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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 다카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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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노 다카유키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지도자이다. 1973년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하여 2루수, 중견수, 1루수로 활약하며 1979년에는 3할 타율을 기록했다. 1989년 은퇴 후에는 코치, 해설가, 독립 리그 감독 등을 역임했다. 특히 형제 선수인 사다오카 지아키와 함께 일본 프로 야구에서 1000경기 이상 출전과 1000개 이상의 안타를 기록한 유일한 형제 선수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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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 다카유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선수명고노 다카유키
원어명Takayuki Kono
일본어 표기河埜 敬幸
로마자 표기Kono Takayuki
가나こうの たかゆき
한자河埜 敬幸
로마자 표기 (한국어)Kono Takayuki
일본어 (한국어)고노 다카유키
별명チコ
국적일본
출신지에히메현 야와타하마시
생년월일1955년 4월 18일
신장179
체중78
利き腕
타석
수비 위치2루수, 1루수, 외야수
프로 입단 연도1973년
드래프트 순위3순위
첫 출장1975년 9월 4일
마지막 경기1989년 10월 20일
소속 구단 (2020년)카나플렉스
역대 직책GM
선수 경력
선수 경력난카이 호크스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974 ~ 1989)
감독 및 코치 경력
감독 및 코치 경력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1990 ~ 1993, 1997, 2004 ~ 2006)
나가사키 세인츠 (2007 ~ 2008)
기슈 레인저스 (2009 ~ 2010)
고양 원더스 (2012 ~ 2014)
카나플렉스
기타 정보

2. 선수 시절

고노 다카유키는 에히메 현립 야와타하마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3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난카이 호크스로부터 3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1] 4년차부터 주전 2루수로 활약했으며, 견실한 수비와 승부에 강한 타격을 바탕으로 침체된 팀을 이끌었다. 1979년에는 3할 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같은 형제 선수로 활약한 사다오카 지아키와 함께 2루수와 유격수를 번갈아 맡았다.[15] 1984년1985년에는 주로 중견수로 활약했고, 이듬해부터는 2루수로 복귀했다. 1988년부터는 1루수로도 활약했다. 1989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콧수염을 길러 트레이드 마크가 되기도 했다.[16]

고노 형제는 일본 프로 야구에서 형제가 모두 1000경기 이상 출전, 1000안타 이상을 기록한 유일한 사례이다 (외국인 선수 중에서는 레론 리, 레온 리 형제가 달성).[16]

1975년 시즌 도중 시마모토 고헤이가 킨테츠 버팔로스로 이적하면서 등번호 32번에서 8번으로 변경되었다. 1976년 1군에 정착하여 유격수나 2루수로 20경기에 선발 출장했다. 1977년 5월부터 사쿠라이 테루히데를 대신해 주전 2루수를 꿰찼고, 시즌 후반에는 유격수와 3루수를 겸하며 활약했다.

1978년 감독이 히로세 스미츠로 교체된 후 부상으로 늦게 출발했지만, 5월에 2루수로 복귀하여 첫 규정 타석 (30위, 타율 .246)에 도달했고 리그 최다 23희생타를 기록했다. 1979년에는 2루수 출전이 늘면서 개인 최다 25도루, 타율 .300 (13위)을 기록했고, 사다오카 토모아키와 키스톤 콤비를 이루었다.[4] 같은 해 올스타 게임에 형제 모두 선출되기도 했다.

1980년 3루수나 유격수로 출전하는 일이 많아지며 부진했지만, 1981년 2루수가 주 포지션이 되면서 타격도 살아났다.[3] 1982년에는 처음으로 전 경기(2루수)에 출장했다.[3] 1983년 후지와라 미츠루의 은퇴로 리드오프를 맡아, 4월 23일 니혼햄 파이터스전부터 5월 13일 한큐 브레이브스전까지 15경기 연속 득점을 기록했다.[1] 이 해 19경기 연속 안타, 9경기 연속 초구 선두 타자 안타 (당시 프로 야구 기록)도 기록했다.[3]

