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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도타 히로미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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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도타 히로미쓰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주로 외야수와 지명 타자로 활약했다. 1970년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하여 1988년까지 선수 생활을 했으며, 1981년과 1983년, 1988년에 홈런왕을 차지했다. 1988년에는 40세의 나이로 MVP를 수상하며 최고령 기록을 세웠고, 오릭스 브레이브스를 거쳐 1992년 다이에 호크스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야구 해설가로 활동했으며, 2006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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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도타 히로미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가도타 히로미쓰
원어 이름門田 博光 (일본어)
로마자 표기Hiromitsu Kadota
출생일1948년 2월 26일
사망일2023년 1월 23일 (향년 74세)
출생지오노다시, 일본
신장170cm
체중81kg
포지션외야수, 지명타자
투구/타석좌투/좌타
선수 경력
프로 입단 연도1969년
드래프트 순위2순위
첫 출장1970년 4월 12일
마지막 출장1992년 10월 1일
소속 구단난카이 호크스 (1970–1988)
오릭스 브레이브스 (1989–1990)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991–1992)
감독 경력
감독 경력오사카 호크스 드림 (2010 - 2011)
수상 및 기록
주요 수상1988년 퍼시픽 리그 MVP
명예의 전당 헌액2006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통산 성적타율: .289
홈런: 567개
안타: 2,566개
타점: 1,678점
기타 정보
별명(불혹의 대포)
사망 기사산케이 스포츠 - 門田博光さんが急死 74歳 プロ野球歴代3位の通算567本塁打
교도 통신 - 門田博光さんが死去
데일리 스포츠 - 門田博光氏が死去 74歳 40歳で本塁打、打点の2冠 「中年の星」
가도타 히로미쓰
가도타 히로미쓰

2. 프로 선수 경력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한 가도타는 1970년 개막부터 2번 타자 겸 우익수로 기용되어 53경기에 선발 출장하며 빠른 발, 강한 어깨, 뛰어난 타격을 갖춘 중거리 타자로 주목받았다. 1971년에는 주전으로 자리잡아 주로 3번 타자로 활약하며 타율 .300(리그 11위), 31홈런, 120타점을 기록하여 타점왕을 획득하고[13] 첫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또한, 강한 어깨를 바탕으로 같은 해 15개의 보살을 기록했다. 오 사다하루를 참고하여 타격 폼을 한 발 타법으로 바꾸었다.

1971년부터 노무라 가쓰야 감독이 해임된 1977년까지 7년간 5번의 타율 3할을 기록했다. 1973년에는 타율 .310(리그 5위), 18홈런을 기록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같은 해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일본 시리즈 3차전에서 호리우치 쓰네오에게 홈런을 쳤지만, 시리즈 통산 17타수 3안타에 그쳤다. 노무라 감독 시절에는 주로 3번 타자로 뛰며 중거리 타자로서의 성향이 강했다. 노무라 감독은 "내 앞에 주자로 나가기만 하면 된다. 홈런은 노리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하며 가도타가 크게 휘두르는 것을 제지했다고 한다.

노무라 감독 해임 후, 가도타는 장거리 타자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4번 타자로서 이전에는 사용이 허락되지 않았던 무거운 배트(1000g)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1978년에는 여름에 체력이 떨어져 타율 .250, 홈런 15개로 부진했지만[14], 이후 적응에 성공했다. 1976년 올스타전 2차전(고라쿠엔 구장)에서는 1회에 2점 홈런을 포함하여 5타수 4안타 2타점을 기록하며 MVP를 차지했다[15][16].

1979년 2월 16일, 고치현 오가타 구장에서 준비 운동 중 점프 후 착지 과정에서 오른쪽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부상을 입었다[17]. 피로 누적, 새로 신은 스파이크, 딱딱한 그라운드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거의 한 시즌을 통째로 결장했지만, 같은 해 9월 대타로 복귀했다. 당시 아킬레스건 파열은 완치까지 6개월이 걸려 현역 복귀가 어려운 부상이었지만, 가도타는 빠른 회복을 보였다.

1980년, 가도타는 어머니가 44세에 돌아가신 것을 기리기 위해 등번호를 "'''44'''"로 변경했다[18]. 이후 "홈런을 치면 발에 부담이 가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모든 타석에서 홈런을 노린다"[19]라며 장타를 노리는 타격에 집중했다. 같은 해 6월 25일 니폰햄 파이터스와의 경기(오사카 스타디움)에서 9회 1사 1, 2루 상황에서 대타의 대타로 출전, 상대 투수 스기야마 지타카에게서 대타 역전 사요나라 3점 홈런을 기록했다[20]. 이 해 41홈런을 기록하며 컴백상을 수상했다[21].

1981년 7월에는 월간 16홈런이라는 프로 야구 신기록(당시)을 세웠다[22]. 16번째 홈런은 같은 달 31일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경기(오사카 스타디움) 3회 무사 만루에서 스기모토 마사시에게서 뽑아낸 만루 홈런이었다[22]. 올스타전으로 인해 약 1주일간 공식 경기가 중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기록을 달성했다. 8월 22일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경기(조에쓰 시영 구장)에서는 마쓰누마 마사유키에게서 시즌 2번째 만루 홈런을[23], 같은 달 27일 롯데 오리온즈와의 경기(오사카 스타디움)에서는 3-3 동점인 9회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구라모치 아키라에게서 사요나라 홈런을 기록했다[24]. 이 해 44홈런으로 첫 홈런왕을 차지했다[25].

1983년에도 40홈런으로 홈런왕에 올랐다[26]. 같은 해 5월 24일 니폰햄 파이터스와의 경기(고라쿠엔 구장) 5회 1사 만루에서 가와하라 쇼지에게서[27], 같은 달 27일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경기(오사카 스타디움) 4회 1사 만루에서 구도 기미야스에게서 각각 만루 홈런을[28], 당시 투수였던 아이코 마사시 (롯데 오리온즈)에게서 2개의 만루 홈런을 뽑아내며 시즌 4번째 최다 만루 홈런의 퍼시픽 리그 타이기록을 세웠다[30]. 올스타전 1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는 1회에 마쓰오카 히로시, 6회에 니시모토 세이에게서 각각 홈런을 쳐 2홈런 3타점[31]으로 MVP에 선정되었다[32].

1985년 4월 14일, 니폰햄 파이터스와의 경기(오사카 스타디움) 7회에 사카마키 아키라에게서 통산 10번째[33] 만루 홈런을 기록했다[34]. 1987년 8월 26일,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경기(오사카 스타디움)에서 구도 기미야스에게서 좌중간 2루타를 쳐[35]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36][37]. 9월 1일 롯데 오리온즈와의 경기(오사카 스타디움)에서는 1점을 뒤쫓는 9회 무사 1루에서 우시지마 가즈히코에게서 역전 사요나라 2점 홈런을 쳤다[38].

