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 히로아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후쿠시 히로아키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로, 요미우리 자이언츠, 난카이 호크스,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활약했다. 1983년에는 삼미 슈퍼스타즈에 입단하여 KBO 리그에서 30승을 기록하며 다승왕을 차지했으나, 이후 마약 사건으로 한국 야구계에서 영구 제명되었다. 은퇴 후 일본으로 돌아가 마작장을 운영하다가 54세의 나이로 급사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와카야마현 출신 야구 선수 - 요시미 유지
요시미 유지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투수로서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지바 롯데 마린스, 한신 타이거스에서 활약했으며 2002년 신인왕 경쟁과 월간 MVP를 수상했고, 2015년부터는 DeNA의 타격 투수로 활동했다. - 와카야마현 출신 야구 선수 - 야마사키 고타로
야마사키 고타로는 빠른 발과 강한 어깨를 가진 외야수로서 2016년부터 2024년까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 활동하며 2021년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고, 은퇴 후 2025년부터 2군 외야 수비 주루 코치로 활동할 예정이다. - 삼미 슈퍼스타즈 선수 - 권두조
권두조는 1982년부터 1987년까지 롯데, 삼미, 청보에서 활동한 프로야구 선수로, 6시즌 동안 타율 0.220, 352안타, 112타점, 24도루를 기록했으나, 낮은 타율과 높은 삼진율을 보였고 상세 기록은 자료 부족으로 미완성 상태이다. - 삼미 슈퍼스타즈 선수 - 우경하
우경하는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이며, 통산 6시즌 동안 332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0.225, 192안타, 17홈런 등을 기록했다. - 재일 한국인 출신 KBO 리그 선수 - 송재박
송재박은 일본과 한국 프로 야구에서 선수와 코치로 활동하며, 일본에서는 세이부 라이온스와 요코하마 다이요 훼일스에서, 한국에서는 OB 베어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고, 은퇴 후 두산 베어스 코치로 활동하며 우수 코치상을 수상했다. - 재일 한국인 출신 KBO 리그 선수 - 김실
김실은 일본과 한국에서 선수로 활동하고 은퇴 후 코치와 감독으로 지도자 경력을 쌓았으며, 2023년부터 일본 시나노 그란세로스에서 야수 종합 코치를 맡고 있다.
후쿠시 히로아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후쿠시 히로아키 (福士 敬章) |
출생일 | 1950년 12월 27일 |
사망일 | 2005년 4월 13일 (향년 54세) |
출생지 | 돗토리현 |
사망 장소 | 와카야마현 |
신장 | 182cm |
체중 | 91kg |
타석 | 우타 |
투구 | 우투 |
선수 경력 (NPB) | |
포지션 | 투수 |
데뷔 리그 | NPB |
데뷔 년도 | 1970년 |
데뷔 팀 | 요미우리 자이언츠 |
최종 리그 | NPB |
최종 년도 | 1982년 |
최종 팀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팀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70년–1972년) 난카이 호크스 (1973년–1976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77년–1982년) |
선수 경력 (KBO) | |
데뷔 리그 | KBO |
데뷔 년도 | 1983년 |
데뷔 팀 | 삼미 슈퍼스타즈 |
최종 리그 | KBO |
최종 년도 | 1986년 |
최종 팀 | 빙그레 이글스 |
팀 | 삼미 슈퍼스타즈/청보 핀토스 (1983년–1985년) 빙그레 이글스 (1986년) |
NPB 통계 | |
승-패 | 91승 84패 |
평균자책점 | 3.68 |
탈삼진 | 785 |
KBO 통계 | |
승-패 | 55승 79패 |
평균자책점 | 3.56 |
탈삼진 | 541 |
수상 경력 | |
NPB | 3× 올스타 5× 일본 시리즈 우승 (1970, 1971, 1972, 1979, 1980) |
KBO | 골든글러브 (1983) |
KBO 단일 시즌 기록 | |
최다 승리 | 30 (1983년) |
최다 완투 | 36 (1983년) |
최다 패배 | 25 (1985년) |
기타 정보 | |
한국어 이름 | 장명부 (張明夫) |
일본어 표기 | ja |
지도자 경력 | |
지도자 경력 | 삼성 라이온즈 (1988) 롯데 자이언츠 (1990) |
2. 일본 프로 야구 시절
돗토리 현립 돗토리니시 고등학교 졸업 후, 1968년 말 번외 지명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松原明夫|마쓰바라 아키오일본어라는 이름으로 입단했다. 입단 초기 가와카미 데쓰하루 감독의 기대를 받았으나 출전 기회가 많지 않았고, 1973년 도미다 마사루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야마우치 신이치와 함께 난카이 호크스로 이적했다.