1984년 새 외국인 선수 제프 도일의 영입으로 중견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타율 .296 (10위), 리그 2위 48개의 멀티 안타, 리그 3위 163안타를 기록했다.[5] 1986년부터 2루수로 복귀했고,[1] 1987년 타율 .312를 기록했다. 1988년부터 유가미야 히로시의 활약으로 1루수로 옮겨갔다. 1989년 윌리 업쇼의 입단으로 출전 기회가 줄었고, 같은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다이에·소프트뱅크 호크스 시절 등번호'''

연도등번호
1974년 - 1975년 중도32
1975년 중도 - 1989년8



'''통산 성적'''

연도소속팀경기수타수안타타율홈런타점도루
1975난카이
다이에
9101.100000
1976496113.213153
197711033088.26701910
197810739898.24632316
1979125496149.300135525
198012539992.23110498
1981125453123.2724367
1982130519144.27763311
1983126477123.258114416
1984130551163.296147617
198510835083.2378438
198611536997.2635224
198710827686.3125274
1988121369102.2765189
19896410222.2160133
통산:15년155251601384.26885463141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 난카이(난카이 호크스)는 1989년에 다이에(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구단명을 변경

2. 1. 프로 입단 전

河野 敬幸|고노 다카유키일본어에히메현 출신의 전 일본 프로 야구 선수이다. 1500g의 미숙아로 태어나 생사를 넘나들었기 때문에, 부모가 "그저 행복하게 살아줬으면 좋겠다"는 소망에서 '다카유키'(敬幸일본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3]

형을 따라 야와타하마 공고 야구부에 입부했고, 3학년 때 여름 고시엔 현 예선 준준결승에 진출했지만, 야와타하마고에 콜드 게임으로 패했다. 1973년 드래프트 3순위로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했다.[1]

2. 2. 난카이 호크스 시절

에히메현립 야와타하마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3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난카이 호크스로부터 3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1] 4년차부터 주전 2루수로 활약했으며, 견실한 수비와 승부에 강한 타격을 바탕으로 침체된 팀을 이끌었다. 1979년에는 3할 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4]

같은 형제 선수로 활약한 사다오카 지아키와 함께 2루수와 유격수를 번갈아 맡았다.[15] 1984년1985년에는 주로 중견수로 활약했고, 이듬해부터는 2루수로 복귀했다. 1988년부터는 1루수로도 활약했다. 1989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콧수염을 길러 트레이드 마크가 되기도 했다.[16]

고노 형제는 일본 프로 야구에서 형제가 모두 1000경기 이상 출전, 1000안타 이상을 기록한 유일한 사례이다 (외국인 선수 중에서는 레론 리, 레온 리 형제가 달성).[16]

1975년 시즌 도중 시마모토 고헤이가 킨테츠 버팔로스로 이적하면서 등번호 32번에서 8번으로 변경되었다. 1976년 1군에 정착하여 유격수나 2루수로 20경기에 선발 출장했다. 1977년 5월부터 사쿠라이 테루히데를 대신해 주전 2루수를 꿰찼고, 시즌 후반에는 유격수와 3루수를 겸하며 활약했다.

1978년 감독이 히로세 스미츠로 교체된 후 부상으로 늦게 출발했지만, 5월에 2루수로 복귀하여 첫 규정 타석 (30위, 타율 .246)에 도달했고 리그 최다 23희생타를 기록했다. 1979년에는 2루수 출전이 늘면서 개인 최다 25도루, 타율 .300 (13위)을 기록했고, 사다오카 토모아키와 키스톤 콤비를 이루었다.[4] 같은 해 올스타 게임에 형제 모두 선출되기도 했다.