1988년, 40세의 나이로 타율 .311, 44홈런, 125타점을 기록하며 홈런왕과 타점왕 2관왕을 차지하고[39][40] MVP에도 선정되었다[41][42]. 40대의 40홈런, 100타점, OPS 10할은 사상 최초의 기록(40대의 44홈런, 125타점, OPS 1.062는 역대 최고 기록)이며, 이 해를 마지막으로 사라진 난카이에서의 선수 생활을 화려하게 마무리했다. 40세 MVP 선정은 프로 야구 사상 최고령 기록이며, 40세를 의미하는 "'''불혹'''"이라는 말은 이 해의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35].

2. 1. 입단 전

가도타 히로미쓰는 야마구치현 오노다시에서 5형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가도타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무역 관련 사업에 실패하여 온 가족이 나라시로 이사하여 검소한 가정에서 자랐다[7]。 덴리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야구부에 입부했다. 4번 타자, 중견수로서 동기인 에이스 토야마 요시아키와 함께 활약했다.

1965년 여름 고시엔 현 예선 결승에 진출, 시라타키 마사타카 투수가 있던 고리야마 고등학교를 2-0으로 꺾었다. 이어 기와 대회 결승에서도 현 와카야마 상업을 3-1로 꺾고 고시엔에 출장했다. 1회전에서 마루코 실에 9회에 역전패하여 1-3으로 패퇴했다. 고등학교 시절 3년 동안 홈런은 한 개도 치지 못했다.

졸업 후에는 토야마와 함께 사회인 야구팀인 쿠라레 오카야마 경식 야구부에 입단한다. 취직한 구라시키 레이온 오카야마 공장에서는 신발 제조 업무에 종사했으며, 월수입은 15000JPY이었다[8]

1966년부터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4년 연속 출장했다. 1968년 도시 대항에 3번 타자, 우익수로 출장했다. 1회전에서 전년도 우승팀 일본 석유에 대패했지만, 상대 에이스 미우라 겐지로부터 2안타를 쳐내 호타자로 주목받았다[9]

같은 해 드래프트에서 한큐 브레이브스로부터 12위 지명을 받았지만, 이를 거부했다[10]

1969년 드래프트에서 난카이 호크스로부터 2위 지명을 받아 프로에 입단했다[11]

2. 2. 난카이 호크스 시절 (1970-1988)

1970년, 개막부터 2번 타자, 우익수로 기용되어 53경기에 선발 출장하며 준족·강견·호타의 중거리 타자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1971년에는 주전으로 정착, 주로 3번 타자로서 타율.300(리그 11위), 31홈런, 120타점을 기록하여 타점왕을 획득하고[13], 첫 베스트 나인에 선출되었다. 강한 어깨로도 알려져 같은 해에 15개의 보살을 기록했다. 또한 타격 폼을 오 사다하루를 참고한 한 발 타법으로 개조했다.

프로 입단 2년째인 1971년부터 노무라 가쓰야 감독 해임의 해인 1977년까지 7년간 5번의 타율 3할을 기록했다. 1973년에는 타율 .310(리그 5위), 18홈런의 성적으로 리그 우승에 공헌했다. 같은 해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일본 시리즈 3차전에 호리우치 쓰네오에게서 홈런을 쳐, 시리즈 통산 17타수 3안타를 기록했다. 노무라 감독 시대에는 주로 3번 타자로 활약, 중거리 타자로서의 성격이 짙었지만, 4번 타자 겸 감독인 노무라로부터 "내 앞에 주자로 나가기만 하면 돼. 그게 네 일이야. 홈런 같은 건 노리지 않아도 돼"라는 말을 들었고, 크게 휘두르면 혼났다고 한다.

노무라의 감독 해임으로 그 속박에서 풀려나 장거리 타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4번 타자로서, 그때까지 사용하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던 무거운 배트(1000g)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첫 해(1978년)에는 여름이 되자 기력이 떨어져 휘두를 수 없게 되어 타율 .250, 홈런 15개로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지만[14], 이후에는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

1976년, 올스타전 2차전(고라쿠엔 구장)에서는 1회에 날린 2점 홈런을 포함한 5타수 4안타 2타점의 성적[15]으로 MVP에 선정되었다[16].

1979년 2월 16일, 캠프지인 오가타 구장(고치현)에서 준비 운동으로 점프를 하고 착지했을 때 오른쪽 발의 아킬레스건이 끊어졌다[17]. 피로 누적, 이날부터 신은 새 스파이크, "너무 굳다"고 많은 선수나 평론가가 우려했던 그라운드 등, 다양한 요인이 있는 가운데 일어난 일이었다. 거의 한 시즌을 통째로 날렸지만, 같은 해 9월 대타로 복귀했다. 아킬레스건 파열은 완치까지 6개월이 걸려 당시로서는 통상적으로 현역 복귀 자체가 어려웠지만, 빠른 복귀를 이뤄냈다.

1980년, 등번호를 어머니가 44세에 돌아가신 것에 연유하여 "'''44'''"로 변경했다[18]. 이 해 이후, "홈런을 치면 발에 부담이 가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모든 타석 홈런을 노린다"[19]며 장타를 노리는 타격에 전념했다. 같은 해 6월 25일 니폰햄 파이터스전(오사카 스타디움)에서는 1점을 쫓는 9회 1사 1·2루 상황에서 아라이 히로마사 대신 사쿠라이 테루히데가 대타로 나가자, 니폰햄은 키다 이사무에서 스기야마 지타카로 투수를 교체했다. 가도타는 대타의 대타로 출전, 스기야마에게서 대타 역전 사요나라 3점 홈런을 날렸다[20]. 시즌에서는 41홈런을 기록하며 컴백상을 수상했다[21].

1981년 7월에는 월간 16홈런의 프로 야구 신기록(당시)을 세웠다[22]. 16번째 홈런은 같은 달 31일 대 세이부전(오사카 스타디움) 3회 무사 만루 타석에서 스기모토 마사시에게서 날린 만루 홈런이었다[22]. 7월은 올스타전으로 인해 약 1주일간 공식전이 중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기록을 달성했다. 8월 22일 대 세이부 라이온스전(조에쓰 시영 구장)에서는 마쓰누마 마사유키에게서 시즌 2번째 만루 홈런[23], 같은 달 27일 대 롯데 오리온즈전(오사카 스타디움)에서는 3-3 동점인 9회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구라모치 아키라에게서 사요나라 홈런을 날렸다[24]. 시즌 44홈런으로 첫 홈런왕을 획득했다[25].

1983년에도 40홈런으로 홈런왕에 올랐다[26]. 같은 해 5월 24일 대 니폰햄전(고라쿠엔 구장) 5회 1사 만루 타석에서 가와하라 쇼지에게서[27], 같은 달 27일 대 세이부전(오사카 스타디움) 4회 1사 만루 타석에서 구도 기미야스에게서 각각 만루 홈런[28], 당시 투수였던 아이코 마사시 (롯데)에게서 2개의 만루 홈런을 쳐내며 시즌 4번째 최다 만루 홈런의 퍼시픽 리그 타이기록을 세웠다[30]. 올스타전 1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는 1회에 마쓰오카 히로시, 6회에 니시모토 세이에게서 각각 홈런을 날려 2홈런 3타점[31]으로 MVP에 선정되었다[32].

