, 2018년 5월 28일 경상북도 경산시 부적리 331번지 등 28필지, 36784m2 면적이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에 추가로 지정되었다.[6]
6. 압독국과의 관계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왕 23년(서기 102년) 조에는 '압독국왕이 신라에 항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3] 押督國|압독국ltc은 현재의 경상북도 경산시 압량읍 일대로 추정되며,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은 이러한 압독국의 실체와 신라와의 관계를 밝히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 고분군은 임당동, 조영동뿐만 아니라 이후 추가 지정된 대동, 부적리 일대에 걸쳐 분포하며, 고대 압독국의 최고 지배자들의 집단 묘역으로 여겨진다.[2][5][6]
초기 임당동 고분군 발굴에서는 널무덤(목관묘), 독무덤(옹관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 등 다양한 형식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금·은제 장신구, 고리자루큰칼(환두대도)을 비롯한 철기류와 토기류는 무덤의 주인이 당시 이 지역의 유력한 지배자였음을 보여준다. 특히 임당동 출토 유물과 무덤 구조는 경주 지역 초기 무덤의 그것과 유사성을 보이면서도, 가야 문화의 요소도 함께 나타나 당시 활발했던 문화 교류의 흔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2016년부터 진행된 임당 1호분 발굴조사는 압독국 지배층의 모습을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냈다.[4] 도굴되지 않은 1A호분은 으뜸덧널과 딸린덧널을 '昌'자형으로 배치한 임당지구 고총의 전형적인 구조를 보여준다. 으뜸덧널의 주인공은 머리를 동쪽으로 두고 은제 허리띠, 순금제 가는고리 귀걸이, 금동관모와 관장식, 고리자루칼 등 최고 지배자를 상징하는 위세품을 착용하고 있었다. 주인공의 발치에서는 금제 귀걸이를 한 어린아이 인골 1점이, 딸린덧널 서쪽 가장자리에서는 금동제 귀걸이를 착용한 어른 인골 1구가 확인되어 순장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딸린덧널에는 다양한 토기류와 함께 금동제 말안장, 철제 발걸이 등도 부장되어 있었다.[4]
한편, 고분군 북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부적리 고분군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봉분 직경 20m~30m, 높이 6.5m 정도의 대형 고분 5기가 분포하고 있으며,[5] 2016~2017년 발굴된 고분은 당시 신라 왕족들이 주로 사용하던 돌무지덧널무덤 형태로 밝혀져, 압독국이 신라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5] 이는 『삼국사기』 기록 이후 압독국이 신라의 영향력 아래 편입되어 가는 과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2024년 10월 30일 당시의 추가 발굴에서는 신라의 간접적인 지배와 관련된 유물이 확인되기도 했다.[3] 이는 압독국이 신라에 복속된 이후에도 곧바로 완전 흡수된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 동안 지역 유력 세력을 통해 간접적인 통치를 받는 등 어느 정도의 자치성을 유지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처럼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은 압독국의 존재와 그 성장 과정, 그리고 신라와의 복잡한 관계 변화를 보여주는 핵심적인 유적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부적리 고분군의 추가 지정(2018년 5월 28일, 28필지 36784m2)[6]과 발굴 성과는 신라에 편입된 이후 압독국 유력 세력의 동향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역사적·학술적 가치를 지닌다.[6]
참조
[1]
간행물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지정명칭 변경 및 지정·해제 고시
문화재청장
2011-07-28
[2]
간행물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 사적 추가 지정
문화재청장
2016-06-01
[3]
뉴스
경산 압독국 무덤서 '4단 장식 금동관'...천마총과 비슷
https://www.tbc.co.k[...]
TBC
2024-10-30
[4]
뉴스
경산 임당동 고분군 발굴…학계 "신라 지방조직 연구에 큰 도움"
http://www.imaeil.co[...]
매일신문
2017-06-23
[5]
뉴스
경산 부적리 고분군 사적 지정…임당동·조영동 516호에 추가
http://news.imaeil.c[...]
매일신문
2018-05-28
[6]
간행물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사적 추가 지정
http://gwanbo.mois.g[...]
2018-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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