1980년 3루수나 유격수로 출전하는 일이 많아지며 부진했지만, 1981년 2루수가 주 포지션이 되면서 타격도 살아났다.[3] 1982년에는 처음으로 전 경기(2루수)에 출장했다.[3] 1983년 후지와라 미츠루의 은퇴로 리드오프를 맡아, 4월 23일 니혼햄 파이터스전부터 5월 13일 한큐 브레이브스전까지 15경기 연속 득점을 기록했다.[1] 이 해 19경기 연속 안타, 9경기 연속 초구 선두 타자 안타 (당시 프로 야구 기록)도 기록했다.[3]

1984년 새 외국인 선수 제프 도일의 영입으로 중견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타율 .296 (10위), 리그 2위 48개의 멀티 안타, 리그 3위 163안타를 기록했다.[5] 1986년부터 2루수로 복귀했고,[1] 1987년 타율 .312를 기록했다. 1988년부터 유가미야 히로시의 활약으로 1루수로 옮겨갔다. 1989년 윌리 업쇼의 입단으로 출전 기회가 줄었고, 같은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 첫 기록

  • 첫 출장: 1975년 9월 4일, 대 태평양 클럽 라이온즈 후기 9회전 (오사카 스타디움), 7회말에 노무라 가쓰야의 대주자로 출장
  • 첫 선발 출장: 1975년 9월 15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후기 13회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9번・유격수로 선발 출장
  • 첫 안타: 1975년 9월 17일, 대 롯데 오리온즈 후기 10회전 (오사카 스타디움), 5회말에 나리타 후미오로부터
  • 첫 홈런・첫 타점: 1976년 5월 28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전기 6회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5회초에 야마구치 다카시로부터 솔로


; 이정표 기록

  • 1000경기 출장: 1984년 8월 5일, 대 긴테쓰 버팔로스 17회전 (후지이데라 구장), 1번・중견수로 선발 출장 ※역대 249번째
  • 1000안타: 1985년 4월 9일, 대 긴테쓰 버팔로스 1회전 (오사카 스타디움), 6회말에 구보 야스오로부터 ※역대 139번째
  • 1500경기 출장: 1989년 5월 3일, 대 닛폰햄 파이터스 5회전 (헤이와다이 구장), 8회말에 후지모토 히로시의 대타로 출장 ※역대 92번째


; 기타 기록

  • 15경기 연속 득점: 1982년 4월 23일 - 5월 13일
  • 올스타전 출장: 4회 (1979년, 1981년, 1982년, 1984년)

2. 3. 다이에·소프트뱅크 호크스 시절

에히메 현립 야와타하마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3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난카이 호크스로부터 3순위로 지명을 받아 입단했으며, 4년차부터는 주전 2루수로 활약했다.[1] 견실한 수비와 승부에 강한 타격을 살려 침체에 빠져있던 팀을 이끌었으며, 1979년에는 3할 대의 타율을 기록했다. 같은 형제 선수로 활약한 사다오카 지아키와 2루수와 유격수를 각각 지켰고[15] 1984년과 1985년은 주로 중견수로 활약, 이듬해부터는 2루수로 복귀한 후 1988년부터는 1루수로 활약했다. 1989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으며, 현역 시절에는 콧수염을 기르면서 트레이드 마크가 되기도 했다.[16]

고노 형제는 많은 활약을 한 형제 선수들 가운데서도 수많은 실적을 남겨 1000경기 이상 출전과 1000개 이상의 안타를 기록했다. 일본 프로 야구에서 형제끼리 1000안타를 달성한 사례는 일본인 선수 중에서는 고노 형제 밖에 없었다(외국인 선수 중에서는 레론 리, 레온 리 형제가 달성).[16]

고노 다카유키는 스포츠 가족에서 태어났지만, "敬幸"라는 이름은 1500g의 미숙아로 태어나 생사를 넘나들었기 때문에, 부모님이 "그저 행복하게 살아줬으면 좋겠다"는 소망에서 비롯되었다.[3] 형을 따라 야와타하마 공고 야구부에 입부했고, 3학년이던 1973년, 여름 고시엔 현 예선 준준결승에 진출했지만, 야와타하마고에 콜드 게임으로 패했다. 같은 해 드래프트 3순위로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했다.[1] 1975년 시즌 도중 시마모토 고헤이의 킨테츠 버팔로스 이적으로 인해, 32번에서 시마모토가 달았던 8번으로 이례적인 한 자릿수 번호로 변경되었다. 1976년에는 1군에 정착하여 유격수나 2루수로 20경기에 선발 출장했다. 1977년에는 5월부터 사쿠라이 테루히데를 대신하여 2루수 레귤러를 획득했고, 시즌 후반에는 유격수와 3루수를 겸하며 활약했다. 그해 오프 노무라 가쓰야가 감독에서 해임되자, 원정 숙소에서 친하게 지냈던 에가와 유타카에게 동조하여 함께 퇴단을 희망했지만, 에가와의 필사적인 설득으로 마음을 돌렸다.