1985년 4월 14일, 대 니폰햄전(오사카 스타디움) 7회에 사카마키 아키라에게서 통산 10번째[33] 만루 홈런을 기록했다[34].

1987년 8월 26일, 대 세이부전(오사카 스타디움)에서 구도 기미야스에게서 좌중간 2루타를 날려[35],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36][37]. 9월 1일 대 롯데전(오사카 스타디움)에서는 1점을 뒤쫓는 9회 무사 1루 타석에서 우시지마 가즈히코에게서 역전 사요나라 2점 홈런을 쳤다[38].

1988년에는 40세의 나이로 타율 .311, 44홈런, 125타점을 기록, 홈런왕과 타점왕 2관왕을 차지하고[39][40], MVP에도 선정되었다[41][42]. 40대의 40홈런, 100타점, OPS 10할은 사상 최초(40대의 44홈런, 125타점, OPS 1.062는 역대 최고 기록)이며, 이 해를 마지막으로 사라진 난카이에서의 선수 생활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40세 MVP 선정은 프로 야구 사상 최고령 기록이며, 40세를 의미하는 "'''불혹'''"이라는 말은 이 해의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35].

3. 은퇴 이후

1993년부터 2005년까지 아사히 방송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65] 2010년에는 고베 나인 크루즈 2군 감독과 오사카 호크스 드림 감독을 역임했다. 말년에는 효고현 아코군 가미고리정의 회원제 별장지에 있는 자택에서 혼자 은거 생활을 했지만, 당뇨병 등의 영향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아이오이시의 병원에서 이틀에 한 번 인공 투석을 받는 등 요양 생활을 계속했다.[65][66]

2023년 1월 23일, 예정되었던 통원 치료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아, 다음 날인 1월 24일에 의사로부터 상담을 받고 자택을 방문한 경찰관에 의해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4][5]

4. 주요 기록 및 타이틀

가도타 히로미쓰는 홈런에 대한 강한 집착과 자신만의 타격 철학을 가졌던 선수였다. "홈런이 잘못 맞은 것이 히트", "홈런을 노리는 것을 그만두면 4할을 칠 수 있다"는 그의 말에서 장타에 대한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67]

그는 큰 숫자의 등번호를 선호했는데, 1980년에는 행크 애런을 따라 44번을 달고 44홈런을 목표로 해 홈런왕을 차지했고, 이후에는 60홈런을 목표로 등번호를 60번으로 변경하기도 했다.[69] 또한 "빠른 공을 무거운 배트로 칠 수 있다면, 느린 공도 대응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34인치 반, 1000g의 특대 배트를 사용했다.[71][72]

; 기록


  • 통산 567홈런 (역대 3위)
  • 통산 1678타점 (역대 6위)
  • 통산 2566안타 (최다 안타 타이틀 없이 달성한 역대 최다 안타)
  • 통산 4688루타 (리그 최다 루타 없이 달성한 역대 최다 루타)
  • 월간 홈런 16개 (1981년 7월) : 퍼시픽 리그 기록[139]
  • 시즌 만루 홈런 4개 (1983년) : 퍼시픽 리그 타이기록[30]
  • 2경기 연속 끝내기 홈런 (1990년 9월 9일 ~ 10일) : 역대 6번째, 퍼시픽 리그 최초[50][51]
  • 1경기 5사사구 (1988년 5월 27일) : 퍼시픽 리그 타이기록
  • 외야수 1경기 10 수비 기회, 1경기 10보살 (1973년 6월 10일) : 퍼시픽 리그 타이기록
  • 동일 구장(오사카 스타디움) 1000안타
  • 첫 출장·첫 선발 출장: 1970년 4월 12일, 롯데 오리온스와의 1차전 (도쿄 스타디움), 2번·우익수로 선발 출장
  • 첫 안타: 상동, 4회 초에 기타루 마사아키를 상대로
  • 첫 타점: 1970년 4월 26일, 도에이 플라이어스와의 2차전 (고라쿠엔 구장), 4회 초에 대타로 출전하여 미야자키 쇼지를 상대로 좌전 적시타[115]
  • 첫 홈런: 1970년 5월 13일, 도에이 플라이어스와의 4차전 (오사카 스타디움), 2회 말에 다카하시 나오키를 상대로[116]


; 타이틀 및 수상

타이틀횟수연도수상
홈런왕31981년, 1983년, 1988년MVP: 1회(1988년)[42]
타점왕21971년, 1988년쇼리키 마쓰타로상: 1회(1988년)[109]
최고 출루율31981년, 1987년, 1988년베스트 나인: 7회(1971년, 1976년, 1977년, 1981년, 1983년, 1988년, 1989년)
colspan="3" |컴백상: 1회(1980년)[21]
colspan="3" |월간 MVP: 3회(1981년 7월[110], 1988년 5월[111], 1989년 5월[112])
colspan="3" |올스타전 MVP: 2회(1976년 2차전[16], 1983년 1차전[32])
colspan="3"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2006년)[63]
colspan="3" |일본 프로 스포츠 대상 수훈상: 1회 (1988년) [113]
colspan="3" |호치 프로 스포츠 대상: 1회 (1988년)
colspan="3" |산스포 MVP 대상: 1회 (1988년[114])


4. 1. 통산 기록

연도소속경기타석타수득점안타2루타3루타홈런루타타점도루도루사희생번트희생플라이볼넷고의사구사구삼진병살타타율출루율장타율OPS
1970난카이792462322758121896312102903392.250.285.414.698
1971129558506701522413127112053163827588.300.354.536.889
197212552947573147242142175843154513379.309.369.457.826
1973127530484661502611823265350240144310.310.366.479.845
1974124487432621162342722876120747615910.269.337.528.865
197512955048572136292192268561155554498.280.355.466.821
1976125522456641372542223677210105472518.300.370.518.887
197712854347971150220252479155085254723.313.379.516.895
19781064063603790130151484432143734594.250.323.411.735
197919635451520223170001800150.278.365.426.791
198011143037760110100412438400024893727.292.374.6451.019
19811275374388313718044287105411492827010.3134316551.086
198210739233342911701916545610452113636.273.372.495.868
1983122487396681161414025296110285204866.293.4216361.057
1984108444362601031103020478310575202751.285.405.564.969
198511446638363104122231896200047881889.272.393.493.886
19861234794165110914025198772310571251017.262.358.476.834
1987126458379631201603122969110374242665.317428.6041.032
1988130557447821391204428312521010982028213.3114296331.062
1989오릭스1164894067012417133242930203783210312.305.417.5961.013
19901195274467712521031239910102787111811.280.387.536.923
1991다이에11242536738971501816666100354717710.264.358.452.810
1992651791551540607672300031932375.258.341.432.773
통산: 23년257110304886813192566383195674688167851356951273182621520164.289.379.529.907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
  • 난카이(난카이 호크스)는 1989년 다이에(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구단명을 변경


; 외야 수비

연도구단외야
경기자살보살실책병살수비율
1970난카이72151520.987
19711292611544.986
19721252941036.990
19731262661450.982
1974120283911.997
19751262961011.997
1976125258812.996
19771283121134.991
197846103411.991
198210000.000
1986330001.000
19873051120.963
1989오릭스5169441.948
199030000.000
통산10852347912720.989