난카이에서는 노무라 가쓰야 감독 아래 선발 로테이션의 한 축을 담당하며 이적 첫해인 1973년 7승을 거두며 팀의 퍼시픽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일본시리즈에도 등판했다.
1977년에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고바 다케시 감독의 요청으로 김기태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히로시마로 이적했다. 히로시마에서 선발 투수로 활약하며 1978년과 1980년 두 차례 15승을 기록하는 등 팀의 핵심 투수로 자리 잡았다. 특히 1979년과 1980년에는 팀의 일본시리즈 2년 연속 우승에 크게 기여하며 카프 황금기의 주역 중 한 명으로 활약했다. 1979년에는 이름을 福士 敬章|후쿠시 히로아키일본어로 개명했다.
1981년까지 꾸준히 활약했으나, 1982년에는 3승 13패로 부진한 성적을 거둔 뒤 팀에서 방출되었다.
2. 1. 요미우리 자이언츠 (1969-1972)
돗토리 현립 돗토리니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쿠시 히로아키는 원래 와세다 대학에 진학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 프로야구의 드래프트 규정상 외국 국적 선수는 일본 학교를 졸업해도 드래프트 회의를 거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新浦壽夫|신우라 스미오일본어와 마찬가지로 드래프트 외 입단(번외 지명) 방식을 택했다. 히로시마, 다이요 등 여러 구단과의 경쟁 끝에 1968년 말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계약하고 1969년 연습생 신분으로 입단했다.[5] 당시 이름은 松原明夫|마쓰바라 아키오일본어였다.입단 2년차인 1970년에 1군으로 승격되었고, 개막 4차전에 선발 투수로 기용되는 등 당시 가와카미 데쓰하루 감독의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요미우리에서 보낸 3시즌(1969-1972) 동안 출전 기회가 제한적이었고 뚜렷한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결국 1973년 시즌을 앞두고 도미다 마사루와의 1:2 트레이드를 통해 야마우치 신이치와 함께 난카이 호크스로 이적하게 되었다.[5][6]
2. 2. 난카이 호크스 (1973-1976)
1973년, 도미다 마사루와의 2:1 트레이드를 통해 야마우치 신이치와 함께 난카이 호크스로 이적하였다. 당시 이름은 마쓰바라 아키오였다. 이적 첫 해인 1973년, 노무라 가쓰야 감독의 지도 아래 선발 로테이션의 한 축을 담당하며 7승을 거두었고, 팀의 퍼시픽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같은 해 일본시리즈에도 선발 등판했으나, 친정팀인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로 패전 투수가 되었다.난카이 호크스에서 활동한 4년 동안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1973년에는 평균자책점 2.87로 리그 8위에 올랐고, 1974년에는 평균자책점 3.04로 리그 공동 8위를 기록했다. 1975년에는 4번의 완봉승을 거두며 이 부문 리그 공동 1위에 오르기도 했다. 1976년 시즌까지 난카이 호크스 소속으로 활동했다.
2. 3.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77-1982)
1977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고바 다케시 감독의 요청에 따라 김기태와의 1:1 트레이드로 히로시마로 이적하였다. 선발 투수로 활약하며 1978년과 1980년 두 차례 15승을 기록했고, 카프의 2년 연속 일본시리즈 우승(1979년~1980년)에도 기여하며 팀의 황금기를 이끄는 주요 선수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1978년에는 NPB 올스타전에 처음으로 출전했으며, 12번의 완투로 센트럴 리그 공동 1위에 올랐고, 3.60의 평균자책점으로 리그 9위를 기록했다. 다만, 리그에서 가장 많은 236개의 안타를 허용하기도 했다.