감독이 히로세 스미츠로 교체된 1978년에는 부상으로 늦게 출발했지만, 5월에는 2루수로 복귀하여 첫 규정 타석 (30위, 타율 .246)에 도달했고, 리그 최다 23개의 희생타도 기록했다. 1979년에는 본업인 2루수로 출전이 늘어난 것도 좋은 영향을 주었는지, 개인 최다인 25개의 도루를 기록했다. 형이 이후에도 달성하지 못한 타율 .300 (13위)을 기록했고, 역시 형제 선수로 활약한 사다오카 토모아키와 함께 키스톤 콤비를 이루었다.[4] 같은 해 올스타 게임에는 고노 형제 유일의 동시 선출을 이뤄냈다. 다시 3루수나 유격수로 출전하는 일이 많아진 1980년에는 급격한 부진을 보였지만, 1981년에 2루수가 메인이 되면서 타격도 부활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3] 1982년에는 첫 전 경기 출장으로, 전 경기를 2루수로 소화한 처음이자 마지막 시즌이 되었다.[3] 1983년은, 전년 오프에 후지와라 미츠루가 은퇴하면서 새롭게 리드오프 맨이 되었고,[3] 4월 23일 니혼햄 파이터스전 (고라쿠엔)부터 5월 13일 한큐 브레이브스전 (오사카)까지 15경기 연속 득점을 기록했다.[1] 당시 프로 야구 기록인 16경기 연속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이 해에는 19경기 연속 안타, 당시 프로 야구 기록과 동률인 9경기 연속 초구 선두 타자 안타도 기록했고, 팀도 9경기 연속 초회 득점으로 프로 야구 기록과 타이를 이뤘다.[3]

1984년에는 새 외국인 선수 제프 도일이 영입되어 2루수로 기용하는 방침이 정해짐에 따라, 중견수로의 컨버전을 통보받았다. 본인은 도일과의 포지션 경쟁을 희망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타율 .296의 좋은 성적으로 베스트 텐 10위에 들었다. 멀티 안타는 리그 2위인 48개, 안타는 리그 3위인 163개를 기록했고, 1위는 모두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부머 웰즈였다.[5] 이 해부터는 평소에도 저절로 다리 근육이 단련된다는 아이디어에 따라, 공수 교대 시 벤치나 수비 위치로 전력 질주를 하게 되었다. 그 선구자가 되었지만, 젊은 선수들도 전력 질주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팀 내에서는 "쓸데없는 짓을 했다"며 불만을 사기도 했다고 한다.[3] 1986년부터 2루수로 복귀했고,[1] 1987년에는 타율 .312를 기록했지만, 1988년부터 유가미야 히로시의 활약으로 1루수로 옮겨갔다. 1989년에는 윌리 업쇼의 입단으로 1루수 출장 기회도 줄어들었고, 같은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견실한 수비와 승부 근성이 있는 타격으로 침체기 팀을 지탱했다. 1984년~1986년 사이 콧수염을 길러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지만, 이유는 중견수로의 컨버전에 대한 반발이었다고 후에 말했다. 1981년경에도 콧수염, 턱수염을 길렀던 시기가 있었다.[6]

고노 형제는 수많은 활약을 한 형제 선수 중에서도 특히 실적을 남겼으며, 모두 1000경기 이상 출장, 4000타수, 1000개 이상의 안타를 기록했다. 일본인 선수 중에서는 고노 형제밖에 없다.[6][7] 현역 시절의 인지도에서는 거인에 재적했던 형, 가즈마사에게 뒤떨어지지만, 통산 성적에서는 형을 능가하는 항목이 많다. 형제 모두 100홈런[8]에는 다카유키가 15개 부족했다.