== 기록 ==

=== 첫 기록 ===


  • 첫 출장·첫 선발 출장: 1970년 4월 12일, 롯데 오리온스와의 1차전 (도쿄 스타디움), 2번·우익수로 선발 출장
  • 첫 안타: 상동, 4회 초에 기타루 마사아키를 상대로
  • 첫 타점: 1970년 4월 26일, 도에이 플라이어스와의 2차전 (고라쿠엔 구장), 4회 초에 대타로 출전하여 미야자키 쇼지를 상대로 좌전 적시타[115]
  • 첫 홈런: 1970년 5월 13일, 도에이 플라이어스와의 4차전 (오사카 스타디움), 2회 말에 다카하시 나오키를 상대로[116]


=== 주요 기록 ===

  • 100홈런: 1975년 5월 11일,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전기 6차전 (오사카 스타디움), 9회 말에 다케무라 가즈요시를 상대로 2점 홈런 ※역대 82번째
  • 150홈런: 1977년 5월 29일, 니혼햄 파이터스와의 전기 12차전 (아오모리시영 야구장), 4회 초에 노무라 오사무를 상대로 2점 홈런 ※역대 48번째
  • 1000안타: 1977년 8월 13일,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후기 6차전 (오사카 스타디움), 4회 말에 사토 요시노리를 상대로 투수 강습 유격수 내야 안타 ※역대 103번째
  • 1000경기 출장: 1978년 5월 11일,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와의 전기 9차전 (헤이와다이 구장), 3번·우익수로 선발 출장 ※역대 200번째[117]
  • 200홈런: 1980년 6월 27일,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전기 11차전 (세이부 라이온즈 구장), 4회 초에 마쓰누마 히로히사를 상대로 솔로 홈런 ※역대 34번째[118]
  • 250홈런: 1981년 8월 1일,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후기 5차전 (오사카 스타디움), 6회 말에 시바타 야스미쓰를 상대로 2점 홈런 ※역대 19번째[119]
  • 1500안타: 1983년 5월 17일, 킨테츠 버팔로스와의 7차전 (오사카 스타디움), 4회 말에 스즈키 게이지를 상대로 동점 솔로 홈런 ※역대 47번째
  • 300홈런: 1983년 6월 22일,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10차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3회 초에 야마오카 유키히코를 상대로 2점 홈런 ※역대 15번째[116]
  • 1500경기 출장: 1983년 7월 12일, 롯데 오리온스와의 14차전 (가와사키 구장), 4번·지명 타자로 선발 출장 ※역대 75번째[121]
  • 1000타점: 1984년 4월 6일,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1차전 (오사카 스타디움), 9회 말에 사토 요시노리를 상대로 우전 적시타 ※역대 17번째[122]
  • 350홈런: 1984년 8월 26일, 니혼햄 파이터스와의 24차전 (헤이와다이 구장), 2회 초에 다카하시 사토시를 상대로 좌중간 2점 홈런 ※역대 12번째[123]
  • 3000루타: 1986년 6월 13일, 니혼햄 파이터스와의 11차전 (오사카 스타디움), 6회 말에 키타 이사무를 상대로 중전 안타 ※역대 25번째
  • 1000삼진: 1986년 8월 19일, 니혼햄 파이터스와의 19차전 (오사카 스타디움), 8회 말에 다나카 유키오를 상대로 ※역대 12번째[124]
  • 400홈런: 1986년 10월 2일, 킨테츠 버팔로스와의 25차전 (후지이데라 구장), 5회 초에 오노 가즈요시를 상대로 우중간 2점 홈런 ※역대 10번째[125]
  • 3500루타: 1987년 4월 25일, 킨테츠 버팔로스와의 2차전 (오사카 스타디움), 4회 말에 아와노 히데유키를 상대로 좌중간 솔로 홈런 ※역대 15번째[126]
  • 3002루타: 1987년 5월 2일, 롯데 오리온스와의 4차전 (가와사키 구장), 6회 초에 사토 마사오를 상대로 좌중간 2루타 ※역대 27번째[127]
  • 1000득점: 1987년 6월 16일, 니혼햄 파이터스와의 9차전 (군마현립 시키시마 공원 야구장), 7회 초에 가토 에이지의 3점 홈런으로 득점 ※역대 21번째[128]
  • 2000안타: 1987년 8월 26일,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18차전 (오사카 스타디움), 3회 말에 구도 기미야스를 상대로 좌중간 2루타 ※역대 24번째[37]
  • 2000경기 출장: 1987년 9월 8일,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20차전 (세이부 라이온즈 구장), 4번·지명 타자로 선발 출장 ※역대 24번째[129]
  • 450홈런: 1988년 6월 12일, 킨테츠 버팔로스와의 9차전 (니가타시영 도야노 야구장), 2회 말에 가토 데쓰로를 상대로 중월 2점 홈런 ※역대 9번째[130]
  • 4000루타: 1989년 4월 26일, 롯데 오리온스와의 5차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7회 말에 세키 기요카즈를 상대로 좌월 솔로 홈런 ※역대 10번째[131]
  • 500홈런: 1989년 8월 15일, 킨테츠 버팔로스와의 15차전 (후지이데라 구장), 3회 초에 오노 가즈요시를 상대로 우중간 솔로 홈런 ※역대 6번째[132]
  • 1500타점: 1990년 4월 10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의 1차전 (그린 스타디움 고베), 1회 말에 야마우치 다카노리를 상대로 역전 2점 홈런 ※역대 6번째[115]
  • 3502루타: 1990년 6월 10일,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8차전 (세이부 라이온즈 구장), 7회 초에 구로하라 유지를 상대로 우중간 2루타 ※역대 18번째[133]
  • 4500루타: 1991년 5월 28일,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6차전 (기타큐슈 시민 구장), 3회 말에 와타나베 도모오를 상대로 1루 강습 내야 안타 ※역대 4번째[134]
  • 550홈런: 1991년 6월 7일, 니혼햄 파이터스와의 9차전 (헤이와다이 구장), 1회 말에 스미 가네오를 상대로 선제 2점 홈런 ※역대 3번째[135]
  • 2500안타: 1991년 8월 7일, 니혼햄 파이터스와의 19차전 (헤이와다이 구장), 5회 말에 스미 가네오를 상대로 역전 결승 2점 적시타 ※역대 6번째[136]
  • 2500경기 출장: 1991년 9월 23일, 오릭스 블루웨이브와의 25차전 (헤이와다이 구장), 4번·지명 타자로 선발 출장 ※역대 5번째[137]
  • 1500삼진: 1992년 5월 28일,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8차전 (헤이와다이 구장), 4회 말에 와타나베 도모오를 상대로 ※역대 2번째[138]