1979년, 그는 자신의 이름을 마쓰바라 아키오에서 후쿠시 히로아키(福士 敬章)로 개명했다. 그 해 평균자책점 3.57로 리그 8위를 기록했으며, 카프는 일본시리즈에 진출했다. 후쿠시는 시리즈 4차전에서 뛰어난 투구를 선보이며 1승, 평균자책점 2.19를 기록했고, 이는 히로시마가 창단 30년 만에 첫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1980년 시즌에도 15승을 거두며 두 번째로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그 해 일본시리즈 6차전에서 승리 투수가 되어 카프의 2년 연속 우승에 힘을 보탰다.
1981년에는 세 번째로 올스타에 선정되었으나, 센트럴 리그에서 볼넷, 실점, 자책점 허용 부문에서 리그 1위를 기록하는 등 다소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1982년 시즌에는 3승 13패로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고, 시즌 종료 후 카프에서 방출되었다.
3. KBO 리그 시절
1983년 내야수 이영구와 함께 재일 교포 선수로는 처음으로 KBO 리그에 진출했다.[14] 삼미 슈퍼스타즈 소속으로 데뷔 첫해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나[2], 재일동포라는 이유로 정규시즌 MVP 수상에 실패했다는 평가가 있다.[21] 또한 구단과의 보너스 지급 문제로 갈등을 겪기도 했다. 이후 청보 핀토스, 빙그레 이글스를 거치며 선수 생활을 이어갔으나, 1986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 지도자로 활동하며 1988년 삼성 라이온즈 2군 투수코치를 맡았고[22], 1989년 말에는 삼미-청보 시절 인연이 있던 김진영 감독을 따라 롯데 자이언츠 투수코치로 부임했다.[23][24] 그러나 1990년 시즌 중 김진영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해임되면서[25] 함께 팀을 떠났고, 이후 박영길 감독의 태평양 돌핀스 투수코치 영입 제안도 구단 측의 반대로 무산되었다.[26]
1991년 5월, 박찬, 성낙수와 함께 필로폰을 투약한 혐의로 구속되었고[5], 이 사건으로 인해 KBO로부터 영구 제명 처분을 받고 대한민국 영구 입국 금지 명단에도 올랐다.[5] 이후 일본으로 돌아갔으나 순탄치 못한 말년을 보냈다. 2004년 SK 와이번스가 문학야구장 개장 기념 경기에 그를 초청하려 했으나, 일본 내 거처를 찾지 못해 무산되기도 했다.[27] 2005년 4월 13일, 와카야마현에서 운영하던 마작 가게에서 56세의 나이로 고독사한 채 발견되었으며[28][5], 사인은 마약 중독으로 알려졌다.
3. 1. 삼미 슈퍼스타즈 / 청보 핀토스 (1983-1985)
1983년, 내야수 이영구와 함께 재일 교포 선수로는 처음으로 KBO 리그 무대를 밟았다. 삼미 슈퍼스타즈 소속으로 활동하며 그해 30승(선발 28승)[14] 16패 6세이브라는 경이적인 성적을 거두었다. 이 30승 기록은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KBO 리그 단일 시즌 최다승 기록으로 남아 있다.[2]또한, 1983년 한 해 동안 무려 427⅓이닝을 던져 단일 시즌 최다 이닝 투구 기록도 세웠다. 총 100경기 중 60경기에 등판하여 36경기를 완투했으며, 6번의 완봉승(롯데 2, 삼성 1, 해태 1, MBC 1, OB 1)을 달성했다. 이는 역대 선발 20승 이상을 거둔 투수 중 가장 많은 완봉승 기록이다[16]. 탈삼진 역시 220개를 기록하며 역대 선발 20승 이상 투수 중 최다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15]. 당시 그의 평균자책점은 2.34였다. 그가 거둔 30승과 6세이브는 그해 삼미 슈퍼스타즈 팀 전체 승리(52승)의 약 69%에 해당할 정도로 압도적인 활약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1983년 KBO 리그 골든 글러브 투수 부문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특히 롯데 자이언츠를 상대로 강한 면모를 보였는데, 롯데전에서만 2번의 완봉승을 거두었으며[17][18], 4월 3일 데뷔전 첫 승리(선발승)와[19] 7월 31일 시즌 20번째 선발승(당시 구원승 포함 21승) 역시 롯데를 상대로 기록했다[20].