'''다이에·소프트뱅크 호크스 시절 등번호'''

연도등번호
1974년 - 1975년 중도32
1975년 중도 - 1989년8


3. 은퇴 이후

고노 다카유키는 현역 은퇴 후 지도자와 해설가로 활동했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미국에서 야구 유학을 다녀왔으며, 1993년까지 친정팀 다이에에서 코치로 활동했다. 1994년에는 Sports-i 야구 해설위원을 맡았고, 1995년부터 1996년까지는 스포츠 아이 해설자로 활동했다. 1997년에는 다이에 호크스 2군 육성 코치를 역임했고, 2004년부터 2006년까지는 소프트뱅크 2군 외야 수비 주루 코치를 맡았다.

2007년부터는 프로 야구 독립 리그 팀인 나가사키 세인츠의 감독으로 취임했고,[15] 2009년부터 2010년까지는 간사이 독립 리그 기슈 레인저스[11], 2012년부터 2014년까지는 대한민국의 독립 프로 구단 고양 원더스의 코치를 역임했다. 2014년 11월 17일부터는 사회인 야구 카나플렉스의 제2대 감독으로 취임하여, 2020년부터는 야구부 GM으로 전향했다.

3. 1. 지도자 경력

1990년부터 1992년까지 미국에서 야구 유학 생활을 했고, 1993년까지 친정팀 다이에에서 코치로 활동했다.[15] 1994년에는 Sports-i 야구 해설위원을, 1997년에는 다이에 호크스 2군 육성 코치를 역임했다.[15] 2004년부터 2006년까지는 소프트뱅크 2군 외야 수비 주루 코치를 맡았다.[15]

2007년부터 나가사키 세인츠 감독으로 취임했다.[15] 2008년부터 나가사키 세인츠는 시코쿠 규슈 아일랜드 리그에 참가했는데, 같은 리그의 고치 파이팅독스 감독으로 사다오카 도모아키가 부임하면서 현역 시절 키스톤 콤비를 이뤘던 두 사람이 지도자로서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2008년 전기 시즌에는 선수층 부족으로 성적이 부진하여, 6월 말 감독직에서 해임되었다.[17]

2009년 신설된 간사이 독립 리그기슈 레인저스 코치로 발탁되어[18] 2010년 시즌까지 활동했고, 2012년부터는 대한민국의 독립 야구팀 고양 원더스 코치를 역임했다.[18]

2014년 11월 17일 사회인 야구 카나플렉스의 제2대 감독으로 취임했다. 세이부 라이온즈 등에서 외야수로 활약했던 야구부 고문(당시) 다카하시 후미오의 제안을 받은 것이다. 고노는 사회인 야구 선수 지도는 처음이었지만, 2015년 야구부 창단 2년 만에 코치로 전향한 다카하시와 함께 팀을 제41회 사회인 야구 일본 선수권 대회에 출전시켰다. 2020년부터는 야구부 GM으로 전향했다.

3. 2. 해설가 경력

1990년부터 1992년까지 미국에서 야구 유학 생활을 했고, 1994년에는 Sports-i 야구 해설위원을, 1995년부터 1996년까지 스포츠 아이 해설자를 맡았다.[15][9]

4. 상세 정보

고노 다카유키는 스포츠 가족에서 태어났지만, "敬幸"이라는 이름은 1500g의 미숙아로 태어나 생사를 넘나들었기 때문에 "그저 행복하게 살아줬으면 좋겠다"는 부모님의 소망에서 비롯되었다.[3]

고노 형제는 많은 활약을 한 형제 선수 중에서도 특히 실적이 뛰어나, 모두 1000경기 이상 출장, 4000타수, 1000개 이상의 안타를 기록했다. 이는 일본인 선수 중에서는 고노 형제뿐이다.[6][7] 형인 가즈마사는 거인에서 활약하여 인지도가 높았지만, 통산 성적에서는 다카유키가 형을 능가하는 항목이 많다. 다만, 형제 모두 100홈런[8]에는 다카유키가 15개 부족했다.