=== 기타 기록 ===

  • 월간 홈런 16개: 1981년 7월 ※퍼시픽 리그 기록[139]
  • 시즌 만루 홈런: 4개 (1983년) ※퍼시픽 리그 타이기록[30]
  • 5경기 연속 홈런: 2회 (1981년 7월 1일 - 7일, 1981년 7월 9일 - 12일)[22]
  • 2경기 연속 끝내기 홈런 ※역대 6번째 (퍼시픽 리그 사상 최초)
  • 1990년 9월 9일,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24차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9회 말에 시카토리 요시타카를 상대로 백스크린 우측에 역전 끝내기 만루 홈런[50]
  • 1990년 9월 10일,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25차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9회 말에 와타나베 도모오를 상대로 좌월 끝내기 솔로 홈런[51]
  • 1경기 5사사구: 1988년 5월 27일,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9차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퍼시픽 리그 타이기록
  • 1경기 10 수비 기회·1경기 10보살: 1973년 6월 10일, 니타쿠 홈 플라이어스와의 전기 10차전 (고라쿠엔 구장) ※모두 외야수로서의 퍼시픽 리그 타이기록
  • 동일 구장에서 1000안타 (오사카 스타디움)
  • 올스타전 출장: 14회 (1972년, 1975년 - 1977년, 1980년 - 1984년, 1987년 - 1991년)
  • 최다 안타 없이 통산 2566안타 ※역대 최다
  • 리그 최다 루타 없이 통산 4688루타 ※역대 최다

4. 2. 타이틀

타이틀횟수연도
홈런왕31981년, 1983년, 1988년
타점왕21971년, 1988년
최고 출루율31981년, 1987년, 1988년


  • 홈런왕: 3회 (1981년[25], 1983년[26], 1988년[40]) ※퍼시픽 리그 좌타자 최다 타이기록 (다른 선수로는 타피 로즈, 랄프 브라이언트)
  • 타점왕: 2회 (1971년[13], 1988년[40]) ※17년의 공백 후 수상은 해당 상 역사상 최장 기록
  • 최고 출루율: 3회 (1981년[25], 1987년[108], 1988년[40])

4. 3. 수상

수상 경력


5. 평가 및 논란

가도타는 1971년 31홈런 120타점으로 타점왕을 차지한 후 강한 스윙을 고집했다. 노무라 가쓰야 감독과 오 사다하루는 "히트를 치는 것이 기본이고, 그 연장이 홈런"이라며 설득했지만, 가도타는 "감독님도 오 사다하루 씨도 홈런을 노리고 큰 스윙을 하고 있습니다"라며 반론했다[67]. 가도타는 "홈런이 잘못 맞은 것이 히트", "홈런을 노리는 것을 그만두면 4할을 칠 수 있다"라고 말할 정도로 장타에 집착했다.[68]

풀 스윙에 대해 가도타는 "가볍게 쳐서 홈런을 치려면 얼마나 걸리는지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며, "몇 만 번, 몇십만 번 휘두르기 때문에" 가볍게 치는 것처럼 보인다고 설명했다. 또한 "아침 꼬끼오 소리부터 시간을 잊고 배트를 휘둘렀다"며 노력을 강조했다. 2006년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인터뷰에서도 "(상체를) 비틀고 비틀어 팡! 하고 치는 선수가 요즘 적다"며 아쉬워했다.

가도타는 큰 등번호를 선호했다. 1980년부터 사용한 '''44'''번은 어머니를 기리는 의미였다[69]. 1981년 44홈런으로 홈런왕을 차지하자, 60개를 목표로 '''60'''번으로 변경했다.

1988년 홈런왕과 타점왕을 획득한 후 아베 조지와 인터뷰에서 "지난 7, 8년 동안, 어떤 구장에서도 장외 홈런을 치겠다는 기력으로 해낼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1989년 33홈런을 쳤을 때는 "거의 다 빗맞은 것"이었지만, "장외"를 의식해 온 결과라고 했다[70].

배트에 대해 "빠른 공을 무거운 배트로 칠 수 있다면, 느린 공도 대응할 수 있다"라고 생각했으며, 길이 34인치 반, 무게 1000g의 특대 배트를 사용했다[71][72]

2019년 미즈노 통일구 논란 속에서 가도타는 투수들의 실투 증가, 투수 레벨 저하를 지적했다. 그는 "시즌 내내 가운데 스트레이트만 노릴 수 있다면, 프로에서도 상당한 숫자는 남는다"라고 말했다. 또한 구장 크기에 맞춘 배팅은 장기적으로 힘이 떨어진다고 주장했다[73][74][75][76]

5. 1. 긍정적 평가

가도타는 아킬레스건 파열 후 지명 타자로 기용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미 파열 전인 1978년에도 지명 타자로 가장 많이 출전했다. 그럼에도 우익수 수비 능력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도 있었다. 1970년대 전반 중견수였던 히로세 노리타카는 자신의 저서에서 "가도타는 수비 범위도 결코 좁지 않고, 우중간 플라이도 처리했으며,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를 들은 기억은 거의 없다", "글러브를 부드럽게 사용한 포구도 능숙했지만 어깨가 강해서 종종 홈에서 상대 주자를 잡았다", "타격과 달리 무작정 빠른 공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움직임을 억제하고 빠르고 정확하게 원 바운드 송구를 했다"고 평가했다[81]。 또한, 시즌 두 자릿수 보살을 5번(1971년-1973년, 1975년, 1977년) 기록했다[82]

노무라 가쓰야는 가도타를 발탁하여 3번 타자로 기용했으며, "엄청난 노력가"라고 평가했다. 2년 차에 타점왕을 획득했을 때, 사비로 가도타에게 100만 엔짜리 시계를 선물하고, 자신의 후계자이자 다음 4번 타자로서 기대했다. 가도타도 따라야 할 부분에서는 따랐다고 하며[87], "사쿠라이와 라이트의 가도타는 10년 동안 부동으로 갈 수 있다'라고 노무라에게 들어서, 신뢰가 두터워서 도움이 되었다"라고 말했다[83]

노무라가 3000경기 출장 기념 기록을 세운 경기(1980년 8월 1일 세이부-난카이전)에서 가도타는 "이런 때에 노무라 씨에게 은혜를 갚고 싶다"라고 말하며, 포수 마스크를 쓴 세이부의 노무라 앞에서 특대 홈런을 2타석 연속으로 쳤다. 3번째 타석에 들어선 가도타에게 노무라가 "이제 알았으니, 적당히 해라"라고 하자, "2루타로 끝내주었다"라고 한다[88]

노무라의 부고 소식에, 가도타는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그 전 해(2019년) 도쿄에서 열린 회합 자리였다고 한다. 이미 휠체어 모습이었던 노무라는 "타격을 끝까지 추구하는 가도타 정도의 야구 바보는, 이제 두 번 다시 나오지 않겠지"라고 가도타를 인정해 주었다고 한다[90]

5. 2. 부정적 평가 및 논란

돈 브레이저는 가도타 히로미쓰에게 1주일 동안 번트 연습을 시켰지만, 가도타는 번트에 능숙해지지 못했다. 결국 브레이저는 포기했고, 가도타는 3번 타순을 맡게 되었다.