그러나 이러한 눈부신 활약에도 불구하고 시즌 종료 후 정규시즌 MVP 수상에는 실패했는데, 당시 재일동포 선수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이 작용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21]. 또한, 1억원의 보너스 지급 문제를 둘러싸고 구단 측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1984년에는 13승 20패, 평균자책점 3.30으로 전년도에 비해 다소 주춤한 성적을 기록했다. 1985년에는 삼미 슈퍼스타즈를 인수한 청보 핀토스 소속으로 뛰었으나, 11승 5세이브와 함께 25패를 당하며 KBO 리그 역사상 단일 시즌 최다 패배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남겼다.
3. 2. 빙그레 이글스 (1986)
1986년 시즌을 앞두고 신생팀인 빙그레 이글스와 계약하며 이적했다. 그러나 1986년 시즌 동안 1승 18패, 평균자책점 4.98이라는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고, 이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4. 은퇴 이후
(내용 없음)
4. 1. 지도자 경력
1988년 2월 16일부터 1년 계약으로 삼성 라이온즈 2군 투수코치를 맡았다.[22] 삼미-청보 시절 인연을 맺었던 김진영 감독이 1989년 11월 2일 롯데 자이언츠 감독으로 부임하자[23], 같은 달 30일부터 1년 계약으로 롯데 자이언츠 투수코치를 맡았다[24]. 그러나 김진영 감독이 1990년 시즌 중 성적 부진으로 해임되면서[25], 후쿠시 히로아키 역시 같은 해 말 강병철 감독이 재부임하며 단행된 코칭스태프 개편에 따라 팀을 떠났다. 한편, 삼성 2군 투수코치 시절 1군 감독이었던 박영길 감독이 1990년 시즌 후 태평양 돌핀스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후쿠시를 투수코치로 영입하려 했으나[26], 구단 측의 반대로 무산되었다.4. 2. 마약 사건과 영구 제명
현역 은퇴 후, 1988년 2월 16일부터 1년 계약으로 삼성 라이온즈 2군 투수코치를 맡았다.[22] 이후 삼미-청보 시절 인연이 있던 김진영 감독이 1989년 11월 롯데 자이언츠 감독으로 부임하자[23], 같은 달 30일부터 1년 계약으로 롯데 투수코치로 자리를 옮겼다.[24]그러나 김진영 감독은 1990년 시즌 중반 이후 박동희를 무리하게 기용하는 등의 운영으로[25] 결국 성적 부진으로 시즌 중 해임되었다. 후임으로 강병철 감독이 재부임하면서 코치진 개편이 이루어졌고, 장명부 역시 팀을 떠나게 되었다. 이후 삼성 2군 코치 시절 감독이었던 박영길 감독이 1990년 시즌 후 태평양 돌핀스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그를 투수코치로 영입하려 했으나, 구단 측의 반대로 무산되었다.[26]
롯데 자이언츠 투수코치에서 물러난 다음 해인 1991년 5월, 박찬, 성낙수와 함께 필로폰을 사용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같은 해 7월에 석방되었으나, 이 사건으로 인해 KBO 리그에서 영구 제명되었고 대한민국으로부터 영구 입국 금지 조치를 당했다. 이로 인해 그는 더 이상 한국 땅을 밟을 수 없게 되었다.
SK 와이번스는 2004년 4월 4일 문학야구장 개장 첫 경기에 그를 초청하려 했으나, 당시 일본 내에서 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어 초청을 포기하고 대신 감사용을 초청했다.[27] 이후 2005년 4월 13일, 일본 와카야마현에서 자신이 운영하던 마작 가게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28] 향년 56세였으며, 사인은 마약 중독으로 알려졌다.
4. 3. 사망
롯데 자이언츠 투수코치에서 물러난 이듬해인 1991년 5월, 박찬, 성낙수와 함께 필로폰 투약 혐의로 구속되었다.[27] 같은 해 7월 석방되었으나, 이 사건으로 KBO에서 영구 제명되었고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영구 입국 금지 조치를 받았다. 이로 인해 그는 더 이상 한국 땅을 밟을 수 없게 되었다.2004년 4월 4일, SK 와이번스(현 SSG 랜더스)는 문학야구장 개막전에 그를 초청하려 했으나, 일본 내 거주지를 파악하지 못해 초청을 포기하고 대신 감사용을 초청했다.[27]
2005년 4월 13일, 일본 와카야마현에서 자신이 운영하던 마작 가게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28] 향년 56세였으며, 사인은 마약 중독으로 알려졌다.