2014년 11월 17일, 고노는 사회인 야구 팀 카나플렉스의 제2대 감독으로 취임했다.[12] 이는 세이부 라이온즈 등에서 외야수로 활약했던 야구부 고문(당시) 다카하시 후미오의 제안으로 이루어졌다. 사회인 야구 선수 지도는 처음이었지만,[13] 2015년에는 코치로 전향한 다카하시와 함께 팀을 첫 전국 대회(제41회 사회인 야구 일본 선수권 대회) 출전으로 이끌었다.[14] 2020년부터는 야구부 GM으로 전향했다.

고노의 아들은 야나가와 고교(이후 조세이 대학에 진학) 야구부원으로, 2000년에 가즈키 료타 등과 함께 고시엔에 출전했다.

4. 1. 출신 학교

河野 貴之|고노 다카유키일본어는 야와타하마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4. 2. 선수 경력

고노 다카유키는 1973년 드래프트 3순위로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했다.[1] 1975년 시즌 도중 시마모토 고헤이의 이적으로 등번호 8번을 달게 되었고, 1976년부터 1군에 정착하여 유격수나 2루수로 선발 출장했다. 1977년에는 사쿠라이 테루히데를 대신하여 주전 2루수를 꿰찼고, 시즌 후반에는 유격수와 3루수를 겸하며 활약했다.

1978년에는 부상으로 늦게 출발했지만, 5월에 2루수로 복귀하여 첫 규정 타석을 채웠고, 리그 최다 희생타를 기록했다. 1979년에는 2루수로 주로 출전하며 개인 최다 도루를 기록했고, 타율 .300을 기록하며 사다오카 토모아키와 함께 키스톤 콤비를 이루었다.[4] 같은 해 올스타 게임에 형과 함께 출전하기도 했다.

1980년에는 부진했지만, 1981년에 2루수가 주 포지션이 되면서 타격감이 살아났다.[3] 1982년에는 처음으로 전 경기 출장하며 2루수로 활약했다.[3] 1983년에는 후지와라 미츠루의 은퇴로 리드오프 맨을 맡았고,[3] 15경기 연속 득점, 19경기 연속 안타, 9경기 연속 초구 선두 타자 안타를 기록하며 팀의 9경기 연속 초회 득점에 기여했다.[3]

1984년에는 제프 도일의 영입으로 중견수로 포지션을 변경했지만, 타율 .296을 기록하며 좋은 성적을 냈다. 멀티 안타 리그 2위, 안타 리그 3위를 기록했고, 1위는 부머 웰즈였다.[5] 1986년부터 2루수로 복귀했고,[1] 1987년에는 타율 .312를 기록했지만, 1988년부터 유가미야 히로시에게 밀려 1루수로 옮겨갔다. 1989년에는 윌리 업쇼의 입단으로 출장 기회가 줄어들었고, 같은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고노 다카유키는 견실한 수비와 승부 근성이 있는 타격으로 침체기 팀을 지탱했다. 1984년부터 1986년까지 콧수염을 길러 트레이드 마크가 되기도 했다.[6] 형인 고노 가즈마사보다 통산 성적에서 앞서는 항목이 많으며, 형제 모두 1000경기 이상 출장, 4000타수, 1000개 이상의 안타를 기록했다.[6][7]

; 첫 기록

  • 첫 출장: 1975년 9월 4일, 대 태평양 클럽 라이온즈 후기 9회전 (오사카 스타디움), 7회말에 노무라 가쓰야의 대주자로 출장
  • 첫 선발 출장: 1975년 9월 15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후기 13회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9번・유격수로 선발 출장
  • 첫 안타: 1975년 9월 17일, 대 롯데 오리온즈 후기 10회전 (오사카 스타디움), 5회말에 나리타 후미오로부터
  • 첫 홈런・첫 타점: 1976년 5월 28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전기 6회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5회초에 야마구치 다카시로부터 솔로