가도타는 1970년 경기 중 오른쪽 어깨가 탈구된 이후, 탈구벽을 앓았다. 주간 베이스볼의 사토 미치로 추도 칼럼에 따르면, 1973년 하와이에서 서핑을 하다 바다에 빠진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웨이트 트레이닝을 시작했다고 한다.[1]

1984년 4월 14일, 일본 햄 파이터스와의 경기에서 홈런을 치고 하이파이브를 하다가 오른쪽 어깨가 다시 탈구되었다. 이후 난카이 호크스에서는 가도타와의 강한 터치가 금지되었다.[2]

오릭스 버팔로즈 이적 후인 1989년 9월 25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홈런을 치고 부머 웰스와 하이파이브를 하다가 또 오른팔이 탈구되었다. 이로 인해 약 1주일간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가도타의 부상은 오릭스에게 타격이 되었고, 오릭스의 첫 우승은 1995년까지 미뤄졌다.[3]

6. 기타

1980년 오프 시즌에 난카이 호크스의 가도타와 한신 타이거스가케후 마사유키의 트레이드가 스포츠닛폰에 보도되었다.[93][94] 구단 사무실에 항의가 쇄도하여 이야기는 무산되었지만, 가도타 본인은 후에 "트레이드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다"고 밝혔다.[95][96] 1979년 오프 시즌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트레이드 이야기도 있었지만, 나카시마 시게오 감독이 사임하면서 무산되었다.[97] 아나부키 요시오 감독도 가도타와 야마모토 카즈유키의 트레이드를 한신에 타진했지만, 안도 모토오 감독이 거절하여 무산되었다.[98]

야구뿐만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왼손잡이지만, 펜은 오른손으로 잡는다.[107] 유화는 왼손으로 그린다. 은퇴 후에는 히로시마시의 오코노미무라에 히로시마풍 오코노미야키 가게를 낸 적이 있다.

취미는 도예, 유화, 사경 등이다. 도예는 야구와 통하는 점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은퇴 후에는 그 취미를 모두 그만두었다고 한다.[99]

과거 동료들에 따르면, 현역 시절 자율 훈련으로 대만을 방문했을 때, 물 대신 맥주를 마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부터, 아침부터 물 대신 맥주를 마시는 습관이 생겼을 것이라고 한다. 현역 말기 이후의 당뇨병이나 고혈압 등으로 인한 컨디션 불량으로 이어진다는 견해도 있다.[99] 현역 은퇴 후에 당뇨병에 의한 발의 괴저가 진행되어 발의 일부 손가락 절제 수술을 받았다.[99]

현역 은퇴 후 1993년 1월 26일 방송된 텔레비전 드라마 "호텔 닥터"에 라면 포장마차 주인 역으로 출연했다. ABC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했을 때, "웃는 세일즈맨"의 모구로 후쿠조 흉내를 내기도 했다. 개인기로는 야마시타 키요시의 흉내도 선보였다.

2007년 8월 "난데!?"(TV 아사히)에 마이노우미 슈헤이(스모), 시무라 유히코(농구)와 함께 출연. "고등학교 시절 3년 동안 홈런을 한 번도 치지 못했다" 등의 에피소드를 밝혔다.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다. 아킬레스건 파열 후 복귀한 1980년에 올스타전 출전을 실현하고, 니시노미야 구장에서 가족 앞에서 홈런을 쳤다.

호크스의 후쿠오카 이전에 가도타가 간사이의 다른 구단으로의 이적을 신청한 것에 대해, 구단·야구계 관계자들은 "아이를 사랑하는 가도타라면 어쩔 수 없지"라며 납득하는 부분도 있었다. 그 후, 딸의 고등학교 진학 시기에 단신 부임이 가능해져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이적했다. 부인과는 은퇴 후에 이혼했으며, 만년에는 장남, 장녀와도 떨어져 단신으로 은거 생활을 보냈다.[99]