5. 주요 기록
1983년 내야수 이영구와 함께 재일 교포 선수로는 처음으로 KBO 리그에 진출하여[14] 삼미 슈퍼스타즈 소속으로 활동했다.
KBO 리그1983년 삼미 슈퍼스타즈에서 기록한 30승(선발 28승[14]) 16패 6세이브는 여전히 KBO 리그 단일 시즌 최다 승리 기록으로 남아 있으며, 선발 28승 역시 역대 KBO 선발 최다승 기록이다. 또한 단일 시즌 최다 이닝 투구인 427⅓이닝을 소화했고, 역대 선발 20승 이상 투수 중 최다 탈삼진인 220개를 기록하며[15] 다승왕과 탈삼진왕을 동시에 차지했다. 그 해 기록한 6번의 완봉승(롯데 2, 삼성 1, 해태 1, MBC 1, OB 1)은 역대 선발 20승 이상 투수 최다 완봉승[16] 기록이다. 특히 롯데 자이언츠를 상대로 강한 면모를 보여, 2번의 완봉승[17][18], 시즌 첫 승(4월 3일 데뷔전)[19], 그리고 KBO 리그 최초 선발 20승(7월 31일, 당시 1구원승 포함 21승)[20]을 모두 롯데전에서 달성했다. 그의 30승과 6세이브는 그 해 팀 전체 승리(52승)의 69% 이상을 차지하는 압도적인 활약이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골든 글러브 투수 부문을 수상했다.[2] 하지만 정규시즌 MVP는 유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일동포라는 이유로 수상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다.[21]
1984년에는 13승 20패, 평균자책점 3.30을 기록했고, 1985년에는 11승 5세이브를 올렸으나 KBO 리그 단일 시즌 최다 패배인 25패를 기록하기도 했다. 1986년 신생팀 빙그레 이글스로 이적했으나 1승 18패, 평균자책점 4.98의 부진한 성적을 남기고 시즌 후 은퇴했다.
NPB 리그NPB에서는 마쓰바라 아키오(松原明夫)와 후쿠시 히로아키(福士敬章)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돗토리 니시 고등학교 졸업 후 1969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으나 큰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1973년 난카이 호크스로 트레이드되었다. 난카이에서는 1973년 퍼시픽 리그 평균자책점 8위(2.87), 1974년 공동 8위(3.04), 1975년 완봉 공동 1위(4개)를 기록하며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1977년부터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뛰며 1978년 첫 올스타전에 선정되었고, 12번의 완투로 센트럴 리그 공동 1위에 올랐다. 1979년 후쿠시 히로아키로 개명한 후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으며(시리즈 1승, ERA 2.19), 1980년에는 15승을 거두며 최고 승률 타이틀을 획득하고 팀의 2년 연속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1981년까지 3번의 올스타전에 선정되었으나, 1982년 3승 13패로 부진한 뒤 방출되었다.
리그 | 주요 기록 및 수상 내역 |
---|---|
NPB | 최고 승률 1회 (1980년) 올스타전 출전 3회 (1978년, 1980년, 1981년) 일본 시리즈 우승 2회 (1979년, 1980년) 퍼시픽 리그 완봉 공동 1위 (1975년) 센트럴 리그 완투 공동 1위 (1978년) |
KBO 리그 | 다승왕 1회 (1983년) 탈삼진왕 1회 (1983년) KBO 골든 글러브 (투수) 1회 (1983년) 단일 시즌 최다 승리 (30승, 1983년) 단일 시즌 최다 선발승 (28승, 1983년) 단일 시즌 최다 이닝 (427⅓, 1983년) 단일 시즌 최다 완봉승 (6승, 1983년) 단일 시즌 최다 패배 (25패, 1985년) |
6. 통산 기록
도
속
이
리
전
률
자
점
장
발
투
봉
이
브
드
닝
안
타
홈
런
넷
4
삼
진
맞
크
투
점
책
자
수
H
I
P