; 이정표 기록

  • 1000경기 출장: 1984년 8월 5일, 대 긴테쓰 버팔로스 17회전 (후지이데라 구장), 1번・중견수로 선발 출장 ※역대 249번째
  • 1000안타: 1985년 4월 9일, 대 긴테쓰 버팔로스 1회전 (오사카 스타디움), 6회말에 구보 야스오로부터 ※역대 139번째
  • 1500경기 출장: 1989년 5월 3일, 대 닛폰햄 파이터스 5회전 (헤이와다이 구장), 8회말에 후지모토 히로시의 대타로 출장 ※역대 92번째


; 기타 기록

  • 15경기 연속 득점: 1982년 4월 23일 - 5월 13일
  • 올스타전 출장: 4회 (1979년, 1981년, 1982년, 1984년)


연도소속팀경기수타수안타홈런타점도루타율
1975난카이
다이에
9101000.100
1976496113153.213
19771103308801910.267
19781073989832316.246
1979125496149135525.300
19801253999210498.231
19811254531234367.272
198213051914463311.277
1983126477123114416.258
1984130551163147617.296
1985108350838438.237
1986115369975224.263
1987108276865274.312
19881213691025189.276
198964102220133.216
통산:15년15525160138485463141.268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 난카이(난카이 호크스)는 1989년에 다이에(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구단명을 변경

4. 3. 지도자·기타 경력

고노 다카유키는 은퇴 후 지도자 및 기타 경력을 쌓았다.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타격 코치 (1990년 ~ 1993년)[9]
  • Sports-i 야구 해설위원 (1994년)[9]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2군 육성 코치 (1997년)[9]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군 외야 수비 주루 코치 (2004년 ~ 2006년)[9]
  • 나가사키 세인츠 감독 (2007년 ~ 2008년)[9]
  • 기슈 레인저스 코치 (2009년 ~ 2010년)[11]
  • 고양 원더스 코치 (2012년 ~ 2014년)[12]


1990년부터 1992년까지는 1A・샐리너스 스퍼스에 야구 유학을 다녀왔고,[9] 1995년부터 1996년까지 스포츠 아이해설자도 맡았다.[9]

소프트뱅크 퇴단 후 2007년부터 클럽 팀 나가사키 세인츠 감독에 취임했다.[9] 2008년부터 시코쿠・규슈 아일랜드 리그에 참가한 나가사키 세인츠는, 같은 리그의 고치 파이팅 독스 감독으로 사다오카 토모아키가 취임하면서 현역 시절 키스톤 콤비를 이뤘던 두 사람이 지도자로서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아일랜드 리그 참가 후 첫 시즌인 2008년 전반기에는 선수층 부족으로 성적이 부진하여, 전반기 종료 후 6월 말에 해임되었다.[10]

2009년부터 2010년까지는 간사이 독립 리그기슈 레인저스 코치를,[11] 2012년부터 2014년까지는 대한민국의 독립 프로 구단 고양 원더스의 코치를 역임했다.[12]

2014년 11월 17일 사회인 야구・카나플렉스의 제2대 감독에 취임했다.[12] 세이부 라이온즈 등에서 외야수로 활약했던 야구부 고문 (당시) 다카하시 후미오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고노는 사회인 야구 선수를 지도하는 것은 처음이었지만,[13] 야구부 창단 2년째인 2015년에 코치로 전향한 다카하시와 함께 팀을 첫 전국 대회 (제41회 사회인 야구 일본 선수권 대회) 출전으로 이끌었다.[14] 2020년부터는 야구부 GM으로 전향했다.

아들은 야나가와 고교 (이후 조세이 대학에 진학) 야구부원으로, 2000년에 가즈키 료타 등과 함께 고시엔 출전을 달성했다.