참조

[1] 뉴스 この冬一番の寒気 各地の状況 https://www3.nhk.or.[...]
[2] 웹사이트 門田博光さんが急死 74歳 プロ野球歴代3位の通算567本塁打 https://www.sanspo.c[...] 2023-09-16
[3] 웹사이트 門田博光さんが死去 | 共同通信 https://web.archive.[...] 2023-09-16
[4] 웹사이트 門田博光さんが急死 74歳 プロ野球歴代3位の通算567本塁打 https://www.sanspo.c[...] 産経デジタル 2023-01-24
[5] 웹사이트 門田博光さんが死去 https://nordot.app/9[...] 共同通信 2023-01-24
[6] 뉴스 門田博光氏が死去 74歳 40歳で本塁打、打点の2冠 「中年の星」 https://www.daily.co[...] 株式会社デイリースポーツ 2023-01-24
[7] 간행물 傷だらけの野アザミ 打席に咲けない南海の主砲 門田博光 毎日新聞社
[8] 뉴스 門田博光さんの知られざる社会人時代「靴を作る仕事をしていました」 同級生プロOBが追悼 https://www.tokyo-sp[...] 2023-12-10
[9] 서적 都市対抗野球大会60年史 日本野球連盟, 毎日新聞社
[10] 문서 『本塁打一閃』
[11] 웹사이트 激白 門田博光「関西パ・リーグ漢塾」 https://friday.kodan[...] FRIDAYデジタル 2021-06-23
[12] 서적 ホークス75年史―南海、ダイエー、ソフトバンクー継承される栄光の歴史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13] 뉴스 パ・リーグも全日程終了 首位打者江藤、初の両リーグ獲得 本塁打王・大杉 打点の門田も逃げ切る
[14] 서적 門田博光の本塁打一閃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15] 뉴스 王さまさま!! 門田博、もらったバットで4安打も
[16] 뉴스 第2戦の表彰選手
[17] 뉴스 南海 主砲・門田けが アキレスケン切る 全治二ヵ月、前期絶望
[18] 간행물 球界の記念日にタイムスリップ あの日、あのとき、あの場所で
[19] 서적 私が見た最高の選手、最低の選手 東邦出版
[20] 뉴스 門田、代打サヨナラ3ラン
[21] 뉴스 門田カムバック賞
[22] 뉴스 門田が月間本塁打新 16本、堂々と満塁で飾る
[23] 뉴스 田淵、場外2ラン 西武逃げ込む
[24] 뉴스 単独トップ逃がす ロッテ 門田にサヨナラ食う
[25] 뉴스 パ・リーグ 全日程終了 7日から"日・ロ決戦"
[26] 뉴스 セ・パ公式戦 全日程を終了 山本浩、大島 セ 本塁打王 パ 単独で門田 原、打点とV打の"二冠" 首位打者に真弓 落合は3年連続 最多勝利は東尾、山内和
[27] 뉴스 満塁ホーマーの応酬
[28] 뉴스 レオに強い南海 門田、とどめの満塁アーチ
[29] 뉴스 門田が満塁アーチ 今季3本目
[30] 뉴스 主砲、満塁アーチ応酬 門田はパ新の今季4本目
[31] 뉴스 アーチ合戦 全パが制す 門田2発でMVP ミスター赤ヘルも負けじ
[32] 뉴스 第1戦の表彰選手
[33] 뉴스 南海・門田が10本目の満塁本塁打
[34] 뉴스 門田、逆転満塁3号
[35] 뉴스 【南海ホークス 何回も見たい名場面】門田2000安打達成 88年は40歳で2冠王 https://www.sanspo.c[...] 2023-02-19
[36] 웹사이트 各種記録達成者一覧 2000安打 https://npb.jp/histo[...]
[37] 뉴스 不屈の門田 2000本安打 24人目 北海道新聞 1987-08-27
[38] 뉴스 門田サヨナラ26号 読売新聞 1987-09-02
[39] 웹사이트 阪神・糸井は「30発打てる」 1時間半密着指導の藤井康コーチ驚がく https://www.daily.co[...] デイリースポーツ online 2022-10-23
[40] 뉴스 門田、初の"不惑"二冠 盗塁王・福本が引退 読売新聞 1988-10-24
[41] 웹사이트 ヤクルト・村上宗隆 世界の王、イチローも超える“連続MVP”への期待 https://www.daily.co[...] 2022-10-02
[42] 뉴스 門田 文句なしMVP セも大差で郭 新人王は立浪、森山 読売新聞 1988-10-30
[43] 웹사이트 https://www.sankei.c[...]
[44] 웹사이트 https://www.sankei.c[...]
[45] 뉴스 「門田トレード」正式成立 毎日新聞 1988-11-12
[46]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週刊ベースボール 2016-02-01
[47] 뉴스 オリックス・門田が右肩脱きゅう 読売新聞 1989-09-26
[48] 뉴스 勇者も大敗 井上24SP 読売新聞 1989-09-26
[49] 간행물 冷静と情熱の野球人 大島康徳の負くっか魂!! 週刊ベースボール 2018-10-29
[50] 뉴스 石嶺も36号 秋山・D砲2発かすむ 読売新聞 1990-09-10
[51] 뉴스 門田やめるな! 連日のサヨナラ30号 西武、九回同点もフイ 読売新聞 1990-09-11
[52] 뉴스 42歳で大台 大リーグ記録抜く 読売新聞 1990-09-11
[53] 간행물 門田博光と南海ホークス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 2023-05-00
[54] 뉴스 読売新聞 1990-10-16
[55] 뉴스 門田 古巣ダイエーに復帰 年俸1億3千万円 背番号は「53」 30本塁打突破に自信 北海道新聞 1990-12-08
[56] 뉴스 ラガ、門田が3ラン 近鉄 16年ぶり開幕3連敗 北海道新聞 1991-04-10
[57] 뉴스 主役の本領 広沢MVP ヤクルト連続受賞 総力戦引き分け 北海道新聞 1991-07-25
[58] 뉴스 最終戦の表彰選手 北海道新聞 1991-07-25
[59] 뉴스 門田10回サヨナラ16号 読売新聞 1991-08-09
[60] 뉴스 門田は現状維持でサイン 北海道新聞 1991-12-13
[61] 뉴스 門田博光さんの引退までの5日間…「両目がかすんでボールが見えん。代打にいくのも怖いんよ」 https://web.archive.[...] 西日本スポーツ 2023-01-25
[62] 웹사이트 小脳梗塞患った門田博光氏 現役並みの猛特訓で完全復活 https://www.news-pos[...] NEWSポストセブン 2022-09-16
[63] 뉴스 門田、高木、山田氏 殿堂入り 読売新聞 2006-01-11
[64] 웹사이트 「門田理論を証明したい」。DeNAルーキー倉本寿彦の野望 https://sportiva.shu[...] web Sportiva 2022-09-16
[65] 뉴스 「不惑の大砲」門田博光さん死去 74歳 フルスイングこだわりプロ歴代3位通算567本塁打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 2023-01-24
[66] 뉴스 「現役時代とは別人のように痩せていた」門田博光さん晩年は2日に1回のペースで人工透析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 2023-01-25
[67] 웹사이트 門田博光氏 新人時代、「王さん野村さんに反発した」思い出 https://www.news-pos[...] NEWSポストセブン 2021-06-23
[68] 서적 野村ノート 小学館 2005-00-00
[69] 웹사이트 【門田博光さんを悼む 再録連載⑧】鈴木、山田と激闘経て…衝撃の1988年/プロ野球三国志(1/2ページ) https://archive.is/E[...]
[70] 웹사이트 門田博光が本塁打増に持論。「打撃を球場サイズに合わせたらあかん」 https://sportiva.shu[...] web Sportiva 2021-06-23
[71] 웹사이트 不惑の壁打ち破った大砲 門田博光 https://www.chunichi[...] 中日スポーツ 2019-11-19
[72] 웹사이트 門田博光が特徴や弱点をズバリ指摘。小園、根尾、藤原に飛躍への助言 https://sportiva.shu[...] web Sportiva 2020-01-30
[73] 웹사이트 門田博光が本塁打増に持論。「打撃を球場サイズに合わせたらあかん」(1/4ページ) https://sportiva.shu[...] web Sportiva 2019-06-03
[74] 웹사이트 門田博光が本塁打増に持論。「打撃を球場サイズに合わせたらあかん」(2/4ページ) https://sportiva.shu[...] web Sportiva 2019-06-03
[75] 웹사이트 門田博光が本塁打増に持論。「打撃を球場サイズに合わせたらあかん」(3/4ページ) https://sportiva.shu[...] web Sportiva 2019-06-03
[76] 웹사이트 門田博光が本塁打増に持論。「打撃を球場サイズに合わせたらあかん」(4/4ページ) https://sportiva.shu[...] web Sportiva 2019-06-03
[77] 서적 ナニワ野球伝説 朝日新聞出版 2011
[78] 웹사이트 村田兆治氏 門田博光氏にサヨナラHR打たれスライダー封印した https://www.news-pos[...] NEWSポストセブン 2015-02-28