4. 4. 개인 기록

구분내용
첫 출장1975년 9월 4일, 대 태평양 클럽 라이온즈 후기 9회전 (오사카 스타디움), 7회말에 노무라 가쓰야의 대주자로 출장
첫 선발 출장1975년 9월 15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후기 13회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9번·유격수로 선발 출장
첫 안타1975년 9월 17일, 대 롯데 오리온즈 후기 10회전 (오사카 스타디움), 5회말에 나리타 후미오로부터
첫 홈런·첫 타점1976년 5월 28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전기 6회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5회초에 야마구치 다카시로부터 솔로
1000경기 출장1984년 8월 5일, 대 긴테쓰 버팔로스 17회전 (후지이데라 구장), 1번·중견수로 선발 출장 ※역대 249번째
1000안타1985년 4월 9일, 대 긴테쓰 버팔로스 1회전 (오사카 스타디움), 6회말에 구보 야스오로부터 ※역대 139번째
1500경기 출장1989년 5월 3일, 대 닛폰햄 파이터스 5회전 (헤이와다이 구장), 8회말에 후지모토 히로시의 대타로 출장 ※역대 92번째
15경기 연속 득점1982년 4월 23일 ~ 5월 13일
올스타전 출장4회 (1979년, 1981년, 1982년, 1984년)


4. 5. 등번호

河野 敬幸|고노 다카유키일본어의 등번호는 다음과 같다.

  • '''32''' (1974년 ~ 1975년 중도)
  • '''8''' (1975년 중도 ~ 1989년, 2008년)
  • '''78''' (1990년 ~ 1993년, 1997년, 2009년 ~ 2010년)
  • '''73''' (2004년 ~ 2006년)

참조

[1] 서적 "'86プロ野球選手写真名鑑" 日刊スポーツ出版社 1986-04
[2] 서적 プロ野球人名事典 2003 日外アソシエーツ 2003
[3] 웹사이트 週刊ベースボールONLINE|野球コラム 河埜敬幸 内外野を守ったタカのオールラウンドプレーヤー/プロ野球1980年代の名選手 https://column-sp-ba[...]
[4] 웹사이트 第49回 長崎・河埜敬幸「野球ノートで意識改革」 http://www.ninomiyas[...] Sports Communications 2008-03-04
[5] 간행물 週刊プロ野球データファイル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13
[6] 웹사이트 プロ野球2世代写真展 「野球一族」 いにしえ編 http://www.jiji.com/[...] 時事通信社
[7] 문서 外国人選手では[[レロン・リー]]、[[レオン・リー]]兄弟が達成。
[8] 문서 リー兄弟は達成。
[9] 웹사이트 第49回 長崎・河埜敬幸「野球ノートで意識改革」 http://www.ninomiyas[...] Sports Communications 2008-03-04
[10] 웹사이트 最下位・長崎、河埜監督、岡本コーチを解任 http://www.ninomiyas[...] Sports Communications 2008-06-26
[11] 웹사이트 第4回 紀州・河埜敬幸「走塁が後期を占う」 http://www.ninomiyas[...] Sports Communications 2009-07-28
[12] 웹사이트 元南海の河埜氏  社会人野球カナフレックス監督就任 https://web.archive.[...] スポーツニッポン 2014-12-03
[13] 웹사이트 元南海名手、滋賀に新天地 カナフレックス監督に河埜氏就任 http://www.kyoto-np.[...] 京都新聞 2015-04-14
[14] 웹사이트 日本新薬、カナフレックス出場 社会人野球日本選手権 http://www.kyoto-np.[...] 京都新聞 2015-10-28
[15] 웹인용 第49回 長崎・河埜敬幸「野球ノートで意識改革」 http://www.ninomiyas[...] 2012-01-17
[16] 웹인용 プロ野球2世代写真展 「野球一族」 いにしえ編 http://www.jiji.com/[...] 2012-01-17
[17] 웹인용 最下位・長崎、河埜監督、岡本コーチを解任 http://www.ninomiyas[...] 2012-01-17
[18] 웹인용 第4回 紀州・河埜敬幸「走塁が後期を占う」 http://www.ninomiyas[...] 2012-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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