[79] 웹사이트 門田さんと最も多く対戦した東尾修氏「良きライバル。人柄も真っすぐな人」「晩年は糖尿病で足を…」 ― スポニチ Sponichi Annex 野球 https://www.sponichi[...] Sponichi Annex 野球
[80] 서적 野球小僧 白夜書房
[81] 서적 南海ホークス ナンバ 栄光と哀しみの故郷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14
[82] 서적 プロ野球記録大鑑(昭和11年→平成4年) 講談社 1993
[83] 웹사이트 伝説の男・門田博光が振り返る「パ・リーグ」破天荒すぎた時代 https://friday.gold/[...] FRIDAY 2018-08-18
[84] 간행물 【読む野球決定版! 】よみがえる1970年代のプロ野球 Part.2 [1975年編]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22
[85] 간행물 週刊新潮 週刊新潮 2017-12-21
[86] 서적 プロ野球の男 野村克也の目 朝日新聞社 1982
[87] 서적 20世紀プロ野球事件簿 ベル・スズカワ 2001
[88] 서적 名選手にドラマあり 脳裏に焼き付くあのシーン 小学館新書 2014
[89] 웹사이트 歴史的和解!南海ノムさん、36年ぶり復活 http://www.sanspo.co[...] サンケイスポーツ 2013-09-01
[90] 웹사이트 門田博光氏「最高の手本」野村氏に怒られ認めさせた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 2020-02-11
[91] 웹사이트 中日ファンがいまだに悔やむ36年前の「ある事件」 https://dot.asahi.co[...] AERA dot. 2018-03-17
[92] 웹사이트 門田“痛すぎる”31号 ハイタッチで右肩脱臼 https://www.sponichi[...] スポーツニッポン 2012-09-25
[93] 웹사이트 【あの時・不惑の本塁打王 門田博光】(4)愛する家族のため移籍決断 https://www.hochi.co[...] スポーツ報知 2017-01-02
[94] 웹사이트 「トレードなら引退」掛布は決意していた https://www.sankei.c[...] 産経WEST 2017-01-21
[95] 웹사이트 門田博光氏、掛布とのトレード話「本当」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 2013-04-20
[96] 웹사이트 イチロー・原も?幻のトレード3選 https://r25.jp/off/0[...] R25 2015-07-31
[97] 웹사이트 門田博光さんに「巨人トレード」計画 憧れの長嶋監督への恩返しは幻に - プロ野球番記者コラム - 野球コラム : 日刊スポーツ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
[98] 웹사이트 「巨人以外には行きません」と言っていた仲田幸司を獲得できた83年ドラフト…阪神入団60年・安藤統男の球界見聞録<29> : スポーツ報知 https://archive.is/d[...] スポーツ報知
[99] 웹사이트 「朝からビールを飲んで…」 プロ野球史上3位のホームラン王の晩年はなぜ孤独だったのか ホークス門田博光さんの死から1年 https://www.dailyshi[...] デイリー新潮(『週刊新潮』2023年2月9日号記事の再構成) 2024-01-19
[100] 웹사이트 門田博光が今明かす二度のコーチ就任要請「僕が人に教えるのは難しいんとちゃうか」 https://nikkan-spa.j[...] NIKKAN SPA!
[101] 웹사이트 門田博光が今明かす二度のコーチ就任要請「僕が人に教えるのは難しいんとちゃうか」 https://nikkan-spa.j[...] NIKKAN SPA!
[102] 웹사이트 【南海ホークス 何回も見たい名場面】1988年、不惑の大砲の目に涙 - サンスポ https://www.sanspo.c[...] サンスポ
[103] 웹사이트 88年、大阪球場の最終戦を終え、セレモニーで涙する門田博光 ― スポニチ Sponichi Annex 野球 https://www.sponichi[...] スポニチ Sponichi Annex 野球
[104] 웹사이트 門田博光さんが語っていた南海の大阪球場最終戦「泣いてしまった。でも、男のいい涙」…74歳で急死 - スポーツ報知 https://hochi.news/a[...] スポーツ報知
[105] 웹사이트 門田博光、鈴木啓示、米田哲也が語り合う昭和のパ・リーグ|NEWSポストセブン - Part 3 https://www.news-pos[...] NEWSポストセブン
[106] 웹사이트 大阪球場の住宅展示場:懐かしの野球場10 写真特集:時事ドットコム https://www.jiji.com[...]
[107] 웹사이트 1980年南海ホークスが蘇る。門田博光氏の直筆サイン入りミニユニフォーム額受注販売開始! https://prtimes.jp/m[...] PR TIMES 2017-04-28
[108] 신문 首位打者・新井 本塁打王・秋山 パリーグの全日程終了 北海道新聞 1987-10-22
[109] 신문 正力松太郎賞 「40歳2冠」門田に 読売新聞 1988-11-17
[110] 신문 江川、門田ともに初受賞 セ、パ月間MVP 北海道新聞 1981-08-06
[111] 신문 5月MVP 「セ」槙原「パ」門田 読売新聞 1988-06-07
[112] 신문 槙原、門田らが月間MVPに 読売新聞 1989-06-07
[113] 웹사이트 歴代授賞者 http://www.jpsa.jp/a[...] 公益財団法人日本プロスポーツ協会 2017-11-25
[114] 뉴스 【ファン交歓会一問一答】原口、関西弁の女性「いいと思います」(画像6)歴代サンスポMVP大賞、新人賞の受賞者 https://www.sanspo.c[...] 産業経済新聞社 2016-11-23
[115] 신문 オリックス・門田が史上6人目の通算1500打点 読売新聞 1990-04-11
[116] 신문 南海・門田博光内野手(三五)が通算300本塁打 読売新聞 1983-06-23
[117] 신문 門田が千試合出場 北海道新聞 1978-05-12
[118] 신문 記録メモ 門田(南海)通算200本塁打 北海道新聞 1980-06-28
[119] 신문 記録メモ 門田(南海)通算250号本塁打 北海道新聞 1981-08-02
[120] 신문 南海・門田博光内野手(三五)が通算1500安打 読売新聞 1983-05-18
[121] 신문 記録メモ 門田(南海)通算1500試合出場 北海道新聞 1983-07-13
[122] 신문 門田1000打点 史上17人目 北海道新聞 1984-04-07
[123] 신문 南海・門田博光外野手(三六)が通算350本塁打 読売新聞 1984-08-27
[124] 신문 南海・門田が通算1000三振 読売新聞 1986-08-20
[125] 신문 史上10人目の快記録 北海道新聞 1986-10-03
[126] 신문 門田が3500塁打 毎日新聞 1987-04-26
[127] 신문 門田が300二塁打 毎日新聞 1987-05-03
[128] 신문 記録メモ 門田(南海)通算1000得点 北海道新聞 1987-06-17
[129] 신문 門田・史上24人目の2000試合出場 読売新聞 1987-09-09
[130] 신문 門田が通算450本塁打 読売新聞 1988-06-13
[131] 신문 オリックス・門田博光(四一)が4000塁打 読売新聞 1989-04-27
[132] 신문 門田500号 史上6人目 501号も連発 勇者脱出 祝砲6発 読売新聞 1989-08-16
[133] 신문 オリックス・門田博光選手(四二)が350二塁打 読売新聞 1990-06-11
[134] 신문 門田4500塁打 読売新聞 1991-05-29
[135] 신문 門田史上3人目550号 読売新聞 1991-06-08
[136] 신문 門田6人目2500本安打 43歳、22年目で達成 今季3度目の快記録 読売新聞 1991-08-08
[137] 신문 門田、2500試合出場 読売新聞 1991-09-24
[138] 신문 2544安打、1500三振 毎日新聞 1992-05-29
[139] 뉴스 バレンティン 月間本塁打日本新!8月17本目の51号 https://www.sponichi[...] 2013-08-28
[140] 웹사이트 ある野球人の死〜門田博光とその時代〜 https://www.nhk.jp/p[...] NHK 2024-06-08
[141] 웹인용 門田博光さんが急死 74歳 プロ野球歴代3位の通算567本塁打 https://www.sanspo.c[...] 産経デジタル 2023-01-24
[142] 웹인용 門田博光さんが死去 https://nordot.app/9[...] 共同通信 2023-01-24
[143] 문서 2013년 8월에 블라디미르 발렌틴이 경신했다.
[144] 뉴스 バレンティン 月間本塁打日本新!8月17本目の51号 http://www.sponichi.[...] 스포츠 닛폰 2013-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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